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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앙 로즈>는 소재부터가 극적이다.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렸지만 불운이 끊이지 않았던 음악가. 프랑스 최고의 가수라고 손꼽히는 에디트 피아프를 그린 이 전기영화의 매력은 기실 그녀의 굴곡 많은 인생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솔의 제왕 레이 찰스의 삶을 영화화한 <레이>,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을 담은 <샤인> 등 명망있는 실존 음악가를 내세운 비슷한 유의 음악영화가 그렇듯 가장 무거운 짐을 껴안은 쪽도 감독 올리비에 다한이 아닌 극중 에디트 피아프 역을 맡은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다. 그러나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에서 <사랑의 찬가>(l’Hymne l’Amour), <파담 파담>(Padam Padam),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에 이르기까지 128분의 러닝타임을 꽉 채운 주옥같은 명곡들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양 코티아르는 피아프가 겪었던 역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 <라비앙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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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로 간주될 정보가 있습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죽음의 테마에 사로잡힌 지도 꽤 오래됐다. 캘리포니아 데스 밸리(Death Valley)에서 <게리>를 찍은 2002년을 기점으로 치자면 5년째다. <엘리펀트>(2003)는 의도적으로 또래들을 살해한 10대 소년에 관한 영화였고, <라스트 데이즈>(2006)는 불가피하게 자기를 살해한 20대 청년에 관한 영화였다. 그리고 <파라노이드 파크>는 의도하지 않은 살인을 범하고 그 기억을 혼자 삼켜버리는 10대 소년에 관한 영화다. ‘죽음과 청년’ 연작(?) 네편은 미학적으로도 소집단을 형성한다. 이들 영화에서 관습적 드라마투르기와 편집 공식은 거의 폐기되고, 시간은 주관적으로 흐른다. 또 음악과 음향이 그리는 보이지 않는 풍경(sound-scape)이 이미지를 질기게 따라붙는다.
포틀랜드에 사는 소년 알렉스(게이브 네빈스)는 친구 제라드(제이크 밀러)에게 이끌려, 집나온 10대
외부자의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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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은 어디에?”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의 강도 4인은 로망을 꿈꾸며 은행을 턴다. 0.1초 단위까지 자신의 몸으로 정확한 시간을 잴 수 있는 유키코(스즈키 교카)는 지루한 자동차 교습소 일상에 대한 도발로 은행을 털고, 연설의 달인 쿄노(사토 고이치)는 은행 사람들을 상대로 사랑과 인생, 자연의 철학을 읊는다. 타고난 소매치기 쿠온(마쓰다 쇼타)은 멕시코로의 여행을 꿈꾸며 은행으로 향하고, 거짓말이라면 단숨에 간파하는 나루세(오오사와 다카오)는 시청에서의 따분한 시간을 갱으로 돌파한다.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4명의 인물이 갱을 조직해 은행을 턴다. 제목의 의미 그대로 이들이 은행을 터는 방식은 매우 명랑한데 유키코가 밖에서 시간을 재며, 나루세는 거짓말 탐지 기능으로 금고 열쇠를 찾아내고, 쿠온이 재빨리 금고의 돈을 가방에 담는 사이 쿄노는 어디로 흐를지 모를 이야기로 사람들
정말 지구가 움직일 수도?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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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강도와 프로 강도, 그리고 비리경찰이 한날한시에 은행을 습격한다. <마을금고연쇄습격사건>은 절박한 상황에 몰린 한 남자가 궁여지책 끝에 은행을 털기로 하고, 그렇게 들어간 은행에서 여러 인물들과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 간판에 페인트칠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남자 배기로(이문식)는 아픈 딸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신체포기 각서까지 쓰고 돈을 빌리지만 소매치기를 당한 그는 마지막 방법으로 은행강도를 결심한다. 한편 마을금고를 며칠간 탐색하며 털이를 준비해온 강도 일당 만수(박효준)와 우상(정경호)은 같은 날, 배기로보다 조금 늦게 금고에 들어서고, 마을금고의 이사장과 어두운 거래를 하고 있던 비리경찰 구 반장(백윤식)은 금고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문서를 빼내기 위해 금고털이 도라이바(김상호)를 생수배달원으로 변장시켜 투입한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한 공간에 모인 세 무리의 인물들. 박상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인간의 희극과 비극 <마을금고연쇄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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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인타운, 재미 한국인 졸부들을 상대로 하는 룸살롱 앞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룸살롱 영업이사인 전진호(정준호)가 누군가의 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것. 이후 사건의 용의자로 14살 한국계 소년이 잡히고, 장래가 유망한 한국계 변호사 존 킴(존 조)은 소년의 무죄를 증명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한다. 그러나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갱단의 일원인 마이크(김준성)는 의뭉스러운 태도로 존 킴 주변을 맴돈다.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한국계 남성이라는 이상한 유대감이 둘의 만남을 지속시키고, 상황은 점차 처음의 의도와는 점점 멀어져 파국으로 향하게 된다.
