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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구원의 길은 없는가? 어떻게든 이 부류의 고뇌가 찾아오면(발단) 대개는 서사의 산을 오른다(전개). 그리고 그곳에서 갖은 통과의례와 시험을 거치고(위기)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안개 뒤 산정에 올라 대답을 쟁취한다(절정). 그리고 정확히 있었던 그 지점으로 하산하는 것이다(결말). 외관상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난 상태. 이를 일컫는 수많은 이름, 성장, 구원, 해탈, 게슈탈트 변환, 패러다임 시프트 등등. 따지고 보면 영화를 포함해 모든 이야기는 이 소멸과 생성에 관한 종교적 에픽이다. 다만 장르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겪어내야 할 이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모두 일정한 도식에 밀어넣고 구조화한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내러티브 자체의 종교성은 어쩌면 모든 시간예술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한, 구원 그 자체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고뇌가 되는 영화는 이 일정한 도식을 사용할 수 없다.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영화적 명상, <삼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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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첫 번째 국내 개봉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1996년 작품 <이마베프>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는 한국의 극장에 걸리지 못한 채 비디오로만 출시되었고 비디오 마니아들의 입을 통해서만 떠돌았었다. 말하자면, <클린>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로서 많은 글을 썼고, 잉마르 베리만에 관한 책을 펴냈고, 홍콩 무협영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을 존경한 나머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허우샤오시엔의 초상>(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허우샤오시엔을 따르는지 절로 알게 된다)을 만들어낸 시네필 출신의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심상을 비평적인 측면이 아닌 창작의 측면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영화인 셈이다.
<이마베프>는 비평가로서의 그의 화려한 이력과 공력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만끽시킬 만한 영화였다. 일견에서 제기되는 영화와 뱀파이어의 존재론적
인물과 음악을 따라가는 갱생의 드라마, <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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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는 두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늘어진 뱃살 아래 팬티 한장만 입고 철거민들을 두드겨패는 깡패와 아이를 점지받으러 온 여인을 낡은 아파트 복도 벽에 세워놓고 손수 씨를 뿌려주는 박수무당. 그리고 사정에 이른 무당의 신음소리와 함께 타이틀이 떠오른다. 귀여워. 누구도 이 남자들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타이틀을 소리내어 읽어주는 한 여자만은 진심인 듯, 깨물어주고 싶다는 목소리로 “귀여워”라고 말한다. 그 여자 순이 덕분에, 깡패와 박수무당과 다른 두 남자는 정말 귀여운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한때 아이 점지에 용하다고 소문났던 무당 장수로(장선우)는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배다른 두 아들과 살고 있다. 큰아들 후까시(김석훈)는 <본 투 킬>에서 정우성이 탔던 오토바이 V맥스를 타고 세상이 한점으로 모일 때까지 달려보는 게 소원인 퀵서비스맨이다. 후까시보다 조금 늦게 아버지를 찾아온 탓에 둘째가 된 개코(선우)는 건달기가 농후한 견인차 운전기사
콩가루 집안 배다른 네 부자 이야기,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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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재활용될 뿐이다!’ 십년도 훨씬 지난 영화의 속편을 뜬금없이 제작하질 않나(<더티 댄싱2>) 프레데터와 에일리언을 맞붙여 싸우게 하질 않나, 과거 히트작들을 무리하게 우려먹어야 할 만큼 소재 기근에 시달리는 할리우드의 최근 사정을 물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곤 해도 제작하는 속편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졸작 신세를 면치 못했던 ‘저주받은 클래식’ <엑소시스트>에까지 다시금 손을 대다니, 얼마간 그 고충이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결론1)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이하 <엑소시스트4>)은 생각보다 끔찍하지만은 않다.
공포영화의 고전이 된 <엑소시스트>가 세기적 악몽이 된 이유는, 사실 180도 목 회전 신공을 보여준 소녀 리건(린다 블레어)의 엽기 충격 쇼 때문이 아니라 선과 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믿기 힘든 심령 혈투를 너무나 리얼하게 만든 캐릭터들의 생생한 약동과
저주는 살아 있다,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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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구도 사랑한 적 없어. 영혼까지 썩어 있으니….” 여자는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린 채 이를 갈고 있는 남자에게 속삭인다. “돈이 오기까지 몇 시간 여유가 있어. 어디 가서 좀 놀다올까?” 이 뻔뻔할 정도의 태연함, 너의 쾌락을 즐겨라! 여기, 히치콕의 여주인공이 재탄생한다.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를 그토록 매혹시켰던, 그리하여 결국 추락사당하는 킴 노박의 옆모습은 우아하게 스카프를 감고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에 든 멍을 감추는, 그러나 결코 살해당하지 않는 옆모습으로 재현된다. “왜 악당들이 잘사는지 알아?”라는 그 여자의 거만한 질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의 정체성을 덮어쓸 수 있다. 겉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그녀의 기억조차 완전히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오래간만에 작심하고 히치콕 스타일로 찍은 스릴러 <팜므파탈>은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적 쾌감을 체현하려는 욕망으로 팽배하다.
