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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속이 복잡해진다. 선과 악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그의 인물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돈의 세계를 헤매며 답을 구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영화는 그들에게 명확한 해법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정호 월드’는 그러나 뜨겁다. 마치 바위가 다시 떨어질 걸 알면서도 산 위로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이정호 감독이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은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세계의 부조리에 몸을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부서지고, 누군가는 괴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신작 <비스트>는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두 형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조명한다. <방황하는 칼날>(2013) 이후 5년 만의 복귀작인 이 영화는 더 깊은 절망과 더 복합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방황하는 칼날>과 <비스트> 사이, <탐정: 더 비기
<비스트> 이정호 감독, "한수가 모차르트라면, 민태는 살리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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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와 거리를 두며 살아가던 소년 세바스찬(아사 버터필드)은 우연히 삶에 대한 울분을 음악으로 토해내는 제라드(알렉스 울프)를 만나면서 일상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사실 영화는 세바스찬의 불안과 성장에 초점을 맞췄지만 러닝타임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 인물은 심장이식의 후유증을 안고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반항적인 펑크록 마니아 제라드다. 제라드를 연기한 배우는 최근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에서 저주에 사로잡힌 아들 피터 역으로 분했던 알렉스 울프로,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영화와 음악 활동을 하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배우로도 활동 중인 어머니 폴리 드래퍼가 연출한 모큐멘터리 <더 네이키드 브러더스 밴드: 더 무비>에서 형인 냇 울프와 함께 출연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알렉스 울프는 ‘냇 앤드 알렉스 울프’라는 이름으로 형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보스턴마라톤 테러 실화를 다룬 <패트리어트 데이>에서 테러리스트 형제를 연기한 그가 &
<하우스 오브 투모로우> 알렉스 울프 - 음악과 영화에 둘러싸인 이 배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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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진범이 누구인지 끝까지 추적해야 하는 영화 <진범>은 범인의 실체와 동기를 끝까지 숨겨야 하는, 그러니까 관객과 꽤 정교한 두뇌게임을 벌여야 하는 영화다. 그 게임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역시 배우들의 몫이다. 특히 <진범>처럼 연극적인 상황에서 심리묘사만으로 극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배우 유선이 맡은 인물 다연은 살해 용의자로 몰린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목적만 지닌 인물이다. 배우 유선의 전작을 꾸준히 봤던 관객이라면 이번에도 유사한 톤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언제나 비슷한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진범>의 ‘진범’이 누구인지 찾는 도중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다연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는 길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배우 유선이 보여준다.
-<진범>은 영화의 제목부터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한 기획이다. 송새벽 배
<진범> 유선 - 퍼즐처럼 감정을 배분하는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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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경찰은 가장 친한 친구가 범인이라 한다. 친구의 아내 다연(유선)은 남편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호소 중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범>의 러닝타임을 꽉 채우며 극을 끌고 나가는 영훈(송새벽)은 트라우마에 빠질 여력이 없다. 아내를 위한 복수와 친구를 향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형사를 자처한다. 캐릭터 준비를 특히나 꼼꼼히 하는 것으로 알려진 배우 송새벽은 그런 영훈을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전보다 훨씬 수척하고 예민한 얼굴로 나타나 고정욱 감독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옆에서 몰래 구경하는 듯한” 시나리오 설정에 빠졌다는 송새벽은, 평범한 사람이 비극 앞에서 극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연기하며 <진범>의 진의를 드러낸다.
-<7년의 밤>(2018), <해피 투게더><2018>,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와 <빙의>(2019), 그리
<진범> 송새벽 - 비범한 평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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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욱 감독의 연출 데뷔작 <진범>은 살해당한 한 여인을 둘러싸고 그의 남편 영훈(송새벽)과 친구 준성(오민석), 준성의 아내 다연(유선)이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 벌이는 위험한 공조를 다룬 영화다. 유력한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준성을 둘러싸고 그의 결백을 철석같이 믿는 영훈과 다연의 공조가 뜻하는 바는 뭘까. 둘은 언뜻 같은 목적을 지닌 듯하나 사건의 실체를 캐면 캘수록 서로를 점점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덧 스릴러영화로 필모그래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배우 유선이 <어린 의뢰인>의 무시무시했던 아동폭력범에서 지고지순한 다연 역으로 변신했고, 코미디와 스릴러 장르를 오가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송새벽이 진실을 알고 싶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영훈을 연기한다. 팽팽한 줄다리기 시합을 보는 것처럼 한발 물러섰다가 두발 앞질러 치고 빠지는 연기의 합을 볼 수 있
<진범> 송새벽·유선 - '진짜'들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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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스퇴켄 달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활동하는 의학박사다. 90년대생인 그는 의대에서 만난 니나 브로크만과 함께 젊은이들과 성노동자, 난민을 대상으로 성 건강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고, 2015년부터 <운데르리베(성기)>라는 블로그를 열어 여성 성 건강을 둘러싼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글을 썼다. 니나 브로크만과 엘렌 스퇴켄 달은 <질의 응답>이라는 여성 성 건강에 대한 책을 썼다. <질의 응답>을 쓴 엘렌 스퇴켄 달 작가가 한국을 방문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해 노력한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와 대담 행사를 가졌다. 그를 만나 여성의 성과 건강을 둘러싼 진실과 오해에 대해 들었다.
