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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 탓인지 수맥 탓인지 몰라도 남해 물건리는 고독한 중년과 노년으로 북적인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고독하다기보다 낙이 없다. 결혼을 회피하는 노총각 동생 중범(박영규)과 단둘이 사는 타조 농장주인 배중달(주현)도, 자식에게 외면당하고 혼자 살며 중달과의 멱살잡이로 소일하는 허풍선이 조진봉(김무생)도, 어린 손녀 하나 바라보며 배를 모는 필국(송재호)도, 중범을 짝사랑하는 이혼녀 순아(진희경)도 사는 게 적막하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중증 건망증 탓에 도통 소통이 안 되는 구멍가게 주인 찬경(양택조)과 그의 아내(이주실)의 생활 역시 진봉과 중달의 싸움을 말리는 일 외에는 별 이벤트가 없다. 이처럼 심심한 마을에 일대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미모의 서울내기 송인주 여사(선우용녀)의 방문. 그러나 속내를 알고 보면 인주 역시 자식들도 편들어주지 않는 황혼 이혼을 결행한 쓸쓸한 처지다. 게다가 위자료로 남편에게 받은 섬의 실상이 손바닥만한 암초라는 사실을 발견하자 낙담한 인주
마음을 느슨히 풀고 보는 한가로운 마당놀이, <고독이 몸부림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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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은 김동원 감독이 10년 동안 찍은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비전향 장기수 두 사람을 봉천동으로 데려오자는 한 신부의 부탁을 받아들여 습관처럼 카메라를 챙겨 나간 것이 질긴 인연의 시작이 됐다. 조창손, 김석형 두 비전향 장기수가 머물고 있다는 대전의 한 요양원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신부에게서 ‘그들이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라는 귀띔을 전해 듣고서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했다는 그는 봉천동에 정착한 뒤로 이질적인 체제 아래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빠짐없이 담는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들은 좀처럼 카메라에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남파 당시의 상황을 묻는 질문에는 그들은 “그것까지는 물을 필요없습니다. 그런 정도로만 아시고”라고 고개를 젓거나 “뭐 그런 소리를 담아. 그러다간 큰일나지”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렇다고 <송환>이 변죽만 울리다 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카메라를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단 며칠 아니 몇
시대와 이념에 거세당했던 인간들에 대한 진심어린 고백, <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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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젤 워싱턴이 돌아왔다, 고 말하기엔 그는 꽤나 자주 돌아온다. 달리 보면 해마다 한두번씩 스크린을 방문하는 성실성만큼은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작은 드물지만 매번 자기보다 인지도 낮은 감독과 작업해서인지 모든 영화가 ‘덴젤 워싱턴의 00’처럼 보일 정도로 존재감도 확고하다. 이런 아우라는 정의의 경찰이라는 단골 캐릭터 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스카를 안겨준 <트레이닝 데이>가 그 이미지를 뒤집어서인지, <아웃 오브 타임>에선 선악 이분법이 제법 흐트러져 있다. 가령 매트(덴젤 워싱턴)는 존경받는 수사반장이면서도 사생활은 복잡해서, 유부녀 앤(산나 라단)과는 불륜 중이고 아내(에바 멘데스)와는 이혼 준비 중이다. 앤이 암 선고를 받았을 땐 공금을 빼내면서까지 그녀의 치료를 도우려한다. 그러나 앤의 집이 화재로 불타자, 매트가 보험금을 노리고 앤을 죽인 것처럼 오해될 정황들이 속속 드러난다. 그는 이 증거들을 감추면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
어디에도 방점을 찍지 못한 어정쩡한 영화, <아웃 오브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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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와 <더 록>이 그러하듯이 <헌티드>도 후일담이다. 베트남전은 전쟁을 ‘극복된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 회상하는 미국사회의 전쟁 로망을 일순간에 박살냈다. 이후 할리우드 전쟁영화는 전장을 벗어난 군인을 다루는 후일담에 집착한다. <헌티드>는 코소보의 전장에서 시작된다. 하늘에는 장마처럼 퍼붓는 나토의 공습, 지상에서는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이 얽힌 인종학살이 이루어지는 생지옥에 주인공 애런이 투입된다. 은성훈장을 가슴에 달고 미국으로 돌아온 애런(베니치오 델 토로)이 숲속에서 밀렵꾼들을 ‘환경보호’의 이름으로 난도질하는 대목까지의 전개는 <람보>의 반복학습이다.
