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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처럼 숏의 통일성으로 신을 구분한다면, <필름 소셜리즘>은 3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각 장면들엔 소제목이 붙는다. 지중해를 가르는 유람선을 담은 1부 ‘이러한 사물들’, 부모에게 자유와 평등, 연합(우애)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는 남매의 이야기인 2부 ‘유럽이여’, 그리고 3부 ‘우리의 휴머니티’. 카메라는 진실과 허상의 전설을 담은 6개의 장소들(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데사, 그리스, 나폴리, 바로셀로나)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제목이 ‘소셜리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학자 장 폴 쿠르니에가 이를 잘못 읽어 ‘필름’이란 단어를 붙였고, 이를 들은 고다르가 ‘소셜리즘을 알리는 영화’라는 뜻으로 그대로 썼다고 한다. 프랑스 주간지 <레쟁록큅티블>의 인터뷰에 따르면 애초에 구상은 2부 ‘마르탱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캐릭터는 영혼이 담긴 대사가 없는, 그래서 결코 닫힌 구조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상태였고, 이에
3개의 장면 <필름 소셜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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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의 어느 해안, 불법 아동 인신매매단이 마스크를 쓴 한 소년을 눈밭 속에 남겨둔 채 떠난다. 소년의 이름은 그윈플렌(마크-앙드레 드롱당). 마스크는 길게 찢어진 그의 입매를 겨우 가리고 있다. 기이한 외모를 운명으로 짊어진 소년은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준 우르수스(제라르 드파르디외)의 보살핌 아래 유명한 광대로 자라난다.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고아 소녀 데아(크리스타 테렛)와 함께 그는 자신의 기구한 삶을 무대 에 올려 명성을 얻는다. 그렇게 그는 우르수스, 데아와 함께 성공가도에 오를 것 같았으나 여공작의 유혹에 빠져 귀족사회의 놀림거리로 전락한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고 막대한 재산이 수중에 떨어진 뒤에도 그의 처지는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가 권력자들의 이면을 확인하고 우르수스와 데아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순간까지도 신은 그의 편이 아닌 듯하다.
저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영화화한 야심찬 프로젝트다. 팀 버튼도
빅토르 위고 원작 <웃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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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영원히 외로운 길이고, 비평은 그 발꿈치도 못 따라간다.”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와서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노가수의 고백에, 영화 속 남자는 이런 문구를 바친다. 둘은 오래전 결혼하리만큼 사랑했던 사이였고, 짧은 기간 동안 함께했지만 오해와 어긋남으로 인해 결국 헤어졌다. ‘비첨하우스’라고 불리는 영국의 대저택에서 두 사람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회한다.
지휘자 토마스 비첨의 이름을 딴 이곳은 은퇴한 오페라 가수들과 음악가들을 위한 실버하우스이다. 어느 날 적당히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던 음악가들 사이에 새로운 거주자가 나타날 거라는 소문이 도는데, 그녀는 바로 당대의 디바 진 홀튼(매기 스미스)이다. 우아한 테너 레지(톰 커트니)와 바람둥이 베이스 윌프(빌리 코놀리), 가끔 치매 증상으로 걱정을 안기기도 하는 알토 씨씨(폴린 콜린스)에게 몇년 전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던 최고의 소프라노 진의 등장은 충격을 안겨준다. 그해 연례만찬에서 최상의 혼성 콰르텟(사중창)을
노년의 로맨스 <콰르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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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의 친구를 자처했던 지율 스님이 4대강 사업과 관련한 환경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모래가 흐르는 강>은 천성산을 내려와 내성천 가에 텐트를 친 지율 스님이 4년여간 내성천 일대의 변화를 기록한 작품이다. 지율 스님은 처음부터 한편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기록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런 자막이 흐른다. “2008년 12월, 4대강 뉴스를 보고 산에서 내려와 물길을 따라 걸으며 무너져가는 강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수해 예방, 수자원 확보, 경제 발전 등 정부의 화려한 구호와는 정반대로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무너지고 파괴되는 섬뜩한 국토의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아니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된 내성천의 모습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율 스님은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4대강 공사장을 둘러본 지율 스님은 곧 낙동강의 지천인 내성천으로 향한다. 내성천의 상류엔 영주다목적댐이 건설되고 있다. 영주
강물이 품고 있는 생명의 소리 <모래가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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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사랑의 밀어 따위는 없다. 머리끄덩이 잡기는 예삿일. “너 같은 미친X는 정말 처음”이라는 발사에 “이런 개 같은 XX가”라는 폭격으로 받아치는 식이다. 연애 초기의 설렘과 흥분이 가라앉은 오래된 커플에겐, 식어버린 온도에 딱 맞는 ‘생활형 연애’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연애의 온도>는 3년째 비밀연애를 해온 직장동료 동희(이민기)와 영(김민희)의 결별 스토리다. ‘헤어져’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마이클 더글러스, 캐서린 터너가 죽자고 부부싸움을 하던 <장미의 전쟁>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메가톤급 치졸한 공방전이다. 선물했던 노트북은 부서져서 되돌아오고, 호의로 줬던 돈은 모두 빚으로 셈해지는 살풍경의 현장에서 사랑은 지긋지긋한 현실이 된다.