-여성의 성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능’과 ‘건강’이 아닌 ‘아름다움’과 ‘가치’ 문제로 다루는 경우가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질의 응답>에서 필요한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출간 이후 독자들을 많이 만났을 텐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무엇이었나.
<질의 응답> 엘렌 스퇴켄 달 작가 - 여성이 만든 여성을 위한 콘텐츠가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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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은 <범죄도시>(2017)와 감독부터 배우, 제작사, 배급사까지 그대로 함께하며 깜짝 흥행에 성공했던 전작의 좋은 기운을 가져간다. 이중에는 <범죄도시> 이후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소속이 됐다는 유영채 프로듀서도 있다. 그는 “<범죄도시>보다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의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더 치열했다”고 설명한다.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은 한 인물의 성장기면서 러브 스토리, 정치 이야기다. 전체 톤을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또한 목포가 배경인 만큼 현지 로케이션을 찾는 것도 큰 이슈였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목포 최대 조직 보스 장세출(김래원)이 버스 사고 현장에서 시민을 구해내는 장면은 목포대교를 8시간 동안 전면 통제해서 찍었다. “현지 분들에게 ‘시민을 위한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임을 강조하며 설득하는 과정을 오래 거쳤다”는 것이 &l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유영채 프로듀서 - 자유로운 판을 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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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마케터로, 제작자로,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구경만 하다가 직접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이 되니 어색하다.” 곽신애 대표가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기생충>을 제작한 그는 영화잡지 <키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제작사 청년필름, LJ필름의 기획마케팅실을 거쳐 바른손이앤에이의 대표이사가 된 흔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를 기획, 홍보하고 <모던보이>의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여자, 정혜> <러브토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삼거리극장>의 마케팅 총괄을 거쳐 <가려진 시간>과 <기생충>을 제작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떤 일관성이 엿보인다. 작가로서 뚜렷한 개성을 가진 감독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서포터로서 업계에 몸담아온 곽신애 대표는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국내 흥행으로 영화인으로서 가장 화려한 순간을
<기생충> 제작자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 "고유의 결이 있는 감독을 서포트하는 것이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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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2017)의 688만 관객 동원. 강윤성 감독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할 수 있을까. “찍는 동안은 즐겁게 찍었는데, 지금은 핸드폰 중독자라고 할 정도로 실시간 스코어를 확인 중이다. (웃음)” 참신한 기획으로, 그악스런 범죄도시를 창조해 낸 강윤성 감독이 이번엔 목포를 배경으로 한 코믹, 액션, 멜로의 혼용 장르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으로 돌아왔다. <범죄도시>의 마석도(마동석) 같은 영웅 캐릭터 장세출(김래원)이 메인 캐릭터, 마동석, 윤계상의 깜짝출연, <범죄도시>를 함께 했던 스탭들의 대거 참여, 배우들과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가는 캐릭터 모두 전작과 비슷한 과정이지만, 잔혹한 폭력 서사가 배제된 순수하고 착한 면이 부각된 차기작은 ‘강윤성 감독 작품 맞아?’라고 되물을 정도로 사뭇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범죄도시>의 흥행 성공으로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개발 중인 작품들도 있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강윤성 감독 - 오락영화의 원칙은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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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의 방파제가, <기생충>의 인터폰이라도 되고 싶어요.’ 그렇게라도 상대를 향해 좀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애정 표현. 이 ‘웃기지도 않은’ 고백의 도착지는 요즘 ‘대세 배우’ 이정은이다. 1991년 연극 <한 여름밤의 꿈>으로 데뷔, 연기 경력 30년차 배우 이정은에게 2019년은 특별한 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의 엄마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조연상을 수상했고, <기생충>으로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그렇게 연달아 레드카펫 밟을 일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그건 이정은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 특별한 배우가 안착한 해라는 말이 더 맞지 싶다.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이 보여준 믿음직스러움은 작품 속 애기씨(김태리)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같은 강도로 전달됐다. <미성년>의 대원(김윤석)을 겁주던 취객,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엄마의 먹먹한 감정, 어느 하나도 닮아
