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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오로지 남자만이 설 수 있다는 법령이 지켜지던 영국의 한 시대에 키니스톤(빌리 크루덥)은 당대에 가장 아름다운 연극 속 여성으로 사랑받는 남자배우다. <오델로>에서 여자주인공 데스데모나를 연기하는 그의 마지막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미모와 여성스러움에 언제나처럼 매혹된 관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이름을 외치며 막이 내리기 전 이 연극이 사실상 끝난 것임을 인정해버린다. 그런 그를 늘 무대 뒤편에서 지켜보는 키니스톤의 보조 메리(클레어 데인즈)는 배우가 되고 싶어도 길을 발견할 수 없어 애태우는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이다. 그러던 그녀가 하층민들이 찾는 허름한 주점에서 불법으로 무대에 올라 <오델로>의 데스데모나를 연기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연극에 관심이 많은 왕의 애인이 그리고 언젠가 키니스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는 권세 높은 귀족 하나가 우연히 그녀의 재능을 밀어주고 메리는 마침내 “무대 위의 여자 역은 여자만이 할 수 있다
식상한 성공기 혹은 러브스토리 <스테이지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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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시 칙스는 여성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음반 판매량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컨트리 뮤직의 언니들이다. 이들이 거침없이 인기가도를 달리던 2003년,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우기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런던에서 공연 중이던 딕시 칙스. 메인 보컬인 나탈리가 관중을 향해 외쳤다.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게 부끄럽군요.” 이 한마디,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 말이 이들의 인기에 제동을 걸었다. 대부분이 공화당 지지자들인 컨트리 뮤직 팬들은 딕시 칙스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고,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국은 딕시 칙스의 노래를 틀지 않았다. 이들의 논지는 단 하나, 대통령을 모욕하는 자는 국가를 모독한 자라는 것이다. 부시의 지지율이 사상 최대로 높았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비난과 위협은 ‘다양성’을 노래하는 미국의 끔찍한 이면을 엿보게 한다.
영화는 2003년 문제의 발언 이후,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미국의 끔찍한 이면 <딕시칙스: 셧업 앤 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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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일종의 복수극이지만 피 한 방울, 가벼운 주먹 한번 날리는 일 없이 매우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복수를 치러낸다. 복수란 단순히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신체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을 수시로 접했던 관객에게는 이 영화 속의 복수는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멜라니(데보라 프랑수아)는 심사위원인 아리안(캐서린 프로트)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주위를 분산시키는 바람에 실수를 하게 되어 시험에 떨어진다. 그 뒤로 피아노 치는 것을 그만둔 멜라니는 10년 뒤 아리안의 집에 보모로 들어가 그녀의 커리어와 가족 관계 그리고 아들의 장래까지 모두 망쳐놓고 홀연히 그 집을 떠난다. 파리콩세르바투아르 출신 음악가로, 파리 플레이엘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드니 데르쿠르 감독은 음악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극복할 수 없는 무대 공포증,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할 기회 상
다소 밋밋한 스릴러 <페이지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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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한 아파트에서 남성 포르노 스타의 시체가 발견된다. 저명한 정치가 아버지는 사실상 포르노 사이트의 단골 고객이다. 딸 나탈리는 몬트리올의 명문대에 다니는 집안의 자랑거리다. 이러한 무관해 보이는 사실들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을까. 캐나다영화 <마이 걸, 마이 엔젤>은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이고 평온한 중산층 가정이 서서히 포르노 산업에 관련되며 겪는 균열상에 미스터리를 섞어 만든 영화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이 은밀히 보던 포르노에 자신의 딸이 나오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풍요롭고 화목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모범생 나탈리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자마자 아무런 자의식없이 포르노 산업에 발을 담근 것. 그러나 그녀는 가난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길티 플래저(guilty pleasure)로서 포르노를 즐기는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이러한 영상물이 나날의 일상이 되어버린 나탈리 세대에 죄책감이란 없다. 어릴 때부터 그러한 영상물들을 여과없이 보고 자란 세대가
음란물 노출로 인한 감각적 마비 <마이걸, 마이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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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맞은 스티븐(에이드리언 브로디)은 오랜 꿈이었던 복화술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 아직 독립하지 못했고 애인도 만나지 못한 그의 친구는 다혈질적인 성격의 친구 패니(밀라 요보비치)와 복화술 공연 파트너인 ‘나무왕자’ 인형뿐이다. 어느 날 구직상담소를 찾은 스티븐은 그곳에서 복화술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이야기에 호감을 보이는 로레나(베라 파미가)를 만난다. 하지만 대책없이 나서기 좋아하는 패니의 작전지시는 스티븐을 스토커로 몰리게 하고 그는 가족에게 더욱 바보 같은 존재로 찍혀버린다.
