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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우 또 없다. 멜로와 코미디, 호러와 드라마를 횡단하고 역도 선수(<킹콩을 들다>)와 매니저(<온에어>), 외과의사(<외과의사 봉달희>), 의금부 도사(<음란서생>), 조직폭력배(<조폭 마누라3>)를 숨 가쁘게 종단하면서 20년 가까이 은막 위에 자기 자신을 힘껏 맞부딪힌 사나이. 배경 속 익명의 누군가에서 자기 이름 석자를 크레딧에 가장 먼저 새기기에 이른 이범수의 다음 목적지는 <홍길동의 후예>다. 장르의 관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생경한 액션활극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홍길동의 직계 후손이자 21세기 한국형 슈퍼히어로 홍무혁. 두달 동안 철저한 식단관리로 체중을 4kg나 감량하고, 두달 반가량 신재명 무술감독에게서 땀으로 익히고 몸으로 이해한 캐릭터다.
“실수했다간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두 커트 빼곤 내가 다 했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가는 신이 있었는데, 이쪽 난간을 딛기 전
[이범수] 내일도 부지런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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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도통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박예진의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씨네21>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다가 2001년 <광시곡> 이후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뒤 박예진이 출연한 영화는 <뚫어야 산다>와 <그녀는 예뻤다>같이 대중적 반향이 적은 영화들이었다. 그런데도 박예진을 드라마 연기자라기보다 영화배우로 느끼는 건 연기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8)의 반향이 여전히 쟁쟁하기 때문이리라. “거의 10년 만에 큰 배역을 갖고 영화로 돌아오게 됐는데, 뭔가 시작 같은 느낌도 있다”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박예진에게 ‘영화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첫 작품은 <청담보살>이다. 그녀는 여기서 신내린 점쟁이 태랑을 연기한다. 화려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으로 청담동 일대에서 소문난 무녀인 태랑은 어머니(김수미)가 점지해준 남성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하
[박예진] 비련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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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부터 써야 할지 망설였다. 현재의 조재현을 소개하기 위해 입에 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집행자>의 배우부터 연극열전 프로그래머, 연극열전3 오프닝작 <에쿠우스>의 연출가 겸 배우,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 얼마 전 막을 내린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까지. 돌이켜보면 배우 조재현 역시 언제나 예측을 넘어서는 구석이 있었다. 한때 김기덕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지독히 ‘나쁜 남자’가 <맹부삼천지교> <목포는 항구다> 같은 코미디나 제목부터 <로망스>인 멜로, 혹은 <피아노> <눈사람> <뉴하트> 같은 TV드라마나 자기 색 뚜렷한 연출가들,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등을 자유롭게 노닐었던 건 선입견과 한계를 경계하는 심성 덕이 컸다.
2004년 마흔의 나이에, 다른 작품도 아닌 <에쿠우스>에, 그것도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고
[조재현] 나는 생산적인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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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치한 거 좋아한다고 했냐 안 했냐!”
애인 현준(이병헌)에게 화이트데이 사탕 선물을 내심 기대하던 승희(김태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구에게도 빈틈이라곤 내보이지 않던 사람이, 한번 마음 가는 곳을 정한 이후부터는 주저하지 않고 내숭떨지도 않는다. 타인의 숨겨진 성향을 단숨에 파악하는 직업과 달리, 그녀의 사랑은 감출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 그녀는 직선으로 뜨겁게 내리꽂힌다.
국내 최초 블록버스터 첩보액션드라마 <아이리스>의 프로파일러 최승희 역은 놀랍도록 김태희의 몸에 찰싹 잘 달라붙는다. 전작들이 김태희라는 스타의 강고한 이미지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구미호외전> <중천>), 거꾸로 무리하게 없애려는 노력(<싸움>)이었음을 상기해보면 ‘똑똑하고 쿨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확고한 이미지는 이상하리만치 소극적으로 반영되어왔다. 하지만 승희 역은 그 스타성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외향적이고 강한 에너지가 있고 당당한”
[김태희] 직선으로 뜨겁게 내숭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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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 <아이리스>에 출연한다는 설명은 부족하다. <아이리스>는 이병헌이란 드라마 자체를 포괄한다. <아이리스> 1회에서 캠퍼스를 활보하는 이병헌의 모습은 가장 직접적인 향수다. 교수 앞에서 유창한 지식을 뽐내거나, 차 유리를 보며 머리를 매만지거나, 식판을 들고 관심있는 여자에게 다가가는 이병헌이라니. “<내일은 사랑>을 말하는 거죠? 나도 다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그때는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촬영 전날 밤새워서 아이디어를 짰는데, 그때 습관이 살아나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장면이 다 예전과 똑같은 기분으로 만든 거였어요. (웃음)”
<내일은 사랑>의 신범수뿐일까. 극중 김현준은 이병헌의 또 다른 이름들을 품은 남자다. <백야 3.98>의 민경빈도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활동하는 비밀첩보요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밉지 않게 과시하는 능력은 <폴리스>의 오혜성도 갖고 있었다. 난데없는 키스 뒤 당
[이병헌]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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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김태희가 아닌 현준과 승희를 상상할 수 있을까. 기존에 볼 수 없던 스케일과 소재를 노련하게 풀어가는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두 사람은 뜨겁게 빛난다. 실체를 꿰뚫어볼 수 없는 거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는 개인들의 가슴 아픈 운명은, 이 드라마틱한 매력의 배우들을 통해서만 실감이 난다. 이제 막 초반부를 지나며 상승곡선을 가파르게 그리는 <아이리스>의 두 주인공을 만났다.
