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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정의감이 아니라 의무감 때문이었다.” 진구는 강풀의 웹툰 <26년>을 접하기 전까지 “5.18이니 4.19니, 이렇게 날짜로 기억되는 일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 모두 전라도 분이지만 부모님에게서 먼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들은 기억도 없다. 4년 전, 영화사 청어람에서 웹툰 <26년>을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진구는 웹툰을 보고 뒤늦게 그날의 아픔을 간접 경험한다. 일종의 부채의식은 “나같이 진실을 몰랐던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발전했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먼저 영화사에 매달렸”던 건 그래서다.
당시엔 주인공 곽진배 역할도 아니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 중요한 건 참여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 선한 마음이 통했는지 진배는 결국 진구의 몫이 됐다. 진배는 웹툰에서 영화로 옮겨오면서 가장 많이 변한 인물이다. 조근현 감독은 진배를 통해 영화에 쉼표를 찍기 원했다. 그리하여 진배는 거칠고 냉정하고
[진구] 당신도 아시나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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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라. 쏴라. 제발 쏴버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의 마지막회를 본 사람이라면 그런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4, 5년 전 <26년>이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 영화의 제작을 기다린 수많은 영화팬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여러 정치적인 외압설을 겪은 뒤 지난 7월 가까스로 크랭크인한 <26년>(감독 조근현)이 현재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개봉일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 크랭크업한 뒤 오랜만에 만났다는 진구와 한혜진도 더이상 진배와 미진이 아니었다. 진구의 오른쪽 눈에는 칼자국 흉터가 없었으며, 한혜진 역시 추리닝, 운동화 차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 표지 촬영하는 내내 두 사람의 눈빛만큼은 진배와 미진의 그것이었다. 이 영화를 꼭 보았으면 하는 ‘그분’을 향한 눈빛이었다.
[26년] 두 청춘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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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출신 배우.’ 지금이야 무척 어색한 표현이지만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계에 김의성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를 단골로 수식하던 표현이었다. 지금의 젊은 관객에게야 거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그 역시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민망해하지만 한때 그는 <억수탕>(1997), <바리케이드>(1997) 등 충무로의 잘나가는 주연급 배우였다. 1990년대 중후반, 변화하는 한국 영화계의 상징이 장선우와 박광수로부터 홍상수와 김기덕으로의 이동이었다면,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출연하고 김기덕이 <악어>(1996)와 거의 동시에 준비했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에 출연할 ‘뻔’했기에 그의 갑작스런 퇴장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그는 거의 15년 만에 돌아와 출연한 홍상수의 <북촌방향>(2011) 이후 <건축학개론>을 지나 &l
[김의성] 좀더 뻔뻔하게, 여기저기 부딪히며 재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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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관리가 안돼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 이후 8개월 만에 <음치클리닉>에서 고음불가 캐릭터로 돌아온 배우 박하선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사실 ‘그냥 관리가 안되는’ 그녀의 표정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결정짓는 제1원소다. 10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의 마음에 들고자 안되는 <꽃밭에서>를 부르고 또 불러보는 동주는 음이탈만큼이나 표정이탈에도 일인자다. 사랑 앞에서 쩔쩔매던 그녀가 돌아서 헤비급 박치기, 산낙지 주사(酒邪)에 온 얼굴을 내던질 때, 상대배우 윤상현의 말마따나 그 나이에 그녀처럼 “잘 내려놓는” 여배우가 어디 흔할까 싶다.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한결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보는 사람마저 긴장을 풀고 그녀의 표정을 좇아가게 만드는 소탈한 흡입력은 여전했다. 그 내려놓음이 가능하기까지 짧지 않은 우회로를 지나온 그녀가 자신 앞에 놓인 연기의 미로 속으로 다시 들어서려는 모습 또한
[박하선] 열심히 하니 내 캐릭터에게도 해뜰 날이 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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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2012 영화 <남영동1985>
2009 영화 <바람>
-영화 <남영동1985>의 이 계장이 워낙 경상도 사투리를 잘 써서 혹시 김중기도 사투리를 쓰지 않을까 생각했다. (웃음)
=원래 대구 사람이라 사투리를 썼었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고는 고향에 3년 정도 안 내려갈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투리를 고쳤다. 표준어가 편해지면서 이제는 사투리와 표준어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게 나만의 특기가 되어버렸다.
-이 계장은 김종태 역할을 맡은 배우 박원상을 가장 많이 때리는 인물이다. 박원상이 선배 연기자니 구타장면이 본인에게는 부담이 됐겠다.
