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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1일, 전북 고창의 옛 대성고등학교 미술실. 재잘재잘 깔깔깔. 7명의 소녀들이 모이니 웃음과 수다가 떠나지 않는다. 명랑한 소녀들은 무뚝뚝한 아그리파 석고상조차 미소 짓게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보니엠의 <Sunny>가 울려퍼지자 냉기 돌던 복도에도 생기가 돌았다. 앞머리에 뽕을 넣고, 레이스 달린 공주 치마를 입고, 원색의 티셔츠를 바지 안에 집어넣은 6명의 소녀들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늘에 콕콕 찔러대며 <써니>에 맞춰 춤을 췄다. 멜빵바지를 입은 한 소녀는 이들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 VHS 카메라에 친구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들은 누굴까? 진덕여고 칠공주파 ‘써니’의 리더 춘화(강소라), 전라도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 온 나미(심은경), 얼짱 얼음공주 수지(민효린), 쌍꺼풀에 인생 건 못난이 장미(김민영), 미스코리아가 꿈인 복희(김보미),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는 금옥(남보라), 귀여운 욕쟁이 진희(박진주), 이들은 1980년대를 찬란하게 통과하
칠공주들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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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옥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연희동 주택가 골목의 한 이층 양옥집. 인적 드문 동네 분위기 때문일까, 체감기온 영하 20도라는 강추위 때문일까. 대문을 열자 눈앞에 들어오는 넓은 앞마당이 휑하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처럼 이 집은 왠지 쓸쓸한 사연을 간직한 듯 보인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은 이곳은 민규동 감독의 신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주요 공간이다.
썰렁한 앞마당과 달리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장실 앞은 십수명의 스탭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카메라 세팅하랴, 조명 수정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두 배우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을 챙기는 데 일생을 다 바친” 엄마 인희 역을 맡은 배종옥은 차가운 화장실 안에서, 딸 연수를 연기하는 박하선은 따뜻한 거실에서 각각 따로 감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신은 암에 걸린 엄마가 화장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딸이 처음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엄마의 신음이 그 어
그 가족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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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한국에서 괴물이 등장하는 SF블록버스터를 제작하고 또 흥행에 성공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긴 건 봉준호의 <괴물>부터였다. 이 장르를 유독 낯설어하던 한국 관객의 구미는 당겨졌고, 윤제균이 <7광구>를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누구도 조소하지 않았다. <7광구>는 한·일 공동개발구역인 7광구의 석유시추선 이클립스호를 무대로 한 괴물영화다. 하지원, 안성기, 오지호, 송새벽, 차예련 같은 배우들이 해저에서 기어올라온 괴물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시간은 단 하루이고, 대부분의 인물들이 장렬하게 죽어나갈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갇힌 공간을 무대로 한 괴물영화라는 점에서 <괴물>과 달리 <7광구>는 할리우드 괴물영화 장르의 본격적인 충무로 이식 선언이라고 할 법하다.
원래 윤제균이 감독하기로 됐던 <7광구>의 메가폰은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에게 넘어갔다,
진짜 3D 영화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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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가제)은 한때는 맹위를 떨쳤지만 2군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 투수 ‘도훈’이, 아내의 병으로 그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성숙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신파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바깥 활동으로 정작 가장 소중한 가족에겐 소홀한 보통의 남자들의 이야기, 어쩌면 평범할 수 있는 이 시대 부부의 모습이기도 하다. 얼핏 단출한 드라마지만 김상진 감독이 <투혼>을 연출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표작들을 아무리 열거해 봐도 김상진 감독은 ‘코미디’와 떨어진 적 없는 밀착관계였다. 연출의 변에 앞서 덜컥 그가 웃음이 아닌, 울음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이 열 번째 작품이다. 코미디만 하다 보니 내가 물리더라. 늘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은 감독으로서 욕구가 있었고, 내 나름대로 열 번째 작품이란 의미를 더하고 싶었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부산,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사나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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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일곱 번째 작품 <돈의 맛>은 이르면 2월 말, 늦어도 4월경에는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바람난 가족>을 만들고 나서 <그때 그사람들>을 만들었을 땐, 물론 개봉 당시 잘리면서 망가지긴 했지만, 예전 세 작품과 다른 어떤 야심이 있었다. 이번 작품도 <오래된 정원> <하녀>를 넘어서는 야심을 갖고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임상수 감독의 자신감만큼이나 아주 간략한 시놉시스만으로는 대체 어떤 종류의 에로틱-서스펜스-러브스토리가 펼쳐질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필름파말(Filmpasmal). 임상수 감독이 직접 차린 영화사 이름이다. ‘pas mal’은 ’나쁘지 않다’라는 뜻이다. 프랑스에 머무를 때 후딱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임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불러온 파장을 생각한다면, <돈의 맛>이 그렇게 ‘중간’
