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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컨대 <고지전> 시나리오에서 가장 탐나는 역할을 택하시오 한다면 악어중대 대위 신일영이 압도적으로 1위일 거다. 죽음의 처절함이 살갗으로 파고드는 전장. 고립된 고지에서 부대를 통솔하는 독기 어린 소년의 모습은 전쟁, 그 자체의 얼굴이다. 전쟁이라는 폭풍의 세기를 바로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처절한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단 하나도 쉬울 턱이 없다. 내적, 외적으로 배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어 발산해야 하는 과제, 그만큼 배우라는 직업적 의욕을 깨우는 도전이기도 했다. 이제훈에게 내려진 건 이 절체절명의 ‘명령’이었다. 장훈 감독은 기존의 얼굴 대신 신선함을 가지고 있되 능숙한 연기를 가진 배우를 물색했다. <친구사이?>에서의 현실적인 게이 ‘석이’, <파수꾼>의 강단있는 소년 ‘기태’. 두편의 독립영화에서 이미 그는 새로운 배우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세번의 오디션, 3개월의 기다림 만에 이제훈은 고지를 넘었다.
“내가 캐릭터의 아우라
[이제훈] 반짝반짝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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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년을 어디서 봤던가. 아마 당신은 이창동의 <시>에서 윤정희의 가슴을 찢어놓는 중학생 손자로 이다윗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의 얼굴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시처럼 흐릿해 보인다면 <고지전>은 이다윗의 얼굴을 관객의 가슴에 찔러넣을 첫 번째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고지전>에서 이다윗은 열여섯 소년병 남성식이다.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울 나이의 소년은 병사들의 피와 살이 짓이겨진 애록고지에서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가장 처연하게 품고 있는 이 캐릭터는 이다윗과 거의 같은 나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에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있다. “한국전쟁은 책으로만 배웠다. 당시의 사람들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전쟁이 시작되고 내 친구들이 연필을 버리고 총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 <고지전> 현장에 가면 그 마음 그대로 무서워
[이다윗] 소년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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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만으로 따진다면 류승수만큼 영화계에 공헌한 배우도 없을 것이다. 그는 <외출>과 <미녀는 괴로워>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우정출연과 특별출연을 했다. 잠깐 모습을 보이는 사이, 이 ‘찰나’의 출연이 류승수 연기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소모되고 있는 건 아닌가. 긴급조치가 필요했다.”
악어중대 중사 ‘오기영’은 류승수의 이런 고민에서 출발, 명확한 해답을 반영한 캐릭터다. 폼생폼사 따윈 없다. 추우면 인민군의 군복도 끼어 입고라도 살길을 찾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 술과 노래, 유머에 일가견에 있어 전쟁의 공포로 얼룩진 부대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맏형 역할이기도 하다. “너무 가볍게 가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장훈 감독에 따르자면 한 집안의 살림을 도맡는 집사쯤 된다.” 카리스마와 고뇌, 눈물과 상처가 난무하는 고지에서 발견한 인간애의 다른 이름, 오기영의 역할은 막중했다
[류승수] 또 다른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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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빈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여고괴담4: 목소리>로 갓 데뷔한 그녀는 동료배우들과 인터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뭔가가 달랐다. 조심스런 신인배우처럼 말하는 동료들과 달리 김옥빈은 성대를 열어젖히고 웃거나, 또 이런 말을 거침없이 했다. “등교할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요….” 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매니저의 표정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보시라.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김옥빈은 <다세포소녀>와 <박쥐>를 거치면서 극적 캐릭터와 자신의 캐릭터를 묘하게 뒤섞을 줄 아는, 꽤 독특한 배우로 성장했다. 김옥빈의 역할에 다른 여배우를 집어넣는 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고지전>의 김옥빈은 북한군 저격수 차태경을 연기한다. 그런데 여자 저격수라니, 그거 너무 억지춘향 캐릭터 아니냐고? “냉혈 저격수는 아니다. (웃음) 이유도 없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거기서 자란 캐릭터다. 아무런 생각없이 사람을 죽이는 거다. 직접 만나면
[김옥빈] 다세포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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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석이 전 국민의 ‘고요미’(고창석+귀요미)가 되기까지 딱 ‘1박2일’ 걸렸다. KBS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과 이후의 고창석을 보는 대중의 눈은 달라졌다. <부산>에서 유승호의 아버지로 주연도 하고 <맨발의 꿈>에서 동티모르 주재 외교부 직원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소화했지만 여전히 그는 <영화는 영화다>의 영화감독, <인사동 스캔들>의 호진사 사장, <의형제>의 베트남 조직 보스로 기억됐다. 신 스틸러 고창석은 <1박2일> 이후에 딸바보 고창석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또렷이 남겼다. “지나가던 택시 아저씨가 ‘빵빵’ 하시더니 손가락으로 1박2일 동작을 하시더라. (웃음)”
예능프로그램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이때 고창석은 영화 팬들의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동시에 개봉하는 <고지전>과 <퀵>에 모두 출연하기 때문이다. “<퀵> 언론시사 때 객석의 <고지
[고창석] 헬로우 Mr. 고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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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지면 한참 뒤에 대답이 돌아온다. 그 대답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순으로 머릿속에서 몇 차례 다듬어진 형태인 듯하다. 대답하는 태도 또한 곧고 바르다. 어쩌면 이 사람은 선천적으로 바르고 신중한 사람이거나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되돌아보면 고수는 데뷔 때부터 늘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쓰는 ‘바른생활 청년’이었다. 데뷔 초에 찍은 한 CF에서는 여자친구의 통금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지킬 건 지켜야지” 하며 달렸는가 하면 드라마 <피아노>(2001)에서는 이복남매(김하늘)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면서도 항상 옆에서 지켜주려고 노력한 흑기사였다. 악어부대원들을 이끌고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고지전>의 수혁 역시 고수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캐릭터라 할 만하다.
