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먼 남도 유랑길 2001년 11월7일 날씨 맑음.
양수리에서 촬영이 끝나고 다음주에는 선암사에서 유랑을 떠나는 장승업을 찍는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아마도 어쩌면 겨울촬영 유랑길에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이 일기가 너무 길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 촬영장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의 정말 일부만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것들은 일부러 지나쳤다. 영화평에서 여러분들이 읽은 대부분의 그럴듯한 말들이 현장에 관한 창작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영화의 지식에 대해서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실 영화의 메커니즘은 구체적인 과정을 잘 모르면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정확하게는 옆에 서 있어도 모른다. 영화 현장에 관한 영화기자들의 기사가 대부분 유사한 것은 그들이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카이에 뒤 시네마> 364호에서 ‘촬영현장 특집’호를 내면서 책임편집을 한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0]
-
엑스트라도 똑같은 세상의 중심! 2001년 11월1일 날씨 맑음.
다시 양수리 세트장으로 들어왔다. 이날은 낮에 준비를 거쳐서 밤 촬영이 이어졌다.
장면 #123 기생집 일지춘
(김옥균, 개화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장승업과 인사를 한다)
김병문 (나가면서) “아니, 오원 아닌가?” (김옥균을 돌아보며)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입니다. (승업에게) 인사드리게, 수구파들이 이름 석자만 들어도 오금을 못 펴는 고균 김옥균 선생일세.”
김옥균 “정신없이 살다보니 오원 그림 하나 감상할 여가가 없었구먼. 마음 편한 세상이 오면 그림 한점 부탁드리겠소.”
이 장면은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그리고 안성기 선배의 세션을 보는 것 같았다. 우선 이 일지춘이라는 기생집의 맨 왼편에 있는 정원에 김옥균을 둘러싸고 대화가 벌어지고, 그 옆의 기생집은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방문을 통해 세개의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방문 프레임은 세개로 쪼개져 있지만, 공간은 이어져 있었기 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9]
-
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18일. 날씨 맑음.
<춘향뎐>에서 소리를 찍으셨고, 이번에는 멈춰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하실 참이십니다. 매번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면서도 부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 감독님이 이 작품을 제안하셨을 때 가졌던 생각이 있으실 텐데요.
정말 굉장히 부담이 갔어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때로 움직여야 하고, 살아 있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자연이 살아 있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의 숨소리를 담아야 했으니까요. 한국화에는 영화적 단점이 있어요. 가로가 너무 길든지, 아니면 반대로 세로가 너무 길어서 필요없는 여백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감동이 없어요. <취화선> 때문에 화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림과 동시에 그 과정을 담으면서 그 색채와 앵글이 나와야 한다는 게 엄청난 압박으로 왔어요. 한 4천자 정도를 필름 테스트했어요. 암울한 색채로 담기 위해 브리치 바이 패스(이 효과는 데이비드 핀처의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8]
-
영화 스탭들이 영화에 붙길 기다려 2001년 10월16일 오전. 날씨 맑음.
오늘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모두 동원되는 날이었다. 엑스트라들이 많이 동원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연출부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이미 분장팀과 합류하고 있었다. 엑스트라들이 많은 날은 연출부들이 분장을 하고 엑스트라들 안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의 동선을 그 안에서 일일이 지시해줘야 한다. 당신이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엑스트라들의 움직임 안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그룹지어져 있음과 함께 그들을 이끌고 움직이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사람이 연출부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이날 촬영은 이미 45회 촬영이었는데, 장면은 장승업이 마흔한살이 되던 1882년 초여름 양반집을 나와 시장거리로 나서면서 떡을 훔치는 거지를 보고 회상에 잠기는 이 영화의 두 번째 장면이었다.
장면 # 2 서울 거리(초여름), 41살
화창한 날씨와 대조를 이루어 황량한 풍경, 포졸들이 각지에서 모여든 처참한 유민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7]
-
-
임권택 감독 인터뷰2-2001년 10월13일 안개.