임상수식 부잣집 대가족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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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퍼 필름(Caper Film). 범죄행위를 묘사하는 영화를 일컫는 장르명이다. 최동훈 감독이 아내인 안수현 프로듀서와 함께 차린 영화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잠시 웃었다. 이건 일종의 선언이 아닐까? 사기와 도박을 다룬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를 한국적 케이퍼 필름으로 본다면, 그리고 도술로 환영을 만들었던 <전우치>의 행각까지 범죄로 본다면, 최동훈 감독은 이제 앞으로 만들 영화들의 성격을 아예 규정지으려는 듯 보였다. 현재 준비 중인 신작 <도둑들>(가제) 역시 그가 생각하는 케이퍼 필름의 자장 안에 놓인 작품이다. 한국의 도둑들이 중국의 도둑들과 함께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진 보석을 훔친다는 게 <도둑들>의 대략적인 얼개다. 도둑들 사이에 펼쳐지는 원한과 배신의 음모가 겹겹이 쌓이는 한편, 완벽에 가까운 카지노의 보안시스템을 뚫는 경쾌한 작전 또한 <도둑들>의 활력이 될 듯 보인다. 전작에서 탐구한 사기와 도박
“우아한 도둑 말고 육체노동으로 보석 훔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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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27일. 눈이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한 남자가 종로구 북촌 인근을 배회한다. 홍상수 감독의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12번째 장편영화의 주인공 성준(유준상)이다. 제일 친한 형인 영호(김상중)에게 전화했다가 그에게서 할 일이 많아 못 만나겠다는 말을 들은 다음 그냥 별일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인물들이 줄지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특별 출연자들이다. 사거리 건너에서 아는 김 감독(백종학)이 영화를 찍고 있다. 그를 지나자 다음은 영화 제작자(기주봉)와 마주친다. 연이어 카메라가 패닝하자 다음은 음악감독(백현진)이다. 세 사람 모두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지만 성준과 그들의 감정은 조금씩 엇나간다. 누군가는 뚱하고 누군가는 반긴다. 상대방이 성준을 반기지 않을 때도 있고 성준이 상대방을 덜 반가워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홍상수 감독의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 혹은 그의 지인들이 줄지어 출연하는 이날의 장면을 두고 현장을 보던 누군가
북촌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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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22일, 군산의 어느 한정식집. 약속한 시간이 되자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제규 감독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약 6년 만이다. 지난 2006년 미국으로 떠나 할리우드 데뷔를 준비했던 그는 오랜 시간 공들였던 과제를 잠시 미룬 뒤, 신작 <마이웨이> 제작을 발표했고 지난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데뷔작인 <은행나무 침대>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3편의 전작들이 장르, 테크닉, 규모, 그리고 시장 크기에서 확장을 시도했다면, <마이웨이>는 그가 추구한 ‘확장’의 키워드를 더욱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마이웨이>는 노르망디 해전 당시 미군 포로가 된 어느 한국인 독일군에 관한 실제적인 근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이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소련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노르망디로 흘러가게 된 여정, 그리고 그의 운명을 함께 따르는 일
나의 심장을 뛰게 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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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산 61번지.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곳은 길이 아니다. 운전기사님은 “공중에 있는 걸로 나온다”고 말했다. 방향만을 쫓아 달렸더니 ‘<고지전> 촬영현장’이라 적힌 임시이정표가 보였다. 몇개의 이정표를 지나자 가파른 경사길과 길을 둘러싼 황폐한 산이 나타났다. 2010년 12월7일. <고지전>의 56회차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이곳은 함양 백암산의 어느 자락이다. 지난 2009년 4월12일 오후 3시 함양읍과 지곡면에 걸친 백암산 7부 능선에 발생한 산불은 다음날까지 이어져 약 25ha의 산림을 태웠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산불 발생 초기 백암산 인근 지곡면 보산리 보각마을 주변까지 불길이 번져 주민 40여 가구 80여명이 근처 마을로 긴급대피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백암산은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문장이 국립공원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 같아 애
한국전쟁, 그 포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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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새로운 10년의 시작이다. 한국영화계의 지난 10년 못지않을 앞으로의 10년은 또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씨네21>은 우선 2011년을 준비하는 한국영화들을 미리 만나보기로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6년 만의 신작 <마이웨이>를 촬영 중인 강제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촬영지인 군산으로 향했다. 지난해 <하하하>와 <옥희의 영화>를 연출한 홍상수 감독은 이미 서울의 모처에서 차기작을 촬영 중이었다. 신작 <도둑들>(가제)의 시나리오를 마무리 중인 최동훈 감독은 촬영지인 마카오와 서울을 오가고 있었다. 임상수 감독은 <하녀>의 연작으로 볼 만한 <돈의 맛>을 준비 중이었고, <의형제>의 차기작으로 <고지전>을 선택한 장훈 감독과 배우, 스탭들은 함양의 어느 산자락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크리스마스이브
신작 휘날리며, 2011년도 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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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쳐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IT 산업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시작되는 소통의 의미와 중요함을 유려하게 담아냈다.”(김종철) “겉보기와 다른 심층의 드라마를 지닌 올해의 베스트. 스토리와 서사 화법, 세계관이 일체를 이룬 우리 시대의 도덕 이야기.”(장병원)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의 이야기로 장르적 유려함과 동시대의 사회적 망에 관한 은유적 성찰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기대했을까. 많은 이들이 데이비드 핀처가 그걸 해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소셜 네트워크>로 데이비드 핀처는 왜 그가 할리우드에 남은 몇 되지 않은 장인인지를 입증해냈다.
