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것을 빼앗길세라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은 거기 없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조인성은 <발리에서 생긴 일> <봄날> <비열한 거리> 등을 거치며 아로새겨왔던 불안정한 청춘의 그림자를 지웠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모든 고뇌를 마음속으로 끌어안고 사는 왕의 호위무사 홍림이다. 왕을 연인으로, 왕후를 이성으로 둔 호위무사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칼을 휘두르거나 사랑을 나눌 때에나 비로소 엿볼 수 있다. 홍림 역을 맡아 감정을 억누르고 그것을 몸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배우 조인성 역시 자기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조인성은 그것을 ‘기분 좋은 배신’이라 부른다.
-2년 만이다. <비열한 거리>를 끝내고 공백이 길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됐다. <비열한 거리> 끝나고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이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나 조폭영화였다.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작품이 다양하지 않더라
[조인성] 내 안의 성역을 깨뜨리고…
-
<쌍화점>은 고려 말, 왕(주진모)과 왕이 사랑한 호위무사 ‘홍림’(조인성), 그리고 둘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는 왕후간에 펼쳐지는 운명적인 사랑의 노래다. 격정의 세월, 파국을 향해 치닫는 금기의 사랑. <쌍화점>은 영화계를 넘어 사회의 금기를 스크린에 불러온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 한편의 성공만을 기원하기에 <쌍화점>이 짊어진 짐은 너무 크다. 2008년 한국영화의 침체라는 부침은 <쌍화점>에 내려진 가혹한 운명이다.
지금 충무로는 누구나 <쌍화점>을 말하고 <쌍화점>을 기대한다. 한팔 움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기대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동성애라는 금기에 관한 가장 적극적인 정면 도전을 담보하는 영화. 봇짐 가득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 같은 이야기꾼 감독 유하가 이를 뒷받침하고, <비열한 거리>부터 유하 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아우라가 함께한다.
[조인성, 주진모] 격정의 고려, 금기가 끓는다
-
‘올 연말, 의외의 적시타.’
<과속스캔들>에 대한 한 평자의 코멘트다. 인기스타에게 숨겨둔 딸이 찾아든다, 그 딸은 게다가 미혼모다. 졸지에 할아버지 소리 듣는 총각이라는 설정만으로는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한 그저 그런 코미디영화라는 선입견을 갖기 충분하다. 한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코웃음칠 영화가 아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마냥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찬사 일색이다. 차태현(현수 역), 박보영(정남 역), 왕석현(기동 역) 등 주연배우들의 조합도 미끈하고, 무엇보다 익숙한 이야기에 활어 같은 생동감을 불어넣은 연출 솜씨에 모두들 두손 박수다. 데뷔를 위해 오랫동안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다듬으며 와신상담했던 강형철 감독을 개봉 직전 만났다.
-머리는 염색했나.
=아니.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신경 쓸 일이 많아선지 최근 몇년간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개봉이 코앞이다.
=지금은 막상 차분하다. 시사를 많이 해서인가. 개봉하면 관객 틈바구니에서
[강형철] “소재? 잡생각하다 보면 떠오른다”
-
오빠가 돌아왔다. 언제나 책임감 강하고 믿음직한 절제된 남성미를 보여주던 이정재가 철없는 오빠로 돌아왔다. <태풍>(2005) 이후 무려 3년 만이니 그는 이른바 연예계 데뷔 이후 가장 오랜 휴식을 취한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변신의 폭은 크다. <1724 기방난동사건>(이하 <기방난동사건>)의 ‘천둥’은 그가 연기한 캐릭터 가운데 가장 까불고 철부지인 캐릭터 중 하나다. ‘조선시대 조폭 이야기’인 영화에서 그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시종일관 어수룩한 표정으로 CG와 함께 춤을 춘다.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생동감 넘치는 이정재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이정재는 다시 연기에 몰두하고 싶어 했고, 제법 긴 공백이 아무렇지 않은 듯 새로운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젊은 남자>(1994)로 그해 거의 모든 ‘신인’상을 휩쓸고, 2000년대 초반까지 충무로의 가장 뜨거운 남자였던 그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돌아온 것은 그래서 반갑다. 그는 이른
[이정재] “버라이어티, 나오라면 나가야지”
-
-
송혜교가 ‘산다’. 일이 안 풀리면 버럭 화도 내고, 남자친구가 헤어진 여자를 만나는가 싶으면 금세 삐치고, 사랑의 다가옴에 환하게 웃을 줄 알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PD 주준영은 송혜교를 다사다난한 세상과 만나게 해준다. 송혜교에겐 혁명이다. <올인>의 수연이 지녔던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제로에 놓은 다음 <가을동화>의 은서에게서 보았던 과장된 슬픔을 살짝 걷어내고 <풀하우스>에서 <곰 세 마리>를 부르며 짓던 비현실적인 깜찍함을 과감히 털어내면 가까스로 주준영과의 접점이 생긴다. 영화 <파랑주의보>에서 보여준 비운의 수은이 될 필요도 없고, 슬픔을 억제한 <황진이>의 여성상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주준영은 지금까지 송혜교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목선에 맞추어 싹둑 잘라버린 헤어스타일. 치장하지 않은 스포티한 차림. 노희경 작가
