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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성장의 아이콘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주인공일 때에는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고, 미성숙한 어른들이 주인공일 때에는 그들이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은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순진한 아이는 세상의 비열함과 직면하면서 순진함에서 벗어나고 폭력적인 현실을 인식하면서 어른이 된다. 그러나 비열한 세상과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어른들은 어린이의 순수함과 대면하면서 본래의 자아를 되찾는다. 그러니까 전자는 순수함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후자는 순수함과 재회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박광수 감독의 신작 <눈부신 날에>는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한 남자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딸을 만나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삶을 제대로 살기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야바위판의 바람잡이 우종대(박신양)는 깡패나 조폭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폼 안 나는 날
‘가족’이란 무엇인가 <눈부신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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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따윈 몰라>는 카뮈의 소설과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들을 밑그림으로 해서 일본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려낸다. 일본 대학생들이 영화를 찍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 <이방인>은 영화 속 영화로 변주되고, <Day for Night> <아델 H의 이야기>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 응용된다. 영화는 월요일에서 시작되어 그 다음주 화요일까지 9일 동안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영화제작은 당연히 험난한 과정을 겪으며 진행되고 학생들은 지쳐간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연배우가 출연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생기고 조감독은 다른 배우를 섭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다행히도 물망에 올린 다른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어 이 문제는 해결되지만 또 다른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터져나온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인 이들 청춘남녀에게 고민거리는 두 가지밖에 없다. 영화 혹은 연애는 그들이 당면한 현실이자 고뇌이자 이상이다. 따라서 &l
영화를 만드는 일본의 청춘들 <카뮈 따윈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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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셰퍼드>를 소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미국의 쿠바 공습 실패에 이르기까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시절부터 살펴보는 초기 CIA 이야기. 혹은 로버트 드 니로가 <브롱스 테일> 이후 13년 만에, 맷 데이먼과 안젤리나 졸리와 윌리엄 허트와 알렉 볼드윈과 존 터투로와 조 페시까지 거느리고 만든 두 번째 연출작. 전자의 방식으로 택할 경우 관객의 기대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첩보기관의 대명사 격인 CIA의 기원을 다뤘다는 면에서 <007> 시리즈를 비롯한 첩보스릴러물의 계보를 따르거나, 미국이 CIA의 힘을 빌려 전세계 내전에 개입한 내막을 파헤친 정치드라마의 길을 가거나. 그러나 1961년의 냉철한 첩보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이 내부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과 1939년 예일대학의 문학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시를 쓰던 에드워드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의 궤
가족멜로가 되버린 첩보물 <굿셰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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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이지스>는 젊은 일본인 사관생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방패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고 군함에 사용되는 최첨단 방어시스템인 ‘이지스’를 들먹이며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과연 방어가 자신을 지키는 방안이 될 수 있을지 회의한다.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제공격을 할 수 없게 된 자국의 군대를 일깨우는 그의 목소리에선 가느다란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이렇듯 이 영화는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인 센고쿠 상사(사나다 히로유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반전 메시지를 담으려 하지만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한편 첫머리에 제시되는 사관생도의 주장을 순수하고 애국적인 것으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진정 평화를 지향하는지 의심케 한다.
사건이 발발하는 곳은 이지스 시스템을 구축한 일본 군함 이소카제함. 군사 훈련을 위해 바다로 출격한 이소카제함에 함대훈련소에서 나왔다는 미조구찌 대위(나카이 기이치)와 야마자키 소위가
강한 일본에 대한 열망 <망국의 이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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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일본 자위대 소속의 제3 특별실험 부대가 비밀 실험 중 전국시대에 착륙한다. 이처럼 현재의 인물이 과거로 이동해 기존의 역사를 훼손하자 일본 곳곳에 정체불명의 허수공간인 ‘홀’이 나타나 인류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에 특별실험 부대를 구출하는 한편 손상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마토바 잇사(가가 다케시)가 이끄는 로메오 부대가 꾸려지고 한때 마토바의 휘하에 있었던 카지마 유스케(에구치 요스케), 비밀 실험에 책임을 느끼는 칸자키 레이(스즈키 교코), 전국시대 사무라이 이누마 시치베(기타무라 가즈키) 등이 여기에 합류한다. 당시와 태양의 자기장이 같아져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2005년, 로메오 부대는 1954년으로 옮겨가 마토바와 만나지만 오다 노부나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는 더욱 강한 일본을 건설할 야심으로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다. 미래로 가는 길이 다시 열리는 시간은 74시간27분 뒤. 현재로 돌아오기 위해선 이 시간 내에 마토바의 계략을 저지한 다음 도착한 곳
일본 자위대의 시간여행 <전국자위대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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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처일기>는 일본 작가 시게마쓰 기요시가 쓴 동명의 연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옴니버스영화다. <비타민 F>로 나오키상을 받았고, <소년, 세상을 만나다> <나이프>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시게마쓰 기요시의 이 소설은 <하얀방> <동심> <애처일기> <연기가 눈에 스며든다> <향연> <작은 소스병> 등 6편으로 이뤄져 있는데, 모두 부부 관계를 소재로 삼아 다양하고 관능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쇼치쿠, 포니캐년 그리고 일본위성극장이 손을 잡고 함께 제작한 영화 버전 <애처일기> 또한 원작과 마찬가지로 6편으로 구성됐지만,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동심>과 <향연> 두편이다.