[이병헌, 김태희] 거칠구나 운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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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파주>의 여주인공 은모를 연기한 서우가 그랬다. <미쓰 홍당무>에서도 그렇고 드라마 <탐나는도다>와 <파주>에서도 그렇다. 서우에게선 어리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의 본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주변 환경의 모든 기운을 세차게 빨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꼼짝 못하게 지배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그런 존재. 스크린 위에서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놓으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리는 배우의 존재감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파주> 관련 일정을 50여개 앞두고 있던 서우를, 그래서 만나야만 했다.
-<탐나는도다> 촬영현장에서 코디네이터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파주> 시사회장에서도 심이영이나 이선균 등의 동료배우와 팔짱을 낀 모습이 보였고. 천성적으로 참 다정하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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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 안개처럼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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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으로 세상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만이 저토록 끈질길 수 있다. 과거 <씨네21>의 조선희 편집장을 지척에서 바라보며 품었던 생각이다. 그녀는 예민하고 눈물도 많지만, 권태나 침체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는다. 지난 2000년 잡지 데스크를 훌쩍 떠나 오랫동안 소원한 대로 전업 소설가가 됐고, 책상 앞에 홀로 되어 장편 <열정과 불안>(2002)과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2006)을 써냈다. 2006년 여름 역사소설을 준비하며 숨을 고르던 그는 영상자료원장 재공모에 응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활력을 얻을 때라는 판단을 내렸다. 조선희 전 원장의 재임 중 영상자료원은 상암동 DMC 이전과 그에 따른 재편이라는 중요한 문턱을 넘었다. 아카이브 전용 건물에 둥지를 틀었고 확장된 하드웨어에 발맞추어 예산과 보유 영화편수가 획기적으로 늘었다. 대중과 만나는 온·오프라인 프로그램도 크게 다양해졌다. “가장 생산적 단계에
[조선희] 제2수장고예산, 후임이 해결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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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까지만 해도 장동건은 비극이 탐내는 영웅이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택한 영화들은 대개 고난과 혼돈 속을 속절없이 뒹구는 대서사극이었고, 그들은 그의 소멸을 통해 절정으로 치달은 다음 묵념하듯 장대한 드라마의 막을 닫곤 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닌 시절에도 가장 격한 전투에 휘말리곤 했던 그의 페르소나들은 마지막까지 생존하지 않는 대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전설로 화했다. 그 유명한 사투리 대사로 죽음마저 농하듯 맞이한 <친구>의 동수로 각인된 이후, 비극은 장동건에게 운명이었다. <해안선>의 강 상병이 그랬고, <무극>의 쿤룬이 그랬으며,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가 그랬고, <태풍>의 씬이 그랬다. 반듯한 이목구비로 각인된 배우에게 그건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일종의 도전이었고, 영화는 완벽에 가까운 그의 육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비극의 혈통을 계승한 존엄한 인물을 읽었다.
4년이 지난 2009년. 기다림은
[장동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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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자본이 투여된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해운대> 또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영화가 만들어질 때는 CG의 완성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개봉 뒤에는 불법 복제파일 유출 사건으로 시끄러웠으며 개봉이 마무리돼가는 현 시점에는 수익 배분에 관해서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이 영화의 메인 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공동제작자로까지 참여해 배급수수료와 투자지분 외에 제작지분까지 챙겼다는 사실을 놓고 시비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CJ엔터테인먼트는 <씨네21>에 <해운대> 투자와 공동제작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우리가 어떤 제작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야기를 나눠야 의문이 풀릴 것 같다”는 이상용 CJ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투자제작팀장에게 <해운대>에서 CJ가 담당한 몫에 관한 설명과 여러 뒷이야기를 들었다.
