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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은 배우 황정민의 운명이지만 선택은 자유다. 그런데 그는 이번 선택으로 꽤 무리수 있는 역할을 뽑아든다. 조선시대의 사립탐정 ‘진호’. 시대극은 흥행작 리스트에서 제대로 이름을 올려본 지 오래고, 탐정물은 충무로에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장르다.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기꺼이 선택을 한 황정민의 포부는 사뭇 크다.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을 신경 쓰는 대신 그는 ‘연기 같지도 않은 연기’를 하는 진짜 명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눈치챘나? 다소 생소한 조선시대의 탐정 진호는 바로 배우 황정민의 연기 영역을 넓혀줄 시도의 한 과정이다.
“전 뭐, 연기 평생할 거니까요.”
황정민과 무수히 인터뷰를 하고, 그가 한 수많은 말들 중에 유독 이 한마디는 떠나질 않는다. 연기자가 계속 연기하겠다는 거야 뭐 별스럽겠냐마는 수더분한 차림의 황정민이 툭 내뱉은 이 짧은 문장은 꽤 흡입력이 강해 곧잘 그의 역할들을 삼켜버릴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달콤한 인생>의 징글징글한
[황정민] “나 힘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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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홍 감독은 처음에 많이 쑥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하다. 2001년에 <세이 예스>를 완성하고 그 뒤로 소식이 없었으니 근 8년 만에 매체를 접촉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잘됐으면 <스턴트맨>을 2005년쯤 개봉하고 또 다른 전환점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80%나 해놓고 결국 개봉하지 못했다. 그때는 “솔직히 영화를 안 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김성홍 감독은 <실종>으로 조용히 돌아와 있다. 시간은 확실히 많이 흘렀고 영화판도 많이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구냐고 과거를 묻는 기자도 있단다. 그는 <투캅스>의 각본을 썼고 <손톱> <올가미> 등 90년대 개성있는 호러 및 스릴러 장르영화의 길을 개척했던 사람 중 하나다. 한번 입이 터지자 지나간 시간을 묻어버리겠다는 듯 그의 말은 봇물같이 쏟아졌다.
-사진 찍으니 쑥스러운가.
=사실 어떤 경우가 있느냐
[김성홍] “이건 난도질 영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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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이다. 맞다, 사실 그런 이야기다. 홀로 남은 소년, 소녀가 등을 맞대고 한집에서 살면서 서로 눈물을 닦아주는 러브스토리. 소녀는 아름답게, 소년은 건실하게 자라지만, 선의를 품었다 해도 침략자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남자가 둘 사이에 끼어들고, 누군가는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는 뻔한 결말. 그렇지만 조금 솔직해지자. 가슴 시린 어느 저녁이라면, 당신 역시 그림같이 예쁜 남녀가 그림같이 예쁘게 사랑하다 그림같이 예쁘게 이별하는 그림같이 예쁜 멜로영화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까. 게다가 권상우, 이보영, 이범수 주연에, 지휘자로 이름을 올린 이가 원태연이다.
아니, 원태연이라니? 맞다. 90년대 초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같은 시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시인 원태연이, 맞다. 남녀주인공의 이름부터 케이와 크림이라니 감상적인 그의 시쓰기와
[원태연] “난 이단아지, 나쁜 놈이지, 이제 익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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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들에게 묻지 않았다.
지난해 5월, 취재차 찾아간 영화 <울학교 이티>의 촬영현장. 기자간담회 자리에는 주인공인 김수로가 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이한위와 김성령 등 고참 배우들이, 그리고 또 한쪽에는 고등학생으로 분한 남녀 배우들이 주눅 든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본인을 포함한) 기자들은 오로지 김수로에게만 질문했다. 선배 배우들과는 간단히 대화했다. 하지만 어린 배우들에게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사실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 가운데 한명이 몇 개월 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 것이며, 다른 한명은 <과속스캔들>의 정남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당시 이민호는 그저 평범한 학원물에 등장하다 사라질 것 같은 다소 ‘센’ 외모의 소년이었다. 박보영은 유난히 작아 눈에 띄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단 한 사람, 배우 이한위는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후배들을 한명씩 소개해줬던 그는 박보영을 소개
[박보영] 제 고민 좀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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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도 살인사건>의 김한민 감독이 또 한편의 스릴러를 완성했다. 제목은 <핸드폰>. 하지만 그의 스릴러엔 항상 무언가가 하나 더 있다. 2007년 개봉한 <극락도 살인사건>은 스릴러 장르에 호러, 코미디를 곁들인 영화였고, 2월19일 개봉해 현재 상영 중인 <핸드폰>은 스릴러의 틀 안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작품이다. 핸드폰을 분실한 남자와 핸드폰을 습득한 남자의 밀고 당기는 싸움을 바탕으로 두 남자의 일상과 사회적 조건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 한국영화계에선 불모지에 가까운 스릴러 장르에 두번이나 도전한 남자. 그의 <핸드폰>은 스릴러를 잘 구워 삶았을까. ‘한국형 스릴러’, ‘생활형 스릴러’가 유일한 비책이라 말하는 그를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소 미지근한 관객 반응에 기분이 담담하다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한민 감독의 핸드폰은 꽤 자주 울렸다.
