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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다. HUN(최종훈) 작가가 그린 동명의 웹툰을 사랑한 팬들과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이후 장철수 감독의 차기작을 고대했던 팬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을 기대하는 팬들까지, 설렘 반 우려 반의 심경으로 영화를 기다린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기대는 절반 정도 채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중간 다소 늘어지는 감도 있지만, 상업영화로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재미는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원작의 내용을 지나치게 충실히 옮긴 탓에 웹툰에서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신파적 요소가 화면에 돌출되었고, 그것이 때때로 영화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북한의 특수 공작부대 조장 원류환(김수현)이 남한의 달동네에 잠입한다. 그는 뛰어난 신체기술과 사격 능력을 가진 엘리트 요원이지만, 정작 그가 맡은 남파임무는 동네 바보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하루에 세
청년들의 순정 <은밀하게 위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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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레이몽 드파르동은 2010년에 <프랑스>(la France)라는 표제의 사진 전시회를 연다. 그가 수년간 한적한 시골마을을 다니며 찍었던 풍경을 담은 전시회였다. 영화 <프랑스 다이어리>는 이 전시회에서 공개되었던 사진들의 뒷이야기, 그러니까 레이몽이 대형 카메라를 들고 시골 농장, 카페, 이발소 등지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기록한다. 노작가가 한곳에 멈춰 서서 빛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거나 카메라를 덮은 붉은 천을 들어 렌즈를 들여다보고 노출을 계산하는 작업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따금 레이몽이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어 사진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한가로운 여행길 사이사이에 지난 반세기 동안 레이몽이 작업했던 다큐멘터리 클립과 미공개 자료들이 회상처럼 끼어든다. 덕분에 1960년대 초반에 사진작가로서 이력을 시작해 베네수엘라, 아이티, 비아프라 등 분쟁지역을 돌아다니고, 이후 관
레이몽 드파르동의 시간 <프랑스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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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수호하는 영웅 사이퍼 레이지(윌 스미스) 장군은 아들 키타이(제이든 스미스)와 함께 레인저 훈련 행성으로 가던 중 불의의 사고로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다. 그곳은 자연의 역습으로 인류가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3072년의 지구다. 생존자는 단 두 사람, 게다가 사이퍼는 두 다리가 부러진 상황, 조난 신호를 보낼 장치를 찾기 위한 키타이의 모험이 시작된다.
요약하자면 M. 나이트 샤말란표 보이스카우트 영화다. 사랑하지만 소통하지 못하던 아들과 아버지가 불의의 조난을 당하고, 서로의 손발이 되어 역경을 헤쳐나가는 사이 마음속 앙금을 털어낸다. 아들은 성장하고 아버지는 솔직해지는, 익숙하지만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문제는 이야기와 배경 묘사 사이의 개연성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SF에서 배경 디자인은 그 자체로 작품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애프터 어스>의 배경들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계속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낚싯바늘 없는 낚시질이 계속 되어봤자
미래의 지구 <애프터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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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다이어리>는 14살 소녀 오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실화다. 어머니의 죽음 뒤 오다가 갓 도착한 에스토니아는 낯설고 우울한 나라다. 새어머니는 관리인과 불륜에 빠졌고 아버지의 실험실에는 절단된 시체들이 가득하다. 이 속에서 조숙한 오다에게 일기 쓰기란 절규를 대체한 무엇이다. 죽음과 고독과 악의 예감 속에 휩싸여 있던 오다는 우연히 에스토니아 아나키스트 도망자를 만난다. 오다는 무명의 그를 ‘슈납스’라 부르며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함께 도망가기를 꿈꾼다. 독일과 러시아가 갈등하던 1차대전 직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영화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전쟁의 근원이 되는 악의 문제, 인간의 잔혹성, 교양주의의 기만 등을 에둘러 보여준다. 도저한 전쟁의 전조는 생체실험을 통해 우생학을 합리화하는 아버지의 음울한 실험실을 통해 드러난다. 비정상적 실험을 일부 소재로 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시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다소 힘들 수 있다.
이 영화는 기존에 알고 있는 전쟁
전쟁의 근원 <폴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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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런던으로 돌아온 도리안 그레이(벤 반스). 젊고 아름다운 데다 큰 저택과 막대한 유산까지 갖게 된 그는 금세 귀족들의 주목을 받으며 런던 사교계의 별로 떠오른다. 하지만 도리안 그레이는 느긋한 쾌락주의자 헨리 워튼 경(콜린 퍼스)과 함께 아편굴과 매음굴을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촉망받는 화가 바질 홀랜드(벤 채플린)가 그린 아름다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점점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게다가 약혼녀가 도리안 그레이의 변심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도리안은 죄책감을 잊기 위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더불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화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형상으로 변질되어간다.
