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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 ‘남친’에게 차인 고3 하영(하지원)은 꿀꿀한 기분에 길 위의 콜라캔을 차버린다. 캔이 귀족 대학생 형준(김재원)이 몰던 외제차를 가격하리라곤 물론 예상 못한 일. 싸가지 없는 형준은 차 수리비로 300만원어치의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전대미문의 노비계약이 체결된다. 그 이후는 ‘싸가지’가 ‘내 사랑’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황당무계한 설정은 원작의 것이 아니다. 인터넷 소설 영화화 1호인 <내 사랑 싸가지>는 여고생과 대학생의 로맨스라는 뼈대 외엔 원작에서 빌린 살이 많지 않다. 사실 인터넷 하이틴로맨스의 참맛은 할리퀸 문고풍 소녀취향과 결별한 요즘 여고생들의 입담에 있다. 남자애들 비속어를 한아름의 이모티콘으로 귀엽게 버무리는 탈문법적 구어체는 순수문학의 작가적 ‘문체’에 아랑곳않는 넷세대의 ‘말맛’이다. 한데 바로 이 말맛이야말로 참으로 비영화적인 법. 그래서 영화는 대사를 가지치고, 한정된 시간 내의 드라마와 장르문법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평균을 밑도는 상투적 신데렐라 서사, <내 사랑 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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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어른이야”라고 느꼈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부모의 곁을 떠나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던 날? 내 값진 노동의 대가를 두둑한 지갑으로 치환받던 감격적인 순간? 그를, 그녀를 영원히 책임지고 싶었던 운명적인 모멘트? 혹은 숨도 같이 쉬기 싫었던 동료나 상사를 무던히 참아내게 된 인내력 업그레이드의 그날? 아니면 더이상 소시지부침이 아니라 버섯구이나, 더덕무침에 젓가락이 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정말 그때 당신은 어른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희열이란 동시에 우리가 한때 모두 거쳐왔던 소년, 소녀로서의 즐거움을 망각시키는 치명적인 독소를 품고 있다. 마치 피터팬과 뛰놀던 네버랜드에서의 기억을 접고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했던 웬디처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책과 연극과 영화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피터팬>은 성장을 거부한 채 네버랜드에서 살아가는 소년 피터팬과 도시에서
모든 어른들을 위한 슬픈 동화, <피터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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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의 북미 대륙. 부족 무당 타나나는 소년 키나이에게 토템 의식을 치러주며 삶의 징표로 ‘사랑’을 의미하는 곰의 토템을 건네준다. 내심 형들처럼 용감한 독수리나 늑대 같은 토템을 바라고 있던 키나이는 실망한다. 얼마 뒤 물고기 바구니를 훔쳐간 곰을 뒤쫓던 키나이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그뒤를 쫓던 큰형 시트카는 동생 대신 곰과 맞서다 죽음을 맞는다. 죄책감과 분노에 북받친 키나이는 곰의 토템을 내팽개친 채 끝끝내 형을 죽인 곰을 없애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 오로라의 형태를 한 정령들이 키나이를 곰으로 바꿔버린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둘째형 데나히는 동생마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곰에게 복수를 맹세한다. 자신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는 키나이는 길 잃은 아기 곰 코다와 함께 정령들을 만날 수 있는 산을 찾아 떠난다.
