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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물이며, 왜 눈인가. 저주받은 물을 소재로 고독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하는 영화 <데스워터>는 임팩트가 없다.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기자가 음침한 공간을 따라가지만 영화는 100분이 넘는 상영시간을 단 한번의 놀램도 없이 지루하게 끌고 간다. 물론 일본 공포영화의 리듬이 한국처럼 가파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데스워터>는 <주온>의 스산한 공포를 전해주지 못한다.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감독이 소재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 저주받은 물을 마신 사람에게 환각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은 질병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해도, 물에 대한 공포가 눈에 비치는 세상에 대한 공포로 변주되는 과정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특히 <데스워터>는 천천히 분위기를 조성한 뒤 공포적 요소를 등장시키는데, 그 타이밍이 꼭 한 박자씩 느리다. 그리고 그 장치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사건을 따라가는 기자의 발걸음은
한 박자씩 느린 공포 <데스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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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960년대는 뜨겁기만 한 시대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스코트 매킨지), 사랑할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찾아 헤매는(제퍼슨 에어플레인)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클럽 ‘맥스 캔자스 시티’의 어두운 무대에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냉소적이고 전위적인 록음악 연주에 몰두했다.
반전과 평화를 목놓아 외치는 뜨거운 세계의 다른 한편에 차가운 아방가르드의 지하세계가 있었다. 실험적인 연극에서 미니멀리즘적인 팝아트까지, 60년대 뉴욕 맨해튼의 예술계는 언더그라운드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정점은 앤디 워홀이었다. ‘팩토리 걸’은 스스로 ‘공장’이라고 불렀던 자신의 창작 스튜디오 안에서 현대 예술의 혁명을 제조했던 앤디 워홀의 여자, 에디 세즈윅에 관한 영화다.
1965년,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파티에 들렀다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
예술가 그룹의 내부 엿보기 <팩토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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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속 홍콩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아틀란티스나 희망봉처럼 특정한 정서의 기호다. 사연없고 치떨리는 기억 하나 없는 도시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1997년 중국 반환과 21세기 들어 홍콩을 엄습한 전염병은, 홍콩을, 뿌리 뽑힌 자의 만성적 고독과 사춘기적 불안을 도맡아 상징하게 만들었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은 그 이미지에 아예 ‘무간지옥’, ‘상처받은 도시’라는 이름을 붙여 영화 제목으로 앞세웠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영어 제목은 ‘고통의 고백’(Confession of Pain)이다. 고통받는 자들은 이번에도 두 남자다. 양조위와 금성무는 1995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나진 않고 따로따로 방황했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에서도 둘의 성격은 <중경삼림>의 캐릭터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12년 전 연인을 떠나보내고 한밤중 스낵 코너에 말없이 들러 요기를 하던 양조
고통받는 두 남자 <상성: 상처받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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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TV의 인기 공포 시리즈였던 <전설의 고향>에는 소복귀신이 마스코트처럼 등장하곤 했다. 하얀 옷의 긴 머리 여인이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눈으론 독기를 내뿜었다. 여인의 한풀이성 저주는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드라마와 더불어 스르르 마무리되곤 했다. 극장판 <전설의 고향>은 핏줄기 대신 사다코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차갑게 응징만 가하는 버전으로 변형됐다.