[송혜교] ‘예쁘다’보다는 ‘연기 잘한다’고 해주세요
-
시작은 문득, 이었다. 마감을 끝내고 술자리에 둘러앉아 다음주엔 누굴 인터뷰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문성근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말했고, 모두들 궁금하다고 했다. 문성근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혹자는 좀처럼 출연하지 않던 드라마에 연이어 얼굴을 보인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실종> 현장에 다녀왔던 기자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았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수>에서의 가성 연기가 대단하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강우석 감독의 <강철중: 공공의 적1-1>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내년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에서 선보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 중일 것이라는 누군가의 전언까지 들었을 때, 배우 문성근이 그 어느 때보다 연기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다음날 인터뷰 제안을 위해 수화기를 들었고, 그는 전주에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형 잠깐만!”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가 수차례 들렸고, 결국 인터뷰는 빡빡한 촬영
[문성근] 이제는 ‘나 많이 할래’가 됐다
-
차태현이 돌아왔다. 눈가와 입꼬리를 포물선 모양으로 만들며 씩 웃는, 소년 같은 미소는 그대로인데 양손에는 딸과 손자를 잡고 돌아왔다. 12월4일 개봉하는 <과속스캔들>에서 차태현은 ‘중3 때 실수로 낳은’ 딸이 미혼모가 돼 집으로 찾아오면서 시련을 겪는 인기 DJ 남현수를 연기한다. 2005년까지 대개 아름다운 아가씨의 수더분한 연인이었던 그의 행보는 이제 종잡을 수 없다. 서른셋, 스스로의 나이를 “배우 하기 애매모호한 시점”이라 말하는 차태현은 그럼에도 트로트 가수(<복면달호>)로, 어수룩한 바보(<바보>)로, 돈 많은 시한부 인생(<꽃 찾으러 왔단다>)으로 변신하며 미래를 위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있다. “요즘은 때마다 무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한 시간 반 동안 그 일부를 훔쳐보았다.
아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나오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멜로도 하고 코미디
[차태현] 밝은 영화로 인정받고 싶다
-
“내가 ‘어’ 하면 조폭인 줄 안다니까.”
이춘연 씨네2000 대표의 말이 틀리진 않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어’ 하고 뒷걸음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영화계를 대표한 ‘큰 바위 얼굴’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등을 이끌며 영화계 대소사에 나섰던 이 대표. 올해 4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후보군 중 영화인들로부터 가장 큰 신임을 얻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진위 위원장 후보 접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계에 봉사하느라 상대적으로 소흘했던 제작 일선으로 돌아왔다. 후반작업 중인 김윤석 주연의 <거북이 달린다>에 이어 <여고괴담5> 오디션과 캐스팅을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이 대표를 강남의 새 사무실에서 만났다. 쉬지 않고 매년 꼬박꼬박 1편씩 내놓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그였지만, 배고프긴 마찬가지라며 이 대표는 손사래를 쳤다.
-강남으로 출근하니까 어떤가.
=충무로 사무실은 ‘오며 가며, 사랑
[이춘연] “힘들수록 기본에 충실해야지”
-
키아누 리브스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날아온다. 모두가 그를 의심하고 그 역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네오와 <콘스탄틴>의 퇴마사 콘스탄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그가 꼭 지구를 구해주리란 것을. <지구가 정지된 날>로부터 무려 60여년, 키아누 리브스는 리메이크작의 선한 외계인 클라투로 찾아온다.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키아누 리브스는 외계인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거대한 미확인 비행물체가 착지하고,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한 남자 클라투(키아누 리브스)가 나타난다. 외모는 지구인과 똑같고 영어도 구사한다. 그는 수세기 동안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멸하기 위한 거대한 공격을 계획 중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를 비롯한 세계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공격을 감행하려는지,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인류를 말살해서 지구를 청소하려던 클라투는 점점
[키아누 리브스] 외계인, 지구를 부탁해
-
당신은 아이돌입니까.