-<해운대>에서 투자를 담당한 것은 알겠는데 공동제작사로서는 어떤 일을 했나
[이상용] <해운대>, 올 여름 개봉 포기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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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굿 다운로더 캠페인의 위원장직을 수락하게 된 계기는.
안성기: 현재 한국영화계에 불법 다운로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영화의 미래나 모든 창작 작업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 운동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딱히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차에 ‘굿 다운로더 캠페인’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여러 가지 면에서 환영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위원장직을 제안해줘 고마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박중훈: 사석에서 영화인들끼리 만나서 담소를 나눌 때마다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고민은 항상 나오는 이야기였다. 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소극적인 자세로 걱정만 했는데, 현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굿 다운로더 캠페인의 위원장직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아 좋은 기회다 싶었다. 이제는 발벗고 나서서 대중의식을 적극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시점이다.
Q2. 영화계
[안성기, 박중훈] 저작권부터 다시 알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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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이 없을 듯한 9월의 어느 월요일, 서울 삼성동의 한 스튜디오가 아침부터 특별한 촬영을 위해 분주하다. 가을의 문턱에서 내리는 가을비의 정취를 느낄 만한 시간조차 아까운 듯 그들의 손과 발은 바쁘다. 스튜디오의 정문은 통제를 시작했고 넓은 주차장은 미리 올 손님들을 맞으려고 예약된다. 하나 둘씩 배우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량들로 이미 주차장은 만원이다. 그들을 도와 촬영할 스탭 수도 급격하게 늘어간다. 그렇게 모인 배우들이 분장실을 거치면서 캠페인 심벌이 새겨진 옷을 입고 하나의 목적으로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김주혁, 김태희, 김하늘, 박중훈, 송강호, 신민아, 안성기, 엄정화, 장동건, 정우성, 하지원, 현빈 등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12명의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아니면 좀처럼 한자리에서 볼 수 없던 배우들이 합법 다운로드 권장을 위한 대국민 문화 캠페인 ‘굿 다운로더 캠페인’(주최 영화진흥위원회 불법복제방지를 위한 영화인협의회, 주관 굿 다
굿 다운로더, 우리와 악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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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은 랑만이야. 푸르름은 광대무변이지. 그것은 숙원의 약속이고. 그것은 옥 같은 고백이야.” 생소한 울림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옌볜 두 소년, 소녀의 대화다. 자고 있던 감각을 깨우듯 살며시 진동하는 이 울림은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이젠 그저 화면을 응시할 뿐이다. 크레용으로 그린 푸른 산과 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미자 감독의 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의 도입부다. 훈춘에 사는 조선족을 그린 이 영화는 다양한 굴곡을 지나 힘차게 뻗어가는 생명력을 담는다. 영화엔 주인공 철이와 숙이, 학교의 자영 선생과 왕 선생, 철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지만 강미자 감독의 관심은 이들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생명에 있는 것 같다. 단순하지만 강한 동력이 영화를 관통해 흐른다. 한국영화에서 쉽게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미자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영화의 시작점부터 묻고 싶다.
=시나리오는 이지상 감독님이 썼다. 아는 후배 한명이 중국에서 영화작업을 하겠
[강미자] 옌볜을 미화하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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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또 다른 이름은 붉은 꽃, 자영이다. 전자가 백성들의 지엄한 어미라면 후자는 금기의 사랑에 애달파했던 우리와 똑 같은 여염집 여인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황후로 간택되는 순간 지워지고 만 ‘불꽃’ 민자영에게 왕관이 드리운 그늘만큼의 빛을 선사한 퓨전사극이다. 일본 무사의 칼날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여장부의 마지막 숨은, 익히 들었던 그 문구에 그 이름 석자를 덧붙인 다소 이례적인 고백으로 화한다. “나는 조선의 국모 민자영이다”라는. 강수연, 최명길, 이미연 등의 대를 잇는 이 차기 황후는 우연찮게도 “한자로는 다스릴 수, 사랑 애”, 수애다.
“황후도 여자잖나. 여배우도 여자고.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너무 좋은 기회였다. 두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넓지만 그건 또 종이 한장 차이여야 했다. 너무 많은 변화를 추구해도 동질성이 없어지고. 현실성도 없어지고. 그게 아니라 같은 외면, 같은 내면의 캐릭터. 김용균 감독님은 이번 역
[수애] 모던한 왕비는 절제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