사랑에 빠지는 건 3초의 찰나로도 가능하다지만, 그 사랑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 몇백 곱절의 노력이 필요한 게 연애다. <연애의 온도>는 지극히 사실적인 상황과 구어체
야단법석 결별 스토리 <연애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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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히 짚고 가자. <부러진 화살>이 공개되기 전까지 정지영 감독은 과거에 머물렀다. <남부군>의 명성과 거장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유효했지만, 현재진행형 감독의 수식을 붙이긴 어려웠다. <부러진 화살>이 거둔 평단과 흥행의 성공 이후, 연이은 <남영동1985>의 문제제기로 정지영 감독은 궤도를 되찾았다. 정지영 감독의 부활은 그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고, 한국 영화사에 뜨겁고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한국 영화산업 최고의 전성기에 중견감독의 활동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 같은 연배의 이두용, 이장호, 고(故) 박철수 감독이 뭉쳐 만든 네편의 옴니버스 단편영화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은 그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의 영화다. 정지영 감독의 시장에서의 입지가 고무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를 네 감독은 대규모 자본의 도움 없이 감독으로서의 노련한 연출력과 현재의 고민을 접목해 완성했다.
이
한국 영화사에 바치는 질문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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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9일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 박철수 감독의 유작 <생생활활>은 <녹색의자>(2003) 이후 저예산 디지털영화로 맥을 이어온, 성(性)과 영화의 엄숙주의로부터 탈피를 주장했던 박철수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현대판 <데카메론>’이라는 카피답게 100여분의 상영시간 동안 자그마치 스무개의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이 영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간호사 이야기, 성매매 방지 특별법에 대한 토론, 페티시 산업 종사자와의 인터뷰, 성에 대한 학제간 논의 등을 통해 오늘날 성에 관련된 고정관념과 제도들이 어떻게 비틀리고 억압된 성의식을 창출하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에 출연했던 오인혜가 배역을 바꿔가며 때로는 감독의 시선에서,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에서 이 천태만상의 이야기 속을 유람한다.
<생생활활>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어떠한 구심점이나 일관된 맥락 없이 자유분방하게 연결
‘현대판 <데카메론>’ <생생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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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감독이 관객에게 뉴욕을 꿈꾸게 만들었다면 오멸 감독은 보는 이가 제주를 앓게 만든다. 그의 제주는 늘 ‘웃프다’. 인물이 처한 상황의 비루함은 여유로운 삶의 리듬과 유머로 전도되고 그 누구도 일방적인 동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 4.3 사건을 ‘제사’(祭祀) 형식을 빌려 스크린 위로 소환한다. 작품은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소제목으로 분절된다. 하지만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살고 싶었는가’이다. 감자의 제주 사투리인 ‘지슬’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이며, 달리고, 항거하고, 배반하면서까지 살아남고 싶었던 이들의 삶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그들은 집을 떠나 캄캄한 동굴에 숨어서, 죽은 어미의 품에서 꺼내온 지슬을 먹는다. 그리고 삶의 고통이 무색하게 지슬은 늘 달다.
