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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에 루키노 비스콘티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꽤 비장한 생각을 갖고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스크린 위로 옮겨내려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해롤드 핀터가 동참했던 조셉 로지의 뒤이은 ‘프루스트 프로젝트’도 실현에 이르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영화는 알랭 레네의 예에서 보듯 프루스트로부터 신선한 자극과 심원한 배움을 드물지 않게 구해왔음에도 방대함과 심오함과 복잡함이 뒤엉킨 프루스트의 실지(實地)마저 감히 정복하진 못했다. 실제로 영화화 프로젝트에 돌입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미신에 가까운 두려움을 가졌었다는 비스콘티의 태도는 프루스트란 대작가를 곤혹스럽게 대하는 영화 자체의 전반적인 태도와 통하는 데가 있지 않나 싶다.
영화가 프루스트에 대한 그 같은 두려움 혹은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최근의 일인데, 그 공로는 <되찾은 시간>(1999)의 라울 루이즈에게 돌아
헛된 욕망을 자재로 구축된 미로 같은 세상, <갇힌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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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현대영화 또는 모던 시네마의 시작으로 불리는 몇 편의 유럽 영화가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정사>를, 브레송이 <소매치기>를 모두 이 해에 만들었다. 그리고 알랭 레네는 첫 장편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었다. 레네는 출현과 동시에 영화 사유의 뇌관을 뒤흔들었다. 그럼으로써 고전에서 현대로 영화의 축을 전환시킨 영화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위치를 부여받았다. “레네와 함께 영화의 이미지는 공간과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위상학과 시간의 문제가 되었다”는 철학자 들뢰즈의 선언은 그래서 나왔다. 공간상의 운동을 보여주는 장치로서의 영화를, 주름 접힌 시간을 유영하는 타임머신으로서의 영화로 탈바꿈시키는 이론적 혁신에 성공한 것이었다. 영화감독이 무슨 이론적 혁신이냐고 반문하겠지만, 레네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만드는 실천적 영화 이론가였다.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
인간 행동학에 대한 드라마적 교육, <내 미국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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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가의 장남 에버렛(더모트 멀로니)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애인 메리디스(사라 제시카 파커)와 함께 집에 돌아온다. 에버렛은 외조모의 결혼반지를 물려받아 메리디스에게 청혼하려고 하지만, 어머니 시빌(다이앤 키튼)과 여동생 에이미(레이첼 맥애덤스)를 비롯해 가족 대부분이 그녀를 싫어한다. 메리디스에게 호감을 표하는 유일한 가족은 둘째 남동생 벤(루크 윌슨). 그러나 벤이 메리디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다. 메리디스를 응원해주기 위해 달려온 여동생 줄리(클레어 데인즈)와 에버렛 사이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영화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명절이다. <패밀리 맨>처럼 천사가 인생을 되돌려주거나 <산타클로스>처럼 진짜 산타가 찾아오지는 않더라도, 가능하리라 믿지 않았던 사랑이나 화해가, 신의 섭리처럼 찾아들곤 한다. 가족과 로맨틱코미디를 결합한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또한 그러한 기적을 믿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영화,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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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으로 인생이 달라졌다는 이들은 허다하지만, 그 영화를 기어코 자기 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감독은 흔치 않다. 아홉살 나이에 <킹콩>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피터 잭슨이 바로 그 희귀 케이스다. 철사 뼈대 위에 어머니의 모피 조각을 입혀 만든 킹콩 인형, 판지로 지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조악하게’ 시도했던 리허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 2억700만달러 규모의 3시간짜리 영화로 다소 ‘거하게’ 실현됐다.
피터 잭슨은 1933년작 <킹콩>의 골격을 그대로 가져왔다. 무모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은 우연히 발굴한 여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를 내세워 신작을 찍기로 하고 미지의 섬으로 향하는데, 이 여정에 동행한 작가 잭 드리스콜(에이드리언 브로디)은 앤과 로맨틱한 사이로 발전한다. ‘해골섬’으로 불리는 촬영지에선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앤은 섬을 지배하는 괴물 킹콩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킹콩은 앤을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피터 잭슨의 시도, <킹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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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출신인 해적 씬(장동건)은 어린 시절 망명을 거부당해 일가족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그 이후 남한과 북한을 모두 증오하게 된 씬은 핵위성유도장치를 손에 넣고 20년 동안 마음에 품어온 복수를 시작하려 한다. 씬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은 해군 대위 강세종(이정재). 충직한 군인 강세종은 씬의 흔적을 좇다가 러시아에 어릴 적 헤어진 씬의 누나 최명주(이미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를 미끼 삼아 씬과 대면하게 된다. 강세종은 맨몸으로 중국 땅을 헤맸던 남매에게 동정과 우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친구> <챔피언>의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태풍>은 그동안 흥행기록을 세웠던 한국영화들과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남매애로 대치된 형제애와 전쟁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닮아 있고,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남자들 사이의 공감은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아 갈 곳이 없어진 남자는 <실미
감정을 싣지 못한 거대한 스펙터클,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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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사랑이란 없다. 적당한 우연과 강철 같은 의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사랑은 만들어진다. 사랑의 완성이란 곧 거듭되는 노력의 결과다. 그 짜릿한 사랑의 느낌이 그렇게 공들여 만들어낸 것이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운명처럼 온 것이라고 그냥 속고 마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렇게들 산다.
