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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윤주)은 엄마(설지윤)에게서 출생에 관한 진실을 듣게 된다. 너는 강간으로 인한 원치 않은 임신의 결과였다고 표독스럽게 고백하는 엄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인선은 생부인 방준(임대일)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방준 전처의 친척으로 위장한 인선은 방준의 집에 머물게 되고, 인선과 방준은 각자 다른 목적으로 위험한 동거를 시작한다. 방준과 함께 살면서 인선은 방준의 인간적인 모습에 동요하고, 방준과 인선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연극계에 오래 몸담았던 중견 배우 임대일은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피부에 느낄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주역이다. 핸드헬드로 촬영한 화면과 툭툭 끊어지는 편집은 영화에 거친 인상을 심지만 그렇게 이어붙은 화면들은 불안하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로 기능한다. 공들인 듯한 미장센과 피아노 선율은 이 거친 작품에 묘한 음산함과 세련됨을 얹어주며 완급을 조절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두 남자의 음담패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불편
‘불쾌함’이라는 감정 <나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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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올 거야.” 조성희 감독의 전작 <짐승의 끝>에 등장한 이 구절은, 신작 <늑대소년>에 관한 예언처럼 들린다. <늑대소년>의 철수(송중기)는 상대를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는 이와 발톱, 무시무시한 근력이 깃든 육체 복판에 순정 100%의 심장을 지닌 존재다. 관객은 오랜 외국생활 끝에 고국을 찾은 한 노부인의 회상을 경유해 그를 만난다. 47년 전, 폐를 앓는 소녀 순이(박보영)는 요양차 이사한 시골집 창고에서 야수 같은 소년과 맞닥뜨린다. 가뜩이나 투박한 촌이 싫었던 소녀는, 말도 못하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소년을 구박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마음을 기울인다. ‘철수’라고 불리게 된 소년의 가슴에도 소녀를 향한 무조건적 신뢰와 애정이 싹트고 둘의 관계는 순이네를 마을에 이주시킨 부잣집 아들 지태(유연석)의 질투를 부른다.
전작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에서 과
미소년으로 환생하다 <늑대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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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면 퀴어 멜로드라마의 구역에서 흡족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일단 이성애 관계가 중심인 드라마를 다룬 영화보다 표본 수가 적으니 당연하고, 두 번째로는 비주류적 소재를 영화화시키는 1차 목표에 탈진한 나머지 과장과 감상주의의 유혹에 말리기 쉽다. 이성애자의 패러다임에 끼워맞추어 동성 커플에게 남녀 역할을 작위적으로 분담시키는 오류는 숱한 함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최고의 퀴어영화에 주어지는 테디베어상을 탄 아이라 잭스 감독의 <라잇 온 미>는, 에이즈 공포와 거대한 불관용에 맞선 인정투쟁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어낸 21세기에 비로소 연애의 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퀴어 러브스토리의 상을 예시한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사는 덴마크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 에릭(투레 린드하르트)은 전화데이트를 통해 변호사 폴(재커리 부스)을 만난다. 대외적으로 여자친구까지 둔 폴은 처음엔 방어적 태도를 취하지만 오래지 않아 에릭의 생일 파티를 주최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라잇 온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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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해도 이미 얽혀 있다. 그것이 이 도시의 비정함을 낳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췌장암 말기에 놓인 아내(서영희)의 병원비를 위해 사채업자에게 5천만원을 빌린 남자(김석훈)는 돈을 갚지 못할 처지가 되자 사채업자에게 신장과 간 중 하나를 떼어주어야 할 판이다. 한편 그의 장기를 요구하는 악독한 사채업자(이기영)의 아내는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묵은 모텔 창문 너머로 감옥을 탈출한 탈옥수(안길강)가 영문도 모른 채 떨어져 죽는다. 그 탈옥수는 우연히 옥상에서 어느 췌장암 말기 환자의 자살을 막으려다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채업자의 아내는 돈이 필요한 한 택시기사(조성하)에게 납치되는데 그 택시기사가 돈이 필요해진 이유는 자신의 뺑소니 범죄를 목격한, 그러니까 사채업자에게 장기를 적출당할 위기에 놓인 남자(김석훈)의 협박 때문이다. 이 남자도 돈이
사회 밑바닥의 그물망 <비정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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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에 위치한 ‘오픈 스페이스 배’에 모인 국내외 시각예술가들. 그들은 배밭에 위치한 숙소에서 합숙을 시작하며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이들을 찍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온 다큐멘터리팀도 분주히 움직인다. 어느덧 전시회 오픈 일정이 다가오고 전시회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파티에 묘령의 여인이 찾아온다. 묘령의 여인은 파티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예술가들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그리고 특별한 이상징후를 보이지 않았던 예술가들이 묘령의 여인과 접촉한 뒤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부귀영화>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실황에 호러를 덧입혀 가공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10개의 챕터로 이뤄진 작품은 챕터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 이야기와 그들의 트라우마에 대해 들려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곁을 맴도는 묘령의 여인과 접촉한 뒤 사라지는 듯하지만 그들의 실종은 예술가 개인이 가진 트라우마와 더 연관이 있다. 묘령의 여인이 예술
예술가들의 연쇄죽음 <부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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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미명 아래 ‘와일드 세븐’이라는 초법률적 경찰조직이 결성된다. 히바(에이타)를 비롯해 7명의 전과자들로 구성된 와일드 세븐은 악질 범죄자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은폐되어 있으며, 일본 경시청 간부 쿠사나미(나카이 기이치)가 와일드 세븐을 지휘한다. 어느 날 범죄조직이 도쿄 상공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살포하겠다고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 법무성 공안조사청 PSU의 수장 키류는 와일드 세븐을 끌어들여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와일드 세븐은 키류가 범죄 정보를 주식거래에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사실을 알게 된다. 키류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와일드 세븐을 없애려 한다.
