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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방탄조끼를 입은 원작이 아닐까? 위대한 이야기꾼이 점지한 짝짓기와 플롯의 비급(秘(만들어야함?及))만 지키면, 나머지는 어떻게 주무르건 지루한 영화가 나오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쉬즈 더 맨>은 <내가 싫어하는 열 가지 이유> <O> 등에 이어 현대 틴에이저를 위해 셰익스피어를 앙증맞게 개작한 영화. 재해석까지는 과욕이고 변용의 잔재미가 최선인 기획이다. 청춘영화 속 동아리들이 십중팔구 그렇지만, <쉬즈 더 맨>의 콘월고교 여학생 축구부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폐지된다. 학교의 조치와 표리부동한 남자친구에게 격분한 축구선수 바이올라(아만다 바인스)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제임스 커크)으로 변장해 이웃 일리아고교로 전학한다. 그리고 축구부 주장인 룸메이트 듀크(채닝 테이텀)에게 축구를 배우는 대신 연애를 돕기로 한다. 바이올라는 어느새 듀크에게 반하지만 그녀가 남자 모습인 탓에 사랑의 줄긋기는 뒤죽박죽이
유쾌한 하이틴 로맨스 <쉬즈 더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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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이라는 고유명사는 종종 ‘장진스럽다’는 형용사의 용례를 통해서 설명돼왔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장진 감독은 ‘장진스러움’에 머물지 않고 최근 몇년간 멜로(<아는 여자>), 스릴러(<박수칠 때 떠나라>), 액션(<거룩한 계보>)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영화적 외연을 넓혀왔다. 신작 <아들>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정통 드라마다.
강도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 강식(차승원)은 1박2일 동안 가족을 방문할 수 있는 귀휴 대상자로 선발되어 고향 집에 간다. 그러나 어머니(김지영)는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 준석(류덕환)은 15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가 낯설어 겉돈다. 얼어붙은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확실히 <아들>은 장진 감독이 새 영역에 스스로를 밀어넣은 작품이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장진 감독이 새 모습을 보였는지, 이전의 ‘장진스러운’ 특성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따지는 것은 별
장진, 스스로 새 영역으로 밀어 넣은 작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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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작전 중 동료를 잃고 은퇴한 저격수 스웨거(마크 월버그)는 정부 관계자인 존슨 대령(대니 글로버)으로부터 대통령 암살 음모를 막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범행이 일어날 장소를 돌아다니며 가능한 암살 방식을 모조리 연구한 저격수는 수집한 정보를 존슨 대령에게 전해주지만, 대통령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주교가 암살의 대상이 되고 총상을 입은 조격수는 오히려 암살범으로 몰린다. 이제 저격수는 뒤쫓는 FBI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동시에 존슨 대령 일당의 음모를 폭로해야만 한다.
여기서 에티오피아 학살과 의회의 음모론에 뭔 의미가 있을까. 음험한 미국 정부의 시스템을 소재로 끌어오긴 했지만 <더블타겟>에서 정치적 의중을 읽어내려는 노력은 표적을 잘못 겨냥한 것이다. 안톤 후쿠아 감독은 의회의 음모 집단을 거의 만화적으로 보일 만큼 관습적인 악(惡) 자체로 그려낸다. 대신 그는 관객의 기대만큼 열심히 액션의 쾌락을 안고 달음박질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고비마다 로케이션
액션의 쾌락 <더블타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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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은 프랑스인이라고 믿는 남자와, 베를린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으나 자바섬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는 여자.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애써 지우려, 새로운 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남녀는 프랑스 파리에서 20일 밤을 함께 지낸다. <20일 밤, 그리고 비오는 하루>는 이들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며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 파리의 아파트를 처분하려고 집을 방문한 여자는 위층에 살고 있는 남자와 마주치고 섹스와 대화가 섞인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본다. 기억 속 전쟁과 화산 폭발의 이미지를 경유한 여정은 원점을 향하고, 두 남녀는 자바섬에 도착한다. 다소 도식적인 틀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진부하며, 그 의미도 사색의 여유가 공허하게 느껴질 만큼 깊지 않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
상처를 치유하는 섹스 <20일 밤, 그리고 비오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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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년 전의 저주를 풀기 위해 닌자거북이들이 다시 뭉쳤다. 인기 만화 캐릭터인 닌자거북이를 3D애니메이션으로 옮긴 <닌자거북이 TMNT>는 낮에는 각자 생업에, 밤에는 비밀리에 훈련을 하며 뉴욕의 하수구 세계를 누비는 닌자거북이들의 부활담이다. 최고의 적이었던 슈레더가 죽고 팀의 리더였던 레오나르도가 원정훈련을 떠난 뒤, 다른 닌자들은 컴퓨터를 수리하거나, 아이들의 파티 놀잇감이 되고, 정체를 숨긴 채 범죄를 소탕하고 다닌다. 하지만 과거의 저주는 시간을 거슬러 뉴욕 도시를 검게 물들게 하고, 이에 레오는 나머지 닌자들과 힘을 합쳐 지구를 구한다. 장쯔이, 사라 미셸 겔러, 크리스 에반스 등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액션의 쾌감과 오락을 향한 무한질주는 충분히 스릴있지만, 동양적 요소를 차용해 싸움의 동기를 부여하는 스토리는 헐겁다.