국내 스타의 경우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대다수가 한눈에 아이돌이거나 아이돌이 아니지만 일본의 잡지나 인터뷰 프로그램, 혹은 할리우드의 연예 프로그램엔 저 질문에 주저하는 배우들이 꽤 있다. “아이돌이라 불리면 억울하다” 인상짓던 나리미야 히로키나, <바스켓볼 다이어리> 때의 객기를 용기삼아 질문에 조롱을 던지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학창 시절의 이지메 경험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아오이 유우 등. 스스로를 아이돌이라 흔쾌히 답하지 못하는 이 장면들은 이상하게 마음을 흔든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섰더니 자신도 모르는 화려한 스타가 인사를 건네는 듯한 느낌의 대변이랄까. 혹은 아이돌이라 규정되어진 일정한 외적 틀 속에 마음까지는 포획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의 표출이랄까. 스스로를 아이돌이란 수사 속에서 꺼내려는 저 부정의 답변은 멋진 그림처럼만 느껴지던 스타가 마침내 마음을 여는 순간 같다. 당연히 신나하고 밝게 미소지을 줄 알았는데 인상을 쓴다. 마음
[유아인] “수컷은 되고 싶지 않아요”
-
사실 개성이란 말은 변덕 심한 세월이 자기 입맛에 맞게 여기저기 갖다 붙여놓는 단어다. 유행이 세월따라 변하고 또 변하듯 개성도 어제오늘 운명이 다르다. 90년대 후반 등장했던 일군의 개성파 여자배우들, 공효진, 김민선, 이요원, 배두나의 오늘도 그렇다. 공효진이 패셔니스타의 이미지를 지나 <미쓰 홍당무>로 화려하게 피었고 배두나가 세권의 사진집을 내며 도시의 팬시한 스타로 자리잡았지만 이른 결혼으로 활동이 뜸해진 이요원과 톡톡 튀는 목소리가 이젠 더이상 새롭지 않은 김민선은 다소 심심한 배우가 되어버렸다. 개성파 배우의 길 찾기는 변화무쌍한 세월을 이겨내야 하는 암중모색의 과정이다. 김민선이 2007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두편의 영화 <가면>과 <별빛 속으로>를 찍으며 갑작스레 바쁜 몸가짐을 보여준 건 그래서 조금 흥미로웠다. 워낙 높은 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튕겨내는 듯했다. 노출이 화두가 되어버렸지만 그림, 남장, 승마, 사극 등
[김민선] 두려워말자, 다 보여주자
-
정신없이 달려온 10년. ‘독립영화’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과는 유리된 그 무엇이라 여기던 시선을 뒤로하고 인디스토리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그렇게 달려왔다. 올해는 한국독립영화사를 되새겨볼 때 꽤 의미있는 해다. 국내 독립영화 최초의 제도적 산실이나 다름없는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지난 9월로 10주년을 맞았고, 오는 11일이면 그와 무관하지 않은 첫 독립영화 배급회사 인디스토리가 설립된 지 역시 1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 영화에 목숨 건 시네필들의 전설적 동아리나 다름없는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유구한 역사와 연대의 기억 속에서 한독협과 인디스토리는 그 애정과 갈증의 결정체였다. 특히 인디스토리의 역사는 바로 한국 독립영화가 좀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한국영화계에 지속적인 활력을 불어넣으며 그 존재를 확인해온 긍지의 기록이다. 그 중심에는 문화학교 서울의 ‘큐브릭 곽’ 사무국장 시절을 거쳐(이메일 아이디는
[곽용수] 이거 참 돈 되는 걸 해야 되는데…
-
아직까지도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지노 로얄>에서 완벽하게 리모델링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보여줬던 크레이그는 오히려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꼽힌다. 그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의 아카데미상인 BAFTA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브닝 스탠더드>의 영화상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건 2005년 그가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임명’될 당시의 까칠한 분위기를 생각할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제임스 본드와 007 시리즈의 팬임을 자처하는 블로거들이 미친 듯이 쏟아내던 인신공격성 글과 “내 이름은 블랜드(순한, 매력없는), 제임스 블랜드”(Bland, James Bland) 따위의 헤드라인을 뽑아대던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공세는 잠잠해졌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 ‘취임’ 반대를 위해 만들어졌던 인터넷 사이트(craignotbond.com)도 사라진 지 오래다. 회고해보자면,
[대니얼 크레이그] 아니, 007이 저런 천한 일까지?
-
“개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필모그래피에서 빼는 경우도 있던데, 나로서는 정말 빼고 싶지 않은 영화예요.” 2004년 촬영을 마쳤지만 4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 10월16일에야 개봉한 <사과>에 대한 문소리의 애정은 각별하다. 첫 단독 주연작이었다는 점, 시나리오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영화와 연기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을 하게 했다는 점 등 문소리가 <사과>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해 보인다. ‘가오’가 생명인 배우가 기자에게 “왜 나를 인터뷰 안 하냐?”고 따졌을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사실, <사과>를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이 든다. 현재에 가까울수록 시간이 점점 빨리 흐르는 탓인지, 불과 4년 전인데도 영화 속 풍경과 물건들은 아주 오래전 그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사과>를 보며 4년 전의 자신을 추억한 관객이 있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어쩌면 문소리가 <사과>에 그토록 애착
[문소리] 돈으로도 못 살 가르침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