어린 쌍둥이 자매가 물에 빠져 언니 소연(박신혜)만 살아 나온 지 10년, 잔혹한 죽음의 행렬이 시작된다. 쌍둥이 자매에게 행했던 무언가를 감추어온 (듯한) 이들은 마치 응징처럼 죽임을 당하고, 10년 만에 의식을 차린 소연은 뒤죽박죽된 기억 속에 혹시 자신이 인간의 얼굴을 한 귀신은 아닌지 불길한 흔적들을 뚝뚝 흘리고 다닌다. 소연의 흔들리는 정체가 긴장 유지 장치의 일종인지 순수한 공포를 은밀히 감싸는 연막장치인지는, 대부분의 호러물이 그렇듯,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려야
사다코로 변한 소복귀신 <전설의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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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항상 집착으로 변해가는 걸까. 와타나베 마모루 감독의 2004년작 <도쿄 욕망>은 첫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소녀의 아픈 성장기다. 12년 전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여고생 유카(오다기리 리사)가 그 주인공. 유카는 9살 무렵 사촌인 리에코(사토미 요코)가 결혼할 상대라며 데려온 남자 이노우에(시모모토 시로)에게 한눈에 반한다. 좋아하지만, 고백할 수 없는 상황. 16살까지 혼자 속앓이를 해오던 유카는 리에코 부부가 같은 동네로 이사오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도 점점 커져 이노우에를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연출을 맡은 와타나베 마모루 감독은 일본 AV 영화계의 대표적인 중견감독이다. 1965년 데뷔작을 만든 이래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이 200편이 넘는다. 주로 감수성이 강한 에로틱 드라마를 만들어온 와타나베 감독은 <도쿄 욕망>에서도 10대의 첫사랑과 속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10대의 첫사랑과 속마음 <도쿄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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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삶에서, 건강한 욕망을 찬양하고 웃음으로 거짓 정치를 비웃는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 걸작 3부작의 완결편. <가까이서 본 기차>와 <줄 위의 종달새>가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했고, 1991년작 <거지의 오페라>가 마지막으로 관객을 찾는다. 앞선 두 작품이 체코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면 <거지의 오페라>는 극작가이자 벨벳혁명을 주도한 끝에 체제 붕괴 뒤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이후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바츨라프 하벨의 희곡을 스크린에 옮긴 결과물이다. 거지들의 왕국을 지배하는 대도(大盜)와 그가 결탁한 권력자와 정부(情婦)들의 이야기 <거지의 오페라>는 18세기 초 런던에서 초연된 동명의 대중 오페라가 기원이며, 브레히트가 <서푼짜리 오페라>로 각색한 풍자극의 고전이기도 하다.
값비싼 보석부터 값을 매길 수 없는 여인의 마음까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매키
이리 멘젤 3부작의 완결편 <거지의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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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터너(올랜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시)이 싱가포르의 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간다. 이유는 바다괴물 크라켄한테 잡아먹힌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구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이들은 잭 스패로우가 있어야만 해적연맹의 아홉 영주를 모아 연합함대를 구성할 수 있고, 해적 소탕에 쌍심지를 켠 동인도회사에 맞설 수 있다. 동인도회사의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은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과 그 선장 데비 존스(빌 나이)를 수하에 거느리게 된 터. 이 힘이 막강해서, 해적 연합함대는 다시 바다의 여신 칼립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는 끝없는 바다의 크기를 체험하려는 듯 전편들보다 더 멀리 노를 저어 아시아로 나아간다. 주윤발이 고약한 심보를 가진 해적으로 출연한다는 건 오래전에 노출된 사실. 전편들의 스펙터클에 밀리지만 않는다면 이번 3편의 재미도 어느 정도는 보장돼 있다. 축축하고 원시적
선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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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불행한 여자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난 감쪽같이 다시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기만 하면, 그럴 수만 있다면…. 신애(전도연)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 준(선정엽)을 데리고 이사한다. 밀양 오는 길에 고장난 차를 고쳐주러 온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에게 신애는 문득 묻는다. “밀양의 뜻이 뭔 줄 아세요? 비밀의 햇볕이래요.” 그녀의 인생은 의미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종찬은 이 속모를 여자를 그날부터 졸졸 따른다. 늘 네댓 걸음 뒤에서, 부르면 다가서고 밀쳐내면 물러나면서.
사실 남편이 신애를 떠난 건 죽음이 처음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을 사랑했었다. <밀양>은 시작이 시작이 아니고, 끝이 끝이 아닌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신애는 먼 길을 걸어왔고 영화가 끝나도 신애에게 끝난 일은 없다. 2시간20여분의 러닝타임은 툭 베어낸 생의 고약한 한 토
타인과 끝내 나눌 수 없는 고통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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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린 자식도 많아 여섯 식구. 아빠는 도박에 빠져 있고, 엄마는 끊이지 않는 부부싸움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 남겨진 네 남매. 술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빠는 허구한 날 방구석에 드러누워, 첫째 윤숙이(김유나)가 구두를 닦고 신문을 팔며 생계를 꾸린다. 하루하루가 힘든 고통의 연속이지만 언젠가 행복이 찾아올 거란 믿음을 놓지 않는 아이들. 80년대 연속극에서나 볼 법한 눈물의 가족 이야기는 1964년 출간된 에세이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원작이다. 13살 아이 이윤복의 일기를 당시 학교 선생님들이 모아 출간하면서 화제가 된 작품. 1965년에는 김수용 감독이 같은 제목의 영화를 연출했었다. 4명의 신인 아역배우들이 네 남매로 출연하며 TV드라마 <아들과 딸> <신돈> 등으로 익숙한 윤철형이 아빠 역을 연기했다.