<웨스트 32번가>는 뉴욕의 한인 동포사회를 배경으로, 한국계 미국인 감독과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영화는 변호사 존 킴을 중심으로 하는 백인 중심의 상류층 세계와 환락의 밤거리를 떠도는 한국 갱단의 세계를 두축으로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릴러와 누아르의 조합을 기대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잠들지 않는 악행의 밤 <웨스트 32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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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불감증인 건 아니니 걱정마시길. <색화동>은 에로영화가 아니라 에로영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는 영화다. 넓게 보자면 주류를 꿈꾸는 비주류 영화인의 이야기고, 더 넓게 보자면 낯선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의 좌충우돌 소동극이다. 영화과 학생인 진규에게 충무로는 더없이 먼 세계다. 애써 준비한 시나리오는 여러 공모전을 돌며 낙방소식을 전하고, 여자친구는 비전이 없는 진규를 탓하며 떠나버린다. 같은 과 친구들이 “너 잘되면 나 좀 끌어주라”며 내뱉는 희망도 무기력하다. 진규는 우선 돈도 벌고 경험도 쌓자는 생각에 에로영화 현장을 찾지만 이곳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원칙과 달리 스토리를 생각하지도 않고 착실한 준비도 안 하고 배우의 연기보다는 피부상태에만 신경을 쓴다. 게다가 에로영화란 타이틀 덕분에 그들은 ‘벌레 취급’을 당하는가 하면 촬영장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불청객들은 눈으로 배우들을 농락한다. 열심히 해보자고 굳
‘에로’영화 종사자들의 인생극장 <색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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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애니메이션의 실사영화와 일본 에로영화들이 속속 소개되고 있다. <크림레몬> 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게임, 소설로 전환되면서까지 공전의 히트를 한 <크림레몬> 시리즈(1984∼93)는 드라마, 판타지, SF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보여주며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성인애니메이션의 전설. 안노 히데아키, 기타쿠보 히로유키 등도 작화가로 참여한 바 있는 애니판 <크림레몬>은 전형적 미소녀물로 1980년대 OVA시장을 발전시키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2005년부터 실사영화로 제작돼 일본에서 DVD로 발표됐던 것이 이번에 국내에서 극장 개봉된다. 소개되는 작품은 <미소녀 아미의 일기> <꽃봉오리의 모습> <꿈꾼 후에> <풀사이드의 아미> <소녀의 초상화> 이상 5편. 다양한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여주인공 ‘아미’의 이야기가 이중 네편을 차지한다. 16살 아미(원 애니메이션에서
성인애니메이션의 전설 <크림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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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자취를 감춘 결혼식장. 신부와 하객은 그의 행방을 찾던 도중 빈방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신부의 친구와 마주치고, 곧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 들어가 있는 신랑을 발견한다. “어머, 신랑 친구인 줄 알았지 뭐야.” 뻔뻔스레 응답하는 여자는 광고회사 중역 카티야(제니퍼 러브 휴이트). 앙심을 품은 신부는 파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카티야를 골탕먹이기 위해 유명 인사들이 운집하는 호화로운 파티를 개최하고 그녀의 이름만 쏙 빼놓는다. 파티의 입장권인 황금열쇠를 얻기 위해 온갖 파렴치한 수단을 동원하던 카티야는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꿈꾸던 이상형(콜린 퍼거슨)을 만나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제니퍼 러브 휴잇의 컨페션>(이하 <컨페션>)은 <섹스 &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들을 매혹했던 ‘칙릿’의 감수성을 빌려오고자 하는 영화다. 광고회사라는 도회적이고 트렌디한 무대부터 시시콜콜 고
민망한 호들갑 <제니퍼 러브 휴잇의 컨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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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는 법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적 사명감과 고객의 이익을 실현해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감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 두개의 사명감은 종종 충돌해 변호사들은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의뢰인의 죄를 인정하고 법의 관용에 호소할 것인가, 죄를 모른 체하고 법의 허점을 파고들 것인가. <세븐데이즈>의 주인공 지연(김윤진)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녀는 의뢰인의 편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100%에 가까운 승률을 기록 중인 변호사다. 그러던 지연에게 최악의 사건이 벌어진다. 홀로 키우던 딸이 납치된 것. 유괴범은 공판이 7일밖에 남지 않은 살인용의자를 석방시키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그녀는 직업적 사명감이나 명예가 아니라 딸의 생명을 위해 무죄판결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세븐데이즈>는 법정영화보다는 액션스릴러 장르에 가깝다. 살인혐의가 명명백백해 보이는 용의자의 살인혐의를 벗기기 위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지연은 꽤 높은 물리적인 장
변호사의 분투기 <세븐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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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괴물과 인간이 공존하던 암흑의 고대. 호르트가르 왕(앤서니 홉킨스)이 다스리는 덴마크 주민들은 정체불명의 괴물 그렌델(크리스핀 글로버)의 무차별적인 학살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물론 괴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영웅이 당도한다. 베오울프(레이 윈스턴)라는 젊은 전사가 열네명의 병사와 함께 호르트가르 성에 도착하고,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그렌델의 목숨을 빼앗아 덴마크의 영웅이 된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그렌델의 엄마, 아름다운 물의 마녀(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 전사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만다. 그녀를 죽이려 혈혈단신 동굴로 들어선 베오울프는 그렌델이 호르트가르 왕의 자손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 역시 부귀영화와 권력을 유지해줄 테니 자신과 동침해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유혹을 받게 된다. 제의는 받아들여지지만 무심한 운명은 50년 뒤 베오울프에게 되돌아온다.
