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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하다. 보드카를 병째 입에 물고 <올 바이 마이셀프>를 온몸으로 불러젖히며 세계 만방에 자기를 알리고 한살 더 먹었지만 33살의 싱글족이란 신분은 그대로다. 알코올과 담배? 물론 이 정다운 친구들과 절연하지 못했다. 몸무게? 행복해져서일까, 통통하던 몸매는 좀 퉁퉁해졌다. 그 무엇보다 변함없는 건 브리짓 존스를 매력적이게 만들었던 그녀만의 행동거지다. 좀더 좋은 것과 좀더 나쁜 것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망설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행동하는, 그러나 이따금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를 도약시키는 재주.
그 남자들도 여전하다. 마크 다시는 냉정해보일 만큼 말끔한 표정의 기품있는 인권변호사다. 무뚝뚝한 낯빛에 그 속내가 자주 묻혀버리기는 하지만 사랑의 열정을 은근히 감춰두었다. 그래서 더 완벽한 상대가 된다. 다니엘 클리버는 섹스 클리닉을 받고 있다고 ‘신분 위장’을 해야 할 정도로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치기해가며 누군가를 침대로 끌어들이고 있다. 브리짓을 향한 유혹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연애,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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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초연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을 각색한 영화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이 원작인 이 뮤지컬은 화려하고 장중한 음악과 지하 호수까지 만든 경이로운 무대, 호러와 로맨스가 뒤섞인 스토리로 사랑받아왔다. 그러므로 감독 조엘 슈마허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전으로 안착한 소설과 뮤지컬의 무게를 이중으로 짊어지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담한 변형 혹은 충실한 복제,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면, 슈마허는 후자를 택했다. <폰부스> <배트맨 & 로빈> <타임 투 킬> 등에서 불균등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그는 제작자이기도 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그를 향한 충성에 가까운 각색을 시도했고, 뮤지컬 무대에서는 불가능했던 스펙터클만을 덧붙였다.
1919년 파리. 노인이 된 라울 드 샤니 백작은 파리 오페라극장 소장품을 판매하는 경매장을 찾는다. 극장 지하에서 발견된, 아직도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낡은 뮤직박스를 산
원작 뮤지컬의 충실한 복제, <오페라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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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원대했으나 끝은 미약하다. 최근 할리우드영화들은 독창적인 주제를 도무지 감당해내지 못한다. 훌륭한 주제들은 어김없이 샛길로 빠져 결론에 이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이라고 봐주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 멀쩡한 이야기에 자본의 잉여가 탄생시킨 쓸데없는 살덩어리가 붙여지고 있다. 이 천박함 속에서 영화는 ‘슬퍼하라, 울어라, 무서워하라’를 강요한다. 그러니 가볍게 웃어줄 수밖에. 영화가 당면한 새로운 비극이다. <포가튼> 역시 기대만발했던 시작의 꿈을 결말은 어김없이 배신한다. 탱탱했던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모성이라는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서사에 기억, 상실의 아우라를 첨가한 영화의 도입부는 꽤 신선하다. 비행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허덕이는 텔리(줄리언 무어). 아들을 떠나보낼 수 없는 그녀는 기억을 통해 아들의 존재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물건들이 사라졌음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망각의 세계에 기억을 되돌려 세상을 구원하리, <포가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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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그는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글래스고와 에든버러를 오가는 부부의 바지선에 일꾼으로 고용돼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강에서 젊은 여자의 익사체를 발견한다. 얇은 속치마만 걸친 채 떠내려온 여자의 허옇게 불어터진 시신. 그는 남몰래 시신의 등을 쓰다듬고, 경찰의 들것에서 떨어진 여자의 다리를 응시한다. 그녀는 사고를 당한 것일까, 자살한 것일까, 살해당한 것일까. 범죄스릴러의 모양새로 시작하는 <영 아담>은 뜻밖에도,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을 풀어가는 과정에 집중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담이 아니라 조다. ‘영 아담’이라는 제목은 그러니까, 인간의 선과 악, 본성과 실존의 문제를 건드리는 영화가 될 거라는, 가장 직접적인 힌트다.
여인의 익사체를 발견한 건 ‘계기’에 불과하다. 이때부터 바지선 남녀의 ‘캐릭터 반전’이 시작된다. 수줍고 우직해 보이던 그 남자 조(이완 맥그리거)는 노골적으로 바지선의 여주인 엘라(틸다 스윈튼)를 유혹한다. 엘라
검푸르고 음습한 유혹의 기술, <영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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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민병대원 치키(브랑코 쥬리치)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세르비아군한테 동료를 모두 잃고 전선 한가운데 놓인 참호 속으로 피신한다. 세르비아의 신참 병사 니노(레네 비토라야츠)도 전황을 확인하고자 참호로 들어왔다가 치키에게 동료를 잃는다. 이제 적국의 두 병사는 참호 안에서 정면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치키와 니노는 총을 뺏고 빼앗기며 주도권을 다투지만 상대방을 제거할 수는 없다. 아군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안 적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참호 안에는 또 한명의 병사가 있으니, 그는 대인지뢰 위에 눕힌 채 정신을 잃었던 치키의 동료 체라(필립 쇼바고비치)다. 그가 몸을 약간만 움직여도 세명의 목숨은 순식간에 날아간다. 결국 공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세 사람의 이상하고도 위험한 공존이 시작된다.