<동심>의 주인공은 주택가에 살고 있는 주부 후지사와 요코(나카하라 쇼코). 그녀의 삶은 별다른 자극이나 변화없는 평범함 그 자체다. 남편 신이
두 남녀의 접붙이기 <애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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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코믹스의 익히 알려진 매력은 혼란스러운 괴력이 확신에 찬 괴력과 싸운다는 데 있다. 스파이더 맨은 흉측한 거미인간이 된 대가로 힘에 대한 조정자와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 사이에서 줄타기 곡예를 벌여야 한다. 4500만부의 책을 팔아냈다는 <고스트 라이더> 역시 이 범주다. 악마 메피스토텔레스(피터 폰다)에게 영혼을 판 바이크 스턴트맨 자니 블레이즈(니콜라스 케이지)는 불멸의 힘과 굴종의 노예라는 이중의 캐릭터가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빌려온 흥미로운 구도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으려 했던 지적 욕망 탓에 유혹을 자초했던 파우스트와 달리 자니는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영혼을 건다. 욕망이 스스로에 향해 있다기보다 애초부터 일방향의 희생정신에 봉사한다. 마블 코믹스 캐릭터의 복합적 갈등이 일차방정식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오히려 흥미로운 구도는 아들 블랙하트(웨스 벤틀리)가 아버지 메피스토펠레스를 없애고 세상에 군림하려는 반역이다. 아버지 메피
우왕좌왕하는 거대한 함대 <고스트 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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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가 어렵게 재회한 곳이 백사 노인의 칠순잔칫집이다. 송화는 님과의 이별을 아파하는 소리로 심금을 울리지만, 서릿발 같은 조 명창에게 ‘모욕’당한다. 소리를 내면서도 그 소리의 뜻과 법을 모르니 한심하다는 것이다. 상전(뽕나무밭)이 벽해(푸른 바다)로 바뀌는 긴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간절하게 드러냈지만, 송화는 상전의 뜻을 몰라 ‘쌍전’으로 소리냈던 터였다. 송화를 감싸준 건 동호가 아니라 주인장 백사 노인이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 듣기 좋으면 그만이지.”
예술의 생명은 법도로 따질 게 아니라 그 값어치를 매겨줄 손님의 손에 달리긴 했다. 그런데 백사 노인은 소리만 품은 게 아니라 송화의 몸뚱이까지 안았다. 친일의 대가로 해방 뒤에도 호사를 누리는 노인은 고운 송화의 소리에 감싸여, 눈처럼 휘날리는 희디흰 꽃송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세상을 뜬다. <천년학>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이다. <천년학>은 그렇게 아름다워 슬프다.
아름다워 슬픈 영화 <천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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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리브스는 1950년대 미국의 영웅이었다. 1951년부터 58년까지 방영된 TV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하나로 리브스는 18년간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단숨에 미국 모든 서민 가정과 아이들의 꿈이자 이상이 되었다.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91%까지 치솟았다. 소년들의 방에는 슈퍼맨 타이츠가 하나씩 구비되어 있었다. 8년간 리브스는 다른 영화들에 출연해서는 대중과 할리우드의 인정을 좀처럼 받지 못했다. 리브스는 <슈퍼맨의 모험> 첫 방영 무렵에 이미 MGM의 사업부장 에드거 매닉스의 아내이자 8살 연상인 토니 매닉스와 연인 관계를 지속 중이었는데, 할리우드의 모든 이가 알았지만 공식화된 적은 없는 이들의 관계는 1958년 중반 리브스가 젊은 배우지망생을 사귀면서 끝났다. 이듬해 6월16일 리브스는 자신의 침실에서 관자놀이에 총알이 박힌 채 발견됐다. 공식적으로 조지 리브스는 자살했다.
타살에 관한 의혹과 주장들에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조지 리브스
위험한 진실, 할리우드의 이면 <할리우드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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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 도쿄에서 2년째 자취 중인 청년 쇼(에이타)의 생활은 무기력하다. 이는 여자친구 아스카(시바사키 고우)도 확인하는 바다. “너랑 있으면 사는 게 재미없어. 아니 사는 게 싫어져.” 그러던 어느 날 쇼는 조그맣고 흰 상자를 든 아버지의 방문을 받는다. 상자 안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고모 마츠코(나카타니 미키)의 유골이 들어 있다. 20대에 집을 나간 그녀는 53살에 이르러 아라카와 강변에서 맞아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아버지의 당부로 망자의 아파트를 정리하던 쇼는 고모의 유품과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 명랑한 소녀가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이웃에게 불리기까지 걸어온 가시밭길을 알게 된다.
