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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消盡). 아주 사라져 다 없어져버리다. 말하자면, 페이드 어웨이. 요즘 고현정의 가슴에 직각으로 꽂혀 있는 단어다. “잘 소진되고 싶어요.” 숱한 밤 혼자 되뇐 다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와 나란한 맥락에서, “맑아질 때까지 맑아지겠어”를 올해의 슬로건으로 정했다는 고현정. 그녀가 11월에 만나기를 청한 상대는 뮤지션 윤상이었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윤상의 음악은 사운드도 노랫말도 더없이 담(淡)하다. 나직하고 싱겁기에 또렷한 맛이 없지만, 그 잔잔한 아담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여음은 천천히 수천 가닥 지류를 이룬다. 그 원천이 중간톤이 풍부한, 정교한 조율의 산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잠깐 윤상의 2집 《Part II》에 수록된 <소년>의 가사를 그대로 빌려 풍경을 하나 그려보자.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소년이 당신을 향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별안간 뒤돌아 뛰어가버린다. 끝내 듣지 못한 고백은 그러나 두고두고 당
그녀와 그, 그와 그녀 담담(淡淡)한 섬세함으로 공명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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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만 스튜디오에서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아더 크리스마스>를 연출한 영국 출신의 사라 스미스는 이전까지는 TV용 실사영화를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감독이었다. 고어 버빈스키가 <랭고>를 만들고, 브래드 버드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연출하는 시대이니,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스크린 위에서만 사라지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2011년 6월15일, 컬버시티에 위치한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짱 두둑한 여감독 사라 스미스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모든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한해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수가 한두편에 불과했던 예전에 비해 이제는 15~20편에 달하는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가? 스튜디오를,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
아드만의 인장 못생긴 캐릭터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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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산타는 어떻게 전세계 수억명의 아이들에게 하룻밤 사이에 선물을 나눠줄 수 있나요? 11월25일 개봉하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CG애니메이션 <아더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이 마음속 한켠에 품을 만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영화다. 그런데 이건 소박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마스 가족용 애니메이션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아드만 스튜디오의 미래가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회심의 일격이다. <아더 크리스마스>는 점토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유명한 영국 아드만 스튜디오의 CG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잠깐. 아드만 스튜디오가 CG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고? 그것도 픽사나 드림웍스 스타일의 대자본 CG애니메이션을? 일단 아드만 스튜디오의 지난 몇년을 한번 돌아보자. 가내 수공업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드만 스튜디오는 <윌레스와 그로밋>(1995), <치킨 런>(2000) 같은 점토애니메이션의 명가였다. CG애니메이션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와중에도 아드만 스튜디오의 점토
산타 가족은 행복한 X-MAS를 맞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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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국 감독은 하마터면 배우로 남을 뻔했다. 단역이긴 하지만 그는 지난해 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반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연출 기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단역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대학원에 진학해 6편의 단편을 찍었다는 황병국 감독. 두 번째 장편영화 <특수본>을 들고 6년 만에 돌아온 그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간의 마음고생까지 털어놨다.
-시사회 직후 동료들의 반응이 어떤가. 혹시 김성수 감독도 봤나(황병국 감독은 데뷔하기 전 김성수 감독의 연출부였다).
=VIP 시사회가 기자 시사 다음주라 많이들 못 보셨다. 김성수 감독님은 음악 넣기 전에 보여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분 스타일 알잖나. 바꿀 수 없는 상황이면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하신다. 봉고차 액션은 다른 영화에선 못 본 장면이라 칭찬을 하시긴 했다. 그 장면은 촬영 전에 프리 비주얼 작업까지 했는데 막상 찍으려고 하니 긴장이 되더라. 그때도 감독님은 내게 액
데뷔작 이후 6년…현장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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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양극화가 심하지 않나. 가진 자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분노가 많이 담겨 있더라. 만약 내가 그대로 만들면 왜 저렇게 편협하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래서 4편은… (중략)… 사회가 보이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거다.” <공공의 적 2012> 시나리오 공모전 시상식에서 강우석 감독이 전한 이 말은 최근에 일기 시작한 어떤 경향을 일깨워주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모순의 현실을 가공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와 영화의 재료로 사용하는 이러한 기류는 불과 몇년 전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2000년대 중반 한해에 10편 넘게 쏟아져 나왔던 ‘경찰영화’가 대부분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비리형사의 면면을 파헤쳤던 것을 상기해보라. 사뭇 달라진 이같은 상황은 비단 형사를 주인공 삼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당거래>(2010)뿐만 아니라 <모비딕>(2010)이 그러했고, 올해 <도가니>가 그러했다. <특수본>
받아라, 분노의 직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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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는 실력파 시네필을 위한 자리다. 당신이 이번 상영작 중 정전도 모두 섭렵했고 그 대안적 목록까지 눈여겨보았으며 영화계의 친구들이 소개하는 작품과 초장편의 대작들까지 다 보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건 여기 소개된 ‘국내 최초 상영작들’이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 운영팀에 따르면 이번 개관 기념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국내 최초 상영작은 25편이나 된다.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상영회를 한번 더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름과 제목으로만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영화들! 10편을 골랐다.