올리버 파커 감독은 <이상적인 남편>(1999)과 <임포턴스 오브 비잉 어니스트>(2002)로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두 차례 영화화한 바 있다. 하지만 <도리안 그레이>를 통
19세기 런던의 뒷골목 <도리안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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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호스피스 병원이 위기에 처했다. 조용하게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던 중병의 환자들이 수개월 연체된 병동 운영비 때문에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찾아보면 살길은, 아니 편하게 죽을(?) 길은 있는 법. 호스피스 병원의 환자들이 결성한 취미밴드 ‘불사조 밴드’는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해 병원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고 후원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때마침 아이돌 가수 송충의(이홍기)가 폭행사건에 휘말려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병원에 오게 된다. ‘불사조 밴드’ 멤버들은 충의를 설득해 창작곡과 연주 훈련을 부탁한다. 조폭 출신의 뇌종양 환자 무성(마동석), 나이트클럽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는 간암 말기의 봉식(임원희), 자원봉사자이자 위암을 앓고 있는 안나(백진희), 시도 때도 없이 도촬을 일삼는 백혈병 소녀 하은(전민서)은 충의와 함께 병원을 구하기 위한 생애 마지막 무대를 준비한다.
남택수 감독의 <뜨거운 안녕>은 <7번방의
생애 마지막 무대 <뜨거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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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누구에게 고해받고 용서받나요?” 검은 옷의 신부는 묶인 곳이 많다. 죄 많은 지상에, 사람들의 평판에, 영적 갈구와 육체적 욕망에도. 어느 날 가족 없이 늘 성당에서 지내던 여중생 연미가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다. 전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박 신부(조재현)와 늘 집을 비웠던 언니 수현(배정화)은 연미의 죽음에 해 죄책감을 느끼며 서로를 위로하다가 깊은 관계까지 맺게 된다.
영화는 박 신부를 따라가지만 우리는 그의 경험과 내면 전부를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의 카메라워킹은 고요하며 우리는 프레임 밖의 상황들, 좀더 구체적인 단서들과 의혹들을 알아낼 수 없다. 파드레 최에게 온 편지의 내용, 박 신부의 과거, 그가 실제 연미에 대해 품은 감정과 욕망의 정도 등은 보이지 않으며, 사실상 그것들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영화를 관습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많은 단서들은 아마도 프레임 밖에 있을 터인데,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어딘가, 하지만 그 모서리가 다 보이지
영혼의 구원을 귀한 편력기 <콘돌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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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치의 딸인 제니퍼 챔버스 린치의 네 번째 연출작 <체인드>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붙잡힌 아이의 이야기이다. 8살 꼬마인 팀(에먼 파렌)은 엄마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대로 납치당하고 만다. 연쇄살인마인 택시기사 밥(빈센트 도노프리오)은 엄마를 죽인 뒤 팀을 사슬에 묶어놓고 키우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충분히 고통스럽지만 이건 도입부일 뿐이다. 진짜 사건은 살인마가 팀을 또 다른 살인마로 키우면서 벌어진다. 팀은 엄마가 죽은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살인마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그렇게 어딘가 뒤틀린 어른으로 성장한다.
애초에 살인마가 여자와 아이를 죽이는 영화이니 편하게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는 편이 좋다.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여자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주고, 여기에 정체불명의 시점숏까지 집어넣어 불쾌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유의 영화에 거부감을 가진 관
살인마를 키워낸 살인마 <체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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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생활을 하다 은퇴한 빌리(권혁수)는 염소 고든(이인성)과 함께 평화로운 하루를 보낸다. 그의 평화를 깬 것은 어린 비버 베시부(정현경)의 낭떠러지 추락사고다. 빌리와 고든은 베시부를 구하기 위해 육해공을 넘나드는 특급 작전을 펼친다. 한편, 5년 전부터 베시부를 추적해온 경찰 맥킨지(고성일)가 등장한 뒤로, 사건은 어떻게든 베시부를 잡아가려는 맥킨지와 베시부를 구하려는 빌리의 줄다리기로 번진다. 그사이 추락한 베시부는 급물살에 휘말려 댐 아래로 떠내려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일단 편집과 음악이 훌륭하다. 제작은 숀 코너리, 주제가는 ‘007’ 시리즈로 유명한 셜리 배시가 불렀고, <센스, 센서빌리티>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의 음악을 담당한 패트릭 도일이 음악작업을 맡았다. 샤샤 하트만 감독은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미스터 빌리: 하일랜드의 수호자>(이하 <빌리>)의 음악은 웅장하고 근사하다. 문제는 스토리다.
