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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지금쯤 원작소설의 광팬들은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개봉을 앞두고, 기대 반 우려 반의 심경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스테디’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판타지소설 <반지의 제왕>의 영화판은 그러나, 원작의 명성에 누가 되진 않을 듯하다. 그것은 <천상의 피조물들> <데드 얼라이브> <프라이트너>로 알려진, 판타지 호러 장르의 재간꾼 피터 잭슨의 이름에서 배어나는 미더움 때문. 피터 잭슨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뉴질랜드의 숲 속에 시공을 탈색시킨 중간세계(Middle Earth)를 짓고, 2년 넘도록 두문불출하며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만들어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절대반지’의 내력을 소개하고, 원정대가 구성돼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과정을 따라잡는다. 엘프족과 난장이족, 그리고 인간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먼 옛날, 악의 힘에 동화된 신 사우론이 만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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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야, 찬 바람을 부탁해!
혼곤히 잠든 거인의 꿈처럼 길고 황량한 계절 겨울. 그 거대한 꿈 안에서 다시 꿈꾸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극장이라는 동굴이 있고 영화가 있다.
12월7일부터 2002년 2월 말까지 극장으로 나설 채비를 차리고 있는 영화는 한국영화 16편을 포함해 줄잡아 70편을 웃돈다. 외화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며 흥행을 주도할 ‘빅3’는 판타지 블록버스터 세편. 20세기 판타지문학의 양대 베스트셀러를 최신 특수효과 기술에 힘입어 스크린에 옮겨놓은 <반지의 제왕>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3주 간격으로 주술의 효험을 겨루고,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가 행복해지고픈 크리스마스 주간 관객을 유혹한다. 자기 영역을 굳힌 중견감독의 현재를 알려줄 신작도 즐비하다. 마이클 만의 <알리>,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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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 애니메이션만 기억하면 어쩌지"‘다르르르르르….’ 프라모델 비행기 한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어수선한 오후의 소음 속을 부유하던 비행기가 우리를 인도하는 골목은 낯익은 듯 새로운 세계다. 수채화 붓을 통해 불러낸 유년의 공간. 트램펄린을 반동삼아 구름을 잡을 듯 뛰는 아이들, 담배를 문 입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구경하는 중년아저씨, 번개가면을 서로 뺏으려 자전거 위에서 장난치는 동네 녀석들. 그 한가로운 골목풍경 속으로 쭈뼛쭈뼛 걸어들어오던 노란모자 소년. 악동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골목으로 돌아가던 소년은 결국 그들의 눈에 띄어 모자를 뺏긴다. 하늘로 휙, 날아가는 노란 모자. 모자는 대문 넘어 뻗어나온 어느 집 나무 위에 걸리고, 키가 닿지 않는 소년은 한아름 짱돌을 던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때 소년 곁을 배회하던 강아지의 코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이들의 발걸음은 잠시 나무 아래 계단에 머문다.날렵하게 달려가는 셀 애니메이션의 매끄러운 질감도, 머리카락의
<와니와 준하> 애니메이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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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원안을 냈다는데, 벽장 속의 괴물은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피트 닥터(이하 피트) 래세터와 <토이 스토리>를 만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도 내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고 공감하는 게 좋았다. 그처럼 모두가 공유할 만한 것을 찾고 싶었다. 난 어릴 때 벽장 속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아이들은 그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세계 어느 곳, 어느 문화에서나 보편적이다. 그래서 벽장 문을 지나면 아이들을 겁주는 몬스터들의 회사가 있고, 거기도 경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거의 5년이 걸렸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한 작품에 매달리게 하는 힘이 뭔가.존 래세터(이하 래세터) 우리는 미쳤으니까.(웃음) 애니메이션은 아마 가장 노동집약적인 예술 형식일 것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점이지만, 아주 협동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 개발 때문이다. 우리는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참 어려
“벽장 속 괴물, 모든 유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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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미국 땅에서 제 나름의 분위기를 지닌 도시가 어디 한둘이랴마는, 샌프란시스코는 유난히 독특한 정취를 품고 있다. 멋스런 유럽풍 집들의 이국적인 느낌이 그렇고, 가파른 고개를 꾸준히 기어오르는 전차가 그렇다. 아니 굽이굽이 언덕을 따라 자리잡은 도시 자체가 그렇다. 차가 없으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LA는 물론, 비교적 전철과 택시가 발달한 뉴욕 등 여느 도시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는 것도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한때 히피들의 터전이었다는 헤이트 애시베리에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나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히피문화의 상징이 새겨진 티셔츠가 심심찮게 보이고, 게이들의 거리라는 카스트로의 카페에는 다정하게 마주앉은 동성연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반전시위나 살 집을 요구하는 홈리스들의 시위에 100여명이 몰리는가 하면, 킹 크림슨 같은 60년대산 노장들의 공연에 아직도 수백명이 줄지어 선다. 사랑과 자유의 이상
