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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리 고헤이는 80년대 이후 일본에서 작가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온 대표적인 감독으로 꼽힌다. 한편, 한편의 영화에 4∼5년 동안 공을 들이는 그는, 20년간 4편의 작품을 선보인 과작의 감독이기도 하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과 일본인, 재일한국인의 우정을 담은 <큐포라가 있는 거리>로 잘 알려진 우라야마 기리로 감독 아래서 연출 수업을 한 그의 데뷔작은 81년에 만든 <진흙강>.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전후 일본 서민들의 삶을 아이의 눈으로 보여주는 흑백영화다. 강가 다리 옆에서 우동집을 하는 부부의 아들 노부오는 새로 강에 정박한 배에서 사는 소년과 친구가 된다. 소년의 가족은 전쟁으로 가장을 잃고 몸을 파는 어머니의 매춘으로 살아가는 처지. 우연히 매춘 현장을 목격한 노부오는 혼란에 빠지고, 친구의 배는 또 어디론가 떠나간다. 전후의 폐허는 끝났다고 공언하던 50년대 중반의 오사카를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살아남은 부모 세대의 기억과 빈곤한 생활에, 소년들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스포트라이트; 오구리 고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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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로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각인됐을 이름이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무궁무진하다. 62년에 데뷔한 이래 무려 9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충무로 도제시스템 아래서 흥행영화를 만들며 영화 수련을 쌓았고, 70년대를 거치면서 작가적 자의식과 대면하며 숱한 문제작을 선보였다. 사극, 멜로, 코미디, 액션, 전쟁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 탈장르적 드라마들을 통해, 한국인의 뿌리뽑힌 정체성과 이식된 근대화의 감춰진 상처를 성찰해왔다. 물리적으로 편수가 워낙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오래 전 작품일수록 접할 기회가 드문 그의 영화세계 일부를 이번 광주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 엿볼 수 있다.임권택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10편.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는 젊은이들의 투쟁을 액션드라마 형식에 담은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부터 판소리를 바탕으로 소리와 영상의 일체화를 실험한 최근작 <춘향뎐>까지를 아우르되, 80년대 이후의 작품들이 주축을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임권택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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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 제로 Ze(’)ro de Conduite감독 장 비고 프랑스 1933년 44분힘겨운 유년 시절에 대한 회고라는 점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1959)에, 학교라는 권위체제에 대한 과격한 반항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린제이 앤더슨의 <만약에…>(1968)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이 바로 장 비고의 <품행 제로>이다. 영화는 학교가 강요하는 행동지침들을 따르지 못해 품행 점수 0점을 받는 소년들의 ‘시스템’에 대한 반항을 보여준다. 픽션영화로는 비고가 처음으로 만든 <품행 제로>는 그의 무정부주의적인 반항정신이 잘 녹아 있는 영화. 또한 급진적인 태도와 더불어 세밀한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적인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혼합한 창의성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랑주씨의 범죄 Le Crime de Monsieur Lange감독 장 르누아르 프랑스 1936년 80분거의 파산할 위기를 맞은 소규모 출판사의 사장이 회사의 돈을 갖고 사라지자, 직원인 랑주는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폴리티컬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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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 식으로 말하면 대가의 예술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세계의 정수(精髓)이다. 그것은 아무나 보여주지 못하는 심원함과 광대함을 풀어놓는 세계이기에 그 자체가 교훈인 그런 세계가 될 만하다. 광주영화제가 마련하는 ‘마스터스’는 그래서 대가라 불리는 이들의 현재가 어떤 모양인지를 살펴보고자 기획된 섹션이다. 그들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은 일단은 일종의 경이로움과의 대면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영화가 과연 어느 지점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점검이 되기도 할 것이다.자신의 영화에서 연극 무대를 자주 끌어들였던 누벨바그 세대 감독 자크 리베트는 또다시 무대를 향한 애정을 과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리베트의 신작 <알게 되리라>는 연극을 올리는 무대라는 환경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을 경박하지 않은 가벼움과 유머 가득한 터치로 그려낸 일종의 풍속 희극이다. 영화는 현실과 무대의 경계에 선 연극 배우 카미유와 그 주변 사람들의 욕망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깃들여 있는 연극성을 찬미