아이들의 힘찬 눈물 <저 하늘에도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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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참기 위해 코를 쥐어짜는 요타로(쓰마부키 사토시)와 카오루(나가사와 마사미). 동명의 노래를 모티브로 한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오키나와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요타로에겐 배다른 여동생이 있다. 어릴 때 엄마(고이즈미 교코)가 새아빠와 함께 데려온 카오루.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정을 쌓아가던 둘은 새아빠의 가출과 엄마의 죽음으로 슬픔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둘은 이성간의 감정에 예민해지고,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남매는 결혼할 수 없다고 단정했던 감정이 아슬아슬하게 다시 솟아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눈물을 노린 장면들이 과도해서 오히려 몰입하기 힘들며, 작은 디테일로 빛날 수 있었던 요소들도 너무 자주 등장해 그 효과를 잃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을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눈물이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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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묻는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 아직 소년에 가까운 청년이 씩씩하게 답한다. “예.” <마이 제너레이션>으로 데뷔하여 주목을 모은 노동석의 두 번째 장편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그 문답으로 끝난다. 현실의 절망을 헤매던 청춘군상이 현실과 그 재현됨의 자기 반영적 경계 사이에서 멈춘 영화가 <마이 제너레이션>이었다면(영화의 마지막에 재경은 병석에게 말한다. “카메라 끄면 말할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그들의 현실이 아직 밝은 미래와 접속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나 징조는 보이는 그 길 위에서 호기로운 대답과 함께 멈추는 영화다.
기수(김병석)와 종대(유아인)는 형제처럼 친한 동네 형, 아우다. 드러머인 기수는 음악의 꿈이 있지만 그는 지금 취객을 상대로 대리운전을 하며 어렵게 산다. 기수의 삶이 험난하다면 종대의 삶은 위태롭다. 종대의 어머니는 왜곡된 신앙으로 살고 종대는 폭력계의 거물 김 사장(최재성) 밑으로
삶은 아직 불명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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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리 멘젤 감독은 리비도의 유머로 많은 걸 풀어낸다. 두 가지 사랑이 있다. 종교적 이유로 토요일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폐철처리장으로 끌려온 요리사 파벨과 체코를 뜨려고 하다가 국경에서 붙잡혀 감옥으로 온 뒤 폐철처리장에서 노역하는 이트카가 눈이 맞았다. 폐철을 녹여 쓸모있는 무언가로 재탄생시키는 이곳에서 파벨과 이트카는 ‘쓸모있는’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이들을 지도하는 당 간부는 유독 아이를 사랑한다. 그의 집에는 아이들이 들끓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사랑에 호응해야 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괴로움이 역력하다. 그는 모종의 장소에서 벌거벗은 여자아이를 손수 목욕시켜주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치르는데 그 도착적 천연덕스러움이 징그럽다.
강압적, 일방적 리비도가 풍요로운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스탈린식 공산주의는 이상향이 될 수 없다는 직접적 비유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촬영된 이 영화는 옛 소련의 무력 진압으로 체코가 다시 철의
정치적 압제에 항거 <줄 위의 종달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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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영화(personal film), 포스트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필립 가렐의 영화를 가리켜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함께 포스트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장 외스타슈가 단 세편의 장편영화를 끝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빈자리까지 채우며 고군분투하는 이가 바로 필립 가렐이다. 가렐은 자신의 사적 경험과 기억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포착하지만, 그 삶을 낭만화된 추억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건조하다 못해 냉정하다. <와일드 이노선스>는 필립 가렐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적 영화로 불리는 가렐 영화의 특성과 특유의 건조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가렐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연인이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니코를 떠올렸을 것이다. 마약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니코에 대한 사랑과 기억에,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현대영화에 대한 성찰적 시선의 무게가 더해지는 순간, <와일드 이노선스>는 필립 가렐 특유의 서
<파우스트>의 가렐식 번역 <와일드 이노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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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의 정체성은 그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묘사되지 않은 것에 의해 더 잘 규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렇다. 이 영화는 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양 혹은 한 원인으로 빠짐없이 거론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주인공으로 삼고도 혁명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왕실과 왕실 사람들의 사생활에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 두 시간 남짓한 작품에서 왕실 밖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110분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파리로 가는 마차 안에서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앙투아네트와 관련한 가장 극적인 사건일 단두대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영화 속 스캔들의 대상인 뒤바리 부인이나 페르젠 백작보다도 비중이 적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리는 영화라고 반드시 프랑스 대혁명을 묘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인물과 관련해서 거의 자동연상되는 결정적 사건들을 누락시키고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면, 거기엔
10대 소녀의 감성 <마리 앙투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