거의 확실하게 디즈니의 마지막 셀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될 <브라더 베어>는 스타일상의 놀라움과 내용상의 낯익은 진부함이라는, 디즈니가 최근 처한
참신함과 전통의 그늘 사이, <브라더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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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우삼의 흔적은 과거완료형이 된 듯하다. <페이스 오프>와 <미션 임파서블2>까지만 해도 ‘오우삼표’ 액션의 홍콩 키워드라 할 쌍권총이 수놓는 발레액션이나 슬로모션으로 펼쳐지는 비장미의 과잉이 곳곳에서 꿈틀거렸다. <페이첵>에 이르러선 서로의 얼굴에 총을 마주 겨눈 두 남자, 봉술 격투장면, 운명의 순간을 예고하며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가 간신히 오우삼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흰 비둘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환상의 존재로 나오는 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벤 애플렉은 촬영장에서 마냥 친절하고 평화로운 오우삼을 보고 “도대체 오우삼은 어디 있는 거야. 그 액션의 달인은 어디 간 거야”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했다). 오우삼은 할리우드에 부드럽게 안착하다 못해 아예 귀화를 작정한 것일까. 적어도 <페이첵>만 놓고 보면 오우삼은 질박한 개성보다 반질거리는 표준 공예품을 택한 장인처럼 보인다. <페이첵>은 오우삼만 잊으면 즐겁게 볼 수
오우삼만 잊으면 즐겁게 볼 수 있는 팝콘무비, <페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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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J. 심슨 사건이 종결된 뒤 미국 내에서는 사법제도에 대한 비판이 극심했다. 개인의 범죄를 인종차별로 부각시켜 무죄를 끌어낸 심슨 사건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비난과 함께 배심원 제도에 대한 논란도 가져왔다. 능숙한 변호사들의 ‘연기’에, 배심원들이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것이다. 한때 변호사 생활을 했던 존 그리샴은 미국 사법제도의 허점과 모순을 파고든 <타임 투 킬> <의뢰인> <야망의 함정> <레인메이커>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다. <런어웨이>에서는 미국 사법제도의 핵심인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을 다룬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는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시민은 배심원 명부에 오르고, 시민의 의무인 배심원에 선정되면 타당한 이유없이 거부할 수 없다. 권리와 의무, 모든 것을 지킬 때 진정한 시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관의 판단과 결정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판
법정 바깥의 배심원 쟁탈전, <런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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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스토리의 미덕은 등산과 하산이라는 고도(高度)의 추이가 인물의 긴장과 대구를 이룬다는 것에 있다. 집결과 등정, 추락과 극복, 정상에서의 절정과 하산을 갖춘 산행 스토리는 그 자체로 서사장르의 시간표를 내장하고 있다. ‘산 밑’의 이야기가 어떻던가와 상관없이 산에선 산에서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 안엔 산 밑에서 살던 자연인(the natural)을 영적인 존재로 주목하는 신화적 긴장감이 있다. 산악영화는 따라서 이종교배된 다른 장르가 무엇이던가에 상관없이 항상 ‘산악영화’라는 메타의 장르로 회자되는 구석이 있다.
산악드라마를 통과하는 인물들에게서 입체적인 유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내극의 좁다란 방 안에서도 납득할 만한 변화무쌍함을 가진 인물은 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 드라마가 인물에게 등반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단조롭다 못해, 편협하리만큼 집요하고 일관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들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헤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조여
조난당한 산악 드라마, <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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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고통이다. 상상 속에서 소년은 영웅이지만 거울에 비친 나는 한없이 초라하다. 그 불일치를 감당할 수 없기에 아프고, 아픔을 잊기 위해 더욱더 초인의 환상에 집착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시절의 기억으로 이뤄진 영화다. 1978년, 소년들의 영웅은 이소룡이었고 폭력은 매일 반복되는 일과였다. 선생님은 폭언과 구타를 가르쳤고, 학교는 권력의 발바닥을 핥았으며, 아이들은 주먹질로 그들만의 서열을 만들었다. 그때를 어떻게 견뎠던가? 가능한 유일한 길은 수컷이 되는 것이었다. 맞기 전에 선방을 날리고 모욕을 당하기 전에 욕설을 뱉어라. 불의에 맞서기 위해 남자가 돼야 했던 한 소년의 성장기, <말죽거리 잔혹사>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쓴 청춘에 대한 헌사와 흉포한 남성성의 근원을 파고드는 냉정한 고발이 나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다.