마스터스-영화의 세월을 품은 거장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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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영화제에서 소개하는 ‘일본의 두 거장’, 미조구치 겐지와 이마무라 쇼헤이는 각기 다른 시대에 활동한 만큼 둘 사이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감독들이다. 예컨대, 다소 단순화해서 비교하자면 미조구치의 세계가 ‘우미(優美)의 미학’에 집중한 것이라면 이마무라의 세계는 ‘혼돈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감독은 공교롭게도 여성 캐릭터에 특히 치중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일치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두 감독의 영화들 속에서 여성들은 상이한 존재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판이한 두 일본 감독들의 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는 일본영화사의 다른 두 양상들을 직접 관찰하고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미조구치 겐지:영화게의 셰익스피어1889년 도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미조구치는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고 신문 광고 일러스트레이트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2년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그는 와카야마 오사무의 조감독으로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미조구치 겐지와 이마무라 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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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용 L’emploi du Temps감독 로랑 캉테 프랑스 2001년 132분 로랑 캉테는 근래 등장한 영화감독들 가운데 아주 드물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기 영화 속에 끌어안으려 절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다. 데뷔작 <인력 자원부>(1999)에서 프랑스의 한 금속 공장에 카메라를 들이댔던 그는 그 다음 작품인 <시간의 사용>에서는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당한 한 중산층 가장의 이야기를 통해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벵상은 얼마 전 실직당한 처지이건만 자신의 그런 상황을 가족들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위스에서 새로운 일을 얻어 바쁘다고 말한다. <시간의 사용>은 결코 서두르는 법 없는 차근차근한 발걸음으로 이 남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관찰해간다. 그럼으로써 벵상이라는 인물의 불안한 초상을 꼼꼼하게 그려나간다. 올 베니스영화제에서 ‘오늘의 사자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영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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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늦봄의 전주, 여름의 부천, 늦가을의 부산으로 이어진 영화 축제의 달력에, 이제 한장이 더 늘어났다. 겨울이 싸늘한 걸음을 재촉하는 가운데 광주에서도 또 하나의 국제영화제가 시작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2월7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는 12개국에서 불러모은 140여편의 영화와 함께 첫걸음을 내딛는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영화의 지평을 넓혀가는 신진 작가들과, 영화사에 또렷한 인장으로 남은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해 60여편의 장편과 80여편의 단편이 광주극장 등 시내 4개 영화관에서 8일 동안 상영된다.이미 아시아영화의 장으로 자리를 다진 부산이나 판타지의 향연으로 개성을 갖춘 부천, 디지털영화를 비롯한 대안영화의 가능성을 찾는 전주까지 3개의 국제영화제가 있는 상황에서, 광주의 영화제 소식에 ‘또?’ 하는 의문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염정호 영화제 사무국장에 따르면, “광주가 5·18항쟁을 거치며 민주화의
2001 광주국제영상축제 올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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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충무로에 ‘이명세교’라는 종파가 있었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을 보고 매료된 젊은 영화인들이 그를 받들며 뿌리내린 이명세교는 궁핍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했지만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이 넘치던 사람들에게 영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샘물과도 같았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세계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태도를 존경하던 그들 가운데 김태균 감독과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90년대 초반 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젊은 감독지망생들과 영화공장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던 김태균 감독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남자는 괴로워> 등 이명세 감독의 영화 3편의 프로듀서였고 당시 차승재씨는 단순히 옷장사를 하는 김태균 감독의 친구로서 이명세교에 가입했다. 지금은 감독과 제작자로 엇갈린 행보를 걷고 있지만 이명세 감독과 그들의 인연은 어릴 적 친구에 대한 추억처럼 애틋한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화산고>의 김태균, 선배 이명세에게 `개기며` 영화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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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다. <투캅스>에 나오는, 업소 돌면서 관리비 뜯는 경찰관에 대한 강우석 감독의 애정은 그런 것이었다. 적당히 때묻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임하는 <투캅스>의 안성기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양심에 어긋하는 일에 몸서리치던 패기만만한 젊은 형사 박중훈도 결국은 안성기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강우석 감독이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후 3년 만에 연출하는 작품 <공공의 적>에 등장하는 형사 철중도 그런 인물이다. 사소한 불법은 거리낌없이 눈감을 줄 아는 이 남자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유를 법의 잣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는 진짜 나쁜 놈을 만난다. 