1992년 유고연방의 한 공화국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촉발된 보스니아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불린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곳, <노 맨스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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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에 태어난 두 남자가 액션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까불지마>의 오지명, 최불암은 모두 1930년대생이다. ‘100% 대역이겠지’라는 섣부른 판단은 거절한다. 특히 오지명은 꽤 어려운 난이도의 수차례의 ‘합’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몸을 내던진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로 와이어 액션마저 직접 해내는 그의 투혼은 인상적이다. 장동휘, 박노식과 더불어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주역으로 부상하며 150여편의 활극에 출연한 그의 과거를 고려하면 이는 납득이 되기도 한다. <까불지마>는 두 주연간에 철저히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 활극은 오지명, 드라마는 최불암, 노주현은 코미디와 드라마를 아우르며 두 사람의 가교 역할을 한다. 그래서 <까불지마>는 막가는 코미디보다는 ‘휴먼코미디’의 성격이 강한 영화다.
벽돌(최불암)과 개떡(오지명)은 동방파의 실세다. 삼복(노주현)은 구두닦이를 하다가 그들에 의해 발탁된다. 벽돌과 개떡은 후배
수사반장와 오반장의 합체, <까불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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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이미 청춘이 지난 사람들에게만 빛나는 시절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 무렵엔 대부분 실수를 많이 했고, 가난했고, 멀리 보지 못했다. 전주와 부산영화제 등을 통해 먼저 알려졌던 <마이 제너레이션>은 그런 청춘을 직시하는 영화다. 기억하는 과거라기보다는 겪고 있는 현재에 가까운 청춘을 기록한 이 영화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혹하다고 말한다. 카드깡, 빚보증, 체념, 지루한 밤. 조금도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 나이먹은 단어들이 나의 세대 혹은 우리의 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병석(김병석)은 결혼식 비디오를 찍거나 고깃집에서 불을 피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먹고산다. 그의 여자친구 재경(유재경)은 사채업자 사무실에 취직하지만 우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해고당한다. “영어공부라도 좀 해보지 그래?”라는 핀잔과 함께. 정말 그녀는 딱히 할 줄 아는 일이 없다. 인터넷 홈쇼핑에서 물건을 떼다 팔던 재경은 그나마 사기를 당하고, 빚을 갚기 위해 카드깡
청춘을 직시하는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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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진원지는 사방에 있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그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거나 또는 재수생이 되거나, 아니면 그 둘 중 무엇도 아닌 것이 실제로 돼버리는 경험을 맞이하는 그 첫해의 삶이 막막하다는 사실에 대해 대개는 알고 있다. 변영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발레교습소>는 청춘의 그 공백기에 쓰여지는 불안의 기록들을 담고 싶어한다. 영화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주인공의 시간을 다룬다.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순간에서 시작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이제 막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까지만을 다룬다. 잘난 척하며 그 너머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한다. ‘발레교습소’는 바로 그들이 모여 스스로 고민을 짜내고 해결하는 곳이다.
고3 민재(윤계상)는 몇년 전 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답답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행기 조종사인 아버지는 대를 이어 항공과에 갈 것을 종용한다. 한편 민재는 같은
소년의 말미와 청년의 초입을 돌아보다, <발레교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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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쿼바디스>가 또다시 영화로 재탄생했다. 네로 시대의 로마에서 벌어진 기독교 박해를 중심으로 로마군 장교와 기독교인 여자와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1896년에 발표된 이래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그중에서도 로버트 테일러가 로마군 장교로, 데보라 카가 기독교인으로 분한 MGM의 1951년작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한 세기가 바뀌어 폴란드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역시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영화 외적인 의미, 즉 폴란드인 감독이 자국의 고전을 마침내 연출했다는 ‘애국적’인 맥락이 눈에 띈다.
때는 기독교 탄압이 거세지던 네로 시대. 로마의 장교 마크 비니키우스(파벨 델라그)는 우연히 마주친 리기아(막달레나 미엘카시)에게 한눈에 반한다. 비니키우스는 자신의 삼촌 페트로니우스(보구슬로 린다)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페트로니우
인간이여, 어디로 가는가, <쿼바디스 도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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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분리성 정체장애 혹은 해리성 정체장애로 수정되어 일컬어지는 다중인격장애는 영화의 오래된 단골 손님이다. 실제 사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직조해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구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깝게는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 감추어놓았던 반전의 모티브이기도 했는데, <미로>는 <장화, 홍련>의 작법을 좀더 확장해놓은 듯하다.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인물을 ‘통합’하는 장치로 다중인격이란 소재를 끌어들였는데 <미로>는 그 인물군을 사방으로 넓혀놓은 것이다.
