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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나 장르로 봐선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란 게 믿기 힘든 감독들이 있다. <스플래쉬>에서 <분노의 역류> <아폴로 13>을 거쳐 <뷰티풀 마인드>로 이어진 론 하워드도 그중 하나. ‘작가’는 못 돼도 그는 분명 코미디부터 SFX스펙터클까지 어떤 과목이든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장인’이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의 무난한 정공법과 보수적 가족주의는 할리우드 하면 떠오르는 전형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실종>은 그의 작품 중 <파 앤드 어웨이>와 <랜섬>의 설정을 뒤섞고 변주한 듯한 영화다. 개척시대가 배경이지만 이번에 대립하는 건 소작농과 지주가 아니라 인디언과 백인이며, 유괴되는 건 재벌의 외아들이 아니라 여의사의 딸이다. 두딸과 살던 여의사, 매기(케이트 블란쳇)는 어느 날 20년 만에 아버지(토미 리 존스)의 방문을 받는다. 하지만 가족을 버리고 인디언이 돼버린 아버지는 도저히 용
로드스릴러를 표방하는 지루한 드라마,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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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들은 나뒹구는 마약 주사기를 장난감 삼아 놀고, 소년들이 공을 차는 주택가에는 마약 딜러에게 고문당하는 자의 비명이 무상하게 울려퍼진다. 좀더 자라면 이 아이들은 조직에 고용돼 마약 행상에 나설 것이다. 마약이 오염시킨 199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빈민가 풍경 앞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마땅하다.
어떤 경우에나 싸움은, 성토나 한탄과는 다른 문제다. 상대가 “네 아들을 유괴해 성폭행한 다음, 네 년을 쏘아 죽여주지”라고 협박하는 무뢰한일 때는 더욱. 그러나 <선데이 인디펜던트>의 열혈 기자 베로니카 게린은, 기사나 쓰고 수사는 경찰에 맡기라는 현명한 충고를 묵살한 채 마약 트래픽의 진원지를 캔다. 의욕과 사명감이 마치 방탄조끼라도 되는 양 암흑가를 들쑤시는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는 관객의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는가?
조엘 슈마허 감독은 계몽적 의도가 아니라 베로니카 게린이라는 여성의 ‘캐릭터’가
굽힐 줄 모르는 어느 기자의 마약 전쟁, <베로니카 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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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먹은 샴쌍둥이 테너 형제(이들은 ‘결합된 형제’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점잖게 밝힌 바 있다)는 마을의 명사다. 어떤 까다로운 주문이라도 3분 내에 해결하는 ‘번개 버거’의 공동 요리사이자 야구면 야구, 권투면 권투, 미식 축구면 미식 축구를 하는 족족 우승으로 이끄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게다가 형인 월트(그렉 키니어)는 직접 희곡을 쓰고 출연을 겸하는 만능 재주꾼이기도 하다. 내성적인 동생 밥(맷 데이먼)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면서도 기꺼이 형을 위해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무대에 함께 오른다. 그들이 함께라면 겁날 게 없다. 섹스문제만 해도 서로 조금씩만 양해하고 자세를 바꾸어준다면(!) 별 문제될 건 없다. 한명이 샤워할 때도 나머지 한명이 비옷만 입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안온한 일상의 다사로운 행복이 월트의 폭탄 선언으로 산산조각나버린다.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프로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것! 대경실색할 노릇이지 않겠는가.
바로 그 순간,
따로 또 같이 - 가슴이 훈훈해지는 형제애, <붙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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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를 비롯한 일본 문화가 비단 할리우드만 탐내는 소재는 아니다. <사무라이>는 프랑스에서 홍콩과 일본의 스탭 및 배우를 끌어들여 제작하고 국제언어인 영어로 더빙한 영화다. 이런 다국적성 탓인지는 몰라도 <사무라이>는 정체가 없다. 결정적으로 제목이 되는 ‘사무라이’의 존재가 이 영화 속엔 없다. 뼈대있는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조차 ‘철권’ 같은 비디오게임용 액션에 더 정통하다. <패트레이버> <공각기동대> <아바론>을 작업했던 가와이 겐지의 음악은 시작부터 친숙한 록 사운드와 랩 비트를 만들어 <사무라이>의 초국적성에 일익을 담당한다.