컴컴한 호텔 방 안
범죄와 배신의 섹시한 파노라마, <팜므 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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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언스 형제는 뻔뻔하다. <스크림>을 비롯해 그 무렵 히트한 호러, 스릴러, 액션물을 닥치는 대로 베끼고 비틀고 버무린 ‘잡탕’영화 <무서운 영화>는 무서운 게 아니라 황당하고 어이없게 웃기는 영화였다. 그 속편은 또 어떤가. 유령 나오는 집이 주인공인 <더 헌팅>을 패러디한 <무서운 영화2>는 전편보단 못했어도, ‘막가파 유머’의 소신을 충분히 피력했더랬다. 이번엔 더하다. 맏형 키넌 아이보리는 두 동생 숀과 말론을, 여성으로, 그것도 백인 여성으로 ‘둔갑’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들이 여장한 건 차마 못 보겠다고? 그러니까 ‘웃자’는 얘기다.
세트로 사고치는 FBI 요원 케빈(숀 웨이언스)과 마커스(말론 웨이언스)는 퇴출 위기에 몰리고, 납치 위협에 노출된 호텔 재벌가 자매의 경호를 자청하지만, 그들의 귀한 얼굴에 흠집을 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예정된 자선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들을 대신해, 케빈과 마커스는 어마어
인종과 성과 문화에 거침없는 조롱을! <화이트 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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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과거는 끔찍했다. 그가 끔찍함을 견디는 법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를 근근이 견뎌냈다. 혹은 끔찍함으로부터 도피했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분리된 채 현재에 안착한 그는 문득 잃어버린 과거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 기억은 복원되고 불행은 시작된다. 뒤늦게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려는 자에 대한 현실의 때늦은 단죄일까, 그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타자에게 떠넘기고 홀로 현재로 도피했던 자신에 대한 처벌일까.
상처로 가득한 어린 시절의 에반(애시튼 커처)은 종종 기억을 잃는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그는 매순간 자신의 기억을 일기로 기록한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그는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을 떠나 모범적인 대학생으로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전의 일기장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기억과의 대면에 괴로워하던 그는 불행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법을 발견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함,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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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놓인 건 그저 가느다란 선일 뿐이지만 그것을 넘는 순간 혹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을 지도, 그럼으로 해서 운명 자체가 단숨에 바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선 앞에 선 사람은 한쪽 다리를 들고는 앞으로 내디딜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듯한 미결정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학의 멈춰진 발걸음>(1991)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하나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가르는 경계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그처럼 마치 학이 한쪽 다리를 들고는 움직임을 멈추고 걸음을 유예하고 있는 듯한 자세로 비유한 바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98년작 <영원과 하루>에서 우리는, 그와 같이 경계를 마주하고서 서성거리는 또 다른 인물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인물의 경우에 그 앞에 놓여 있는 경계란 얼른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커다란 두려움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과 내일을 나누는 경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언젠가 맞을 수밖에 없는 갈림길, 즉 삶과
한 남자의 지친 내면의 발걸음, <영원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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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녀 하나(스즈키 안)는 어느 날 전철역에서 만나 짝사랑하게 된 학교 선배 미야모토(가쿠 도모히로)를 미행하다 그가 섀시문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하는 것을 목격한다. 얼마 뒤 깨어난 미야모토에게 하나는 깜찍한 거짓말을 한다. “선배, 기억 안 나요? 선배가 나 좋아한다고 고백했잖아요”라고. 하나는 미야모토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과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며 윽박지르고, 단짝친구 앨리스(아오이 유우)까지 이 귀여운 사기극에 동참시켜 사랑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대체 이와이 순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걸까. 한 남자아이와의 연애를 통해 한뼘씩 자라나는 두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하나와 앨리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궁금증이 치오른다. 시종 조잘대고 까르르 웃음을 쏟아내며 서로에 의지해 뒤엉키는 소녀들의 겉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점만이 아니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달콤한 조각케이크같은 일상의 판타지, <하나와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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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챙기기 바쁜 불량교사 김봉두를 교화의 길로 이끈 건 코는 흘리되 때는 묻지 않은 시골 아이들이었다. 김봉두는 시골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선생’이 되고, 그 다음에야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김봉두의 갱생 스토리가 현실에선 불가능한 판타지라고 해도, 본디 사람은 선하게 태어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 영화의 순진함을 믿고 싶어하는 관객은 많았다. 장규성 감독의 <여선생 vs 여제자>는 전작 <선생 김봉두>의 속편이라고 부를 만한 영화다. 그런데 이번엔 눈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울찬가를 부르는 산골 아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카메라가 찾아간 곳은 남도의 한 조그마한 도시의 초등학교. 교실엔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직행하고, 담임선생님을 ‘담탱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고, 뺨을 때리는 선생을 동영상으로 찍어 고발하는 지금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과연 이런 곳에서도 ‘선생’이 태어날 수 있을까.
