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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매퀸과 알리 맥그로의 도주는 관능적이었다. 조직과 경찰 양쪽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며 풍기는 범죄적 남녀의 땀내음이나, 도시에서 황량한 국경지대로 바뀌는 도주로 자체가 그랬다. 도주하는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틈조차 끈적거렸다. 샘 페킨파의 <겟어웨이>(1972)가 빚어낸 도주의 관능을 킴 베이싱어와 알렉 볼드윈의 <겟어웨이>(1994)가 부활시키려는 건 역시 무모한 시도였다. 배우의 느낌으로 치자면 <아일랜드>의 이완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슨이 좀더 근접해 보이나 이번에는 감독의 세공이 걸린다. 배타적인 아메리칸 시네마의 기수 마이클 베이는 사막에서 도시로 탈출 경로를 뒤바꾸고, 금지됐던 섹스의 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며, 남녀를 쫓는 악당과 경찰의 무장력을 한층 높였지만 그냥 모듬상을 차린 듯하다.
모듬은 눈을 유혹하지만 신선도를 의심받곤 한다. <아일랜드>가 <겟어웨이>의 리메이크는 아니지만 <겟어웨이>
미래를 바라보는 회의어린 시선,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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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디지털 삼인삼색’, 그 여섯 번째 프로젝트를 완성한 감독들은 쓰카모토 신야, 송일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다. 쓰카모토 신야는 전매특허에 가까운 신체의 상상력으로 재장전했고, 송일곤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즐기며 연극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정글을 배경으로 이미지의 편린들을 모아서 영화 안 세계와 영화 바깥 세계를 공존시킨다. 극장에서의 상영 순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의 욕망>, 쓰카모토 신야의 <혼몽>, 송일곤의 <마법사(들)>이지만, 여기서의 소개순서는 <혼몽> <마법사(들)> <세계의 욕망>으로 한다.
<혼몽>.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남자는 좁은 몇뼘 간격의 벽 사이에 갇혀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뿐 아니라, 왜 거기 그렇게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혼몽>은 영화의 주인공인 벽 속에 갇힌
디지털영화의 가능성, <디지털 삼인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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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동안 몸을 사릴 줄 모르는 <엔터 더 이글>은 분명 홍콩 액션물의 적자다. 동유럽까지 찾아가 평원에서 고산까지 가리지 않고 쿵후 액션을 심어놓은 <엔터 더 이글>은 홍콩영화계를 대표해서 실종된 액션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프로페셔널 대도와 킬러, 소매치기 커플, 보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적과 동료가 바뀌면서 박물관에서 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비행선으로 럭비공마냥 옮겨지는 다이아몬드를 쫓는 이들의 사투 장면이 뿜어내는 스피드의 매력은 홍콩 액션을 한물간 장르라고 싸잡아 폄하하기엔 망설여질 만큼 눈길을 잡아챈다.