2위 <엉클 분미>
타이의 비범한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미술과 영화의 경계를 넘고 시간의 절차를 뒤흔들어 관객을 황홀한 상태로 이끈다. ‘만약 과거에 미래가 존재한다면’이라는 말도 안되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건
할리우드 감독들의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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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뒤에 그가 있었다
올해의 제작자 - <아저씨> 이태헌 오퍼스픽처스 대표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을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 <아저씨>를 기획, 제작한 이태헌 오퍼스픽처스 대표는 선정 소식이 뜻밖이라는 반응이다. 기대를 하면 실망이 큰 법이니, 내가 만든 영화에 아쉬워하지 말자는 평소의 지론으로 그는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영화 자체보다 주변의 여러 여건 덕분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한다.” 확실히 <아저씨>는 이야기 자체보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의 도움에 기대는 영화인 것 같다. “<아저씨>는 원빈의 육체와 예리한 무술지도, 그리고 카메라워크와 세트미술이 만나 비로소 탁월한 영화가 되었다. 그 전체를 조율하고 프로덕션하는 능력은 제작자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황진미)는 평은 “순수한 액션 장르를 만들고 싶었다. 한국적인 것,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들을 제외하고 말이다”라는 이태헌 대표의 말과 일치한다. 그의 다음
2010 올해의 제작자, 시나리오,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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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허 캐릭터
올해의 신인 남자배우 - <방자전> 송새벽
압도적으로 선정됐다. 올해의 신인 남자배우는 “귀여운 변태의 탄생”(남다은)을 알린 송새벽이다. 김종철 평론가는 “<방자전>이 기억에 남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송새벽의 존재” 때문이라며 “요상한 말투도 인상적이지만, 단편적인 다른 캐릭터와 달리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예측 불허의 기대감이 주연배우들을 가볍게 압도했다”고 했다. 송새벽은 올 한해 자신의 활약상에 몇점을 줄까. “여태껏 개근상만 탔는데 올해는 굉장히 특별한 해인 것 같으니 55점을 주고 싶다”고 선정 소감을 밝혔다. 점수가 짜야 똑바로 산다나? 현재 송새벽은 전국 팔도를 누비며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연애담 <위험한 상견례>를 찍고 있다. 의견 중에는 물론 “과대평가된 배우”(김태훈)라는 일침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를 지지한 이들은 2011년의 출연 영화 <위험한 상견례>와 <7광구>를
2010 올해의 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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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남자가 되다
올해의 남자배우 - <아저씨> 원빈
그냥 아저씨가 커피라면 원빈은 ‘TOP’다. 이제는 제법 식상했지만 이 말만큼 <아저씨>의 원빈을 수식하는 데 어울리는 표현도 없다. 그만큼 <아저씨>에서 원빈은 절대적이었다. “<아저씨>의 작품성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지만 누가 뭐래도 <아저씨>는 올해 한국영화의 여러 코드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코드의 중심에는 원빈이 있다”(김태훈), “<아저씨>는 ‘원빈의 역설’이 아니었다면 그다지 빛이 나지 않았을 영화다. 오직 원빈이라는 불가사의한 육체 속에서 비장함과 잔혹함과 아름다움이 투구를 벌일 때만 그 긴장이 오롯이 살아난다”(황진미)는 평가처럼 <아저씨>는 원빈에서 시작해서 원빈으로 끝나는 영화다.
이같은 성취가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배우 본인의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덕분이다. “<마더>처럼 <아저씨> 역시 기존
2010 올해의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