<베오울프>는 퍼포먼스 캡처 기술로 만들어진 풀 CGI영화다. 모든 캐릭터는 실재 배우의 연기를 디지
‘어른들의 이야기꾼’ 저메키스 <베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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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열흘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화려한 휴가>의 또 다른 버전은 아닐까 궁금하겠지만, 김현석 감독은 친절히 ‘99% 픽션’이라는 자막까지 넣어뒀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바로 야구와 더불어 소심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다. 그러니까 <스카우트>는 그의 이전 두 영화인 <YMCA야구단>(2002)과 <광식이 동생 광태>(2005)가 한몸으로 만난 영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시대의 암울한 공기가 흐른다. 스포츠 에이전시의 세계를 다뤘던 <제리 맥과이어>(1996)의 한국적 저개발의 기억이라고나 할까?
1980년, 대학 직원 호창(임창정)에게 광주 출장 명령이 떨어진다. 광주일고 3학년 ‘괴물’ 야구선수 선동열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카우트해오라는 것. 하지만 경쟁 대학이 이미 점찍어둔 상태고, 행방 역시 묘연해 출장 일수는 늘어만 간다. 그런 가운데 호창은 광주가 고향이자 옛사랑이기도 한 대학
비주류를 향해 바치는 찬가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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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혼란스럽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두 번째 연출작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는 청춘을 다루는 여타 영화들과 비슷한 태도를 견지하는 영화다. 소년도, 어른 남자도 아닌 십대 청년들은 불안정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바보스럽게 낄낄대다가 잔인할 정도의 폭언을 쏟아내기도 하는 이들 무리는 딱 그 나이만큼의 고뇌를 짊어진 채 가족과 사랑, 미래를 고민한다.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주는 몇몇 장면이나 빠른 템포의 음악도, 청춘의 카오스를 빚어내기에 적합해 보인다. 거기다 이 영화가 한 가지 덧붙인 것이라면 단테의 장편서사시 <신곡>이다. 1970년대 스페인의 작은 마을. 신장 하나를 떼내는 수술을 받은 미겔리토(알베르토 아마릴라)는 갑자기 <신곡>에 빠져들면서 시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와 붙어다니는 친구들은 모두 세명. 불우하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파코(펠릭스 고메즈), 동양무술에 심취한 바비, 그리고 모라탈라가 그들이다. 친구들과 수영장에서 소일하던
청춘의 카오스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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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거울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세상을 응시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소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다. 아니 던져진다. 첫숏과 마지막 숏의 이러한 대조는 전수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일종의 전환점과도 같은 <검은 땅의 소녀와>의 위상과 유사점이 있다. 전작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동일한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기억의 편린들을 꿰맞추며 자신을 찾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보여주었다면, <검은 땅의 소녀와>는 인물들이 하루하루 버텨가기에 급급한 검은 땅의 세상으로 그 시선을 옮긴다.
진폐증에 걸린 해곤(조영진)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허름한 집 한채마저도 철거 대상인 형편이다. 광부들은 합병증으로 발전되지 않는 한 진폐증만으로는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 해곤은 철거 보조비로 보험조차 가입되지 않은 트럭 한대를 임대해 장사를 시작하지만, 정신 지체아 아들 동구(박현우)의 실수로 사고가 나면서 작은 희망마저도 빼앗긴다.
검은 땅의 세상 <검은 땅의소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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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성공가도를 달리는 자신만만한 남자가 있다. 경력만 화려한 줄 알았더니 아내에겐 가정적인 남편이요, 딸에겐 자상한 아버지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이 남자의 삶은 그 완벽함 때문에 왠지 위태롭다. 아니나 다를까, 곧 그의 안온한 일생을 박살내는 악당이 등장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시는 딸을 보지 못하리라 협박한다. 마이크 바커 감독의 스릴러 <더 버터플라이>에서 닐 랜달(제라드 버틀러)이 라이언(피어스 브로스넌)의 횡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딸 소피의 납치다. 거기다 함께 붙잡힌 아내 애비(마리아 벨로)와 그가 회사와 관련해 저지른 몇 가지 비리들 역시 그의 발을 묶어놓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전까지 닐의 세계를 완전무결하게 보이게끔 한 모든 것들이 도리어 치명적인 비수로 돌아오는 셈이다. 게다가 라이언은 유례없이 잔인한 악당이다. 자신이 돈 따위에는 관심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듯 닐에게 전 재산을 인
아이리시 억양의 악당 피어스 브로스넌 <더 버터플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