=이 계장이 김종태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찍을 때 그전 촬영 때문에 박원상 선배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한번에 끝내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 결국 5번을 다시 찍었는데 마지막에 정지영 감독님이 오셔서 “중기야, 그냥 세게 때려” 하시더라. 그래서 진짜 있는 힘껏 때렸더니 오케이 사
[who are you] 김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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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기대해왔다. 그가 성우로서 활약해주기를. 오늘에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종혁의 목소리엔 언제나 묘하게 로맨틱한 기운이 있었다고.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서인지 이종혁의 발성은 무척 안정적이고 그 울림엔 독특하고 무거운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최근 이종혁은 말 그대로 ‘포텐’이 터졌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맞춘 듯 어울렸던 쾌남 이정록을 연기한 덕분이다. 그전엔 아무리 이종혁이 코믹하거나 부드러운 역할을 맡았어도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늘 약간의 차가움을 느꼈었다고 기억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추노>에서 익히 보았던 그 어두운 얼굴을 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에 와서 이종혁은 비로소 또 하나의 새로운 얼굴을 찾은 듯했다. 한동안은 드라마에서 그를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종혁의 다음 작품들은 장르가 모두 제각각이다. 목소리 출연을 한 드림웍스의 3D애니메이션 <가디언즈>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
[이종혁] Mr.유쾌/상쾌/통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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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이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가 처음이라고? 의아해할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유해진은 <가디언즈>로 애니메이션 더빙 작업을 처음 경험했다. 느닷없이 착각이 작동했다면 십중팔구 <전우치>(2009)의 초랭이 때문일 것이다. “내레이션을 해본 적은 있다. 몇년 전에 다큐멘터리 <MBC 스페셜 공룡의 땅>에서 ‘나는 티라노 사우루스다∼’(웃음), 그 정도가 전부다.” 목소리 연기는 그야말로 ‘생초짜’라고 뒤로 물러서지만, 알고 보니 배우 유해진이 아니라 성우 유해진이 될 뻔한 전력도 있다. 캐묻다 보니 서울예술대학 재학 시절 한 방송사의 성우 시험에 응시한 기억도 털어놓는다. “친구들이 본다고 해서 따라갔다. 성우 하면 목소리가 낭랑하고 청아해야 한다고 생각하잖나. 내 목소리는 탁하니까 아예 기대도 안 했는데 합격은 못했어도 운 좋게 최종 면접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해도 <가디언즈>의 부활절 토끼 버니를 흔쾌히 받아들인 건 목소리 연기 자
[유해진] Mr. 판타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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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 피팅을 마치고 카메라 앞에 자리를 잡는 품새가 벌써 예사롭지 않다. 검은 오라를 풍기는 악령 피치의 이종혁과 촐랑 끼가 있는 부활절 토끼 버니 역의 유해진은 사진촬영 때만은 자못 점잖은 모습인 반면, 류승룡은 자신이 맡은 산타클로스 놀스를 스튜디오까지 끌고 온 듯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가디언즈>의 놀스는 우리가 흔히 봐왔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치고는 비주얼부터 좀 희한하다. 시꺼먼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운 똥배도 막강하고, 양팔에는 착한 아이들과 못된 아이들을 무려 문신으로 새겨놨다. 하지만 그 투박한 외피 안에 아주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들어있다. 그 정체를 놀스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마트로시카 인형을 가지고 친절하게 설명해 보인다. “내 겉모습은 이래, 그치? 몸집은 크고 우악스럽잖아. 하지만 자, 열어봐. 속마음은 아주 유쾌하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냐. 신비로운 구석도 있고 또
[류승룡] Mr.페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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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뭉쳤다. 전설에 대한 전설이라 할 만한 <가디언즈>는 산타클로스 놀스, 부활절 토끼 버니, 이빨 요정 투스, 꿈의 요정 샌드맨, 서리 요정 잭 프로스트, 다섯 수호신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내기 위해 악몽의 화신 피치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그중 놀스, 버니, 피치에 목소리를 빌려준 류승룡, 유해진, 이종혁을 만났다.
표지 촬영 당일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을 보는데, 목소리 캐스팅 전에 이미지 캐스팅이라도 거쳤나 싶었다. 사전정보 없이 누가 어느 캐릭터를 맡았는지 점칠 수 있을 만큼 높은 싱크로율이었다. 거기에 인터뷰를 더하니 그들의 필모그래피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더 많이 발견된다. 자기 목소리에 꼭 맞는 그림을 입은 그들 덕분에 <가디언즈> 한국어 더빙판은 보는 즐거움만큼 듣는 즐거움도 크다. 그 여운을 담아 여기 그들의 3인3색 더빙 체험기를 전한다.
