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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사회는, 바닥을 쓸어 한줌의 긍지도 건지기 힘든 수렁이었다. 그 수렁이 오죽 어둡고 깊었으면 독일인들이 재건의 희망을 다시 움켜쥔 일을 가리켜 세상은 ‘기적’이라는 격앙된 표현을 썼다. <베른의 기적>은 독일이 경험한 첫 번째 ‘리바운드’의 순간을 포착한다. 1954년 스위스 베른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거둔 승리가 독일인들을 어떻게 위무했는가를, 축구에 반한 광산촌 소년 마티아스(루이스 클람로스)와 그 아버지(피터 로마이어)를 통해 들려준다.
11년간 러시아에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다 귀향한 아버지와 올해 열한살 난 막내아들은 초면이다. 가장의 생환은 반갑지만 가족은 이미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다. 전쟁 노이로제로 갱에도 적응 못하고, 자식들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울음 같은 분노를 터뜨린다. 막내 마티아스에게 아빠를 대신하는 ‘대장’은 지역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된 축구선수 헬무트. 몇 차례의 어긋남 끝에 축구로 의기투합한 부
독일이 경험한 첫번째 ‘리바운드’의 순간, <베른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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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좀 기이한 마블 코믹스 출신의 슈퍼히어로가 있다. 기껏해야 FBI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과 퇴직금을 쏟아부어 장만한 것에 틀림없는 총기들 정도가 유일한 그의 ‘히어로 아이템’이랄까. 전신착용의 섹시 커스튬과 초인간적 능력도 지니지 못한 퍼니셔가 동종업계 경쟁자들(스파이더 맨, 엑스맨, 슈퍼맨 등) 못지않은 인기를 북미지역에서 누려온 것은 바로 그 슈퍼히어로답지 않은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었을 테다.
퍼니셔라는 슈퍼히어로의 탄생비화는 가히 코믹스판 <복수는 나의 것>이라 할 만하다. FBI 요원 ‘프랭크 캐슬’(톰 제인)은 총기밀매조직 소탕작전 중에 사악한 거부 하워드 세인트(존 트래볼타)의 아들을 죽게 만들고, 분노한 하워드 세인트의 손에 프랭크의 가족은 처참하게 몰살당한다. 그리고 프랭크는 복수에 불타는 퍼니셔(응징자)로 거듭난다. <배트맨>에서도 그러했듯이 ‘복수’란 원래 평범한 남자가 슈퍼히어로로 거듭나는 오랜 마블 코믹스의 법칙 중 하나였다.
그
가장 어두운 슈퍼히어로 복수극, <퍼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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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이상 장이모에게 예술가 운운하면서 시비를 거는 것은 시체를 붙잡고 대화를 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적어도 <영웅>이나 <연인>과 같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상업영화에 있어서는 그렇다. 장이모를 놀리려는 말이 아니라, <영웅>을 제외하곤 장이모의 전작들의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연인>을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직 상업성을 목적으로 했으므로 그 상업적 퀄리티, 즉 얼마나 관객을 두 시간 동안 쾌감의 혼수상태로 몰아넣느냐를 질문할 필요만이 있어 보인다.
때는 당조, 서기 859년. 화려했던 시절을 지나 쇠퇴기에 접어든 세상. 난세를 맞아 곳곳에서 반란의 세력들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가 ‘비도문’이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관군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어도 그들의 세력은 더욱더 강화된다. 관에서 일하는 진(금성무)과 리우(유덕화)는 인근 유곽에 새로 나타난 기녀가 비도문의 일원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덫을 놓는다. 그렇게 그들은 아름다운,
이미지적 쾌감의 혼수 상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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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학교가 학문만 가르치는 곳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 교육이 아니라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일일진대 때로 아이들은 생존하고 군림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음모와 협잡도 불사한다. 너무 하드보일드하다고? 어느 사회가, 어느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십대 소녀들의 일상을 좌우하는 그 엄혹한 생존 법칙을 소개한, 매우 우습고도 신랄한 코미디다.