“극중 수혁은 착하고 순수하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점점 냉혈한으로 변한다. 그런 수혁의 변화를 고수의 착하고 바른 이미지가 작용했을 때 효과적일 거라는 판단이 들
[고수] ‘바른 청년’의 틀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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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내색을 않는 사람이다.” 장훈 감독이 <고지전>의 촬영현장에서 본 신하균에 대한 인상이다. 장훈 감독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힘들 때는 힘들다고 표시해도 되는데 (신하균) 선배님은 그런 게 전혀 없으시다. 그저 웃으신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단순히 신하균이 말수가 적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신하균이 <고지전>에서 맡은 강은표 캐릭터가 장훈 감독의 말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인민군과 내통하는 자를 색출하라는 상급의 명령으로 악어부대에 합류하게 된 강은표 중위에게 애록고지에 있는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그곳에서 인민군과 하루에 수차례씩 고지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전쟁에 익숙해진 악어부대는 이제껏 강은표가 보지 못했던 부대였고, 2년 전 헤어졌다가 악어부대에서 다시 만난 친구 김수혁(고수)은 순수함은 없어진 채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관객은 강은표의 눈과 귀를 빌려 악어부대에
[신하균] 연기와 놀던 초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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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만 있는 현장이 어땠냐고요? 군대 다녀온 분들은 다들 아실 거예요. 여자배우는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신하균) “화장품 냄새가 그리웠습니다. 현장은 온통 땀, 탄약, 먼지 냄새뿐이었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여배우와 함께 찍던 현장과 달리 말과 행동에 있어서 편했네요.”(고수) <고지전>에서 수시로 충돌하는 강은표 역의 신하균과 김수혁 역의 고수는 촬영 현장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단순히 다른 현장에 비해 유난히 힘든 촬영이었던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유독 함께 나온 장면이 많아서 두 사람은 동료 배우들과 군대 같은 합숙 생활을 했고, 그들과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신하균과 고수 그리고 류승수, 고창석, 이제훈, 이다윗, 김옥빈 등 7명의 배우가 <고지전>의 배경인 애록고지에서 함께 나눈 이야기를 다음 장부터 전한다.
[신하균, 고수] 배우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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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년을 맞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SICAF)이 새로운 수장을 맞았다. 만화출판사 학산문화사의 대표이기도 한 황경태 조직위원장이다. 청소년 만화지인 <아이큐 점프> <챔프> 등의 창간을 주도한 그는 스타 작가의 파워에 의존하던 기존 만화업계에 신인작가를 발굴해 국내 만화시장의 체질 개선과 토대를 만들어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오는 7월20일 개막을 앞둔 SICAF 역시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업계를 이끌어온 그의 노하우로 새로운 준비를 다지고 있다. 철두철미한 분석과 계획을 말하는 사이사이 평생 만화업에 몸담아온 이가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비밀은 <영심이>의 남자친구 ‘왕경태’의 실제 모델로서의 멋쩍은 미소다. “젊을 땐 지금보다 살도 찌고, 뿔테 안경을 써서 좀 달랐지. 황경태라고는 못하니까 성만 바꾼 거지. (웃음)”
-신임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했는데 어떤 각오인가.