새벽 안개가 쏟아지는 날 아침 일찍. <취화선>에는 이 영화의 과정을 일일이 캠코더에 담아서 영화와 함께 완성될 <메이킹 오브 ‘醉畵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내 생각에 메이킹영화의 최고걸작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난>의 작업과정 일체를 담은 <A.K.>이다). 이 작업은 조선종 PD가 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인데 내가 하는 인터뷰도 메이킹 작업에 포함시켜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였다. 아마 여기서 진행된 감독님과의 인터뷰의 일부는 다시 메이킹 필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40% 정도 나간 거 아닐까 싶은데. 느낌은 늘 그런 것처럼 시작할 때는 좀 막막하고 무엇을 하려니 막연한 것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쯤 윤곽이 드러나고, 이제는 모두들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춘향뎐&g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6]
-
최민식 인터뷰
2001년 10월9일 날씨 아침부터 흐림.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함. 아침에 일어나서 세트장을 처음으로 구석구석 걸어가 보았다. 양수리는 늦가을 아침에는 영락없이 안개가 쏟아져내렸다. 총 2765평(길이 160mx56m)에 한옥기와 26동과 한식초가 35동을 세웠다. 설명에 의하면 이 세트장에 세워진 집들의 자재와 가구들을 일일이 미술팀이 구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흙담장은 전라남도의 수몰지구에서 가져오고, 건축 목자재는 진부령 육송과 황태 덕장목을 사용하고, 한옥 기와들도 실제 기와를 복제한 우레탄으로 만들었다. 이 세트는 볼수록 신기한 느낌을 주는데 그 힘은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길을 이쪽 편에서 보다가 걸어가서 맞은편에서 보면 풍경이 변해서 마치 다른 길처럼 보이게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방 안까지 세세하게 지어져 있어서, 방 안에서 집 바깥을 찍어도 되고 그 반대로 집 바깥에서 방 안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5]
-
주병도 미술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7일 저녁. 날씨 맑음.
이미 <취화선> 팀은 추석이 끝나자마자 이틀 뒤에 양수리 야외세트장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약간의 일이 생겨서 이틀 뒤에나 떠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도착하는 순간 펼쳐진 야외세트장은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이 세트장을 지은 사람은 MBC미술팀의 주병도 미술감독이라고 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세트를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 칭찬을 잘 안 하는 박광수 감독으로부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트장"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명불허전. 어쩌면 이건 이제까지 그의 세트 중에서 최고 걸작인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모든 분야가 다 결정되고 난 다음에 미술만 남은 상태였지요. 한국영화는 한 사람과 일하면 그 사람과 계속 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춘향뎐>을 작업했던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내가 이제까지 한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4]
-
장승업, 고흐와 동시대 화가
2001년 7월16일 날씨 맑음
이 영화의 공식적인 크랭크인은 내가 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보름 뒤인 7월16일 월요일이었다. 날씨 맑음. 이 자리는 기자들을 부른 첫 번째 현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한국화에 관한 세미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한국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22권의 한국화 책을 사들고,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영화와 회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유홍준 선생이 쓴 두권의 <화인열전>에는 장승업이 빠져 있었으며(그런데 안견과 신윤복도 빠져 있었다. 장승업을 고의로 폄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화에 관한 책들에서 김홍도와 김정희에 비하면 장승업은 매우 적게 다루어져 있었다(다루어져 있어도 부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들이 많았다). 영화에서 화가를 다룬 작품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고흐를 다룬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3]
-
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2001년 6월19일에서 그로부터 일주일.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가뭄이 이어지던) 날씨 내내 맑음.
이날 집에서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보면서 장면을 그려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씨네21>의 허문영 기자가 무언가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가서 일종의 현장일기를 써볼 생각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하루이틀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함께 먹고 자면서 “임 감독 영화의 현장에서 그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솜씨를 담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 가기 위한 온갖 핑곗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고마운 제안이었다.
드디어 명분이 생겼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허문영 기자와 함께 <취화선>을 제작하는 태흥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는 화가 장승업을 다룬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며, 제목이 결정된 것은 얼마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2]
-
그는 자신의 일을 꽃을 피우는 일에 비유했다. 꽃을 땅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뿌리가 놓인 땅에서, 꽃은 땅의 풍요와 가난을 먹고 살다, 그 땅으로 돌아간다.
임권택은 땅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환청처럼 땅의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그의 몸을 돌아 영화라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는 평생 이 땅을 떠돌며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 불행한 떠돌이 예술가의 혼을 담은 <취화선>에 이르렀다. 그건 어쩌면 40년 영화인생에서 처음 감독 자신이 주인공인 노래인지도 모른다.
촬영현장 장기취재 허락을 청했을 때, 임 감독은 조용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를 기꺼이 경외하는 외부인은 <취화선>의 제작진과 한달여를 함께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꽃잎이 눈을 떠 영화의 하늘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를 경험했다.