<기생충> 이정은 - 두려우면 지는 것… 어쨌든 계속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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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면? 엄마와 단둘이 사는 중학교 1학년 보희(안지호)는 단짝 녹양(김주아)과 함께 아빠를 찾아 서울을 배회한다. 딱 14살에 걸맞은 성장통을 담아낸 로드무비 <보희와 녹양>은 통통 튀는 촬영을 통해 극중 인물의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살렸다. <보희와 녹양>으로 데뷔한 이성용 촬영감독은 안주영 감독과 나란히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학교 동료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한 이성용 촬영감독의 첫 사수는 <줄탁동시>(2011), <무뢰한>(2015), <벌새>(2018)의 강국현 촬영감독. 그는 처음 만나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강국현 촬영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촬영도 다른 포지션과 마찬가지로 글(시나리오)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그는 “작가로서의 개성이 일관되게 드러나는” 안주영 감독의 시나리오를 단편영화 시절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다. <보희와 녹양
<보희와 녹양> 이성용 촬영감독 - 색은 서정적으로, 움직임은 에너제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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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머물던 근세가 지상으로 올라와 빛을 쬘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웃음)” <기생충>이 개봉한 지 2주 만에 매체 인터뷰에 나선 배우 박명훈의 소감이다. 영화의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 캐릭터로서, 박명훈의 존재는 <기생충>의 마케팅 과정 내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혹여나 관객이 눈치챌까 칸국제영화제 공식 시사에서도 박명훈은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입장하지 못했다. 그런 점이 아쉬웠을 법도 한데, 그는 뤼미에르 극장에서 관객의 기립박수가 쏟아지는 순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말을 아꼈다. 15년여간 대학로 무대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산다> <스틸 플라워> <재꽃> 등의 독립영화를 통해 영화와 인연을 맺은 박명훈은 사회와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지하실에 머무는 <기생충>의 근세 역으로 성공적인 상업영화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을 만난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
<기생충> 배우 박명훈 - 기이함보다는 평범함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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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전설적인 여성 대법관조차 자신의 딸을 이기지는 못한다.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 조명하는 모녀 관계는 그래서 더 흥미롭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엄마 루스가 학생들에게 성차별과 관련된 법을 가르칠 때, 그의 딸 제인은 학교 수업을 빠지고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연설을 들으러 간다. “앉아만 있는 게 무슨 운동이냐”고 엄마에게 되묻는 딸은 자신의 눈앞에서 기회의 문이 닫히더라도 쉽게 체념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전투력을 갖췄다. “널 좀 봐! 넌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젊은 여성이야.” 음담패설을 일삼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는 딸을 보며 루스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한다. 변화를 갈망하던 1970년대 미국의 호방함과 자유로움을 표상하는 신여성으로서의 제인 긴즈버그를 연기하는 건 올해 스무살이 된 미국 미주리 출신의 신인배우 케일리 스페이니다. 그는 2018년
<세상을 바꾼 변호인> 케일리 스페이니 - 실화의 강인함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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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명 배우의 언어는 단단하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하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흔들림이 없다. 부산에서 ‘배관공’(배우, 관객 그리고 공간)이란 극단을 운영하며 연기에 매진해온 15년의 세월, 그는 스스로 무식할 정도로 괴물같이 살아왔다고 토로한다. “일상, 여행, 가족, 관계처럼 내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을 주지 않고 모질게 살았다.” 서울에 와서 영상연기를 시작한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7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연기에 몰두해온 그에게 이번 영화는 어쩌면 좋은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유재명 배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인마를 잡기 위해 대립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비스트>에서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욕망을 지닌 강력반 팀장 민태 역을 맡아 특유의 흡인력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정답이 없는 곳에서 끝내 정답을 찾아나가는 그의 연기는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근래 본
<비스트> 유재명 - 무엇보다 입체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