동물학자인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케이디(린제이 로한)는 미국으로 건너와 한 고등학교에 편입한다. 끼리끼리 패거리를 이룬 그곳에서 케이디는 아웃사이더 리지와 친구가 되고, 그의 제안에 따라 학교 퀸카 레지나(레이첼 맥애덤스)에게 접근해 약점을 캐내려 한다. 레지나의 옛 남자친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한 케이디는 어느새 레지나를 능가하는 권모술수의 달인이 돼버리고, 권력 구도에 일대 변화를 일으킨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선의와 진심으로
십대 소녀들의 생존 법칙, <퀸카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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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중산층 가정을 이룬 던칸 부부(그렉 키니어, 레베카 로민 스테이모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친다. 하나뿐인 여덟살짜리 아들 ‘아담’(카메론 브라이트)이 불의의 사고로 숨진 것. 부부는 절망에 빠지고 때마침 산부인과 의사인 리차드(로버트 드 니로)가 나타나 죽은 아담을 살려낼 수 있는 유전자 복제를 제안한다. 부부는 갈등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고 결국 아담과 똑 닮은 또 한명의 아담을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여덟 번째 생일을 기점으로 아이는 환영에 시달리며 아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위협적인 눈빛과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억에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는 던칸 부부에게까지 확산된다. 가정의 평온함이 점차 균열되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던칸 부부는 결국 리차드를 의심하게 된다.
‘완벽한 가족’의 허상을 파헤치기에 공포물만큼 적격인 장르는 없다. 더구나 그 중심에 아이의 광기나 죽음을 위치시킬 경우 가족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된다. <아카시아>
완벽한 가족의 허상, <갓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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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화장실이 시끌벅적하다. 여고생 애란(채민서)이 옷을 풀어헤치고 용을 쓴다. 그의 친구 순미(이영자)가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이윽고 애란의 몸을 빠져나온 아기가 학교 유리창을 부수고 튀어나와 아톰처럼 하늘로 둥실 날아오른다. 물론 CG다. 조악한 장면이지만 꽤 공격적인 서두다.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아버렸다는 ‘소녀괴담’을 어떠한 비난의 느낌도 담지 않고 재현해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당찬 여고생은 갓난아기를 퀵서비스로 아빠에게 배달시킨다. 역시 고교생인 아빠 철수(정웅인)는 수업 중에 난데없이 아기 바구니를 받아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처하다. 흥미로운 상상력이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까지다. 퀵서비스 아저씨(조형기)의 일장 훈시부터 불길했다. 수업하던 교사의 입을 닥치게 한 그가 철수의 무책임한 연애 행각에 대해 혼구멍을 낸다. 이제부터 상상력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높이로 갑자기 추락하고, 욕설과 폭력으로 누군가를 깔아뭉개야 웃길 수 있다는 가학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신파조 재회 이야기, <돈텔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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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의 메가톤급 시리즈들이 종료되면서 잠시 소재 고갈의 위기에 놓인 할리우드에서 내놓은 최근의 인기 방안은 대략 쓸 만한 히트작 뒤늦게 속편 내기 또는 아예 검증된 히트 시리즈 잡종 교배 이렇게 정리되는 것 같다. 전자의 경우가 무려 16년 만에 돌아온 <더티 댄싱: 하바나 나이트>이고 후자의 경우가 <프레디 vs 제이슨>이다. 아마 슈퍼맨과 배트맨도 랑데부를 벌일 모양이라니 확실히 소재 부양 대책이 절실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기획이 반 이상 먹고들어가는 상황이고 보면, 감독이 할 바란 고작 말도 안 되고 뻔뻔한 기획을 어떻게 말이 되게, 그리고 덜 민망하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정도이다. 게다가 예산까지 조금 손에 쥐어주고 러닝타임까지 간출하라는 오더까지 있다면 그 자율성의 여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대로 <에이리언 vs 프레데터>(이하 〈AvP>)는 단지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하면 누가 더 빠를까?