<스위트 보이스>는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플라모델 조립에 빠져 있는 스티븐의 아버지나 언제나 자식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사는 어머니, 가수가 되고 싶지만 언제나 제 성격에 못 이겨 팀원들을 다그치기 바쁜 팬고라, 역시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누나 하이디, 그리고 죽은 애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로레나까지 등장인물들은
서른살 남녀의 성장담 <스위트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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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주국제영화제가 세명의 감독을 선정하여 지원한 ‘숏숏숏’은 디지털 단편제작지원 프로젝트다. 영화제 동안 첫 상영의 기회를 가졌던 세편의 단편영화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으로 알려진 김종관 감독, <장마>의 함경록 감독,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의 손원평 감독이 참여했다. 섬세한 화법으로 긴장을 쌓아올려서 단편만의 리듬과 집중력을 선보이던 김종관 감독은 <기다린다>에서도 어김없이 그 실력을 발휘한다. 그는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한 상황에서 매우 낯선 순간들을 발견해내며 그 순간에 맞닥뜨린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 심리를 면밀히 관찰한다. 우연한 만남에서 유머러스한 순간으로, 갑작스러운 긴장과 폭력과 공포의 순간으로 예기치 않게 변해가는 상황은 인물들에게 밀착하여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 밖으로 전달된다. 배경음악과 인물들의 반복되는 대사, 누군가의 충동적인 반응과 누군가의 머뭇거리
세 가지 색깔, 세개의 세계 <숏숏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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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멜로드라마에는 늘 그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부모의 반대, 불치병, 출생의 비밀 같은 다소 드라마틱한 요인부터 성격 차이라는 알쏭달쏭하지만 가장 흔한 문제까지 남녀관계를 훼방놓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타이영화 <미… 마이셀프>는 좀 색다른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주인공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를 받은 여자(차야난 마노마이산티팹)는 울며 운전을 하다 길에 서 있던 한 남자(아난다 에버링험)를 치는 사고를 낸다.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자는 할 수 없이 당분간 남자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여자는 남자의 목걸이에 매달린 글자에서 따서 그에게 ‘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집으로 데려온다. 혹시 몰라 전기충격기까지 준비해두고 출근할 땐 방문을 꼭 걸어 잠그던 여자는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탄에 대한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탄이 최면요
타이적인 멜로드라마 <미... 마이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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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의 시골 농장. 농사일밖에 모르는 무심한 남편에게 아내는 그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궁상맞은 여자일 뿐이다. 둘 사이에는 부부로서의 최소한의 애정어린 소통은커녕 서로에 대한 지겨움만 남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 남자는 당연히 슬퍼하지 않고 걱정한다. 누가, 이 집안일을 대신해줄 것인가? 그는 죽은 아내를 대신할 여자, 정확히 말하자면 하녀를 물색하고, 결혼상담소를 통해 새로운 여자를 찾아 루마니아로 향한다.
<미남이시네요!>는 언뜻 <나의 결혼원정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똑같은 결혼원정기라도 후자가 국내에서는 결혼의 기회조차 봉쇄된 농촌 총각들의 절실한 원정기라면, <미남이시네요!>의 주인공 에매(미셸 블랑)는 상대적으로 행복한 축에 속한다. 일꾼처럼 부리던 아내는 결혼생활에 진력이 날 때쯤 조용히 사라져주고, 새로운 일꾼을 구한다는 핑계로 더 젊고 예쁜 여인을 얻었으니 말이다. 물론 영화는 이 남자
나의 결혼원정기 <미남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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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蟲). 문자대로 해석하면 ‘벌레’인 그것은 <무시시>의 세계에서는 정령에 가까운, 초자연적인 존재다. 인간과 함께 살아왔으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무시는 때론 인간의 몸에 침입해 병을 낳거나 기이한 자연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시와 인간을 중재하며, 어긋난 흐름을 되잡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벌레 선생 ‘무시시’다. 독특한 세계관과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300여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우루시바라 유키의 만화 <충사>는 국내에도 8권까지 출간되며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충사>를 실사영화로 옮긴 <무시시>는 <아키라> <스팀보이> 등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오토모 가쓰히로의 손에서 탄생했다. 에피소드를 하나씩 펼쳐가는 만화를 한편에 압축하면서 영화는 주인공 깅코(오다기리 조)의 사연에 초점을 맞췄다. 어린 시절 무시에 의해 기억을 잃고 무시시가 된 깅코가 자신의 과거를 깨
원작의 빛을 잃은 벌레들 <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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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아니한 바 아니었다. 고졸은 돼야 한다는 보스의 명령으로 시작한 <두사부일체>(2001)와 대학은 가야 한다는 보스의 명령으로 시작한 <투사부일체>(2005)에 이어, 이제 계두식(이성재)은 “FTA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보스의 명을 받고 대기업 입사를 준비한다. <상사부일체: 두사부일체3>의 배경은 전편들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대기업과 조폭사회를 그려내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데, 사실 스무살 넘은 성인들에게 체육복을 입혀놓고 담력시험을 시키는 한국 대기업의 연수문화와 조폭들의 신고식이 뭐 그리 다를 게 있겠는가. 그래서 전편들이 사회의 모범집단인 학교와 비모범집단인 조폭의 문화적 충돌을 통해 유머를 생산하는 데 골몰했다면 <상사부일체…>는 ‘여기나 저기나 추접하고 유치하긴 마찬가지네?’라는 투다.
