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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어느 날>이라니, 사뭇 목가적인 제목이다. 문제의 9월이, 2001년 9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뉴욕 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지기 엿새 전 프랑스. 전직 첩보원 이렌느(줄리엣 비노쉬)는 시골에서 거위를 치는 소녀 올란도를 방문한다. 올란도는 10년 전 이렌느의 동료 엘리엇(닉 놀테)이 미국으로 소환될 때 방치한 딸. 미국에서 재혼해 의붓아들 데이빗도 얻은 엘리엇은, 뭔가에 쫓기는 투로, 아들과 딸을 은밀히 만나게 해달라고 이렌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상봉 장소는 예상보다 붐빈다. 잔인하고 정서 불안한 CIA 요원 파운드(존 터투로)가 들이닥치고 엘리엇이 지닌 ‘정보’에 목을 맨 국제적 투자사도 그를 찾느라 혈안이다. 급기야 재회 장소는 베니스로 바뀌고 여행길의 올란도와 데이빗은 남매 이상으로 친밀해진다.
각본가 출신 신인감독 산티아고 아미고레나는 “9·11을 예견하고 그 정보로 이윤을 취한 사람들이 있다”는 가설을 수용해 특이한 스릴러를 썼
긴장 속의 찰나적 평화 <9월의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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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이야기> <천년여우 여우비> 등으로 장편 개봉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점쳤던 이성강 감독의 첫 번째 장편실사영화. <살결>은 그러한 호명에 대해 절반의 긍정과 절반의 부정으로 대답한다. 갑작스런 사고로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나는 광경을 목격한 민우(김윤태)는 옛사랑 재희(김주령)와 우연히 재회한다. 아홉번의 섹스를 제안한 재희와 민우가 육체적 관계를 더해감에 따라 옛 감정 또한 되살아난다. 한편 새로 자취방을 구한 민우는 그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소녀의 영혼을 느끼고, 그 소녀는 민우 이전에 그 방에 살면서 옷을 만들었던 종이(최보영)였음이 밝혀진다. 종이 역시 그 방에서 특별한 사랑을 키웠고, 민우는 재희와 섹스하면서 종이를 느낀다.
한때 포르노로 오해받았을 만큼 많은 ‘살결’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상시키던 이성강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혼과 교감하며 마
이성강 감독이 만든 성인판 동화 <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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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코믹스의 원작을 스크린으로 모신 할리우드영화의 그 방식 그대로 <용호문>의 입구에 만화의 인장을 분명히 새긴다. 현란하게 채색된 만화의 순간 맛보기가 끝나면 이를 닮은 SF적 무협 세계가 펼쳐진다. 홍콩의 마천루를 응용한 인공적 공간의 강호는 악의 자장 안으로 슬슬 끌려들어가는 참이다. 전설의 무림고수가 창립한 용호문의 두 기둥 왕소룡(견자단)과 왕소호(사정봉)가 이별하게 된 사정이 위기를 재촉한다. 왕소룡이 용호문을 떠나 배신 아닌 배신의 길을 거듭하는 사이 거대한 범죄조직 나찰문의 보스 화운사신은 용호문의 제거를 시도한다. 왕소룡과 왕소호가 사랑다툼 벌이는 연인처럼 방황을 거듭할 때 용호문에 간신히 입문한 석흑룡(여문락)이 지원군으로 나서나 화운사신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견자단과 사정봉의 육신은 <옹박> 같은 ‘리얼액션’을 만들어가기에는 너무 깔끔하다. 이건 그들의 부족함이라기보다 만화의 과장된 상상력을 특수효과로 최대한 옮기려는 욕심 사이에
SF적 무협 세계 <용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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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와 트뤼포의 유전자를 살짝 섞어 프로이트적으로 재배치한 듯한 영화라면 짐작이 수월할까. 나치 치하 체코의 작은 기차역에 앳된 수습 역무원이 출근한다. 이 주인공은 성적 해방(아니면 그저 성적 신세계의 입문)이 꼭 필요한 젊은이 밀로스다. 오죽했으면 조루에 대한 공포로 양 손목에 면도칼을 댔을까. 이 주인공에게 사부가 되어주는 이는 성적 해방을 정치적 해방으로 승화시킨 쿨한 역무원 선배다. 성적 해방이 레지스탕스로 화하는 에너지가 되기는 밀로스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의 굳건한 동지는 구김없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들이다. 밀로스만큼이나 앳된 그의 여자친구도, 밀로스에게 에로스의 언어를 처음 선사하는 레지스탕스 여전사도, 성스런 독일어 문장을 엉덩짝에 꽝꽝 찍어대 권위에 찌들린 남성들을 조롱하는 역무원 여자동료도 믿어 의심치 않은 이중의미의 성(性과 聖)스러움을 지녔다.