닌자액션의 무한질주 <닌자거북이 TM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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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 <숨>은 인간의 복잡한 욕망의 뒤얽힘을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호흡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증오와 사랑, 이해와 미움, 사랑과 질투를 ‘들숨과 날숨’에 비유하면서 어쩌면 양극단에 있는 듯이 보이는 그런 감정들이 하나로 섞여 경계가 사라지는 상태를 꿈꾼다. 이 ‘꿈’은 아마도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영화 안에서 점차 현실이라는 테두리를 지워나면서 그 꿈이 실현 가능한 지점들을 발견해나가는 듯하다.
김기덕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 중 하나는 ‘아이러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낮고, 더럽고, 천한 곳에서 가장 숭고하고 순수하며 고귀한 가치들을 찾아낸다. 또 가장 강력한 권력과 폭력의 중심 속에 존재하는 텅 빈 공간들을 포착해낸다. 그것은 창녀를 성녀로 만드는 상투적인 플롯으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직선적인 시간 개념을 ‘활’처럼 휘어버리거나 뫼비우스 띠처럼 꼬아놓음으로써 보편과 상식으로 점철된 시공간을 훌쩍 넘어서기
인간의 복잡한 욕망의 뒤얽힘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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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산만해서….” 한국의 부모들이 유난히 즐겨 쓰는 이 표현은, 동구 아빠 허진규(정진영)씨 입장에서는 앞뒤가 바뀐 말이다. 열한살 소년 동구(최우혁)는 지능이 평균에 못 미치지만 집중력과 끈기는 대단하다. 동구가 열정을 퍼붓는 상대는 학교와 주전자, 그리고 반에서 따돌림당하는 짝꿍 준태(윤찬)다. 동구는 해돋이를 손꼽아 기다려 학교로 달려가고, 점심시간 주전자에 물을 채워 친구들의 컵에 따를 때면 환희로 빛난다. 예민한 준태는 자존심 없어 보이는 동구가 밉다. 그래도 동구는 체육시간에 운동장 한 바퀴 대신 두 바퀴를 돈다. 한 바퀴는 달리지 못하는 짝의 몫이다. 학습 지진아를 배려할 의욕이 없는 선생님은 특수학교 전학을 강권하지만 아빠는 적응이 더딘 아들이 기왕 좋아하는 학교에서 졸업하길 원한다. 악운은 떼지어 오는 법. 집주인은 이사를 종용하고 동구는 교실에 설치된 정수기한테 물 반장 역할을 빼앗긴다. 주전자가 남아 있는 곳은 선수가 모자란 야구부뿐. 동
최고의 번트 <날아라 허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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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면의 대가는 물론 홍상수 감독이다. 남자와 여자, 침대와 술이라는 4원소로 욕망과 욕망이 밀고 당기며 얽히고 바스러지는 풍경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그를 능가할 감독이 나오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이야기는 언뜻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김태식 감독은 착점을 전혀 다른 곳에 놓았다. 홍상수 감독이 욕망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쩔쩔매는 지식인의 위선적 태도를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류학자 같다면, 김태식 감독은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의 객쩍은 고백을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들어주는 친구 같다. 눈을 맞추면서 열심히 들어주다가도 가끔씩 귓가로 흘려듣기도 하는 친구.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주인공은 강원도에서 도장 파는 일로 살아가는 태한(박광정)이다. 아내가 택시 기사인 중식(정보석)과 불륜 관계인 것을 알아챈 태한은 손님인 척 가장해 중식의 택시에 올라탄 뒤 강원도 낙산까지 장거리를 가자고 한다. 택시가
다른 느낌의 불륜 영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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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윈터(힐러리 스왱크)는 종교적인 기적의 허상을 파헤치는 과학자. 한때는 그녀도 신의 부름에 영혼을 불사르는 목자였으나 선교활동 중 어린 딸과 남편이 광신도들에게 살해당하자 종교를 버리고 과학을 신앙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루이지애나주 시골 마을 헤이븐에서 더그 블랙웰(<원초적 본능2>의 데이비드 모리세이)이라는 근사한 사내가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현상을 조사해달라며 찾아온다. 헤이븐의 강물은 핏물처럼 검붉게 물들고 개구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간다. 이 모든 것은 성서의 출애굽기에서 신이 유대인을 억압하는 이집트에 내렸던 10가지 재앙과 똑 닮아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마을 주민들은 12살짜리 금발소녀 로렌(안나소피아 롭)이 사탄의 원흉이라고 믿지만, 캐서린은 모든 재앙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앙은 계속된다. 이가 들끓기 시작하고 독종(毒腫)이 사람들을 쓰러뜨리자 캐서린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귀가 잘 안 맞는 오컬트 액션영화 <리핑 10개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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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는 섹스, 섹스없는 사랑 혹은 ‘섹스 위드 러브’, 이 세개의 길 중에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를 담담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를테면 사랑없는 섹스에 따르는 공허감이나 섹스없는 사랑에 따르는 지루함 혹은 ‘섹스 위드 러브’에 따르는 책임감 따위의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 물론 대부분 ‘섹스 위드 러브’를 가장 이상적인 길로 여기지만, 그 어떤 길을 선택하든 짜릿한 포만감 뒤에는 피로와 고통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섹스 위드 러브>는 너무도 지리멸렬한 일상이 되어버린 동시에 여전히 온몸과 마음의 촉수를 건드리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중심은 네 커플의 일상에 맞춰져 있다. 이들은 초등학교 자녀들의 성교육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신들의 성생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들 각각의 모습은 사랑과 섹스에 관한 전형적인 표본들이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두고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거나 상대방과 원활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 <섹스 위드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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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바보같이 행복하고 안전한 일본, 공허하고 지루한 일본, 졸리지만 잠 안 오는 일본.” 주인공 신(오다기리 조)은 대학 캠퍼스 잔디밭을 괴성을 지르며 가로지른다. 그의 얼굴은 질식사 직전이다. 우리에겐 <자살클럽>(2001)과 <기묘한 서커스>(2005)로 알려진 소노 시온 감독의 <헤저드>가 도입부에서 설정한 상황이다.