여하간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한 계두식은 조직의 미래를 위해 기획실에 들어가 글로벌 경영
조폭영화는 산으로 간다 <상사부일체: 두사부일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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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길 위에 내몰린 한 사이 나쁜 부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근처의 모텔에 찾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하룻밤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일부러 벗어난다, 차를 낯선 사람의 손에 맡긴다, 고장난 차를 버리고 음산한 모텔에 들어간다. 이 사이 나쁜 부부가 심야에 행하는 선택들은 하는 족족 최악의 선택이 되고, 그 하룻밤은 그들에게 불가피한 최악의 밤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낯선 모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푹신하고 에로틱한 침대가 아니라 폭력과 외설을 예감케 하는 시선들이다. 그들은 객실에 놓인 녹화 테이프를 본 뒤 자신들이 곧 스너프 필름의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탈출을 시도해보려 하지만 그들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고 있으며, 차도 없이 낯선 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지하철과 지하세계를 적극 활용한 전작 <컨트롤>로 한정된 공간 사용법을 보여준 님로드 앤탈 감독은, <베이컨
피없는 폐쇄적 공포 <베이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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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의 여성 제이미(마거릿 모로)는 상품에 이름을 지어주는 네이밍 전문가다. 그는 활달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를 가졌지만 연애생활만큼은 절망적이다. 몇번 잠자리를 같이 한 뒤 전화기에 일방적인 이별 메시지를 남긴 채 떠나는 남자들에게 질려버린 제이미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시낭송회를 찾았다가 자신의 교수이자 시인인 존(내빈 앤드루스)과 연인이 된 제이미는 TV쇼 진행자 믹(브라이언 F. 오번)에게도 호감을 갖게 되면서 삶의 희망적인 변환점을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존과 헤어지고, 믹과의 관계도 지지부진해지자 그는 다시 우울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남자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제이미는 ‘깊은 사랑’을 맺을 수 있을까.
<이지 섹스, 이지 러브>는 현대(특히 미국)사회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사랑에 곤란을 겪는 것은 비단 제이미뿐만이 아니다. 남편으로부터 배
사랑 나누기의 어려움 <이지 섹스, 이지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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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똥개> <태풍> 등 곽경택 감독의 두 글자 제목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첫 번째 멜로영화라 한다지만 누가 봐도 <사랑> 역시 곽경택 스타일의 부산누아르영화다. 싸움을 통해 더욱 우정을 키워가는 짐승 같은 남자 고교생들, 부둣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프로’ 폭력배들간의 세 싸움, 그리고 돈 앞에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예의 등 <사랑>은 곽경택 감독의 과거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처럼 <태풍>(2005) 이후 절치부심한 그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낼 수 있는 세계로 선회했다. 좀더 이야기를 펼치자면, 가장 가까이 연상되는 영화는 역시 곽경택 감독에게 가장 큰 영광을 안겨줬던 흥행작 <친구>(2001)다. <친구>에서 면회실의 칸막이를 앞에 두고 “왜 그랬는데?” “쪽팔리서”라고 대화를 주고받던 남자 친구들이, 이번에는 똑같은 상황에서 “사랑하나?”
곽경택 감독의 여전한 부산 누아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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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에 걸친 수다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음악에 5분 동안 함께 귀기울였던 순간이 아닐까. 모든 예술을 통틀어 음악을 가장 위대한 예술로 꼽는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블록버스터의 땅 미국에서, 최강의 블록버스터 시즌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한 인디영화 <원스>는 음악의 힘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를 영화적으로 표현할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다.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고른 호응을 얻은 <원스>의 리뷰 중 상당수는 “이런 영화에 대한 첨언은 일종의 배신”이라며 영화 자체에 대한 말을 아낀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사랑스러운 영화와 사랑스러운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일단 극장으로 향할 것이요, <원스>가 지닌 매력의 배경이 궁금하다면 114쪽 기획기사를 참고할 일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꿈을 잊지 못해 날마다 더블린 번화가에서 거리의 악사를 자처하는 남자(글렌 한사드)는 자신을 버리고 런던으로 떠나간 옛 여자를
리얼리즘 뮤지컬영화 <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