<버라이어티> Variety
감독 앙드레 뒤퐁 | 1925년 | 72분 | 35mm | 흑백 | 독일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앙드레 뒤퐁의 명작 <버라이어티>는 다양한 장르영화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는 샘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버라이어티’하다. 서커스 공중곡예사들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스펙터클한 공중그네 장면은 물론 인물 개
당신이 ‘최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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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제의 목록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인간의 조건> <영화사>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천국의 문> <십계> <아라비아의 로렌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등 장르와 감독을 넘나드는 상영시간 200분 이상의 초장편영화가 13편이나 된다. 게다가 모두 영화사의 진귀한 걸작들이다. 용기있는 프로그래밍이고, 우리에겐 그만큼이나 흔치 않은 기회다. 그중에서도 대표작 다섯편을 골랐다.
무성영화 시기의 대작부터 말하는 게 좋겠다. 이 <뱀파이어>는 칼 드레이어가 아니라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다. 정확히 말하면 뱀파이어가 아니라 뱀파이어라는 이름의 갱단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영화다. 일찍이 알랭 레네와 조르주 프랑주는 푀이야드에게 “환상적 사실주의의 선구자”라는 칭송을 바쳤다. 푀이야드는 초현실주의 그룹과 미학적으로 공유하는 동
엉덩이의 아픔까지 달래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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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떤 영화로 인생을 채우고 있을까. 영화의 전당 개관을 맞이하여 영화인들에게 백지 위임장이 발행됐다. 알찬 영화들이 담겨져 돌아왔다. 배우 고현정·이나영·이선균, 감독 이창동·봉준호, 제작자 심재명, 미술감독 류성희,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영화기자 김혜리,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등 10명의 영화인이 각각 그들만의 주제 아래 그들이 사랑한 5편의 영화를 선정했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분야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5인의 목록에 관해 알아보자.
배우 이나영은 우리에게 ‘낯설고 아름다운’이라는 주제의 선물을 보내왔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오리지널 버전 <렛미인>(2008)을 추천한 그녀의 선택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함께 품은 그녀를 닮았다. 스웨덴의 시린 겨울을 배경으로 바늘처럼 꼭꼭 찌르며 감성을 자극하는 이 영화는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형식의 뱀파이어영화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아름답다. 생경함과 아름다움은 결코 충돌의 대상이 아
그들 각자의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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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당 시네마 운영팀이 선정한 영화사 100편의 걸작선이 여기 있다. 100편의 목록에는 1902년의 <달세계여행>에서 1997년 <영화사>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정전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독특한 점이 있다. 거장의 작품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수작 혹은 비서구권의 걸작들이 여기엔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은 기존의 영화사 100편이 아니다. 능동적인 ‘대안의 영화사 100편’의 명단이다. 그중에서도 연대별로 10편을 추렸다. 이 작품들의 국내 상영이 드물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뒤바리 부인> Madame DuBarry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 1919년 | 85분 | 35mm | 흑백 | 독일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에른스트 루비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흥행작. 이 작품으로 루비치는 “비극의 마스터”, “영화의 라인하르트”, “유럽의 그리피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의 정부로
저평가된 수작, 비서구권 걸작 총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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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올해는 부산에 한번 더 가야 할 것 같다. 부산영화제도 끝났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으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려야겠다. 11월10부터 12월31일까지 열리는 ‘영화의 전당 개관 기념 영화제’가 무려 220여편의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작품들인데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단일 영화제 초유의 규모이자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돋보인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운영팀은 우선 100편의 영화사 걸작을 뽑았다. 공인된 걸작과 대안의 걸작이 여기 가득하다. 배우, 감독 등 10명의 영화계 명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작품들의 목록을 적어 보냈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에픽과 애니메이션의 파라다이스가 펼쳐지는가 하면 21세기의 주옥같은 명작들도 상영된다. 한편 한국영화 연구자들이 한국영화의 미지의 보석을 소개하고, 관객은 자신들만의 작품을 선정하며 칸 비평가 주간 50년간의 대표작들도 온다. 물론 부대행사도 풍부하다. 앞선 10명의 영화계 명사들이 관객과 함께하는 대화 자리가 있을 예정이고,
다시 부산으로 시네마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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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아주 세다. 어쩌면 황당하다. 정필원 작가의 네이버 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우승한 이현이라는 소년이 신에게 지구 멸망을 요구하면서 시작한다. 이현의 소원을 들은 신은 조금 망설인다. 인터넷 용어로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신은 잠시 ‘…’라는 텍스트를 보여주며 고민하더니 이내 ‘ㅇㅋ’라고 답한다. 단 조건이 있다. 지구 멸망까지 100일의 시간을 준다. 이현은 단 한번 자신의 소원을 번복할 수 있다. 신은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오덕희라는 불행 전문 만화가를 이현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위장 취업시킨다. 그리고 그녀에게 뱀파이어, 악마, 천사, 마술사, 구미호 등 12사도와 함께 불행한 소년 이현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명한다.