<사무라이>는 코데니라고 하는 고대 악마의 부활을 막으려는 인간들의 분투를 담은 액션스릴러다. 500년 전 후지와라 가문의 주문을 통해 부활한 이 악마는 그뒤로도 죽지 않고 처녀의 몸을 빌려 목숨을 부지해왔다. 초인간적인 존재에 툭하면 갖다붙이는 기독교적인 설정은 제쳐놓더
정체가 없는 초국적 사무라이들의 활극,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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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 오브 비스트>는 <천녀유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감독 정소동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액션영웅, 스티븐 시걸과 함께 만든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그러나 정소동 감독은 홍콩에서도 웬만한 대표작을 내놓지 못한 지 오래이고, 늙은 영웅 역시 유일한 무기였던 몸이 예전같지 않아 고전 중이다. 결국 이 둘의 결합은 그나마 각자가 유지해온 팬들을 실망시키는 시너지 효과로 작용할 듯하다.
은퇴한 CIA 요원 제이크(스티븐 시걸)는 아내도 없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친구들과의 타이 배낭여행 중 테러집단에 잡히자 사건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타이로 떠난다. 아버지가 구하러 와줄 것이라는 딸의 믿음은 절대로 어긋날 리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뻔한 내용을 전개시키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히는 액션을 펼쳐야 할 스티븐 시걸이 너무 늙어버렸다. 액션연기가 힘에 부치게 되자 손끝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술을 개발했고, 부득이하게 온몸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노쇠한 액션스타의 몰락, <벨리 오브 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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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투명하고 그 자체로 외설적이다. 여기 한 부부와 어린 청년 사이에 벌어지는 욕망이라는 게임의 규칙이 벌어질 것임을, <욕망>은 더도 덜도 아닌 그 게임의 흐름을 따라갈 것임을 예시한다. 로사는 남편 규민의 외도 상대가 뜻밖에도 청년 레오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레오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규민에게 버림받은 레오 역시 기묘한 질투심에 로사와의 격렬한 섹스에 빠져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규민은 상류층의 우아한 권위 밑에 감춰져 있던 야비하고 차가운 본능을 드러낸다. 그는 로사와 레오 양쪽 모두를 비참하게 모욕하기 시작한다. 레오를 훔쳐보던 옆집 소녀 소연 역시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1997년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통해 사적인 기억에마저 공적인 기억이 함께 뒤엉킬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특유의 단면을 거칠게나마 투영시켰던 김응수 감독은 이제 ‘온전히’ 사적인 감정의 파고에 몸을 맡긴 두
욕망에 대한 낯설고도 차가운 시선,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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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진출하지 않는 이유가 ‘내 고향이 제일로 좋다’는 백성기(차인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포는 항구다>는 목포라는 항구도시의 화사한 속살을 진득하게 보여준다. 능청스러운 전라도 사투리가 귀를 간질이고, 정겨운 목포 시가지 곳곳과 함께 대나무밭과 녹차밭 등 관광지들도 화면에 담아 보여준다. 그 풍경도 그렇고, 살가운 사람들도 그렇고, 목포의 운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목포는 항구다>가 관광홍보영화가 될 수는 없다. <목포는 항구다>는 서울 형사가 목포의 폭력조직에 잠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경찰 혹은 조폭코미디다.
<목포는 항구다>의 주인공 이수철과 백성기는 형사답지 않은 형사, 조폭답지 않은 조폭이다. 이수철은 마약에 잔뜩 취한 현행범에게 인질로 잡혀 울먹이는 무력한 인간이고, 백성기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 술자리도 마다하는 성실한 인간이다.