LT(토미 리 존스)가 자신의 손으로 길러낸 살인병기 애런을 쫓기 위해 전원생활을 마무리하고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인 추적극은 시작된다. LT는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에서 닥터 킴블을 쫓던 샘의 환생이다. <헌티드>의 격투장면은 대체로 낭
살인동기가 불명확한 ‘도망자’ 게임, <헌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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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 하는 부잣집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지만, 아버지의 돈으로 쉽게 인생을 꾸려가는 대신 당당한 홀로서기를 꿈꾸는 치과의사 혜진(엄정화). 그러나 삶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치과의사의 권리를 주장하며 기세 좋게 내던진 사표가 단번에 수리되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혜진은 착잡한 마음을 달래러 바닷가를 찾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머, 이런 데가 다 있었네!” 공동 빨래장에서 사이좋게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 지나가는 이들에게 늠름한 인사를 건네는 갈매기, 허허실실 인심 좋은 동네 할아버지들, 지중해 풍광을 뺨치는 바닷가 풍경…. 혜진은 이곳에 치과를 개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에서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나게 되다니. 딱 한살 위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반말을 찍찍 날리는 홍두식, 일명 홍반장이 그녀의 ‘진상’이었던 것이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쓸 만하고 수리면 수리, 배달이면 배달, 요리면 요리, 노래면 노래, 싸움이면 싸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이면서
넉살 좋은 홍반장과의 귀여운 로맨스, <…, 홍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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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는 <조폭마누라>를 만든 조진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조폭코미디라는 변종장르가 정착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던 그는 <어깨동무>에도 비슷한 성공요인을 끌어들였다. 깡패와 보통 사람이 만나면서 빚어지는 오해와 충돌, 은어를 사용한 말장난, 부모를 잃고 힘들게 살아온 형제간의 애정,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폭력, 여자라는 약점 대신 근본없는 삼류깡패라는 단점을 지닌 주인공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서로 상관없는 덩어리를 뚝뚝 떨어뜨린다는 느낌이 강했던 <조폭마누라>와 달리 <어깨동무>는 복잡하고 산만한 스토리를 힘겹게나마 하나로 모아간다.
중년의 깡패 태식(유동근)은 부하 쌍칼(최령)과 꼴통(이문식)을 거느리고 형사를 습격해 재벌 정 회장의 비리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빼앗는다. 그날 밤 태식은 애인이 운영하는 비디오가게에 들렀다가 그 테이프를 잃어버린다. 에로비디오를 빌리러 왔던 동네 백수 동무(이성진)가 실수로
기본 전제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조폭코미디,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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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새벽, 눈밭을 달리는 차 안에 노신사와 젊은 여인이 몸을 기대고 있다. 사랑의 완성, 만족 혹은 체념의 기운이 감지될 무렵, 길 옆으로 나동그라지는 차.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다. 대체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휴먼 스테인>이 풀어놓는 ‘비밀과 거짓말’은 이렇게 끝으로부터 시작된다.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작가 네이던으로, 그는 노신사 콜만이 못다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탐정’으로 역할하며, 일찌감치 떠나버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저명한 교수였던 콜만은 인종차별적 발언 때문에 직장과 아내를 잃고, 네이던을 통해 자신의 지난 인생을 기록으로 남기게 한다. 네이던은 학교 잡역부 퍼니아와의 육체 관계에 탐닉하던 콜만의 최근사는 물론, 흑인 부모에게서 흰 피부를 물려받고, 자신을 유대인으로 가장한 채 살아온 그의 과거를 접하게 된다.