<와일드 세븐>은 냉혹한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일곱 남자의 비장한 무용담이다. 와일드 세븐의 멤버들은 국가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들이다. 그들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악을 처단할 때다. 영화는 밑바닥
일곱 남자의 무용담 <와일드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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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길에서 소녀가 차에 치어 죽는다. 로즈(욜랭드 모로)는 사고를 낸 남편을 대신해 경찰에 전화를 하고, 소녀의 부모를 만나고, 자동차 시트의 핏자국을 닦아낸다. 그리고 얼마 뒤 로즈는 소녀가 죽은 그 길에서 남편이 저지른 사고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편을 차로 받아 살해한다. 남편의 학대로 점철된 32년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이 난다. 자신의 범행을 숨긴 채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로즈는 급하게 짐을 꾸려 도시에 사는 아들 토마스(피에르 모레)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자유의 몸이 된 로즈에겐 죄책감보다 해방감이 더 크다. 토마스 역시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어머니의 새 출발을 기쁜 마음으로 돕는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 로즈가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토마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괴로워하고, 로즈는 그 길로 아들의 집을 떠난다.
<롱 폴링>은 <세라핀>으로 2009년 세자르영화제에서 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
자유를 찾아 <롱 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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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합중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킴 잭슨)은 재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달 탐사선에 흑인 모델 제임스 워싱턴(크리스토퍼 커비)을 실어 보내고 워싱턴은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나치가 달 뒤편에 거대한 기지를 건설한 채 몰래 숨어 있었던 것. 달에서 살아남은 나치의 시간은 뛰어난 전함 건조술을 제외하곤 2차대전 당시에 머물러 있다. 워싱턴이 들고 온 휴대전화를 활용해 미완성이던 거대 전함을 움직일 수 있음을 알게 된 젊은 사령관 클라우스 아들러(고츠 오토)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지구로 향한다. 포로가 된 워싱턴은 나치 교사이자 아들러의 연인인 레나테(줄리아 디에체)의 도움으로 세뇌된 척해 함께 지구로 귀환한다. 그리고 3개월 뒤 지구를 점령하기 위한 나치의 침공이 시작된다.
티모 부오렌솔라 감독의 <아이언 스카이>는 독특하고 기발한 유럽 SF영화다. 지구를 침략하는 것이 외계인이 아니라 달 뒤편에 숨어 있던 나치라는 재미난
나치의 침공 <아이언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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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 사는 11살 소년 아란은 발레 수업을 받기 위해 매일 2시간씩 로마로 통학한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으니 외톨이가 되는 게 당연하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뒤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된 14살 소녀 미카엘라는 아란만큼 지독한 연습벌레다. 그녀의 목표는 흑인은 발레리나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는 것이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뉴욕 변두리에 사는 16살 소년 조안은 하루빨리 프로 무용수가 돼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고향에는 자신의 성공만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가족이 있다. 17살 소녀 레베카는 조안보다 더 암담한 상황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됐으나 아직 발레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지 못했다. 레베카는 더이상 토슈즈를 신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발레는 자신의 유일한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12살 소녀 미코는 어떨까. 미코의 결심은 언제까지나 굳건할까. 이들이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파이널 무대에서 만났다. 세계적인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
꿈을 향한 기본자세 <퍼스트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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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상우의 전작들은 해괴망측하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 내용은 더 심하다. <엄마는 창녀다>는 아들이 포주를 자임하고 나서 병든 노모의 몸을 팔아 먹고산다는 내용이고 <아버지는 개다>는 한 집안의 아버지가 아들들을 짐승처럼 짓밟고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관련하여 그의 영화에는 강도 높은 폭력장면이 상존하며 동시에 성적 수위도 높아서 성기 노출도 다반사다. 감독은 배우가 그 장면을 해내기를 주저하면 자기가 나서서라도 그 장면의 수위를 지키고 강도를 높인다. 그러한 수위와 강도에 대한 강박이 그의 영화를 늘 감싸고 있는데 그건 이상우 영화의 단점이기도 하거니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의 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높인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비>는 벌거벗은 여자도 보기 껄끄러운 성기도 가학적인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순영(김새론)과 순자(김아론)는 정신