비디오게임의 용도변경 상품, <에이리언vs프레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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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왔어, 언제 나갈 거야.” 전과 4범에다 살인미수 혐의로 3년 동안 교도소에 다녀온 딸에게 아버지는 매몰차다. 전직 경찰이라는 점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그 딸을 반길 리 만무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늦둥이 동생 정환(박지빈)을 보러 집에 들렀을 뿐인 딸 또한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그의 기억 속 아버지는 만날 취한 채 엄마를 구타했던 존재일 뿐이다. 부녀는 감정의 상승작용을 통해 서로에 대한 미움을 높이 쌓아올려왔다. 그렇게 홀아비 주석(주현)과 딸 정은(수애)은 서로의 본심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영영 남이 돼버릴 수도 있었다. 정은이 예전 몸담았던 조직의 보스가 훔쳐간 돈을 내놓으라며 정은과 아버지를 괴롭히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숨겨뒀던 속마음을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족>은 제목마따나 주제를 향해 직구로 정면승부하는 영화다. 머리가 커진 뒤로 내내 아버지를 증오해왔던 딸이 자신을 던져서라도 딸의 미래를 지켜주려는 아버지
그 떨칠 수 없는 사랑의 쇠사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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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왼쪽 어깨 너머로 당신을 바라본다. 옷은 국적을 알 수 없고, 머리에는 귀부인도 하녀도 아닌 여자들이 그랬듯이 천을 두르고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소녀를 휘도는 모든 빛을 그러모아 매듭짓는 저 진주 귀걸이는 어디에서 났을까? 보이지 않는 귀에도 진주는 걸려 있을까? 지금 그녀는 웃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일까?
베일에 싸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소녀는 어떤 가설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수많은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미소짓는 데에 성공한다. 이미지는 자기를 해명하지 않는다. 변명도 소명도 하지 않는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쓴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그 일을 문학의 몫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어린 하녀와 화가 사이의 드라마를 말없이 남겨진 초상화의 세부로부터 거꾸로 추리했다. 놀라운 시도는 아니다. 언제나 왼쪽 창에서 스며드는 백포도주 같은 햇빛과 문
예술과 사랑의 비밀을 누설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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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홍콩에서 개봉한 뒤 큰 호응을 이끌어낸 애니메이션 <맥덜>은 2편 <맥덜: 파인애플 빵의 왕자>의 제작과 3편 <맥덜: 우당>을 기획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현재는 텔레비젼 교육용 프로그램을 준비 중일 정도로 홍콩에서 인기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 <맥덜>은 우선 귀여운 애니메이션이다.
돼지의 모습을 갖춘 주인공들은 징그럽기보다는 충분히 호감이 갈 만한 표정들을 보여준다. 몇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으며, 둔하고 바보 같지만 착한 아들 맥덜과 억척스럽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엄마 맥빙 여사, 이 모자를 중심으로 재치있는 에피소드들을 선보인다. 한 가지 느낌만으로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감성의 전달을 시도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맥덜>이 보여주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영민한 아이에게 보여주기에는 잔인한 구석까지 갖춘 애니메이션이다(<맥덜>의 등급은 전체 관람가이다). 물
귀여운 부조리 애니메이션, <맥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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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곤 감독의 전작 <꽃섬>의 여인은 꽃섬이 “모든 슬픔과 불행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거미숲>의 여인은 거미숲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영혼이 갇혀 있는 곳”이라고 일러준다.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나중 지닌 것. 그것이 돌아가 거하는 장소를 송일곤 감독은 여전히 찾아 헤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섬과 그 숲을, 실제의 장소가 아닌 머릿속에 존재하는 메타포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살인 미스터리를 표방한 <거미숲>에서 거미숲은 엄연히 끔찍한 범죄의 현장이기도 하다. 꽃섬은 세 여인의 순례길 끝의 신기루 같은 공간이었으나, <거미숲>은 처음부터 끝까지 숲을 벗어나려는 또는 숲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며 그래서 영화는 내내 ‘숲속에’ 있다(이하 기사는 스포일러로 간주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합니다).