육해공을 넘나드는 특급 작전 <미스터 빌리: 하일랜드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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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것이 자기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프닝의 담담한 독백은 <아이 오브 더 스톰>이 얘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자, 유한한 삶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들의 회한일 것이다. 상류층 가문의 엘리자베스 헌터(샬롯 램플링)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늘 침대에만 누워 있다. 그의 곁에는 두명의 간호사와 가정부, 그리고 유언장을 책임질 변호사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외로 추방됐던 양아들이자 배우 바질 헌터(제프리 러시)와 친딸인 도로시(주디 데이비스)가 찾아온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이, 그들은 갑작스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엘리자베스 헌터의 치매가 불현듯 오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감지된다. 엘리자베스의 값비싼 물건을 탐내는 간호사와 가정부,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서로 살가워 보이지 않는 바질과 도로시 등 이미 어긋난 것들은 다시 꿰맞추기 힘들어 보인다. 노년의 황혼기를 다루는 다른 영화들이 그러한 것들의 봉
노년의 황혼기 <아이 오브 더 스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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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영화의 미덕이란 보는 이의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게 만드는 시각적 자극일 것이다. 하나 <쉐프>는 눈을 홀리는 진수성찬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미니멀한 현대요리(분자미식학)의 장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특급 셰프인 알렉상드르(장 르노)는 “이런 건 요리가 아니”라며 혹평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이라면 맛보단 호기심에 분자요리를 즐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요리만을 고집하는 알렉상드르는 미슐랭 가이드에서도 인정한 전설적인 셰프.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그이지만,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해 버거워한다. 레스토랑의 젊은 사장 스타니실라는 고루한 알렉상드르의 요리를 못마땅해하고 레스토랑에서 그를 내쫓을 궁리에 여념이 없다. 한편, 요리 외길밖에 모르는 신인 요리사 자키(미카엘 윤)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에 번번이 식당에서 해고당한다. 자키의 재능과 센스를 알아본 알렉상드르는 자키를 조수 삼아 스타니실라의 위협에 맞서 레스토랑을 지킬 방도를 연구한다.
완고한 알렉상드
가볍게 즐길 만한 디저트 <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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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사내 존 해리슨(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다. 모두가 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존은 더욱 과감한 테러를 감행해 대규모의 사상자를 낸 뒤 클링온 지역으로 몸을 숨긴다. 클링온과의 전쟁을 우려한 사령부는 비밀리에 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인 커크(크리스 파인)에게 맡기고, 엔터프라이즈호는 ‘특별 무기’를 장착한 채 클링온으로 향한다. 하지만 커크 일행은 베일에 싸인 사건의 충격적인 배후를 알고 혼란에 빠진다.
<스타트렉>이 처음 TV에 등장한 것이 1966년이다. 커크 함장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호는 거의 50년 동안 광활한 우주에서 다양한 모험을 펼치며 셀 수 없이 많은 임무를 해결해왔으며, 그만큼이나 많은 테마를 다루었다. 그리고 J. J. 에이브럼스가 연출한 두 번째 <스타트렉> 극장판인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테러’라는 소재를 정면으로 끌어들여 <스타트렉
‘우리가 만든 적’ <스타트렉 다크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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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김주령)와 현수(김수현)는 결혼 2년차의 30대 부부다. 두 사람은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꾸리고 있다. 화면에 드러난 이들의 일상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고, 각자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저녁에는 맥주 한잔을 기울이는 식이다. 휴일에는 놀이터에서 함께 햇볕을 쬐기도 한다. 여느 신혼부부처럼 이들은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 걸머져야 할 책임감과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변화가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그 고민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가깝고 또 서로를 아낀다.
<잠 못 드는 밤>은 주희와 현수 부부에게 일어난 며칠 동안의 일들을 에세이를 쓰듯이 담아낸 영화다.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걷거나 잠든 배우자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는 것과 같은 애틋한 순간들이 한신 한신 쌓이는데, 이 알콩달콩한 소우주를 지켜보는 일이 즐거워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잠 못 드는 밤>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
알콩달콩한 소우주 <잠 못 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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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타이틀 로맨틱코미디’라는 표현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하다. 감독과 각본을 겸하며 <저스트 어 이어>로 장편 데뷔한 댄 메이저 감독이 영국 출신이긴 하지만 지금껏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2006), <브루노>(2009), <독재자>(2012) 등에서 래리 찰스 감독, 샤샤 바론 코언과 함께했던 시나리오작가이자 프로듀서였음을 먼저 기억해야 할 듯하다. 행여 <노팅힐>(1999)의 <She>나 <러브 액츄얼리>(2003)의 <All you need is love> 같은 사운드트랙의 정서를 떠올렸다가는 큰일이다. <저스트 어 이어>는 패럴리 형제나 주드 애파토우가 워킹 타이틀에 스카우트됐다면 만들었을 법한 영화다.
냇(로즈 번)과 조쉬(라프 스팰)는 첫만남으로부터 7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게 되면서 채 1년도 되기 전에 문제점들이
사랑, 그 이후 <저스트 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