<몬스터 주식회사>와 픽사 스튜디오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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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감독 이용민 출연 이예춘, 도금봉, 이빈화 제작연도 1965년<살인마>(1965, 이용민) 이전에 <흡혈화 악의 꽃>(1961, 이용민)이 있었다. ‘한국판 드라큐라’(두 영화 모두 사용한 메인 카피)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그보다 앞서에는 <괴인 드라큐라>(Horror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59년 수입·개봉), <흡혈귀의 선혈>(Blood of Dracula, 허버트 스트록 감독, 1960년 수입·개봉), <흡혈귀 드라큐라의 신부>(Bride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61년 수입·개봉)가 있었다. 이들 수입 공포영화는 ‘처첩’ 또는 ‘계모-전처자식간의 갈등’을 다루는 조선말 이후의 가정소설들과 함께 <살인마>의 중요한 문화적 원천이다.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가 신파를 끌어들여 한국 괴기영화의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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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영화제가 지난 8월 ‘7인의 감독전’에 이어 11월25일부터 ‘과거로의 환상여행’을 시작한다. <살인마>(이용민), <하녀>(김기영),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 <꿈>(신상옥), <마의 계단>(이만희),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등 60년대 영화 6편에 배창호 감독의 <꿈>을 덧붙여 상영하는 이번 영화제는 한국영화 전성기에 만들어진 판타스틱한 장르영화들을 엿볼 드문 기회이다. 당시 이런 유의 영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된 방식은 최근 영화학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는 <근대성의 유령들>에서 이런 영화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 근대성이 대낮을 밝히는 와중에, 근대화 정책이 ‘현실’에서 혹독하게 말살해버린 여귀, 야수, 괴물, 영매, 무당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밝혔다
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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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모로는 1928년 1월23일 영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줄곧 자랐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오간 국제 결혼 덕분에 그녀는 4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바깥 나들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던 모로였지만 2차대전의 와중에서 그녀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연극이었다.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연기수업을 받던 그녀는 1948년 <마지막 사랑>으로 영화에 데뷔하고 1953년 장 가뱅과 공연한 <현금에 손대지 마라>로 프랑스에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여왕 마고>와 <여학생 기숙사> <가스 오일> 등을 거쳐 1958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출연하면서 명실공히 월드 스타로 발돋움했다.<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 잔 모로는 이미 10여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중견 여배우였다. 당시 촬영기사는 첫 일주일치 촬영 분량을 보고 “애송이 감독 루
나른한 매혹, 그 아름다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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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살았다”라는 찬사로 입을 열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배우로, 감독으로”라고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쥴 앤 짐> 등을 통해 누벨바그의 아이콘이 된 배우 잔 모로는 올해 부산영화제가 모셔온 귀한 손님이다. 11월15일 오전 11시30분, 파라다이스 호텔 18층. 해운대 바다가 창문 가득 펼쳐진 카페에 청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 파란 니트 카디건 차림으로 나타난 잔 모로는 파리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처럼 소탈했지만, 말을 걸면서 똑바로 상대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빨려들고 싶게 아름다웠다. <쥴 앤 짐> 시절의 고혹적인 목소리는 많이 거칠어졌지만, 거침없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위’ 또는 ‘농’ 하고 말할 때 카트린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스크린
“내 안의 진리가 나를 밀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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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대만영화는 이란영화와 함께 미학적 신세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허우샤오시엔이 있었다. 민족의 상처를 성장의 통증에 실어보냈던 초창기를 지나 엄격한 형식미로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는 20세기 영화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성취다.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이 쉰살의 거장은 신작 <밀레니엄 맘보>에서 이제 동시대 대만 젊은이들의 생활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있다. “이건 10년 동안 만들어질 3부작의 미완성 서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임/편집자 나의 인생, 나의 영화부산에서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허우샤오시엔은 “부산을 처음 방문했다. 자갈치 시장이 마음에 들어 자주 나가봤는데 화투를 치고 있는 남자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자갈치 시장의 풍경이나 화투 치는 남자들이 그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을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는 대만의 남루한 변두리에 태어나 싸움질과 도박으로