성실한 고교 음악교사였던 20대의 마츠코. 그녀는 수학여행 도중 절도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 류 요이치를 감싸려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가 누명을 쓴다.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그녀가 가진 성격의 치명적 결함은 상대방을 일단 기쁘게 해주고 보자는 충동. 그리고 윽박지르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해버리
삶의 달인 마츠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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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극락도 살인사건>을 여는 첫 번째 컷은 멀리서 바라본 극락도의 전경이다. 검은 파도를 겹겹이 두른 그 모습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누군가처럼 비밀스럽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오페라 극장 살인사건>) 등 밀실연쇄살인 추리물의 대표작들 역시 모두 등장인물이 외딴섬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스무명을 넘지 않는 등장인물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시체 수에 비례하듯 남은 이들의 갈등과 광기는 증폭되며, 인간의 추악한 욕망 혹은 본성이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섬이라는 물질적 공간은 심리적 공간이자 주제를 은유하는 공간으로 확장·변주된다. 제한된 공간 속 익숙한 얼굴들 중 누군가가 범인이라는 공포가, 눈앞에 펼쳐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박한 고립감이, 섬이라는 공간을 택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제목이 자신이 속한 장르와 심지어 줄거리의 일부까지 명시하
순수한 장르적 쾌감 <극락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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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대위 마르첼리(브누아 마지멜)는 프랑스 최고의 파일럿이라 인정받는 실력자. 어느 날 절친한 동료인 발로아(클로비스 코르니악)와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대열을 이탈한 전투기 미라지 2000과 마주하고 발포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발로아를 위협하던 미라지 2000을 격추시키고 만다. 그리고 군사 재판에 회부돼 지위 해제될 위기에 처한 그들 앞에 스페셜 미션팀의 수상보좌관이 나타난다. 사건에 의혹을 갖고 있던 보좌관은 그들에게 미국 전투기와의 비행 시합을 제안하고 하늘을 떠나 살 수 없었던 이들은 이 위험천만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에 중동의 무기상, 한때 마르첼리와 사귀었던 미국인 파일럿 카스, 또 다른 미국인 파일럿 헤짓 등이 끼어들며 사건은 한층 복잡해진다.
<마하 2.6: 풀스피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스피드에 집착하는 영화다. 마하 2.6은 시속 3000km를 넘어서는 속도. 프랑스 전투기 미라지 2000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을 의미한다.
스피드에 집착하는 영화 <마하 2.6: 풀스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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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파 중간 보스 인구(송강호)는 전원주택으로 이사가 청과물 도매업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어한다. 친구 현수(오달수)의 조직과 충돌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아파트 시공사업권을 따낸 인구는 한밑천 장만해 은퇴할 꿈에 부풀지만, 보스 노 회장의 동생인 노상무(윤제문)가 이권을 탐내 그 앞길을 가로막는다. 게다가 가족문제도 있다. 아내 미령(박지영)은 손을 씻겠다는 약속을 십년 동안 지키지 못한 남편에게 실망해 친정으로 떠나버리고, 10대인 딸 희순도 깡패인 아빠를 부끄러워한다. 인구는 가족을 되찾고 손을 씻기 위해,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도시를 헤매며 분투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삶은 조금씩 무게를 더해간다. 스무살 무렵 인구는 거칠고 사나워서 세상이 두렵지 않은 젊은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흔한살 먹은 인구는 피곤한 남자일 뿐이다. 그는 오래되어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아들을 유학보내고, 조그만 가게라도 장만하기 위해 사람을 패고, 파멸을 바라보면서도 인정을
피로로 가득 찬 영화 <우아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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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관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엄마는 딸이 안타깝고 딸은 그런 엄마가 거추장스럽다. 애증을 오가는 모녀 관계는 대프니 와일더(다이앤 키튼)와 그녀의 막내딸 밀리(맨디 무어) 사이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대프니가 평범한 엄마보다 100배는 극성스런 엄마라면 밀리는 평범한 딸보다 100배는 더 걱정스러운 딸이기 때문. 그도 그럴 것이 시집가서 잘사는 언니들에 비해 밀리의 연애사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밀리가 만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고 그런 남자들조차 매번 그녀를 배반하거나 차버리기 일쑤인 것. 보다못한 대프니는 인터넷에 딸의 애인을 구한다는 광고를 내걸고, 돈 잘 벌고 집안 좋은 건축가 제이슨(톰 에버렛 스콧)이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려든다. 한편 딸에게 소개할 남자들을 면접하던 대프니를 지켜보던 음악가 조니(가브리엘 매치) 역시 우연히 밀리와 마주치고 그녀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연애운이 지지리도 없다 졸지에 양다리까지 걸치게
힘을 잃은 모녀 관계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