전라도 버전의 조폭코미디, <목포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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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윤리학의 과제는 모든 것을 ‘선택’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채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로 기대값을 구해 ‘죄와 벌’이라는 유구한 심연을 넘어보겠다는 근대적 일환이다. 하지만 선택을 하는 개인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미학적 기획은 개념을 구원하려는 이같은 안전망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영화라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무대가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로제타>로 칸을 석권했던 다르덴 형제의 <아들>은 요컨대 그런 영화다.
재활교육센터에서 목공 일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 5년 전 아들이 살해되는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아내와도 이별하고 홀로 미니멀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만큼이나 건조한 표정과 말들은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관계의 방식이다. 그런 그를 카메라는 시종 편집증적으로 쫓아다니는데 게다가 오직 클로즈업으로 그의 머리만을 겨냥한다. 때문에 그가 뛰기라도 하면 이리저리 솟구치며 흔들리는 불편함을 참아야 하고, 그저 평범
선택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종교적 윤리극,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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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일 감독의 <헤이세이 무책임일가: 동경디럭스>를 보면 일가족 사기단이 나온다. “속기보다는 속여라”는 가훈으로 똘똘 뭉친 이 가족은 천부적인 연기력과 비상한 잔머리, 단체라는 장점을 무기로 기발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그러나 이 가족의 엽기적인 사기행각이 밉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마이너리티의 비애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사시간, “행복은 우리 것이 아냐, 저 강 너머 사람들의 것이야”라며 쓸쓸히 젓가락질을 하던 둘째아들 미노루의 대사는 그 왁자지껄한 소동극을 소요시키는 애잔한 울림을 준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도 사기꾼 여자가 등장한다. 가녀린 몸매와 순진한 얼굴로 사람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다니는 이 여자, 주영주(김하늘)는 “슬픈 듯 슬픔을 억제하는” 연기력을 동원해 형무소 안에서도 사기를 친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아낸 여자는 같은 방 죄수들을 앉혀놓고 “이 불신의 시대에 사람을 믿게
전복적 기운이 묻어나는 로맨틱코미디, <그녀를 믿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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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대지에 한 병사가 서 있다. 도랑에는 피가 흐르고 바위와 나뭇등걸은 피묻은 손자국으로 붉다.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아직 죽지 않은 남자는 기다리겠노라하던 고향의 여인을 생각한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무엇을 봤는지 모두 알고 나면 당신은 다시는 내 무릎에 그처럼 다정히 기대지 않겠지요. 행여 내 안에 좋은 것이 있었다면,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콜드 마운틴>의 남군 병사 인만(주드 로)에게 영혼은 영원히 강건한 신의 선물이 아니라 돌보지 않으면 허약해지는 무엇이다. 그는 어색한 첫 키스를 나눴을 따름인 에이다(니콜 키드먼)가 진짜 사랑이었는지, 그녀가 철저히 파괴된 자신을 알아봐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피터스버그 전투의 부상으로 버지니아 병원에 후송된 인만(주드 로)에게 날아든 편지는 그의 상한 육신을 일으켜 세운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여의고 황폐한 농장에서 생존의 투쟁을 치르고 있는 에이다는 호소한다. “전투를 하고 있다면 전투를 멈추세요. 행
서사극 스케일의 멜로드라마, <콜드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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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건 여전히 지금도 포스트 바벨탑 시대임을 체감하는 일이 된다. 그 나라 말도 우리말도 무용지물이고 영어마저 각자의 버전대로 발음이 휘어지노라면, 소통 불능의 해프닝은 유쾌한 추억으로 남기 전에 웃지 못할 답답함과 서글픔으로 물들기 일쑤다. 이때만큼 모국인이라면 누구나 친구가 될 것 같은 순간도 없다. 그 혹은 그녀와는 통역도 필요없고 감정의 언어마저 같을 테니. 이른바 코드까지 맞다면, 눈치볼 것 없는 외국은 도리어 로맨스의 요람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할리우드 중견배우인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이제 막 결혼한 샬롯(스칼렛 요한슨)도 비슷한 처지다.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에 온 밥은 죄다 자기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작은 일본일들의 호들갑과 거두절미식 엉터리 통역에 어안이 벙벙하다. 아내와의 국제전화도 겉돌기만 한다. 사진기자 남편을 따라 도쿄로 온 샬롯은 말로만 사랑한다는 남편이 일 핑계로 사라지고 나면 할 일이 없다. 현란한 도심이