뜻밖에도 이 영화는 다중인격이란 비밀스런 설정을 처음부터 밝히고 간다. 파리의 지하에 27명의 시체가 유기된 채 발견되고 연쇄살인의 용의자로 연약한 여인 클로드(실비 테스튀)가 검거된다. 법정은 착란증세를 보이는 클로드의 정신감정을 위해 그를 병원으로 보내는데, 영화는 이 초반부터 클로드가 다중인격에 빠져 있음을 분명히 한다. 반전의 승부수는 그 다중인격의 범위
다중인격의 미로에 빠진 범죄스릴러,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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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죽는 날까지 식지 않는다면 행복할까. 한날 한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숨을 거둔다면 더 행복할까. 일견 지고지순해 보이는 이런 낭만적 연애관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발명품이지만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고, 자칫 끔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꾸로 보면 오직 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신파적 사랑 이야기가 벙어리 장갑과 털모자 노릇을 할 때도 있다.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쯤으로 요약될 <노트북>엔 직접 손으로 짠 벙어리 장갑의 따스한 분위기가 흐른다.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랑을 엮어나가는 뜨개질 솜씨 덕분이다. 누군가 손으로 공책에 써서 수십년 간직해온 이야기는 낡았을지는 몰라도 진실되다.
갈대가 흔들리는 노을진 강가를 누군가가 혼자 노를 저어가는 인상적인 도입부가 끝나면 병원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등장해 치매 걸린 할머니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껏해야 한 시간에 40센트를 버는 벌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 <노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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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는 사실은 완전 중무장지대다. 남북한의 총구가 바늘 한뼘의 공간에 모두 집중된 곳. 한쪽에서 총탄을 날리기 직전까지만 그곳은 한시적으로 ‘비무장’이다. <DMZ, 비무장지대>는 남북한의 대치 상황처럼 두 갈래의 스토리로 나뉜다. 전반부는 수색대라는 한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되는 신참 지훈과 고참 민기의 ‘아버지·아들’ 관계와 그들이 자신의 해방구인 ‘호텔 코코넛’을 꾸려가는 병영담이다. 후반부는 영화의 주제가 본격화되고 남과 북의 군인들이 자아내는 대립과 만남 그리고 그 결과인 비극을 그리고 있다.
영화학도 지훈(김정훈)은 부대 안에서 과감히 야한 영화를 상영하다가 보안대 일당에게 봉변을 당한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수색대 고참인 이민기(박건영) 병장. 그를 ‘아버지’ 삼아 보직을 수색대로 바꾼 지훈은 초소이며 자신들만의 아지트 ‘호텔 코코넛’에서 고참 권해룡(정은표)과 함께 세 사람만의 새로운 군생활을 시작한다. 긴장된 근무 상황을 제외하면 휴양지의
남과 북의 청춘들이 겪는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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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어주는 게 예의다. 비욘세의 <Crazy in Love>를 깔아놓고 <택시 더 맥시멈>은 이것이 미국영화임을 외치면서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택시 더 맥시멈>은 화제의 프랑스 액션영화였던 <택시> 시리즈를 폭스사가 리메이크한 영화.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원작의 남자들은 <택시 더 맥시멈>에서 여자주인공으로 성전환했고, 원작보다 더욱 익살맞아졌다.
‘조금 삭았던’ <택시>의 주인공 다니엘 역은 이제 볼륨 넘치는 몸매의 벨(퀸 라피타)에게 넘어간다. 벨은 카레이서를 꿈꾸는 스피드광. ‘머큐리 퀵서비스’의 1등 사원이었던 그녀는 새끈한 택시 한대를 뽑아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어쩌다 사고뭉치 형사 와쉬번(지미 펄론)을 만나 은행 강도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크린을 수놓는 오토바이의 질주와 택시의 짜릿한 속도감은 <택시> 시리즈의 그것을 그대로 빼닮았다. 불법개조해 성
<택시> 시리즈의 짜깁기 축약본, <택시 더 맥시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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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행어사>는 시대물이 아닌 하드보일드한 형사물이다. 주인공 문수가 주어진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방식의 이야기구조는 감독 시무라 조지의 전작 <마스터 키튼>을 답습한다. 배경을 인물과 분리하고 캐릭터의 세부에 정성을 기울이는 극화 방향도 이러한 내러티브의 구조와 연결된다. 스토리의 배경인 춘향전, 박문수, 유의태 등의 역사적 장치들은 이야기 진행을 위한 의사(擬似)- 역사적 장치로 축소된다. 주인공 문수가 “기적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되뇌이는 모습은 <무사 쥬베이>에서 그저 주어진 미션에 충실히 임해가던 ‘쿨가이’ 닌자 기바카미 쥬베이와 닮았다. 두 인물에게 존재론적, 사회적, 역사적 정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과 적으로 남겨진 세상뿐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축소되는 차원을 넘어 소거되고 역사성은 탈각된다.
문수는 망해버린 쥬신국의 홀로 남은 암행어사다. 사막을 건너던 그는 암행어사가 되기 위한 과거에
한·일 합작 극장애니메이션 1호 하드보일드 형사물, <신암행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