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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레이 감독의 <브리치>는 등장인물 대다수가 FBI 요원인데도, 첩보스릴러보다 ‘직업의 세계’나 ‘인간극장’에 가까운 야릇한 영화다. 영화는 이중간첩 행위로 미국 국가안보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미국 스파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FBI 간부 로버트 한센(크리스 쿠퍼)의 체포 직전 마지막 나날을 그린다. 25년 재직기간 중 무려 22년을 이중간첩으로 암약한 한센의 진짜 동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쉬운 짐작은 물론 돈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에겐 여섯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KGB로부터 받은 140만달러의 상당액은 인출 불가능한 계좌로 입금됐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미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를 교란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신념? 이건 본인이 노발대발할 추측이다. 한센은 바지 입은 여자를 미워하고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골수 보수주의자였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바로 그) ‘오푸스 데이’의 단원이었던 한센은 사무실을 가족
어느 FBI 이중간첩의 초상 <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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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터비아>를 성공적인 대중영화로 만든 것은 스릴러적 완성도가 아니다. 그 흔한 반전 하나없이 직선주로를 달리는 플롯은 스릴러로서 큰 매력이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를 엮어가며 서스펜스를 직조하는 솜씨도 그리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범인과 일전을 벌이는 장면은 구성상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데도 긴장감이 떨어진다. 마지막 1대1 대결은 주인공 못지않게 악당의 동선을 적절히 스케치해야 장르적 재미가 생기는데, 이 영화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만듦새가 결코 좋지 않았는데도 크게 히트하며 숱한 아류작을 낳았던 공포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가 성공했던 이유. <디스터비아>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스릴러에 수혈된 청춘영화적 에너지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충격을 받은 고교생 케일(샤이어 라버프)은 교사를 폭행해 90일간 가택 연금된다. 전자 발찌가 채워져 30m 밖으론 나갈 수 없게 된 신
스릴러에 수혈된 청춘영화적 에너지 <디스터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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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스>는 <링> <그루지> <다크 워터> 등 일본산 호러영화에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보내온 할리우드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2001년작 <회로>를 모태로 탄생시킨 또 하나의 리메이크다. 최근 아시아영화 수입·배급전문 레이블 ‘드래곤 다이너스티’를 런칭하고 2600억 상당의 아시아영화 펀드를 조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아시아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웨인스타인 형제가 장르영화 제작사 디멘션 필름스를 통해 일찌감치 판권을 구매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본래 웨스 크레이븐 연출에 커스틴 던스트 주연으로 2002년 제작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침 <링>의 리메이크가 개봉하면서 아류작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제작이 취소됐고, 3년 뒤에야 재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이 감독은 광고계 출신인 짐 손제로로 대체되었고, 주인공 자리는 TV시리즈 <베로니카 마스>와 <로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 크리스틴 벨과
할리우드로 간 일본 호러 <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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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박물관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마르티노(조르지오 파소티)는 가족이나 친구 없이 오로지 영화를 벗삼아 혼자 지내는 남자다. 업무시간이 되면 그는 박물관을 닫고 자기가 좋아하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틀어놓은 채 밤을 지샌다. 마르티노가 일하는 박물관 근처에는 햄버거 가게가 있고, 여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만다(프란체스카 이나우디)는 상습 차량절도범인 엔젤(파비오 트로이아노)과 사귄다. 무성의한 남자친구에게 늘 서운한 마음이던 아만다는 우연한 계기에 마르티노와 인연이 닿게 된다. 엔젤과 달리 어리숙하지만 다정한 마르티노에게 아만다는 호감을 느끼고, 애인의 변심을 눈치챈 엔젤은 그때부터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애쓴다. 선택의 문제가 엮인 골치 아픈 삼각관계를 테마로 삼은 <애프터 미드나잇>은 극중 스토리와 전혀 무관한 제3자의 내레이션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이를 통해 상황의 심각성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크고 작은 요소들이 어떻게 인생의 한 단락을 바꿀 수 있는지를
옛 영화들에 대한 러브레터 <애프터 미드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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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 공장에서 일하다 약지 끝 살점을 조금 잃는 사고를 당한 이리스(올가 큐리렌코)는 공장을 그만두고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향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발길을 옮기던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숲속의 표본실. 그곳에는 쓰디쓰거나 애처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물건을 표본으로 만듦으로써 그와 얽힌 기억과 감정을 봉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가득하다. 버리기에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간직하기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려본 사람들이라면,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기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원한 망각을 위한 이 표본실에서 단 한 사람, 이리스만은 누군가의 영원한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표본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 이리스는 원장(마크 베르베)으로부터 빨간 구두를 선물받는다. 원장은 이리스에게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구두를 벗지 말 것을 요구하고, 이리스는 자신의 발이 구두에
중독된 관계, 혹은 영원한 사랑 <약지의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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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육 2007>의 무대는 일본이 아닌 홍콩이다. 사진작가인 케니(토니 호)는 남편과의 첫 데이트를 회상하며 홍콩을 찾은 일본인 유미(사카가미 가오리)와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옷만 입고 나면 ‘도로남’이 될 거라 생각했던 케니와 달리 유미는 끈질기게 그에게 집착하고 급기야 그를 어느 저택으로 유인해 감금한다. 그녀의 완전한 사육은 가혹하다. 유미는 도망가려는 케니를 기절시키고 발가락을 자르다 못해, 그를 찾으러 온 애인 니키(보니 로이)까지 난도질하기에 이른다.