소통 불능의 도시에서 유랑하는 두 이방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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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질병, 기아에 허덕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난민들을 구호하는 영국인 의사. 그리고 런던 상류 가정의 미모의 유부녀(직업은 화랑 큐레이터이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떤 영화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머나먼 사랑>은 대의명분까지 갖춘, 그러나 그 대의명분 때문에 이뤄지기는 힘든, 그래서 더 마음 깊이 고결하게 새겨지는 로맨스에 어드벤처를 곁들인 감동의 드라마가 되기를 의도한다. 그러나 의도에 멈춘다. 극적인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가난하고 힘든 도처의 나라에서 불필요한 악인들이 만들어지고, 의사 남자의 동기도 모호해진다. 이쯤 되면 구호활동이라는 대의명분은 공주병 환자의 장신구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진짜로 구호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보면 짜증이 많이 날 것 같다.
남자 의사는 닉(클라이브 오언)이고 큐레이터 유부녀는 조르단(안젤리나 졸리)이다. 조르단이 닉을 처음 본 건 런던의 한 자선단체 파티장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닉이 이 파티장에 나타난 건 구
숭고한 이미지에 기댄 감동의 공허함, <머나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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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만들어진 독일의 <아나토미>는 독일에서만 1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67개국에 팔리며 인기를 끌었다. 한 대학에서 벌어지는 불법 인체해부실험을 다룬 고어영화 <아나토미>가 고어영화팬만이 아니라 보통의 관객을 끌어들인 매력은 무엇일까. 인간존재의 물질적 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치료하거나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한 방법은 우연히 얻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실험과 노력, 그리고 자의이건 타의이건 희생이 필요하다. 법적으로는 동물실험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사실 이 세계 어딘가에서는 ‘인체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음모론이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가설이다. 이미 알려진 일본의 731부대를 비롯하여 잔혹한 인체실험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아나토미>를 만들었던 슈테판 루조비츠키는 속편에서, 전편의 문제제기를 이어간다. 요하킴(바르나비 멧슈라트)은 근육수축증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으로 의사가 되었다. 베를린의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
반복되는 불법 인체실험의 공포, <아나토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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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아직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대,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촉망받는 청년무사 로드리고는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이자 유력한 왕위계승자 산쵸가 음모로 피살되고 얼떨결에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마저 죽이게 된다. 친구와 연인 모두를 잃는 갑작스러운 시련. 게다가 반역자로 몰려 고향에서 추방당하지만 장차, 한국으로 치자면 ‘성웅 이순신’에 비견될 스페인의 민족 영웅 ‘엘시드’가 될 로드리고에게 이 모두가 극복될 시련임은 불문가지. 탁월한 검술과 높은 덕성으로 아랍왕국의 친구들을 도와 승리자(엘시드)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본국에서의 사랑과 명예도 되찾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모든 문학, 음악, 연극의 소재로 사랑받는 것도 포함해서.
그러나 <엘시드: 전설의 영웅>(<엘시드>)이 다루고 있는 이 11세기 중세 영웅의 실제 이야기는 사실 훨씬 더 복잡한 감이 있다. 로드리고는 그 이후로도 두번은 더 추방당하고, 사랑해서 결혼한 여인은
영웅설화의 어설픈 흉내, <엘시드 : 전설의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