그의 작품들이 대항하고자 하는 적은 ‘적이 없는’ 일본의 현실, 무겁게 내리누르는 ‘안정과 규격’인 듯하다. 하지만 ‘生의 자각’을 위해 이번에 그가 사용한 방법은 공포나 엽기와는 거리가 멀다. 순진하고 유약한 전형적인 일본 젊은이가 다소 독특한(‘헤저드’한) 훈련과정을 거쳐 야심과 뚝심을 갖춘 청년으로 귀환한다는 성장영화의 현대 버전이라고 할까. 일본에서의 삶에 질려 무작정 뉴욕에 도착한 신은 리(제이 웨스트), 다케다(후카미 모토키)와 한패가 되어 갱 놀음을 한다. 다양한 범죄 행위가 청춘의 치기어
성장영화의 현대 버전 <헤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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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57년. 태양이 죽어간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핵탄두로 태양을 재점화하는 것. 8명의 다국적 승무원이 우주선 이카루스 2호에 탄두를 싣고 태양으로 나아간다. 가히 ‘하드 SF’적 상상력으로 시작하지만 <선샤인>은 그리 섬세한 장르영화가 아니다.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갤런드 콤비는 <미션 투 마스>의 브라이언 드 팔마처럼 NASA의 기술자문을 얻는 대신 자신들의 환상을 위한 우주항모를 건설했다. 인공 중력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카루스 2호를 채운 것은 식물로 가득한 산소방과 가상현실 체험실, 거대한 유리창이 달린 태양 관측실의 스타일리시한 외양이다. 하긴 누가 인류의 존망을 건 항모의 이름에 태양빛으로 날개가 녹아 추락해버린 남자의 이름을 붙이겠는가.
망자의 이름을 달고 항해를 계속하던 우주선은 7년 전 같은 임무를 지니고 떠났다가 실종된 이카루스 1호와 마주친다. 대원들은 랑데부를 위해 궤도를 수정하던 중 치명적인 실수를 일으킨다. 좋은 장
뉴에이지 태양교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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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죽어야 한다. 잠깐 피었다 우수수 져버리는 벚꽃은 오랫동안 사무라이의 죽음의 미학을 상징해온 꽃이다. ‘꽃보다도 더’라는 원제의 <하나>(はなよりもなほ)는 벚꽃에 덧씌워진 이런 죽음의 미의식에 의문을 던진다. 사무라이의 존재의의가 없어진 역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사극 <하나>는 벚꽃의 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현대 일본에 여전히 도사린 미시마 유키오적 비장미를 전복하려 한다.
에도막부 말기, 지방 검술사범의 아들 소자 에몬(오카다 준이치)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에도에 상경한다. 달동네에서 근근이 연명하며 원수를 찾아다닌 지도 벌써 3년째. 하지만 어쩐지 그는 복수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이웃은 “자네처럼 심약한 사람은 복수가 어울리지 않아”라고 충고하고, 소자 자신도 복수보다 아름다운 과부 오사에(미야자와 리에)와 그 아
따뜻한 소극(笑劇)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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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가 장애인을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면서 사회를 비판하거나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만들어내거나. <파란자전거>는 장애인을 소재로 내세우면서도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피하려 한 영화다. 물론, 이 영화 또한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불편한 ‘시선’을 줄곧 지적하지만 좀더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장애인의 주변 인물들이다. 또 뭔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잔잔한 일상 속에서 장애인의 문제를 직시하려 한다는 점도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보인다.
한손에 의수를 끼고 살아야 하는 장애인 동규(양진우)는 스물여덟을 맞은 지금, 여러 위기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여자친구인 유리(박효주)의 부모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동규를 사위로 맞이하는 것을 꺼리고, 동규의 일터인 동물원은 폐쇄 위기에 놓여 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그를 독려해줬던 아버지(오광록)마저 병원에 누워 있는 형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하
장애인의 주변인물 이야기 <파란 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