필립 로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부조화스러운 커플의 어둡고 격렬한 연애담의 모양새를 하
연애담의 모양새를 한 인종과 계급의 이야기, <휴먼 스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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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의 못 미더운 원숭이들과 함께 동반 위기에 처했던 할리우드 비틀쥬스 팀 버튼이 이야기꾼에 대한 자성적 우화 <빅 피쉬>를 메고 다시 왔다.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시작한다. 아들 윌(빌리 크루덥)은 이제 더이상 참아내기가 힘들다. 병원 침대에 누워 곧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앨버트 피니)은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 버금갈 만한 젊은 시절 에드워드 블룸(이완 맥그리거)의 무용담을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어린 시절 마녀의 집을 찾아가 그녀의 외눈 안에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본 적이 있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지. 젊은 시절 나는 동네에서 가장 유능한 팔방미인이었어. 우연히 마을로 들어온 거인 친구와 함께 나에게 어울리는 더 큰 세상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단다. 그 여행의 도중에는 신발을 벗고 사는 이상한 마을에도 얼마간 머물렀단다. 그러다가 네 엄마를
팀 버튼의 기상천외한 동화나라, <빅 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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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원조교제 하는 딸을 목격한 아버지가. 당장 달려가 딸의 머리채를 잡아채야겠지만 이 남자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딸과 함께 여관에서 나온 남자를 미행한다. 딸의 뒤를 밟고 딸과 만나기로 약속한 사내들에게 겁을 주며 뺨을 때린다. 아버지는 딸을 구할 수 있을까? 다른 영화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김기덕 영화다. 이런 질문으론 답을 구할 수 없다. 언제나처럼 김기덕 영화에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가 있다. 분노가 들끓지만 그 대상이 자신임이 드러난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과연 딸에게 욕정을 느끼는 아버지들은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김기덕은 이번에도 죄의식과 싸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식. <사마리아>에서 10대 소녀들이 벌이는 위험한 불장난은 신이 인간에게 던진 숙제다. 세상의 딸들은 너무 매혹적인 자태로 그들의 아버지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 3부로 나뉜 이
인간의 죄의식, 아버지의 이름으로 신의 법정에 오르다, <사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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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성들만이 등장했던 조지 쿠커의 1939년작 <여인들>의 부제는 ‘남성들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원래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고려하기도 했었던 프랑수아 오종이 “나의 여성영화 프로젝트”로 만든 영화 의 부제를 붙인다면 그와 비슷하게 ‘한 남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성들의) 모든 것’쯤 될 것 같다.
영화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각자에게 사위, 남편, 아버지, 오빠, 내밀한 연인, 고용인인 한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바로 그 남자가 성탄절 아침에 그만 칼에 찔린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제 범인을 찾아야만 하는데 영화 속 여성들 가운데 용의자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은 이야기의 가장 중심되는 경로로 보아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쥐덫>을 참조한 미스터리영화임에 분명하지만 오종의 욕심은 추리극을 만드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는 뮤지컬적인 요소를 간간이 삽입하는가 하