-뚜껑은 열렸다. 기분이 어떤가.
=담담하다. 음, 담담하다
[김한민] 주제? 러브 이즈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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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우는 확실히 물 같은 배우다. 갈색빛이 어린 눈동자나 여릿한 얼굴 윤곽만으로 꺼낸 말은 결코 아니다. 부드럽다가도 눈썹을 찡그리면 가슴 철렁할 만큼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나 제멋대로 진로를 바꾸는가 싶더니 유유히 순항하는 필모그래피도 그렇다. 온건한 연인의 광채와 냉정한 범죄자의 그늘. 박용우가 껴안은 아이러니는 잔혹한 시대극 <혈의 누>에서 못 말리는 로맨틱스릴러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가파르게 항로를 꺾으면서 비로소 빛을 발했다. 세상사 삼세번이라고, 삼수 만에 대학에 입학하고 두번의 낙방 끝에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이 끈덕진 남자의 걸음은 그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세상> <호로비츠를 위하여>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등 스릴러에서 드라마로, 또 멜로로 긴장어린 줄다리기가 끊이지 않았다. “있는 척, 멋있는 척, 잘생긴 척, 매력있는 척, 폼재”기 일쑤인 경성 최고의 사기꾼 봉구를 유들유들하게
[박용우] 물처럼 차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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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웅에겐 벽이 있었다. 영화 <실미도>로 이름을 알리기 전, 드라마 <부활>로 도약하기 전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다. 그는 연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 꽤 오랜 무명 시절을 보냈고, 시간보다는 작품의 빈도로 세월을 느꼈다. 몇개의 작은 역할과 또 다른 몇개의 작은 역할들. 느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느림은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리듬이다. 거창한 의도가 섞이진 않았지만 엄태웅은 본인에게서 떨쳐낼 수 없는 어떤 망설임과 주저 속에서 작품을 골랐다. 절반은 불안, 두려움 때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어찌할 수 없는 기질적인 망설임 탓이었다. 엄태웅은 그렇게 말한다. 끼로 통하는 연예계에서 다소 투박해 보이는 그의 기질은 일종의 벽이다. 그래서 엄태웅이 <부활>의 엄포스로 활짝 피었을 때 왠지 그는 벽을 하나 넘어온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하면 덜커덩 소리도 났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자기 주변을 꽤 오래 맴돌던 엄태웅이 스스로의 벽을
[엄태웅] 발화점까지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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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웅과 박용우, 핸드폰을 놓고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다
핸드폰, 고작 핸드폰 하나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한손에 쏙 들어가는 그 자그마한 물건은 어이없게도, 잘나가던 그들의 생을 나락으로 빠뜨리고 만다. 약간의 우연과 어긋남, 객기와 무례함이 뒤범벅되면서.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주목받은 김한민 감독의 신작 <핸드폰>은 매니지먼트사 대표인 오승민과 우연히 그의 핸드폰을 습득한 정이규를 뒤쫓는 스릴러다.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뜨거운 발신자 오승민 역에는 엄태웅이, 서늘하게 명령을 내리는 정체불명의 수신자 정이규 역에는 박용우가 캐스팅돼 한판 대결을 펼친다. 그들의 핸드폰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기에 그렇게 치열하게 서로를 추적했던 걸까. 2월9일 바람이 거센 야외로 두 남자를 불러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엄태웅, 박용우] 냉정과 열정의 맹렬한 추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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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말로 치고받는 액션영화다. 추상적인 ‘쩐의 전쟁’이자, 한국식 천민자본주의가 어느 정도로까지 우리의 일상생활 깊숙이 반영됐는가를 추적하는 영화이며, 동시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엄청난 한탕을 꾸미는 과정을 스피디한 웃음으로 포장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좀처럼 볼 수 없던 장르영화, 케이퍼 필름(Caper Film)을 데뷔작으로 선택하며 매끈하게 완성해낸 이호재 감독을 만났다. “<작전>이 풍자까지도 못 가고, 야유나 똥침 정도라고 생각한다. 상층부의 진짜 주범들을 다뤘다고는 솔직히 말 못하겠다”고 겸손하게 물러서긴 했지만, 발로 뛰는 취재와 웰메이드 장르영화에 대한 욕심으로 겁없는 데뷔작을 완성한 그의 야심은 뜨겁다.