<여선생 vs 여제자>가
여자로 부활한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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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동안 맥도널드 메뉴만으로 연명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뚱보가 될까, 영양실조에 걸릴까?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를 보노라면 듣도 보도 못한 먼나라의 허허벌판에 원주민처럼 버려져도 사람들은 꿋꿋이 살아남아 100만달러를 타내고 마는 세상이다. 여자친구와 의사들이 보살펴주고, 3천보도 걷지 않으면서 패스트푸드만 세끼 먹는 일을 어찌 그러한 대모험에 비교하랴. 이러한 여유로운 방심 속에 <슈퍼사이즈 미>가 꼬집고 싶은 고정관념의 틈이 있다. <슈퍼사이즈 미>는 자본주의의 최대 가치인 ‘신속함’과 ‘편리함’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흉기라는 사실을 파고든다.
퀸의 명곡 <팻 보텀드 걸>(Fat bottomed Girl)이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각종 패스트푸드 봉지를 든 사람들의 일상이 빠른 몽타주로 제시된다. 화면이 급정거하면 병원을 찾아가는 주인공 모건 스펄록이 나타난다. 용의주도한 모건은 영화를 찍는 스탭 수만큼 “맥도널드 식
흥미로운 생체실험다큐멘터리, <슈퍼 사이즈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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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 연애 못한단 여자의 80%는 외로움에 치를 떤대.” 오드리(줄리언 무어)의 친구처럼 젊어 보이는 엄마의 충고다. 뉴욕의 대형 로펌에서 예쁨받는 이혼 전문 변호사로 잘 나가는 딸이지만, 끊임없는 사랑과 보톡스로 자신을 성형해가는 엄마가 보기에 딸은 <섹스 앤 시티>의 뉴요커들 같은 생기가 없다. 오드리의 입장에선 이건 억울한 오해다. 과자와 TV의 날씨예보만 있으면 주말 저녁이라도 외로울 게 없으니 그가 보기에 ‘무지 바쁜데 연애해가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20%’에 끼어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게다가 그는 “결혼은 죽음”이라고 믿는 결혼 불신론자다.
문제는 오드리의 이 신념이 직업 환경에서 갖게 된 환상 혹은 착각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가 맡는 이혼소송이 수십억원이 걸려 있는 머니게임과 다름없지만 그는 이혼의 당위성을 지금의 고객과 잠재적인 의뢰인들에게 그럴듯하게 설파해야 하는 처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드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결별시키는 곳에서 누군가와 사
이혼 법정에서의 사랑 게임,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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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모터사이클을 탄 청년은 내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고 말한다. 그는 아직은 ‘체’라고 불리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난 대륙을 더듬으면서, 혁명보다는 연민에 동요하는 젊은 영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알베르토 코르다의 사진이 각인시킨 전사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타고 넘어 천진한 열정으로 여행을 시작한 스물세살 에르네스토와 동행하는 영화다. ‘미알’(나의 알베르토)이라는 다정한 애칭으로 친구를 부르곤 했던 그는 15년 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헌신한 혁명가라는 이유로 살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그 비극을 멀찌감치 두고, 다만 여행을 할 뿐이다. 그리고 기다린다. 에르네스토가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1952년 1월,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생화학을 전공하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를 가로지르는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난다. 스물셋과 스물아홉. 철없이 들뜬 두 청년은 포데로사라고 이
체 게바라의 젊은 한 때,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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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짱’이라는 조어를 만든 이상, 이 땅에서도 잘 가꿔진 육체가 이른바 있는 자들의 표지라는 사실쯤은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헬스클럽은 고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경쟁력을 갖춘 총아들의 메카인 셈인데, ‘목표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라는 허름한 신조 따위가 어울릴 리 없다. 허우대만 멀쩡한 체육관장 피터(빈스 본)가 운영하는 남루한 체육관 ‘애버리지 조’에 ‘몸꽝’으로 회자되는 루저들만 득실거리는 것도 대략 그 때문이다.
자타칭 마이너 감성의 배우 벤 스틸러가 제작에도 참여한 영화 <피구의 제왕>은, 그 구도에서부터 비주류의 감성을 선명하게 지지하고 들어가는 이른바 루저 코미디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두 헬스클럽은 이름에서부터 평범함을 뜻하는 ‘애버리지 조’와 아마도 세계화를 암시하는 ‘글로보’로 맞서고, 외양과 규모, 구성원들의 몸매에서까지 비교체험 극과 극을 선사한다. ‘글로보’의 주인 이름이 ‘화이트 굿맨’(벤 스틸러)이라는 사실은 농
스포츠를 빙자한 루저들의 한풀이, <피구의 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