=원래 이사로는 쭉 활동해왔다. 지금까지는
[황경태] “온·오프라인 넘나드는 만화의 기준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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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전 어떻게 나왔어요? 제 연기 어땠어요?’라고 물었는데, <퀵>에 대해서는 그런 질문 한번도 안 했다. 대신 ‘우리 작품’ 어떻게 봤냐고 묻게 된다. 이런 새로운 도전에, 그만큼 다른 시각으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데뷔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배우. 최근 2년 동안 <해운대> <하모니> <헬로우 고스트> 등 이른바 흥행작들을 골고루 섭렵하며 안정된 필모그래피를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예원은 여전히 목말라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해운대>에 이어 또다시 도전한 블록버스터 <퀵>의 개봉을 앞둔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설렌다.
생애 처음 가슴 아픈 사랑을 경험하는 엽기발랄 삼수생(<해운대>), 의붓아버지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감옥에 들어온 음대생(<하모니>),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법’을 점점 망각하는 냉정한 호스피스(<헬로우 고스트>).
[강예원] 코믹 유전자 탑재,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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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1987년생으로 어머니는 홍콩 사람이며 아버지가 말레이, 아랍계 혼혈이다. 영국 런던 임페리얼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모델 활동을 하다가 2009년부터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세월신투>(2010)로 배우 데뷔했다. 풋풋한 미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족한 게 많은데도 첫 작품으로 홍콩금상장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한 게 꿈만 같다. 두 번째 작품으로 홍콩영화계에서 새로이 주목받는 곽자건 감독의 <프로즌>을 하게 된 것도 영광이었다. 그러고보니 계속 학생으로만 출연했다. (웃음)
-단 두 작품을 끝낸 신인에게 <이소룡전>의 이소룡 역할은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껏 이소룡을 연기한 선배들은 하나같이 무술실력이 빼어난 대배우들이었다. 그래도 이 역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소룡이 태어나 195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배를 타고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기 때문
[who are you] 이치정 李治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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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게 빠른 놈.’ <퀵>의 이민기는 청담에서 상암까지 20분이면 주파하는 업계 최고의 ‘스피드’ 퀵서비스맨이다. 그가 연기하는 ‘기수’는 한때 학원가를 주름잡는 폭주족이었으나 이제는 BMW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러 다닌다. 그러던 중 폭주족 시절 단짝이었던, 지금은 인기 아이돌 가수인 아로미(강예원)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달리다 의문의 협박전화를 받는다. 미지의 인물이 지시하는 대로 배달을 돕지 않으면 아로미가 쓴 헬멧이 폭발한다는 것. 그렇게 기수는 오토바이를 타고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끊임없이 질주한다. 명동과 테헤란로, 그리고 올림픽대로 등 그간의 한국영화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추격전이 벌어지는 <퀵>에서 이민기는 온전히 혼자 중심을 잡아야 하는 ‘원톱’ 주인공이다. 여전히 ‘<해운대>의 형식이’로 기억되는 그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돌파해야 하는 ‘언젠가 한번은 닥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이민기] 그리고 청년은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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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개의 눈>의 변승욱 감독은 2006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로 호평을 받으며 데뷔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세밀함이 엿보이는 멜로드라마였다. 2011년, 오랜만에 그가 선보인 두 번째 영화는 예상외로 공포영화다. 장르는 달라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 공포영화의 룰을 따르면서도 전반적인 전개나 감성의 분위기에서라면 차분하고도 세심한 영화적 기질을 갖췄다. 변승욱 감독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하는 공포영화, 현실의 정서를 반영하는 공포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야기와 현실과 공포 장르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지 그에게 들었다.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개의 눈>(이하 <고양이>)의 영화적 포인트를 ‘공포’와 ‘정서’로 나누어 강조했다.
=공포의 대상이 고양이인 영화다. 고양이와 같이 등장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소녀도 있다. 우선은 이 모습들을 어떻게 외양상 무섭게 보일 것이냐의 문제가 있었다. 이야기를 전개
[변승욱] 호흡이 느리다고? 이야기의 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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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빠져드는 것 같아요.” 남궁민의 사진을 찍던 백종헌 사진기자가 말한다. 남궁민은 멋쩍게 웃는다. 이 웃음마저 살인적이다. 사진기자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건 ‘남궁앓이’ 중인 독자라면 다 알 거다. 남궁민은 남자라도 빠져들 정도의 미소를 짓는다. 이 미소는 배우에게는 생소한 MBC <뉴스데스크>의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악역이 뜬다’는 뉴스에 10초 출연한 악역배우 남궁민은 훈남배우 남궁민이 됐다. MBC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마루 혹은 장준하(극중 이름을 바꾼다)로 남궁민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제2의 전성기? 아니다. 남궁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한번도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는 남궁민은 연예인이 아닌 평범하고 성실히 노력하는 배우로 살고 있다.
남궁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쪽대본으로 유명한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 촬영 스케줄은 너무도 빡빡했다.
[남궁민] 미소 뒤의 악바리 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