문제는 점차 상승하는 액션의 강도와 바뀌는 인물들의 동선을 뒷받침할 만한 동기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끼어 있는 멜로와 코믹적 요소가 후반부의 다이아몬드 대신 돌연 복수를 외치는 인물들의 감정까지 감당하진 못한다. 폭발 직전 비행선에서 피범벅된 얼굴을 한 채 태연히 담배를 무
동유럽까지 찾아가 쿵후 액션을 심어놓다, <엔터 더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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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힉스의 야심은 장대했다. <샤인>으로 선댄스를 시끄럽게 했던 감독은 차기작 <삼나무에 내리는 눈>에다 여러 장르를 비벼넣는다. 살인사건을 던져놓고 그 비밀을 풀어가는 걸 보면 미스터리이고, 법정에 선 무고한 혐의자 가츠오가 가까스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놓고보면 법정드라마다. 이쉬마엘과 하츠오의 가슴 저릿한 로맨스가 그려지는가 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의 수난사가 또 그 사이를 비집는다. 이렇게 방대하고 산만한 이야기들을 스콧 힉스는 이미지로 엮어낸다. 이쉬마엘이 겪은 2차대전의 참상이나 일본인의 수난사가 몇개의 장면으로 요약 발췌된다. 말하자면 감독은 짧은 이미지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다.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촬영은 오랫동안 올리버 스톤과 작업했던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의 솜씨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가 영화의 거의 전부가 돼버렸다는 데 있다. 방만한 이야기는 하나로 묶이지 못한 채 제 갈
알맹이 없는 방만한 이야기, <삼나무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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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간 돼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꼬마돼지 베이브2>는 원제 그대로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돼지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숙명(?)을 벗어나 양치기 돼지로 색다른 존재가치를 발견해가는 전편을 전제로 하되, 재탕에 그치기 쉬운 속편의 우를 피해가려 고심한 산물이랄까. 농장에서 도시로 무대를 옮긴 속편은 순박한 시골뜨기의 수난기에 가깝다. 양치기는 물론 돼지도 드문 살풍경한 도시에 간 베이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 동물들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수난기의 시작은 공항. 마약 단속견이 짖는 바람에 붙잡힌 베이브 일행은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졸지에 도시의 미아가 된 베이브와 하겟 부인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심가, 동물 사절인 대부분의 숙소를 지나 겨우 허름한 호텔에 안착한다. 동물에 후한 여주인 덕에 쉴 곳은 찾았지만 앞일은 막막하다. 어릿광대 주인을 둔 오랑우탄과 침팬지, 떠돌이 개와 고양이 등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든 동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 <꼬마돼지 베이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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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동심을 받쳐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어우러져 1940년대 말 일본 시골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물론 이 시대는 동아시아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힘겹게 살던 시기였다. 영화 초반부는 짐마 할아버지가 ‘맥아더 장군’을 원망하는 대사나 쌍둥이의 급우인 하쯔미의 가난한 삶을 통해 그러한 역사의 단편을 들춰내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아이들의 삶이다. 영화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짐마 할아버지의 죽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족의 삶, 쌍둥이가 겪어야 했던 질병과 온갖 말썽들 그리고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찍기의 미학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과장되지 않게 동심의 세계를 전해준다.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일본 특유의 설정들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 같은 세 할머니의 등장이나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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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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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 <사무라이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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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
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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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경찰>에서 정작 즐거운 사람은 경찰 롤랜드 샤프(토미 리 존스)가 아니라 치어리더인 여학생들이다. 위험에 처한 그들은 언제나 웃고 떠든다. 반대로 ‘정의의 수호자’인 샤프의 얼굴은 항상 굳어 있다. 원하는 것이 명쾌한 소녀들과 달리 샤프는 범인 검거, 아이들의 보호, 딸에 대한 그리움 등 세상사의 고민 앞에서 갈팡질팡한다.