-한국에는 할리우드의 <월 스트리트>나 일본의 <주바쿠>처럼 돈과 자본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없었다. 한국식 천민주의 성격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영화를 장악한다는 측면에서 <작전>은 최
[이호재] “화이트칼라 범죄영화 힘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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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여왕. 제니퍼 애니스톤을 따라다니는 별명이다. 어쩔 도리 없다. 그녀는 눈물의 여왕이다. 우리는 애니스톤의 얼굴을 보며 즉각적으로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를 떠올린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찍으며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는 사랑에 빠졌다. 애니스톤과 브래드 피트는 이혼했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을 입양했고 결혼을 했고 거대한 저택을 샀고 ‘브란젤리나’가 됐다. 애니스톤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프렌즈> 시리즈의 유일한 생존자
파파라치들은 애니스톤의 사진을 미친 듯이 찍어서 타블로이드 잡지들에 팔아먹었다. 타블로이드들은 애니스톤의 사진을 브란젤리나의 행복한 사진과 함께 실었다. 불행과 행복의 대차대조표였다. 타블로이드가 아닌 패션지 <보그>조차 “녹음기를 꺼달라고 요구한” 애니스톤의 말을 잡지에 그대로 실었다. “안젤리나 졸리의 언행은 정말 쿨하지 못했어요.”
[제니퍼 애니스톤] ‘눈물의 여왕’은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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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철없는 남자. 이민기에게 그것은 오래 입어 편안하게 늘어진 티셔츠 같았다. 그를 알려준 <굳세어라 금순아>와 <달자의 봄>이 그랬다. 제법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던 <태릉선수촌> 이후에도 그는 항상 이 편한 차림새를 고수했다.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의 철없는 태권도 사범 이미지는 본격적인 영화 데뷔작 <바람피기 좋은 날>의 숙맥 대학생으로, <로맨틱 아일랜드>의 명랑한 백수로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갔다. 이민기는 그렇게 불안하고 흥미로운 캐릭터로 매 작품에 자신을 대입했고 그건 그를 설명하는 일종의 수식이었다. 그런 이민기가 변했다. 지금까지 입었던 몸에 잘 맞는 의상을 벗고 막 구입한 새 아이템에 눈길을 돌린다. 2월19일 개봉을 앞둔 <오이시맨>에서 그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이명현상 때문에 뮤지션의 길을 접을 위기에 처한 청년 현석을 연기한다. 시린 홋카이도 여행, 무표정한 얼굴, 독백의 대사들,
[이민기] “천방지축, 그거 나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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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연은 <마린보이>의 정서를 지배하는 여자다. 마린보이가 돼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천수(김강우)는 유리(박시연)를 보는 순간 마비된다. 자신이 강 사장(조재현)과 김 반장(이원종)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만 유리의 눈빛 앞에 그 판단력은 상실되고 만다. 영화 속 유리는 상대방의 오감을 그대로 멎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여자여야만 한다. 순간 우리의 뇌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한국 여배우 중 거기에 꼭 들어맞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박시연은 어느덧 그만한 배우로 성장했다.
<마린보이>의 유리 캐릭터가 곽경택의 <사랑>(2007)에서의 ‘미주’와 비슷하지 않냐는 얘기를 들으면 섭섭하다. <사랑>의 주현과 주진모 사이, <마린보이>의 조재현과 김강우 사이에 놓인 박시연의 모습은 얼핏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모두 권력자의 여자로 나왔고,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는 점에서 비슷해요. 하지만 미주가 수동적으
[박시연] 오감을 멎게 하지만, 무심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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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로 뒤덮인 구릿빛 등. <마린보이> 포스터 속 김강우는 시선을 맞추려는 두 배우와 달리 뭔가를 감추려는 듯 혼자 뒤돌아 서 있다. 마약을 몸속에 숨겨 운반하는 신종 마약운송책, 마린보이. 국내 최초의 본격 해양액션물이라 할 만한 이 영화는 애초 주연배우의 육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얼핏 성실한 인상에 은근히 고집스러운 이목구비의 소유자가 30대 첫 영화로 결정하기엔 무리수 아니었을까 싶은데 김강우는 자신의 성품이 천수처럼 가볍다고 주장하고 싶은 눈치다. “어떤 상황에서든 쿨함을 유지하고 싶었어요. 말투도 평소대로 했어요. 저는 정말 착한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요. 정말로요.”
뱃사람들도 안심하지 못하는 바다가 주된 놀이터였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음은 뻔한 일. 그럼에도 제 나이의 매력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어 끌렸다니 자맥질 꽤나 했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수영을 하나도 못해 발차기부터 시작했”
[김강우] 비수를 감춘, 착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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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빚 앞에 살아남으려 ‘마린보이’가 된 남자 천수(김강우), 그 남자들의 바다 위에서 남몰래 자신의 꿈을 꾸는 여자 유리(박시연), 그들은 어느새 뜨거운 연인이 된다. ‘해양스릴러’를 표방하는 <마린보이>에서 김강우와 박시연은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김강우는 과묵하고 무거운 조재현의 반대편에서 어떤 위기가 닥쳐도 허허실실 능글대는 남자로 등장하고, 박시연은 <사랑>과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거쳐 <마린보이>에 이르기까지 얼핏 비슷해 보이는 캐릭터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소화하고 있다. <마린보이>가 보여주는 장르영화의 전형성 속에서 두 사람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김강우, 박시연] 마린보이와 팜므파탈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