감독은 희생자의 범주를 제주도민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권력의 틈바구니에
삶에 대한 열망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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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케(오마 사이)는 심장에 문제가 생겼고, 지아니(가드 엘마레)는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베르다(조이 스타르)는 상대팀 선수를 폭행해 수감 중이고, 레앙드리(프랑크 두보슥)는 실축의 트라우마를 못 이겨 삼류 배우가 되었으며, 마약과 유흥에 찌든 마란델라(람지 베디아)는 방탕한 생활을 그만두지 못한다.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이들은 축구팀 ‘FC몰렌’의 대표선수들이다. 이 구제불능의 팀을 이끄는 감독, 오베라(호세 가르시아)도 만만치 않은 말썽꾼이다. 한때 국가대표로 잘나갔던 오베라지만 지금은 알코올 중독과 가난으로 점철된 시궁창 인생이다. 딸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FC몰렌의 감독이 된 오베라는 구단주가 주는 압박 속에서 팀을 재정비하고 프랑스컵 대회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자벨 위페르, 마리온 코티아르, 르네 젤위거, 니콜 키드먼 등 쟁쟁한 여배우들과 작업하며 우아한 연출을 특기로 삼아온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이력을 상기하면 <드림팀>은 다소 낯설고, 귀여워
구제불능 축구팀 <드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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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의 ‘역사 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통해 나치군에 피의 복수를 함으로써 유럽 역사를 재구성한 타란티노가 미국 노예제 역사에 메스를 들이댄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를 내놓았다. 영화명을 빌려온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1966년작 <장고>처럼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가 주인공이긴 한데, 이 노예가 쇠고랑을 벗는 건 한순간이다. 장고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독일인 현금사냥꾼 닥터 킹(크리스토프 왈츠)의 도움을 받아 금세 멋진 말을 타고 미국 평원을 달리며 헤어진 아내 브룸힐다를 찾아다니는 총잡이 낭만주의자로 변신한다. 말하자면 얼굴색만 다를 뿐 영락없는 미국 서부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브룸힐다가 미시시피에서 가장 악독한 농장 캔디랜드의 노예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농장주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찾아간다.
“(<장고>는)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불구덩
총잡이 낭만주의자 <장고: 분노의 추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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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인 동시에 억압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더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바바라>는 국가와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때 생기는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며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을 재현한다. 출국신청서를 냈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시골의 작은 병원으로 좌천당한 바바라(니나 호스)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잠깐의 외출의 대가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탐문과 알몸 수색을 받아야 한다. 서독에 있는 애인이 출장 올 때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잠시밖에 볼 수 없다. 그녀에게 지금 여기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며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위해 잠시 유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을 탈출하여 연인과 새 삶을 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삶으로 출발하기 직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영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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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만을 위해 모든 걸 던지는 비련의 여인. 영국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여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19세기 러시아 상류계층의 여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캐스팅부터 상영 언어, 로케이션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의 조 라이트가 <안나 카레니나>의 연출을 맡으며 직면했던 문제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제작비 3천만파운드를 두고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했다 취소하기를 여러 번, 결국 조 라이트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촬영을 세달 앞두고 <안나 카레니나>의 주요 배경을 극장으로 바꾼 것이다(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런던 근교의 셰퍼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조 라이트의 이 대담한 시도는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보는 이가 되새겨볼 새도 없이 숨가쁘게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내리며,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회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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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호스트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반기는 꽃미남들의 경쾌한 인사를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마는 단 한명, 하루히만은 예외다. 후지오카 하루히(가와구치 하루나)는 호화스러운 오란고교에서 유일한 서민 학생이다. 조용히 공부할 곳을 찾던 하루히는 실수로 호스트부의 값비싼 화병을 깨고, 화병 값을 변상하는 대신 여자임을 감추는 조건으로 호스트부에 입부한다. 한편 학교 축제인 오란제에서 우승해 중앙홀 사용권을 얻고 싶은 호스트부는 경기 연습에 매진한다. 그즈음 단기 유학생으로 미셸(시노다 마리코)이 전학을 오는데, 미셸의 등장으로 호스트부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8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하토리 비스코의 인기 원작 만화 <오란고교 호스트부>가 TV애니메이션, 시뮬레이션 게임, 드라마에 이어 극장판으로도 제작됐다. 작품의 분위기나 출연진은 드라마와 대부분 같다. 대신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원작 만화의 에피소드를 주된 이야기로
거부할 수 없는 꽃미남들 <오란고교 호스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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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초호화 출연진이다. <블레이드 러너> 등에서 쌓아올린 명성을 내던지고 싸구려 영화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낮은 곳으로 임하셨던 명배우 룻거 하우어. <저수지의 개들> 이후 체중 증가와 비례하는 속도로 ‘미국 B급 액션의 큰형님’에 등극한 마이클 매드슨. 한때 지상 최강의 영장류라 불리며 이종격투기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거기에 열정과 의리의 대한민국 원조 상남자 김보성까지. <영웅: 샐러멘더의 비밀>은 ‘장난 아닌’ 캐스팅만으로도 B급 액션영화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작품이다.
거대 제약회사 사장 헌트(룻거 하우어)는 불로장생의 신약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인간의 자살충동을 자극하는 바이러스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는 무자비한 용병 릭(마이클 매드슨)을 사주하여 이 사실을 은폐하고 기일에 맞춰 신약 출시를 강행한다. 이를 눈치챈 한국 국정원 요원 장현우(김보성)와 러시아 특수부대팀들은 헌트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제
‘B급의 맛’ <영웅: 샐러멘더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