악당 코플랜드 사건의 중요한 증인인 모건 볼을 뒤쫓는 텍사스 경찰 롤란드 샤프. 그 과정에서 동료 엘렌이 총에 맞는다. 모건 볼은 다른 킬러한테 살해되고 그 광경을 다섯명의 여학생이 목격한다. 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앤, 이비, 헤더, 테레사, 바바라는 치어리더다. 경찰서로 불려온 아이들은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보고 외모를 평가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후 샤프는 여학생들과 ‘합숙’하며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그는 치어리더팀의 교사로 학교에 위장전입한다. 이혼한 샤프에게는 딸 엠마가 있다. 엠마와 비슷한 또래인 아이들은 그런 샤프를 장난감
텍사스 레인저와 치어리더가 만나다, <즐거운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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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방 몰래카메라의 한 장면. 뿌연 실루엣으로 보이는 남녀의 뒤편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연히 이 몰카를 손에 넣게 된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는 혼령이 되어 여관방을 맴도는 남자의 사연을 파헤친다. 남녀의 대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힌트 삼아 여관의 위치를 추적하고, 여관 건물 주인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제작진은, 20여년 전 부산에서 발생한 장남의 일가족 살해사건과 몰카 속 혼령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폐가가 된 당시의 사건현장을 탐색하고, 살해된 막내딸의 친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무속인, 음향전문가, 아동심리학자 등 십여명의 관계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들은 서서히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간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화자의 입담에 따라 그 재미가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경험,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직접 겪은 생생한 일화가 지지부진한 일상으로 둔갑할 수도 있고, 사돈의 팔촌이 전한 뻔한 소문이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만들
맛깔스런 호러다큐멘터리, <목두기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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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와 설정만 놓고 보면, 한국영화의 시대극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 갑옷 두르고 수염 기른 근엄한 장군들의 입에서 사투리와 욕지기가 터져나오고(<황산벌>), 정숙과 순결의 규방에서 불그스름한 욕정의 게임들이 버젓이 벌어지고(<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급기야 <천군>에선 성웅 이순신마저 물욕에 사로잡힌 방탕한 사내로 그려진다. “현대의 남북한 군인들이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이순신 장군 만들기에 동참한다”는 줄거리의 <천군>은 시치미 뚝 떼고 엉뚱한 상상력을 피워 올린 한국판 <백 투 더 퓨처>다.
북한장교 강민길(김승우)은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한 핵무기 비격진천뢰가 미국쪽에 양도되자 불만을 품고 비격진천뢰를 탈취한다. 남한 핵물리학자 김수연을 인질로 삼고 도주한 강민길을 잡기 위해 남한장교 박정우(황정민)가 투입된다. 마침 433년 만에 한반도 상공에 거대한 혜성이 지나고, 압록강 유역에서 대치하던 이들은 갑작스런
남북한 군인들의 이순신 장군 만들기, <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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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는 뉴요커(New-Yorker: 뉴욕에 사는 사람)에 대한 영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없는 거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전형적 인물으로서의 뉴요커에 대한 영화다. 네 마리의 동물 캐릭터들, 사자 알렉스(벤 스틸러), 얼룩말 마티(크리스 록), 기린 멜먼(데이비드 시머), 하마 글로리아(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하릴없는 뉴욕의 예찬자들. 심지어 몇몇 대사들은 뉴욕중독증 환자들이 주연인 <섹스&시티>의 대사들(“누군가가 뉴욕을 떠나는 걸 볼 때마다 항상 놀라워. 내 말은, 대체 여기 말고 어디 가서 살 수 있냐고?”-사만사-)에서 따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뉴욕이 갑갑해지기 시작한다면?
<마다가스카>의 이야기가 그들의 탈출욕구에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우디 앨런조차도 일시적인 일탈을 꿈꾸지 않았는가. 결국 얼룩말 마티는 남극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사이코 펭귄갱단에 감화되어 ‘야생’을 찾아
네 마리 뉴요커 동물들의 뉴욕 귀환 프로젝트, <마다가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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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시리즈는 괴담 아래에 애(愛)와 애(哀) 두 가지 정서를 포개어두었다. 점프컷으로 튀어오르는 원혼과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소녀의 눈동자를 헤치면, 기름 먹인 스트레싱 페이퍼 밑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글자와도 같던, 사랑과 슬픔이 새어나오곤 했다. 사자(死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어린 영혼들. 혼자서 죽어간 그 아이들은 생과 사를 가르는 심연을 거부하면서 그저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고 싶다고 아이다운 고집을 세운다. 그 고집은 산 자에겐 공포가 되고, 죽은 자에겐 올가미가 될 뿐이다. 죽은 이는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냉정한 목소리도 아이들이 울먹이면서 저승으로 떠나는 <여고괴담>의 끝자락에 성불이나 해피엔드라는 무심한 내레이션을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노래 연습을 하던 여고생 영언(김옥빈)은 누군가 자신의 노래에 화음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언은 그 목소리로부터 달아나려고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악보
소녀들의 절박한 목소리, <여고괴담4: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