“영화 창조는 관객을 거절하면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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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의 세밀화가 그려내는 무늬
<모텔 선인장>(1997)이 모텔 방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중심에 놓고 그 위에 여러 남녀의 에피소드들을 분산시켜놓았다면, <낙타(들)>에서 구심점은 두 남녀이고 모텔 방은 그들이 거쳐가는 여러 장소 가운데 하나(아마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장소, 즉 목표점일지도 모르지만)일 뿐이다. 데뷔작인 <모텔 선인장> 이후 무려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기용 감독은 그렇게 전작의 구도를 변주하면서 또 그것과는 다른, 아주 인상적인 작품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나이 마흔이 된 한 남자와 그와 같은 나이를 곧 맞게 될 한 여자가,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그들이 어느날 ‘모험’을 감행한다. 사실 모험이라고 해봤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저질러 봤던 남녀들이 지나갔던 길을 그저 반복할 뿐이다. 그들은 서해안의 어느 작은 포구에 도착해서는 우선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기분을 돋워줄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6] - 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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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멸과 파괴의 이중주
여기 더할 나위 없이 악독한 인간이 있다. 먹이를 찾는 매처럼 표독스런 눈을 부라리는 야수, 그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 곁에 남자는 기척없이 다가서고 여자는 벌레보듯 놀라며 사내를 피한다. 기다리던 남자친구를 만나자 야수 같은 남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녀, 순간 사내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빼앗는다. 한낮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은 처음엔 그저 미친 사내의 행패에 불과했다. 여자에게 입을 맞춘 사내는 목격자들 앞에 무릎꿇고 여자는 남자에게 침을 뱉는다. 아무도 짐작 못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그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김기덕 감독의 7번째 영화 <나쁜 남자>는 ‘<악어>의 용패가 <파란 대문>의 진아를 만났을 때’라고 불릴 만한 영화다.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똘똘 뭉친 남자가 행복에 겨워하는 여대생에게 멸시당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5] -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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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삶, 그러나 위로는 있다
지난 98년 <벌이 날다>로 데뷔한 민병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괜찮아, 울지마>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일반에 첫 공개됐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원지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은 작고 따뜻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소박한 삶의 진실을 찾으려 한 첫 번째 작품의 주제의식은 이번 작품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벌이 날다>가 작은 권력을 휘두르는 무례한 이웃을 굴복시킨 보통 사람의 집념을 그린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 도박으로 소일하는 청년 무하마드(무하마드 라히모)는 돈을 다 탕진한 뒤 바이올린 케이스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겐 “유럽 공연이 취소돼 휴가를 얻어 악상을 구상하러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지만, 그게 그의 허장성세임을 알 사람은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4] - 민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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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내 사랑, 어둠만이 가득한”
1997년 7월1일. 유니언 잭이 하강하고 오성홍기가 게양되던 날, 홍콩의 운명은 바뀌었다. 누구는 할리우드로 건너가고, 누구는 중국 본토를 껴안았지만, 프루트 챈은 ‘그날’을 가슴에 묻은 채 ‘홍콩 지킴이’로 남았다. 반환 직전의 불길한 공기를 호흡하는 거리 아이들을 포착한 출세작 <메이드 인 홍콩>이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그것이 8만달러짜리 영화라거나 리얼한 상황과 기묘하게 어우러진 MTV적 영상이 돋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는 ‘홍콩의 그늘’을 주시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홍콩의 모습’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용기와 재기 때문이다. 프루트 챈은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 <리틀 청>으로 이어지는 반환 3부작을 마친 뒤에는 “중국사회에서 일종의 금기사항”인 섹스를 전면에 내세운 창녀 시리즈로 돌입해 <두리안 두리안> <할리우드 홍콩>을 완성해냈
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3] - 프루트 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