<지상 최악의 소년>은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던 작가가 문득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 ‘나 지금 좀 불행한 것 같아, 지구상에서 불행한 정도로는 몇등일까, 누군가 1등이
나 지금 좀 불행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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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체험이란 아껴두었다가 이럴 때 쓰라고 나온 말이다. 스크롤을 내리며 재빨리 속독하는 웹툰의 세계, 웹툰작가 무적핑크는 그 단순한 손놀림에 제동을 건다. 동화를 향한 역설과 개그, 패러디로 점철된 <실질객관동화>(이하 <실객동>)는 단순히 보는 만화가 아닌, 체험하는 웹툰. 웹툰계의 3D블록버스터다. 못 믿겠다면 실제 바느질해서 만든 천으로 입체감을 살린 <마법의 양탄자>편을 보거나, 프로젝터로 쏜 그림을 다시 찍어 평평한 평면의 벽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효과를 준 <장화홍련전>편을 찾아보라. 깎아내린 사과 껍질이 컴퓨터 화면을 줄기차게 따라 내려오는 <백설공주>편이나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콩나무를 거꾸로 거슬러가는 <잭과 콩나무>편의 시도 정도는 <실객동>의 형식적 실험 단계로 보자면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경찰의 날 관련 내용이라면 현상수배벽보 형식이 활용되며, EBS <지식채널 e>의 형식도
웹툰계의 3D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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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인 더 트랩>의 해설판도 있어요.” 네이버 웹툰에 <치즈 인 더 트랩>으로 데뷔한 순끼 작가의 말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해설판까지 양산해낼 정도로 <치즈 인 더 트랩>은 독특한 면모가 있는 로맨스물이다. 그저 달콤한 연애가 아닌 음침한 스릴러물의 냄새가 난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답답해 보이고 어떤 때는 얄밉기도 한 경영학과 여대생 홍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치즈 인 더 트랩>은 꽃미남이고 부자에다가 공부도 잘하지만 비밀스러운 성격의 선배 유정과 홍설의 관계가 중심인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에서 과거의 홍설과 유정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런데 현재의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한다. 여기에 유정과 사연이 있는 인호, 홍설의 스토커 영곤 등 주변 인물들까지 더해지면서 <치즈 인 더 트랩>의 이야기는 점점 꼬여간다.
순끼 작가는 <치즈 인 더 트랩>을 고등학생 때 처음 구상했다고 한다. 데뷔를 위해
둘만 아는 그 느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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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목요웹툰 <목욕의 신>의 독자 댓글은 ‘ㅋ’로 시작해 ‘ㅋ’로 끝난다. 누군가는 성의없는 댓글이라며 토를 달지도 모르겠지만 이 웹툰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해 ‘ㅋ’의 행렬에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말끔하게 생긴 성인 남자들이 팬티 한장만 걸친 채 서로의 때를 1mm라도 더 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목욕의 신>은 최고급 목욕탕인 금자탕에서 일하는 목욕관리사(속칭 ‘때밀이’)들의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은 요원하고 학자금 대출빚을 못 갚아 대부업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허세’가 주인공이다. 허세는 대부업자를 피해 들어간 목욕탕에서 우연히 한 노인의 등을 밀어주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인은 목욕업계의 대부이자 금자탕의 회장님이었다. 허세의 때밀이 솜씨에서 우주의 평온함을 느낀 회장님은 허세의 빚을 다 갚아주겠노라며 금자탕의 목욕관리사로 일할 것을
아놔, 이 폭풍유머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