<완전한 사육 2007>은 <Love Education>이란 원제를 가진 이 영화의 ‘그럴싸한’ 한국 제목이다. 마쓰다 미치코의 실화 소설 <여자고교생유괴사육사건>을 영화화한 다른 <완전한 사육>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보다는 <위험한 정사>나 <미져리> 등과 비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남자와의 하룻밤 이후 그를 파멸
충동적인 발기는 패가망신 <완전한 사육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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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고든의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정치적 고려없이 연출되었지만, 교묘한 거리감각을 보여준다. 축구광 대니얼 고든은 1966년 영국월드컵 8강 신화를 보여주었던 북한 축구팀에 대한 애정어린 헌사인 <천리마 축구단>(2002)을 통해 서방인 최초로 북한에서 영화를 찍었고, 이어 북한의 매스게임을 소재로 한 <어떤 나라>(2004)를 연출했다. 월북 미군의 삶을 추적한 <푸른눈의 평양시민>(2006)은 대니얼 고든의 세 번째 북한 관련 작품이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영리하게 노린 바는 명확했다. 이념적, 정치적으로 무고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수많은 경계들을 허물 수 있다는 것. 미치도록 흐뭇한 영화인 <천리마 축구단>과 집단적, 이념적 색채가 강렬한 매스게임을 그 소재로 한 <어떤 나라>에 등장한 북한은 지구상에 최후로 남아 있는 전체주의의 낯선 이미지들을 지닌 외계(外界)이자 이질적인 타자성의 국가였다. 그러나 너무도 빈번한
독특한 이력의 월북 군인의 삶 <푸른눈의 평양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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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한 남자친구 현중(이기우)과 사랑을 나누는 가인(윤진서)은 유복한 가정의 행복한 여고생. 그러나 어느 날 작은고모가 큰고모를 병실에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일을 목격한 뒤 기이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발생한다. 우등생인 급우가 양호실에서 죽이려 들고, 담임선생님도 급작스레 가인을 공격한다. 충격에 휩싸인 가인에게,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는 전학생 석민(박기웅)이 다가와 “아무도 믿지 않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강경옥의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오기환 감독의 <두사람이다>는 대단히 흥미롭고 풍부한 착점을 지녔다. 마음속 작은 살의와 의심이 만들어내는 비극을 공포영화적으로 다루려는 모티브는 가족과 연인이라는 가장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섬뜩한 실체를 드러내며 ‘관계의 지옥’을 그려내려 한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들이 홀로 남겨진 자가 겪는 끔찍한 일들을 묘사하는 데 비해, 두 사람이 남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소름 끼치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에
관계의 지옥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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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외계인들에게 실험당하고 풀려난 세명의 남자가 외계인 하나를 생포한다. 함께 납치된 적이 있던 오스틴(애덤 코프먼)의 집에 일행이 들이닥치자, 오스틴과 함께 있던 여자친구(미스티 로자스)는 이에 항의한다. 해묵은 트라우마가 네명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사이, 외계인은 사슬에서 풀려나 집 안 어딘가에 숨고, 외계인의 습격으로 한명씩 죽어간다.
<얼터드>는 ‘피해의식’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영화에 가깝다. 흥미를 끄는 것은 주인공들이 말없이 전제하는 규율인데, ‘첫째, 외계인의 눈을 보아서도 그를 만져서도 안 된다. 둘째, 그를 죽이는 것은 짐승이 인간에게 하는 짓처럼 무모하다. 셋째, 우리를 포위하고 있으므로 집 바깥을 나가야 소용없다’로 요약된다. 이 원칙들을 누가 어떻게 허물어뜨리는가에 주목하는 것은 재밌는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얼터드>는 에두아르도 산체스 감독의 화제작 <블레어 윗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작이 마녀 전설을 따라
공포를 즐기려고 ‘노력’하는 영화 <얼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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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예지원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 탈도 많다)의 모범이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소식이 시내 전광판으로 울려퍼지는 가운데 서로 섞이기 어려운 네명의 사내가 청혼 반지를 품고 예지원 집으로 약속한 듯 들이닥친다. 넷 중 하나를 택하라는 사지선다의 요구 앞에 예지원은 답안 기입을 기피하는데, 아껴 먹으려는 그 봉들이 차례로, 말릴 틈 없이 요절난다. 예지원이 죽인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죽어나간 것일 수도 있다. 원작인 프랑스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형사가 여주인공에게 “살인과 사고사의 차이가 뭘까요?”라고 묻는 것처럼, 쌓인 주검의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알쏭달쏭이다. 스타 여배우의 집에서, 여배우의 소품들로 연쇄살인, 아니 연쇄죽음이 벌어졌으니 파란만장할 사단이 벌어진 건 분명하다.