“15분 안에 객석의 주의를 사로잡고 싶었다”는 송일곤 감독은 관객의 얼굴에 페인트를 끼얹듯 <거미숲>을 시작한다. 한
구원을 묻는 살인 미스터리, <거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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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두목에게 배신을 당한 뒤, 그의 돈을 가로채다 경찰에 체포된 루비(장 르노)는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수차례 감옥을 들락거리며 감옥 동료들을 쉴새없는 수다로 괴롭히는 퀀틴(제라르 드파르디외)에게 침묵이란 없다. 루비를 통해 갱단의 비밀을 밝히려는 경찰은 퀀틴의 수다로 루비의 침묵을 깨려 한다. 그러나 루비는 묵묵히 듣기만 하고 퀀틴은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고 믿는다. 루비를 향한 퀀틴의 애정 공세는 나날이 심해지고 이와 함께 루비의 탈옥 계획도 진행된다. 루비의 계획이 성공하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퀀틴으로 상황은 엉뚱하게 흘러가고 예상치 못한 둘의 탈주극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간판 배우 장 르노와 제라르 드파르디외, 그리고 코믹 도주극의 전문가 프란시스 베버가 뭉쳤다. 프란시스 베버의 전작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우연하게 벌어지는 상황들의 코믹함과 범죄자들간의 인간적인 교감이라는 두 줄기가 맞물리며 진행된다. 게다가 지나
자유 대신 친구를 찾아가는 따스한 버디영화, <셧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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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과 배트맨이, 원더우먼과 캣우먼이, 뤼팽과 홈스가 한 작품 속에서 대결한다면 누가 이길까? 팬들이 원하는 바대로 원작을 비틀거나 전혀 다른 식으로 내용을 전개시키는 팬픽(fan fiction)은, 대중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투사되는 인터랙티브한 소통의 가장 명징한 예로서 자유분방한 패러디와 카니발적 특징을 자주 보여준다. 그렇다면 80년대 슬래셔 공포영화의 쌍두마차인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와 시리즈의 제이슨이 함께 등장하는 팬픽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버렸던, 슬래셔 자체의 장르적 특징보다는 바로 그 환상적인 면모 때문에 암묵적인 공포를 확산시켰던 프레디, 그리고 공포영화 속 익숙한 주인공으로 ‘소외된 이의 분노’를 체현하는 존재인 하키 마스크맨 제이슨. 꿈의 지배자와 현실의 지배자가 한 공간에 존재할 때 공포는 배가 될 것이라는, 단순한 양의 합산에 의거한 상상으로 팬픽을 써내려간다면?
유감스럽게도 로니 우(<백발마녀전&
이 세상으로의 귀환을 꿈꾸는 살인마들, <프레디 vs 제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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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와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유디트라는 여인이 있다. 구약성서 외경에는 이스라엘의 과부였던 그녀가 침략자인 신바빌론의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하여 목을 벤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르네상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영웅’ 유디트를 화폭에 담았다. 그중에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바로크 시대의 여류화가도 있다.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친구에게 강간을 당하고 원치 않은 결혼을 하는 등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유디트는 ‘영웅’보다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살아 있는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나쁜 남자’에 대한 복수와 증오가 선연히 드러난다. <프리즈미>는 아르테미시아의 불행했던 삶과 유디트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듯한 복수극이다.
눈오는 밤 불량배들에게 여주인공 치히로는 윤간을 당한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 도쿄로 와서 직장생활을 한 지도 5년이 흘렀다. 남자친구인 노가미와 결혼을 앞둔 치히로. 출근을 서두르던 아침, 5년 전 그녀에
섹스와 폭력으로 가득 찬 냉장고, <프리즈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