에로틱하고 정치적인 정신분석이 펼쳐지는 기차역 에피소드와 인물 풍경은 한편으론 쿤데라의 소설투 같다. 애증이 교
고다르와 트뤼포, 프로이트 <가까이서 본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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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바람난 여자들에 관한 영화다. 직장 상사와 바람난 방송국 아나운서, 남자친구의 아들과 바람난 여자, 무료한 부부생활 중에 있다가 섹시한 정원사를 보고 자위에 눈을 뜬 여자 등 일탈도 다양한 종류로 그려진다. 영화는 “칠레 기혼 여성의 63%가 불륜 중에 있다”라는 통계 결과를 놓고 대담 토론을 벌이는 TV프로그램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배신하지 말고 좇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아스럽게도 메인 스토리는 주제와 충돌한다. 인기 아나운서 세실리아는 상사와 불륜을 일으킨 대가를 톡톡히 치른 다음 우울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즐길 만한 대중영화의 모양새를 띠었고 고민하며 볼 필요는 없을 듯. 2004년작인 이 영화는 현지 개봉 당시 남미에서 내로라하는 톱 여배우들의 대거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바람난 여자들에 관한 영화 <바람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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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은호(유진)와 기백(하석진)은 결혼을 하고 싶지만 양가 부모의 허락을 못 받고 있다. 은호의 아버지 지만(임채무)은 보수적인 가부장이고, 기백의 엄마 심말년(김수미)은 남편 없이 억척스럽게 벌어서 자식을 키워온 강남의 땅부자. 두 집안의 경제 수준과 사고방식 차이가 충돌을 빚으면서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이 연출된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부모가 반대하고 나선다는 설정이 <미트 페어런츠>를 연상시키나 영화는 그보다 덜 웃기고 지루하다. 은호-기백의 멜로 라인은 식상하기 이전에 성의가 없다. 안연홍과 윤다훈의 조연 효과도 크지 않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스크린 데뷔를 치른 유진이 아니라 김수미다. 이 영화는 ‘못 말리는 우리 엄마’의 이야기다. 캐릭터는 역시 상투적이나 김수미의 ‘진짜 연기’는 무의미한 클로즈업 숏들을 꽉 채우고 간다.
저렴한 한국식 코믹멜로물 <못 말리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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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11분, 8시23분, 17시13분. 지하철 기관사 만수(김강우)는 한치의 시간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근무 속에 산다. 그는 <샘터>라는 월간지가 새로 나오는 날이면 간식과 함께 그 책을 들고 플랫폼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의 존재에 조금씩 삶의 활력을 얻어간다. 독문과 강사인 한나(손태영)는 자신의 대학 선배였던 같은 과 교수와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한나의 생일 기념으로 둘은 밤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기대를 품게 했던 새로운 인연과 생일선물은, 보란 듯이 물거품이 된다. 눈이 오는 날, 서로 남남인 만수와 한나는 경의선에 오른다. 두 사람은 예정에 없이 종착역인 임진강 역에 내리게 되고, 집으로 돌아갈 길이 끊긴 탓에 인근 모텔에서 함께 밤을 보내기로 한다.
<경의선>은 너무 무거워서 함부로 쏟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 안에 채우고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감독은 아주 느리고 깊고 세밀하게, 만수와 한나의 한달 전
김강우의 재발견 <경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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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상어>는 판타지의 힘을 빌려 기적을 창조하고, 그 기적의 순간으로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영철(구성환)은 자신이 직접 잡은 백상어를 친구 준구(홍기준)에게 자랑하기 위해 대구로 향한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있는 준구는 영철의 전화가 귀찮기만 하다. 준구가 약속을 반복적으로 미루는 동안, 영철은 이제 막 감옥에서 출소한 유수(홍승일), 그리고 공원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이는 미친 여자 은숙(김미야)과 조우하게 된다. 유수는 가족들이 기별도 없이 이사한 통에 정처없이 떠돌아야 하고, 은숙은 집단 강간을 당한 이후 정신을 놓아버린 상태다. 은숙은 영철이 친구를 위해 가져온 백상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악취를 자신이 사산한 아기의 냄새라고 착각하고, 영철와 유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은숙을 피해 대구의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영철은 그녀에게 썩은 백상어를 건네주고 또다시 준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상어>는
기적의 판타지 <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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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울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컷 울고 나서 뒤늦게 속은 기분이 들거나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했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 될 것 같은 <내일의 기억>은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최루 드라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루물로서 감정을 착취하지 않는다. 품위를 갖추면서도 관객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드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광고회사 직원인 사에키(와타나베 겐)는 성실한 일처리로 회사의 신임을 받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건망증 증세가 깊어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아내 에미코(히구치 가나코)의 강권으로 병원에 간 사에키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라는 진단을 받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결국 딸의 결혼식을 치른 뒤 사직하고 본격적인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눈물겨운 투병을 다룬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코믹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증세에서 시작해 점점 병세가 심해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최루 드라마 <내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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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 <스파이더맨 3>의 도입부에서 피터 파커/스파이더 맨(토비 맥과이어)의 인생은 만사형통 운수대통이다. 이제 영웅의 업무를 완전히 파악한 스파이더 맨은 뉴욕을 안전한 도시로 만들었다. 활강하는 기교에도 노련미가 흐른다. 맨해튼 노점에서 캐릭터 상품이 팔릴 만큼 시민들의 총애도 받고 있다. 2편 결말부에서 “널 구해줄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속삭여준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과의 사랑도 달콤하기 그지없다. 피자 배달하다 해고되는가 하면, 쫄쫄이 입고 엘리베이터 탔다가 민망해지는 2편의 전반부와 정반대다. 잘나가는 피터 파커의 모습이라니 흐뭇하지만, 자전거 타는 곰처럼 어색하다. 부정적인 당신은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아아, 남은 것은 내리막뿐이겠군.” 과연 피터 파커가 3편에서 겪는 환란은 양도 종류도 전편들과 비교불가다.