이 영화는 <비트>나 <친구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말죽거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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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사무라이>를 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임오군란을 겪는 이야기 같다”고 한다면, 엉뚱하긴 해도 얼토당토않은 강변은 아니다. 미국의 네이든 알그렌(톰 크루즈) 대위는 1876년의 일본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갑자기 뛰어들어 예기치 못한 모험을 겪는 ‘앨리스’다. 그리고 ‘앨리스’를 좌충우돌하게 만드는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구한말 임오군란과 닮은꼴이다. 구한말 찬밥신세로 떠밀리는 구식군대와 그들의 정치적 지도자는 개화파와 일본의 파트너십이 주도하는 정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결정타를 맞고 소멸해간다. 메이지 천황의 배후에서 실세 노릇을 하는 개화파에 반기를 든 ‘라스트 사무라이들’의 운명이 딱 그 신세다. 알그렌 대위가 앨리스와 결별하는 지점은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칼잡이들에게 감화감복돼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을 맞이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는다는 거다. 그가 겪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험은 자기 의지로 가속화된다.
알그렌은 어른이고 군인이며 알코올에 찌든 남자다. 그는 폐부 깊
생존의 스타일화, <라스트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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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는 언제까지 희화화를 위한 소재로 쓰일 것인가. 혹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의지없는 생이 펼쳐질 때 누군들 당혹스럽지 않을까.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백두’(정준호)와 ‘동해’(공형진) 또한 그렇다. 이들의 죄라곤 만취한 상태에서 해일을 만나 남한의 피서지로 쓸려왔다는 것뿐. 어떻게든 북으로 돌아가야 할 이들 앞에 놓인 길은 험한 장벽투성이, 천신만고다. 남북이라는 소재를 끌어왔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광복절특사>를 연상케 한다. 어렵사리 탈옥했지만 어떻게든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두 청년의 아둥바둥이 기를 쓰고 북조선으로 유턴하려는 두 군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잠깐. 여기서 <간첩 리철진>을 돌이켜보자. 막중한 임무를 진 남파간첩은 택시강도에게 봉변을 당하고, 외려 한몫 보겠다고 어수룩한 사내를 후려친 남한 강도들은 간첩으로 몰린다. 군 생활 도중 졸지에 남파간첩 꼴이 된 동해와 백두는 어떤가. 제발로
남북관계의 반복적 희화화, <동해물과 백두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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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수스의 판타지 월드는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일까. 마이크 마이어스의 눈요깃감 코믹 연기와 색채 감각에만 집중할 것.
집에서 열리는 리셉션 준비에 한창인 엄마(켈리 프레스턴)는 걱정이 태산이다. 때맞춰 회사에서 급한 호출이 오고, 불안한 엄마는 어린 두 남매 샐리(다코타 패닝)와 콘래드(스펜서 브레슬린)에게 거실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오고, 베이비시터 할머니는 잠들어버렸고, 할 일이 없는 남매는 너무너무 심심하다. 마술 모자를 쓴 커다란 고양이(마이크 마이어스) 한 마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커머셜리즘을 극도로 경계했던 닥터 수스의 유명한 동화 <그린치가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가 짐 캐리 주연의 영화로 개봉됐을 때 쏟아졌던 혹평들은 대부분 닥터 수스의 핵심을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누구나 환호할 법한 판타지와 고도의 심술궂은 유머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던 닥터 수스의 ‘간결한’ 작품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의 즐거움, <더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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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시대 파리 젊은이, 바르셀로나의 ‘잡탕’아파트에서 길을 찾다.