[가디언즈] 세 남자의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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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다 바꾸겠다던 테크노 여전사, 영원히 소녀일 줄 알았던 이정현이 엄마가 되어 돌아왔다. <범죄소년>에서 그가 맡은 장효승은 33살의 미혼모다. 17살 때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한 뒤 아들이 3살 때 가출한 그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뒤, 그는 아들(서영주)이 소년원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간다. 처음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낀 그는 아들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들의 여자친구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혼모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데뷔작 <꽃잎>(1996), 공포영화 <하피>(2000)에서 보여준 강렬한 모습이나 <파란만장>(2011)의 무당은 잠깐 잊어도 좋다. 강이관 감독의 영화 속 인물이 그렇듯이 <범죄소년>의 이정현 역시 사실적이고 섬세한 연기를 펼쳐낸다.
-강이관 감독은 “실제 미혼모들의 연령대가 10대가 많아서 아들 역을 맡은 서영주 씨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았으면 좋
[이정현] 무당? 미혼모? 배우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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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 잭맨을 만났다. <가디언즈>의 부활절 토끼 버니의 목소리를 연기한 휴 잭맨을 인터뷰하기 위해 각국의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적 불문, 성별 불문, 나이 불문, 모두가 휴 잭맨에게 반했다. 30분 남짓 진행된 인터뷰가 끝나고 휴 잭맨이 자리를 뜨자 기자들은 ‘휴 잭맨은 진정한 나이스 가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까칠하고 인색하기 그지없는 기자들이 휴 잭맨에게 이렇게 호의적인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그는 모든 일에 성심성의를 다한다. 단적으로, 그에게 애니메이션 더빙은 단순히 캐릭터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히는 작업이 아니다. 실사영화를 찍듯 온전히 캐릭터 하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 잭맨은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모범 배우다. <가디언즈>는 두 아이를 둔 ‘아빠’ 휴 잭맨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아내 데보라 리 퍼니스와 아들 오스카 맥시밀리안, 딸 에바를 향한 마음
[휴 잭맨] 토끼가 된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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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2012 드라마 <메이퀸>
2012 영화 <도둑들> <범죄소년>
2011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
-축하한다. <범죄소년>으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수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책임감이 크다. 이제 오디션 보면 걱정부터 든다. “상 받은 배우니 이만큼은 해야지”라고 미리 생각하실까봐.
-첫 주연으로 쉽지 않은 연기였다. 소년원 수감, 미혼모 엄마의 갑작스런 등장, 여자친구와의 문제 등 파란만장한 ‘지구’의 상황을 표현해야 했다.
=편하게 해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니 주인공의 무게라는 게 상상 그 이상이더라. 강이관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하면서 조율해 나갔다. 지구는 다들 문제가 많은 학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반대로 최대한 평범한 학생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실제 소년원에서 촬영했다.
=한달 촬영 중 7회차 정도를 소년원에서 찍었
[who are you] 서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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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1985>(이하 <남영동>)가 상영된 직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는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참석해 무대에 올랐고, 그 옆에 함께했던 이경영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은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의 기록을 날짜별로 담아낸 작품이다. 박원상이 고문 피해자인 김종태, 이경영이 ‘장의사’로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김근태와 이근안이라는 실명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고문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김근태 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했고,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모두가 영화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종태는 박종철과 김근태이고
[남영동 1985] 거의 반 미친 채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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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뼛속까지 시인이겠지만, 김선우는 산문의 혁명적 힘을 믿는다. 글로 만났을 때만큼이나 발화되는 그녀의 언어는 명료하지만, 마치 책을 암송하듯 비문이 없는 문장 사이로 한숨이 섞일 때 웃음이 새어들 때 말은 말 이상의 울림을 갖는다. 읽는 이를 주먹 꼭 쥐고 울게 만드는 사랑이야기 <물의 연인들>은 그녀를 닮았다. 인터뷰를 위해 날 맑은 주말의 시내로 나가는 길, 전경들은 사신처럼 줄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닭장차 때문에 공연인지 집회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서울광장의 대낮 같은 조명으로부터는 앰프 소리만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아름다움을 믿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위해 김선우를 만나봐야 했다. 정말, 언어로 혁명이 가능합니까, 묻기 위해서.
Profile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다시, 사랑의 말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