슬픈, 혹은 무서운 동화 <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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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삼국지>의 말기다. 무능한 황제 한헌제(소유붕)로 인해 왕조는 몰락할 위기에 처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조조(주윤발)에 의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조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황실에서는 암암리에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어려서부터 그를 제거하기 위한 훈련을 받은 영저(유역비)와 목순(다마키 히로시)은 각각 궁녀와 내시의 신분으로, 조조가 머물고 있는 화려한 궁궐인 ‘동작대’로 잠입한다.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동작대는 중국 한나라 말기인 건안 15년, 구리로 만든 봉황으로 지붕을 장식한 화려한 궁궐로 조조의 사유지에 자리해 있었다. 평생 그 누구도 믿지 않았던 희대의 책략가이자 야심가인 조조의 권세를 상징하는 거대한 성이었다. <조조: 황제의 반란>은 바로 그 동작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조조의 끝없는 대결이다.
주윤발이 연기한 것에서 보듯 오우삼의 <적벽대전> 연작(2008∼20
황제의 자리를 노리다 <조조: 황제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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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플로리다 해변가에서 태어났지만 아기 바다거북 토토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바다다. 태어나자마자 꽃게와 갈매기를 상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는 토토. 무사히 바다로 입수한 토토는 멕시코 만류를 타고 여행하던 중 소용돌이에 휩쓸려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장장 25년의 세월이 흐르고, 토토는 후손을 낳기 위해 고향인 플로리다의 해변가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닉 스트링거 감독은 멸종위기종인 붉은바다거북의 생태를 담은 자연다큐멘터리를 거북의 일생에 관한 한편의 드라마로 재탄생시켰다. 관객은 토토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25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토토의 시점으로 간접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을 돕는 것은 전적으로 촬영의 몫이다. 로리 맥기니스 촬영감독은 미니어처 카메라를 사용해 아기 거북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토토의 25년을 연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여러 장소를 돌며 다양한 연령대의 거북을 촬영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여기에 화려한 음향과 절묘한 편집을 더해 극영
쉽게 보기 힘든 삶과 죽음 <아기 거북 토토의 바다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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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을 위해 서울지하철 9호선을 이용하던 김형렬 감독은 지난 4월 무렵 지하철 기본요금을 500원 인상한다는 내용의 공고문을 보게 된다. 예고 없는 일방적 통보에 김형렬 감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그 내막을 캔다. <맥코리아>는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이하 맥쿼리)를 고발하는 시사 다큐멘터리다. 글로벌 투자은행이자 금융 서비스 그룹인 맥쿼리는 국내민간투자사업 중 총 13개 사업장에 1조8천억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그중 12곳이 정부로부터 최소운영수입보장제(MRG)를 적용받고 있다. 최소운영수입보장제는 기업이 투자할 때 예상한 수입에 실제 수입이 미치지 못할 경우 정부가 그 금액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물론 그 정부지원금은 국민 세금으로 책정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지하철 9호선은 맥쿼리를 비롯한 민간투자사업 투자자들이 최대 주주로 있기 때문에 시민의 불편에는 아랑곳없이 이윤 추구가 최우선 목표다. 우면산 터널과 마창대교, 인천대교, 인천공항 고속도로 또
소통의 불능 <맥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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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눈물>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진 다양한 생태•자연•환경 다큐멘터리들은 브라운관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를 점점 더 가깝게 만들어놓았다. 진재운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대한 비행> 역시 창원시가 지원하고 KNN부산경남방송이 기획, 제작하여 지난 5월에 방영했던 5부작 다큐멘터리 <위대한 비행>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뉴질랜드에서 알래스카까지 3만여 킬로미터를 비행하는 도요새이다. 몇날 며칠, 바닷길을 한번도 쉬지 않고 날아 이동하는 이 새는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갯짓을 멈추면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갯벌에 도착해 쉬면서도 하루에 두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밀물을 피해야만 한다. 오랫동안 쉼없이 날아야 하기에 허기진 배를 충분히 채울 수도 없다. <위대한 비행>은 이 고단한 도요새의 극적인 여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렇다고 <위대한 비행>에 도요새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요새
도요새의 시선 <위대한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