이름하여 ‘공공의 적’. 먼지 한올 떨어지지 않은 말끔한 양복에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머리를 한 펀드매니저에게 철중은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철중에겐 증거도 증인도 없지만 분노와 투지는 넘쳐난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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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안경에 왜소한 체구, 계단 밑 벽장에서 지내온 외토리 소년 해리. 11살 생일이 다가오지만, 부모를 잃고 페투아니아 이모 부부와 심술맞은 사촌 더들리에게 구박당하며 살아온 해리에게는 별다른 기대가 없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 생일이 되는 순간, 선물처럼 상상치 못한 세계로의 초대장이 날아든다. 거인 해그리드가, 마법사라는 해리의 정체와 함께 전설적인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초대된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벽장의 음지에서 빠져나와 호그와트 특급에 올라탄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 빗자루를 타고 나는 것은 기본. 변신술, 약초와 마술지팡이 이용법 등 갖가지 마법과 신비의 동물들이 실존하는 판타지 세상이다. 이곳에는 전설적인 ‘마법사의 돌’을 노리는 마왕의 음모 또한 도사리고 있다. 마법 수업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인 해리는, 친구들과 함께 마법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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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링의 모든 코너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20세기의 전사다. 열정적으로 산 사람의 일대기가 그렇듯 알리의 생애에는 시대의 갈등이 그대로 들어 있다. 눈부신 권투 재능과 날카로운 위트, 굽힐 줄 모르는 분노와 강인한 인간만이 갖는 내적인 품위로 현대 미국사에 진한 자취를 남긴 이 거인의 장도(長途)를 어떻게 하면 한 편의 극영화 안에 요약할 수 있을까. 이 육중한 과제를 받아 안은 것은 <히트> <인사이더> 등 전작을 통해 유려하고도 역동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공인받은 마이클 만 감독과 슈퍼 헤비급 챔피언이 되기 위해 육체를 ‘리모델링’하다시피한 윌 스미스. “한 인간의 삶에는 나머지 전체를 함축하는 모멘트가 있다. 일단 그것을 발견하면 이야기는 강력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마이클 만 감독은, 알리 개인사의 뇌관을 이슬람 개종, 징병 거부, 결혼, 챔피언 벨트를 따고 잃고 다시 되찾는 사건이 있었던 1964년부터 1974년까지의 1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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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오픈 유어 아이즈!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서 추락을 택했던 세자르가 뉴욕에 떨어졌다. <바닐라 스카이>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1997)를 리메이크한 작품. 매끈한 외모에 재력을 지닌데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데이비드 에임스(톰 크루즈)는 원작에서 세자르가 당했던 고통 역시 그대로 물려받는다. 자신의 단짝친구의 애인인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이튿날 하룻밤 상대였던 줄리(카메론 디아즈)의 복수극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나, 어렵사리 소피아로부터 사랑 고백을 끌어내지만 이후 자신도 알 수 없는 극한적인 분열증세에 시달리는 것까지 닮았다. 직접 판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톰 크루즈는 <클럽 싱글즈><제리 맥과이어>의 카메론 크로에게 메가폰을 맡겼다.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을 악몽의 크레바스 속으로 내몰았던 아메나바르보다는 강도가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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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의 사랑이 고개를 드는 장소는 별이 쏟아지는 강변이나 휘황한 스카이라운지, 외딴 섬같은 ‘위대한’ 로맨스의 공간이 아닌 변두리의 버스 정류장이다. 많은 사람이 심상한 얼굴로 오가는 그곳에서, 사는 이유를 묻는 일조차 경멸하기 시작한 32살의 학원강사 재섭과 일탈과 자해를 통해 세상을 냉소하는 17살의 여고생 소희가 서로를 알아본다. 재섭은 학원에서 시선을 끌던 소희가 중년남자와 승강이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한 뒤 소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고, 집이 같은 동네인 두 사람은 어느날부터 ‘친구처럼’ 대화하기 시작한다. <반칙왕> <조용한 가족>의 프로듀서였던 이미연 감독의 데뷔작인 <버스, 정류장>의 시나리오는, 사랑을 절대적인 보물로 정해놓고 그것을 둘러싼 밀고 당김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사랑과 엇비슷한 형태로 느리게 덩어리져가는 감정의 행로를 따라가는 멜로드라마를 예고한다. <접속> <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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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온기를 구한다면 적당한 영화들이 있다. <줄리엣을 위하여>는 임신중에 암 선고를 받은 여주인공과 가족의 이야기. 익숙한 소재지만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 솔베이 안스파흐의 침착한 시선이 예기치 못한 담담한 감동과 성찰을 끌어낸다. <작별>은 자매애 이상의 자매애를 통해 일상의 일부로만 여겨지는 가족관계의 운명성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서로를 의지하던 자매가 동생이 사랑에 빠지면서 새로운 비극에 빠진다. <뷰티풀 데이즈>(가제)는 <인생은 아름다워>에 미소지은 관객의 감성을 노크하는 휴먼코미디. 나치가 주둔한 체코 시골마을의 순박한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웃음과 사랑을 그린다. <댄싱 앳 더 블루 이구아나>는 옷을 벗어도 드러나지 않는 스트리퍼 다섯명의 진실을 일주일간의 생활기록을 통해 들춰보는 드라마. 위로는 때로 사람 이외의 존재에서 온다. 일본영화 <하치 이야기>는 17개월을 함께한 주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