<스파이더 맨>(2002)은 개봉 주말 흥행(전미) 1억달러를 처음 넘어선 대박 블록버스터이기도 했지만
액션의 총망라 <스파이더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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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골동품 딜러 프랑수아(다니엘 오테유)는 자신의 생일날 저녁 충격에 휩싸인다. 생일파티에 모인 친구들이 그를 진정으로 좋아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수긍할 수 없노라 펄펄 뛰는 프랑수아에게 사업 파트너인 카트린(줄리 가예)이 내기를 건다. 열흘 안에 진정한 친구를 데려올 것. 내기에서 지는 순간 프랑수아가 경매에서 구입한 값비싼 그리스 화병은 카트린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승리를 장담한 프랑수아는 리스트를 만들어 옛 친구들을 찾아가지만 반응은 냉랭하다. 비탄에 빠진 프랑수아는 붙임성이 좋은 택시 운전사 브루노(대니 분)를 우연히 만나고, 그로부터 열흘 만에 친구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르콩트의 즐거운 결론. 모든 사람과 친구인 사람은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이상 심각한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던 르콩트의 선언을 기억하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마이 베스트 프렌드>는 가볍고 친밀한 프랑스 대중코미디의
친밀한 프랑스 대중코미디 <마이 베스트 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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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일의 첫 번째 한국영화 <수>가 지나간 지금,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드보일드’라는 한마디에 축약당한 최양일의 세계를 재확인하는 의미일 수도, 혹은 최양일의 최고 걸작 중 한편을 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재일한국인 강충남은 택시 기사다. 인생의 분명한 목적 따위는 없는 듯도 하지만, 엄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코니라는 필리핀계 호스티스를 만나면서 뭔가 목적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코니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동거를 시작한 충남. 하지만 인생이 뭐 그리 쉽게 달라지던가. 충남의 동창인 사장 세이이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택시회사는 야쿠자의 손에 넘어가고, 심드렁한 사랑에 지쳐버린 코니는 충남의 곁을 떠나 다른 술집으로 옮겨버린다. 하지만 달은 항상 거기에 떠 있다.
재일동포 작가 양석일의 소설 <택시 광조곡>을 원작으로 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유쾌한 희비극이다. 최양
최양일의 걸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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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과 등을 돌리고 살아온 노인 이대근은 아내의 제삿날을 맞아 온 가족을 불러모은다. 하지만 아들 내외는 팍팍한 가정형편 탓에 아버지에게 건강식품이나 팔려는 작태를 선보이고, 기독교도 딸은 어머니 제사상 앞에서도 절은 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린다. 버틴다. 게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막내아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의 천태만상에 가슴을 치던 이대근은 심부름센터 직원이 찾아올 막내아들을 기다리며 제사상을 차리는데, 어느새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런데 이 가족 뭔가 이상하다. 대체 이대근의 이 댁이 간직한 비밀은 무엇일까.
<이대근, 이댁은>은 평범한 내러티브를 가진 일상적인 소극이 아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갑갑한 한옥 세트 속에서 허술한 시트콤처럼 진행되지만,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모든 비밀을 폭로하는 반전이 공개된다. 스포일러 때문에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대근, 이댁은>이 형식적인 서커스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
반전-관절염 가족 <이대근, 이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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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을 장편으로 만드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감독 숀 엘리스는 단편의 앞뒤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덧붙이면 볼 만한 장편영화가 나올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슈퍼마켓 근무의 지루함을 몽상으로 극복하려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18분짜리 단편에 84분 이야기를 더해 102분짜리 장편으로 늘리는 모험을 해냈다. 귀차니즘의 메커니즘이라고나 할까. 미술대학생 벤(숀 비거스태프)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건 좋게 말하자면 하루에 8시간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슈퍼마켓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벤은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시간을 멈추는 상상을 시작하고, 여자 손님들의 나체를 스케치하는 환상을 즐기다가 아르바이트 동료인 샤론(에밀리아 폭스)에게 빠져든다.
단편이 통째로 포함된 처음 절반은 꿈같은 이미지와 재기발랄한 슬랩스틱의 연속에 기분이 나른해진다. 그러나 나머지 이야기는 잘해봐야 꿈과 사랑을 쟁취하는 전형적인 십대 틴에이저영화의 뒷물이며, 미셸 공드리
꿈같은 이미지의 연속 <캐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