프랑스 영화계의 디바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8명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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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의 사춘기>(국내 방영제목)는 평범한 중학생 리지 맥과이어의 일상을 그린 인기 청소년 드라마다. 늘 ‘죽은 사람들’(다른 말로는 위인이나 성현)을 인용하는 아빠와 다정한 엄마, 언제나 리지를 괴롭히려 애쓰는 남동생 맷과 함께 사는 리지 맥과이어(힐러리 더프). 이거 저거 관심도 많고, 다사다난한 소동도 많은 리지의 학교생활을 담은 <리지의 사춘기>는 리지의 속마음을 표현한 익살스러운 애니메이션과 솔직한 감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리지 맥과이어’란 의류 브랜드도 생겼고, 힐러리 더프는 가수로도 데뷔하며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이후 <에이전트 코디 뱅크> 에 출연했고, 극장판 <리지 맥과이어>가 개봉 첫주에 2위를 차지하며 1700만달러를 벌어들여 10대의 아이돌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일상에 지치면, 가끔 여행을 떠난다. TV시리즈도 그렇다. <리지 맥과이어>는 드디어 리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떠나는 로마여행 이야기
꿈 많은 소녀의 백일몽 같은 청춘영화, <리지 맥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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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라로크성 유적에서 발굴 작업에 한창이던 일단의 젊은 고고학자들이 600년 이상 숨겨져 있던 지하유적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며칠 전에 뉴멕시코로 떠난 존스턴 교수의 600년 동안 봉인되어온 친필 구조요청과 안경알이었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기이한 사건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유적 발굴의 후원자였던 ITC에 연락을 취한 그들이 알아낸 것은, 사물의 전송이 가능한 양자 원격 이동 장치가 존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1357년의 프랑스로 떠났던 존스턴 교수가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이었다. 4명의 젊은이들은 이제 ‘6시간’ 안에 교수를 구출하여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야심으로 가득 찬 자본가가 만들어낸 상상을 초월하는 테크놀로지, 그것이 야기한 부작용을 바로잡기 위해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혼재하는 ‘테마 파크’ 속으로 뛰어드는 젊은 전문가 무리들. 이쯤 되면 여기서 <쥬라기 공원>과의 묘한 데자뷔 현상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의 의미에서든
텅 빈 스펙터클에서 길을 잃다,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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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g down the house. 만장을 떠들썩하게 하다. 대갈채를 받다. 영화 <브링 다운 더 하우스>의 타이틀이 갖는 사전적 의미다. 우리가 ‘지붕이 떠나가라’ 박수치는 동안 아마 그네들은 ‘집이 내려앉도록’ 하는 꼴인데 대략 이 차이가 스티브 마틴의 영화를 우리가 ‘웃기는 영화’로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스티브 마틴이 정말 포복절도하게 웃기지 않는 이유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허전함(<신부의 아버지>)이나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애환(<열두명의 웬수들>)에서처럼, 그의 코미디가 실은 ‘웃지 못할 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일들은 그의 영화에서 항상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변모되어 코미디가 된다. 물론 이 좌충우돌의 여정 끝엔 늘 행복한 가족애로의 회복과 격려, 잔잔한 공감이 있다. 좀 뻔한 듯하면서도 사려 깊은 스티브 마틴표 브랜드 코미디의 변치 않는 공식이다.
<브링 다운 더 하우스>는
분노와 통쾌함이 엇갈리는 공감의 대갈채, <브링 다운 더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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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유형의 직업여성이 등장한다. 스티비 닉스의 <에지 오브 세븐틴>이 울려퍼지면 교장 로잘리 멀린스(조앤 쿠색)는 ‘두 얼굴의 여인’처럼 신체변형을 시작한다. 완고하고 단정하던 로잘리의 동그란 두눈이 좀더 커지며 두손과 입술이 어쩔 줄 모르고 움찔거리더니 스티비 닉스의 섹시한 멜로디와 리듬에 기꺼이 어울린다. 눌러둔 ‘끼’가 제대로 발동되면 자신이 직접 근엄한 훈육자로 양성시킨 교사들 앞에서 온몸에 식탁보를 휘감고 마돈나처럼 열창한다, 고 한다. 반면 철없던 시절을 접어버린 친구의 애인은 조신하기 이를 데 없는 시장의 비서다. 그녀는 너무나 도덕주의적 속물이어서 절대로 록의 세계를 이해 못한다. 그녀는 회개시킬 수 없는 훼방꾼이자 문제아다. 세 유형의 초등학생이 있다. 백인, 황색인, 흑인. 모두 부잣집 자식들이고 최고의 사립학교를 다니지만 유독 동양계와 아프리카계 아이는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왕따다. 다행히도 이들은 백인 아이 못지않게 음악에 천부적 재질을 가졌다. 아직
잭 블랙의 개인기가 만발하는 유쾌한 축제, <스쿨 오브 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