영서는 운명 같은 사랑을 점지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동전을 떨어뜨리지만 웬걸, 사랑은 고사하고 헛웃음만 흘린다. 하지만 그에게도 ‘예정대로’ 우연은 찾아온다. 관광 안내를 맡았던 손님이 지갑을 도둑맞고, 그 소매치기는 ‘하필이면’ 태희쪽으로 도망친다. 태희는 소매치기의 칼에 손가락을 다쳐 영서의 치료를 받게 되고, 영서는 컵라면을 먹고 있는 태희를, 태희는 교통경찰과 승강이하는 영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제주도라는 관광지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실제로 몇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태희를 영서가 버스에 태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태희는 휴대폰을
캐릭터로 끌고 가는 멜로영화, <연풍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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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그 제목과 2차 세계대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는 점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칠>은 처칠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관객의 지식과 영화에서 창조한 상상의 세계를 서로 어긋나게 하고, 이로부터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미디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필요로 하는 관객의 세계사적 지식은 이들 인물이 얼마나 뒤틀리게 재현되는지를 알 정도면 충분하다(물론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영국의 명문가 출신으로 2차대전 당시 노년의 나이였던 처칠을 미국 국적에 20대의 젊은 장교로 회춘시키고,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암컷을 꼬드기는 수컷의 작업 기술로 변형시키는 것만으로 <처칠>의 웃음 유발 전략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인물의 전도는 처칠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아이젠하워(로마니 말코)는 백인 조력자 역할을 충실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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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면 어둡고 광활한 러시아 숲의 초입에 성큼 들어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트 워치>는 러시아판 <반지의 제왕>이다. 그러나 이 진술의 방점은 ‘러시아판’에 있다. <반지의 제왕>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점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역사성이다. 여기엔 천년 가까운 어둠의 세력과 빛의 세력의 대결이 있다. 단 두 사람이 싸우는데, 천년 동안 싸워 온 전사들이 모두 호출된다. 선과 악의 엄청난 대결이 아니라, 싸움 하나에도 역사적인 의미를 두고 과거사를 들춰 보이는 과장된 진지함이 있는 것이다. 선은 악을 품고 있고, 악에도 선이 있으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판타지라 해도 무방하다.
흡혈귀와 마법사와 둔갑술사가 활약하는 걸 보면 조잡해 보이는 <블레이드> 연작이나 <언더월드>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이트 워치>만의 영상언어는 그것보다 더 형이상학적이며, 판타지 장르에 훨씬 더 깊이 들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판타지, <나이트 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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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일까? 많은 영화에서 그것은 이웃과 ‘공식적으로’ 화해하기 위한 날로 쓰인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자신보다 이웃을 생각할 것. 소외된 사람이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을 것. 이런 것들이 일반적인 크리스마스의 의미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건너뛰기>의 주제는 화합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화합이 단순히 ‘크리스마스’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회합’으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성대하게 치르던 루더(팀 앨런)와 노라(제이미 리 커티스) 부부는 올해만큼은 특별하게 보내려 한다. 지난해 예산의 절반으로 카리브해 크루즈에서 멋진 휴가를 보내겠다고 결심한 부부. 그들은 매년 해온 기부를 거부하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조차 하지 않는다. 헴록 스트리트의 사람들은 곧 부부를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그린치’와 같은 괴물로 인식해버린다. 부부의 불참으로 인해 지역 신문에서 주최하는 경연대회에서 이길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이기적인 ‘크리스마스 화합’ 프로젝트, <크리스마스 건너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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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주인공들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남자, 여자로 불러달라고 한다. ‘묻지마 연애’를 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든 영화를 보면 남녀주인공의 상황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는 제작진의 믿음 때문이다. <애인>의 보도자료 첫머리에는 한 설문 조사를 빌려 이렇게 쓰여 있다. 40% 넘는 기혼여성이 교제 중인 애인이 있다고, 현재 애인이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애인을 갖고 싶다는 의견도 60% 가까이 된다고.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결혼. <애인>은 캐묻지 않아도 현재 한국의 남녀들이 결혼에 대해 갖고 있는 딜레마를 겨냥해서 기획된 영화로 보인다.