당신의 국적은 무엇입니까? 현재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이 질문은 조금 곤란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맥도널드의 가격표가 ‘마르크’나 ‘리라’가 아닌 ‘유로’로 바뀐 이후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세대들에겐 더욱더.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응시하던 프랑스 젊은이 자비에는 ‘성공하려면 떠나라’는 아버지 친구의 충고에 따라 스페인으로 1년간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와 이혼한 부모 곁을 떠나 처음 생소한 나라에 발을 디딘 자비에의 앞길은 의외로 막막하다. 엄마가 소개해준 집은 그가 머무르기엔 사정이 있고 더듬거리는 스페인어로 찾아간 숙소들은 높은 가격에 비해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결국 자비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공동으로 기거하는 아파트를 찾게 되고 “5년 뒤 자신의 모습을 말한다면?” 같은 엉뚱하고 심오한 질문을 통과한 뒤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한 여자와 이웃들의
유럽공동체시대 젊은이들의 제자리 찾기,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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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를 주름잡는 스노보더가 되어보거나 스위스의 그림 같은 휴양도시를 눈요기하거나.
“죽음은… 생각해본 적 없어, 천국에 가면 눈이 없으니까.”
스노보드 최고의 챔피언 조쉬(그레고리 콜린)가 연인 에텔(줄리엣 고도)에게 한 말은 진심일 것이다.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혀서야 어떻게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설원에 몸을 내던질 수 있을까. 정작 그가 뿌리치지 못하는 건 최고의 스노보더라는 명예와 그 명예가 동반시켜준 ‘부티’나는 삶이다. 추락 직전에 처한 조쉬는 어떻게든 그걸 연장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가 스크린에 모습을 보이는 처음 순간부터 왜 폭력을 행사하는지 따져 묻지 말자. 조쉬를 영웅처럼 떠받들며 프로페셔널 스노보더가 되길 꿈꾸는 가스파(니콜라스 뒤보셸)는 이런 조쉬의 먹잇감이 된다. 조쉬는 가스파를 자기 팀으로 끌어들여 실력을 전수해주고는 스노보딩 챔피언 결승전에 자신을 대리해 위장출전시키려고 한다. 조쉬는 가스파를 옭아매기 위해 연인 에텔을 이용하는 ‘미인계’까지 동원한다.
알프스의 계절 액션 스릴러,<스노우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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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니툰 캐릭터들과 조 단테의 요란한 랑데부, B급영화의 감수성이 하이 컬처와 메이저 스튜디오의 한복판에서 살아숨쉰다!
얄미운 생쥐 제리보다는 영 운이 따라주지 않는 고양이 톰쪽에, 혹은 카나리아 트위티보다는 고양이 실베스터쪽에, 예의바르고 사랑스러운 미키 마우스보다는 도날드 덕이나 구피쪽에 감정이입을 했던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벅스 버니의 팬 층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죠. 하지만 검은 오리 대피의 팬 층은 오로지 루저들밖에 없다구요!”라는 워너 간부 케이트(제나 엘프먼)의 혹독한 발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대피의 심정을. 언제나 버니 대신 사냥꾼 엘모어의 총에 맞아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2인자, 자신감을 되찾고 싶은 검은 오리의 절규를. 그리고 대피가 결국은 인류를 원숭이로 만들어버리려는 악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될 것이다. 루저들이여, 단결하라!
결국 인기 만점의 벅스 버니만을 남겨두겠다는 워너쪽 결정에 따라 쫓겨난 대피는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영화적 상상력, <루니툰 : 백 인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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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과욕의 승부사’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다시 다듬어 내놓은 <해안선>.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은 숲을 가로질러 빠르게 이동하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바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내려온 북한특수부대원들이다. 그 시간 월북한 ‘빨갱이’ 아버지를 둔 주인공 인찬은 누군가를 칼로 살해한 뒤 쫓기는 중이다. <실미도>의 오프닝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이 두개의 사건을 서로 병치시켜 보여준다. 아주 상투적이기 짝이 없지만 그런대로 효과적인 교차편집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 <실미도>의 이 이상한 오프닝은 영화 전체를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이어 우리는 남파된 북한특수부대원들이 달성하지 못한 목적이 그 방향을 바꾸어 삼류인생 인찬의 간절한 소망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따라서 <실미도> 오프닝에 묘사된 침투장면은 인찬이 끝내 이루지 못할 그 기괴한 소망- 주석궁에
국가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숨바꼭질,<실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