임권택 감독, 그리고 그의 영화가족과의 긴 동행의 기록을 여기에 담는다. 이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설레고 자랑스럽고 벅찬 기록이다. 편집자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일부를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
-
<나홀로 집에> 1, 2편의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 콜럼버스(43)는 <그렘린>(1984), <구니스>(1985), <피라미드의 공포>(1985) 등 판타지 성격이 강한 영화들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 1990년 <나홀로 집에>의 대성공 이후로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 <스텝맘>(1998), <바이센테니얼 맨>(1999) 등 80년대 자신이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와 다른 방향으로 행보를 거듭했지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젊은 시절의 영화감각을 되찾았다는 평을 듣게 됐다.어떻게 <해리 포터…>의 감독을 맡게 됐나.수많은 감독들이 <해리 포터…>의 연출자가 되겠다고 오디션을 보고 인터뷰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난 이 영화를 하고 싶었고 내가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가능한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할 준비가 돼 있었다. 만약 감독을 맡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 인터뷰
-
“우리는 한번에 왕창 벌고 빠지는 식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갖길 바란다.” 에 밝힌 워너브러더스 회장 배리 메이어의 소망은 이뤄질 것인가? <해리 포터…>를 프로모션하는 워너의 마케팅 전략은 2년 전 <스타워즈 에피소드1>을 개봉하며 조지 루카스가 택한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조지 루카스는 <뉴욕타임스> <타임> <배니티 페어> 등 10여개 신문, 잡지에 독점인터뷰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의 원하는 기사를 얻어냈다. 개봉 직전까지 영화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차단해 궁금증을 일으키는 방식이었다. 또한 조지 루카스는 펩시콜라, 장난감 회사 헤즈브로, 레고 등에 라이선스권을 제공하며 30억달러 이상의 판권료를 챙겼다. 패스트푸드, 장난감, 문구, 서적, 게임 등 다양한 프랜차이즈를 확보하되 품목마다 독점권을 보장, 단가를 높이는 것이다.전세계적으로 1억1천만부 이상 판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영화라는 점에서 &l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마케팅
-
해리 포터 <대니엘 래드클리프>“오래 전에 잃어버린 내 아들과 다시 만나는 것 같다.” 원작자 조앤 K. 롤링은 처음 래드클리프를 만난 날 이렇게 말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소년의 생일은 7월31일. 해리 포터와 같은 날 태어났고 이날은 롤링의 생일이기도 하다. 1989년생인 래드클리프는 1999년 <BBC>가 제작한 찰스 디킨스 원작의 TV드라마 <데이비드 카퍼필드>로 데뷔한 아역배우이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서 제프리 러시와 제이미 리 커티스의 아들로 얼굴을 비친 적도 있다.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와 제작자 데이비드 헤이먼은 <데이비드 카퍼필드>에서 그를 발견하고 촬영에 들어가기 불과 몇주 전에 캐스팅을 확정했다. <심슨 가족>을 좋아하고 과학과 체육은 잘하지만 그림은 못 그린다는 래드클리프는 자신이 맡은 해리 포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해리 포터는 친구들에게 매우 충실하죠. 그리고 그는 매우 용감하고 혼자 일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배우들
-
글쎄, 내가 세상을 뒤집어 놨대요 프리벳가 4번지 계단 밑 비좁은 벽장에서 구박덩이로 자란 고아 소년 해리 포터에게,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은 아마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로 호모라! 그의 눈앞에 마법의 성문이 활짝 열린 열한살 생일 이후, 소년은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클래스메이트뿐 아니라 천문학적 머릿수의 독자(4권 <해리 포터와 불의 잔>까지 총 1억1천만부 추산)를 신실한 벗으로 얻었다. 선택받은 아이 해리에 대한 경배의 물결은, 머글(마법사가 아닌 보통 인간)들에게 허락된 ‘소망의 거울’인 영화를 통해 또 한번 파고를 높이고 있다. 지난 11월16일 미국 전역 스크린의 1/4에 해당하는 3672개 스크린을 뒤덮으며 베일을 벗은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개봉 닷새 만에 입장 수입 1억달러라는 박스오피스의 골든 스니치(마법사 스포츠 퀴디치의 150점짜리 공)를 잽싸게 거머쥐어 <스타워즈 에피소드1>과 어깨를
김혜리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꼼꼼히 뜯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