결혼을 앞둔 한 여자(성현아)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남자(조동혁)는 한 여자에게 접근한다. 한 여자는 한 남자의 느닷없는 제안을 물리치지만, 한 여자와 한 남자는 다시금 우연히 재회하고, 서로에 대한 호감을 몸으로 확인한다. 한 남자는 어차피 내일이면 비행기 타고 아프리카로 떠
서사도, 감정도 없는 그들만의 섹스,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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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2001)를 만들고 난 다음에도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라는 문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란 땅에 넘어온 아프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프간 알파벳> 을 이듬해에 만든 그는 이후로는 아예 이 다큐멘터리가 다룬 문제 속으로 직접 발벗고 뛰어드는 활동을 하며 몇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그의 필모그래피는 누적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그는 아프간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이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이 뜨거운 심장을 가진 행동주의자 마흐말바프가 3년 만에 신작을 내놨으니 그것이 바로 <섹스와 철학>이다. 그런데 유별난 제목에서도 이미 그 분위기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듯이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마흐말바프의 최근 행보와 합치하는 유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철학>은 마치 그가 그간의 참여적 달음박질을 멈추고 잠시 숨고르기를
인간의 조건으로서 사랑의 문제를 탐구하다, <섹스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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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에 수록된 단편 <미라>는 잔잔하지만 매우 극렬한 연애담이다. 재밌는 건 1인칭 화자인 여성이 가진 연애의 기준이다. ‘그 사람이 추잡한 상상 속에서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루든 내가 용납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녀는 추잡한 상상을 허용하는 남자와만 연애를 해왔다(그렇다고 추잡한 상상을 실천에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다). 사건은 그녀가 이 기준을 처음 어기면서 벌어졌다. “용납을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공격적인 섹스에만 몰두하는 남자와 짧고 굵은 만남을 갖게 된 거다. 가능성 높았던, 극단적인 결말은 두 가지였다. 18년간 함께 살았던 고양이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미라로 만들었듯 그가 그녀를 미라로 만들거나, 그녀가 그의 머리를 으깨 죽이거나.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어느 쪽이든 그리 나빴을 것 같지 않다고 회고한다.
<연애>의 어진(전미선)은 <미라>의 그녀와 다르면서도 비교할
연애는, 미친 짓이다,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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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올해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계는 ‘아부지 어무니’의 손을 부여잡고 5편이나 되는 영화를 내놓았다. <미트 페어런츠>의 속편 <미트 페어런츠2>, <미트 페어런츠>의 재탕 삼탕 격인 <게스 후?> <퍼펙트 웨딩>, 현실을 담백하게 풀어낸 <인 굿 컴퍼니>. 그리고 ‘37살의 이혼녀가 23살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자기 카운슬러의 아들이더라’는 줄거리의 <프라임 러브>다.
<게스 후?>와 <퍼펙트 웨딩>이 같은 이야기의 남녀 버전처럼 보인다면 <프라임 러브>는 여러 면에서 <인 굿 컴퍼니>와 닮았다. 나이든 A와 젊은 B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고, B가 A의 아들(딸) C와 사랑에 빠지면서 세 사람은 껄끄러운 입장이 된다. ‘로맨틱’을 담당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B와 C요, 그들을 못마땅해하는 A가 ‘코미디’를 감당한다. ‘갈등 해소
인생을 성숙시키는 로맨틱코미디, <프라임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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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하고 아는 여자는 떠난다. 이것이 <브로큰 플라워>의 이상한 시작이다. 돈 존스턴(빌 머레이)에게 당도한 편지는 말한다. 19년 전 그가 알지 못하는 동안 옛 애인이 낳아기른 아들이 생부를 찾으러올 테니 놀라지 말라고. 한편 동거를 청산하고 떠나는 여자 셰리(줄리 델피)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마치 당신의 정부(情婦)처럼 느껴져요. 당신은 결혼도 안 했는데 말이죠.” 이중의 곤혹스런 사태를 맞은 이 남자의 대처라곤, 소파에 털썩 눕는 것이 전부다. “컴퓨터 사업으로 돈을 꽤 벌었다”는 언급 외에 그가 왜 화려한 연애 편력과 사업에서 은퇴했는지 암시하는 단서는 거의 없다. 아니, 어쩌면 있다. 여자들은 이 남자가 ‘쿨한’ 방식으로 걸어잠근 마음의 문 뒤쪽에 정작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떠났을 것이다.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는 흔히, 순수하고 열정적인 이방 출신이 무감동한 미국인을 충동질해 인생의 정
배우 빌 머레이가 베푸는 향연, <브로큰 플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