예지원이 주검 하나를 수습하려들면 또 하나의 주검이 생겨난다. 계단으로 연결된 복층 주택이긴 하나 제한된 공간에서 다른 사내들 모르게 주검을 감추는 동
유쾌한 예지원스러운 자세 <죽어도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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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납치 사건 때문에 탈레반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2006년 베를린영화제의 감독상인 은곰상을 수상한 마이클 윈터보텀과 매트 화이트크로스의 작품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끝없는 전쟁에 놓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뜻하지 않게 정치적 희생양이 된 네 청년의 여정을 따라간다. 1984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린의 <인도로 가는 길>이 지배국의 눈으로 식민주의의 비인도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낭만적인 길을 걸었다면, 이 영화는 정반대의 출발선상에서 정치적, 민족적 약자들이 세계 정치의 권력구도 안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현장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고통스러운 ‘길’을 스크린으로 끌어들인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은 이미 2002년작인 <인 디스 월드>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캠프에서 태어나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던 자말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세미다큐 형식으로 만든 바 있다. ‘로드무비’라는 이름이 너무나 낭만적으로 들릴 만
세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발 <관타나모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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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용 장편’이라는 개념을 이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경우가 또 있을까?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와 원작 TV시리즈의 결정적 차이라곤 약 4배로 늘어난 에피소드의 길이와 와이드스크린 비율로 넓어진 화면 너비가 전부다. <심슨가족, 더 무비>는 캐릭터와 사건의 성격, 표현 수위, 농담 색깔은 물론, 오락성과 완성도마저 TV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의 평균치다. 요람 격인 폭스사를 놀려먹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스크린 하단에 방송 예고가 흐르면 “그래요, 폭스는 영화 상영 중에도 채널 광고를 하죠”라는 자막이 뜬다. 뒤집어 말해, 매트 그뢰닝과 제임스 L. 브룩스를 비롯한 <심슨네 가족들>의 창조자들은 텔레비전 우주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마음껏 해보지 못한 작업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극장용 영화로서 <심슨가족, 더 무비>가 구가하는 자유는 주로 공간적 여유다. 관객은 브라운관에서 익힌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파노라마, 360도 등의
호머의 오디세이 <심슨가족, 더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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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광장>은 남북전쟁의 상흔인 분단 상황을 다루는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 <간큰가족> 등이 다소나마 그러했듯 심각한 외피에도 어김없이 코미디의 심장을 품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탄(임창정)은 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지식한 성품의 섬마을 청년이다. 청운의 꿈을 좇아 부모의 가산까지 털어 상경한 그는 어수룩해 보인 탓인지 서울역에서 돈이 든 가방을 강탈당하고 만다. 애꿎은 행인을 넘어뜨려 도둑을 잡기는커녕 경찰서에 잡혀온 그는 ‘교육대’라는 단어에 솔깃한 나머지 삼청교육대에 자진(?)하는 지경에 이른다. 갖은 괴로움을 겪던 중 대열에서 이탈해 멱을 감는 선미(박진희)에게 첫눈에 반하고, 청솔리 마을에 도착해서는 새로 부임한 교사로 오인받아 얼결에 교단에 서게 된다.
평생의 소망을 이뤘을지언정 영탄의 앞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곧은 성격 때문에 마을 이장(임현식)이 처제인 선미를 덮쳤다고 집요하게 의심하고 이내 청솔리 마을의 비
심각한 외피에 코미디의 심장을 품은 영화 <만남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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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쿠로>에는 이름처럼 온몸이 검은색인 개 ‘쿠로’의 생애가 담겨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61년부터 10년 동안 일본의 시골 고등학교에서 생활한 쿠로와 학생들, 교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년 동안 쿠로 곁을 스쳐간 졸업생 수만도 4800명이라고 한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쿠로를 위해 장례식을 마련했고 수천명이 참석해 명복을 빌었다. 쿠로가 이토록 모든 이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한결같은 태도로 학교와 마을 사람들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강산이 바뀌고 인심이 변질되는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쿠로에게서 변치 않는 순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쿠로가 지켜본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료스케와 켄지의 사연을 중심으로 다룬다. 쿠로는 이사 가는 집주인이 버리고 떠나자 홀로 남겨진다. 떠돌던 쿠로는 가끔 음식물을 주는 료스케(쓰마부키 사토시)와 가까워지고 그를 쫓아 학교까지 들어온다. 마침 학교 축제의 가장 행렬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검은색인 개 ‘쿠로’의 생애 <안녕, 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