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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에서 느낀 뜨거움은 어떤 거였나.
=어떻게 이토록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실화로 존재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았다. 우리 어르신들이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았다면, 삶에 대한 그런 집념과 애착은 무엇이었을까 싶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율이 돋았다. 한편으론 나에게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까 싶었다. 영화감독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게 의미있는 도전이었다.
-준식과 타츠오를 마라토너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사실 당시 징병된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밑바닥의 청년들이었을 거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조선과 일본의 심정적 영웅이다.
=이들을 지탱하는 동력과 힘을 생각하다가 나온 설정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동력은 회귀본능이었다. <마이웨이>의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손기정의 금메달 획득이더라. 또 그 당시에는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라톤 대회가 큰 행사였다
“그간 과잉이었다 싶어…이번엔 자제해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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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연이어 체급을 올리는 권투선수의 도전기를 닮았다. <은행나무 침대>부터 <쉬리>를 거쳐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규모와 기술, 장르적 확장을 시도한 강제규의 영화들은 그때마다 한국영화 전체의 체급을 올렸다. 그리고 <마이웨이>는 강제규와 한국영화가 드디어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다. 280억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고의 제작비, 다국적 배우들의 참여와 해외 로케이션, 한국사에서 벗어나 2차대전이란 세계사의 격랑 속으로 뛰어든 이야기. 그의 전작들도 그러했지만 <마이웨이> 또한 한국영화계 전체로 볼 때, 한편의 개봉작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마이웨이>는 전설과 다름없는 실화를 소재로 품는다. 1930년대 후반, 한 조선인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독일로 향한 뒤, 노르망디 해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상상만으로도 고통과 울림으로 가득한 여정이다. 하지만 <
스펙터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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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웨이>가 망하면 큰일난다.” 2011년 한해 동안 수많은 영화관계자들이 기대했고 걱정했다.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마이웨이>는 지금 앞으로 제작될 또 다른 한국영화들의 진행 여부를 결정짓는 책임을 떠안고 있다. 한국의 대작영화들이 대부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낸 올여름을 돌이켜본다면 그 책임은 더욱 막중할 것이다. 지난 12월14일,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마이웨이>는 현재 찬사와 우려를 동시에 얻고 있다. 과연 <마이웨이>의 성취와 한계는 무엇일까. 강제규 감독에게 <마이웨이>의 속내를 물었다. 또한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프로듀서의 증언을 통해 <마이웨이>의 지난 8개월을 돌이켜봤다
강제규, 다시 링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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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을 만들면서 전편의 성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가이 리치_<셜록 홈즈>는 내 작품 중에서 과정이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다. 그만큼 열정적이었고, 가장 즐기면서 만들었다. 속편을 만들 때 어려웠던 점은 전편보다 여러 면에서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편을 본 관객이 극장으로 돌아오게,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도 극장으로 올 수 있게 하는 것, 전편과 같은 열정을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 전편의 캐리커처에서 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작가들에게 묻겠다. 첫편이 성공적으로 출발한 상황에서 프로젝트에 합류한 뒤 특별하게 노력한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미셸 멀로니_마치 움직이는 기차를 뛰어가 따라잡은 뒤 올라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우리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선은 첫편이 완성해놓은 부분을 포착하려 노력했고, 그 다음에는 <그림자 게임>
모리아티의 미스터리가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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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세대’를 위한 셜록 홈스.” <버라이어티>가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이하 <그림자 게임>)에 내놓은 촌평이다. 영국 감독 가이 리치의 인장이나 다름없는 슬로모션-패스트포워드의 액션신과 로봇의 자동차 변신장면에 환호하는 관객의 세대를 짐작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두뇌회전조차 액션장면으로 표현하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과 더불어 셜록 홈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왓슨 박사(주드 로) 사이의 ‘브로맨스’(Brotherhood와 Romance의 합성어) 덕분에 원작 속 셜록 홈스의 이미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을 전편은 전세계에서 5억2400만달러를 극장 수입으로 벌어들였다. 속편 제작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2011년 크리스마스 극장가를 겨냥해 <그림자 게임>으로 돌아왔다. 정의 구현보다는 수수께끼를 해결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더 큰 희열을 느끼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홈스의
홈스, 최대의 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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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의 모험은 일단락됐지만, 스필버그의 모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말, 미국 극장가에서 한판 대결을 벌일 두편의 연출작 <워 호스>(국내 개봉 2월2일)와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이후에도 우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름을 극장에서 종종 확인하게 될 것 같다. 지금까지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스필버그의 시선은 진보하는 테크놀로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와 진득한 드라마를 지닌 역사적 인물들의 주변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
가장 먼저 <맨 인 블랙3>(2012년 5월25일 미국 개봉예정)가 있다. 이전 시리즈 두편의 제작에 관여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3편에서도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맨 인 블랙3>은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스필버그와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작가 제프 네이선슨이 각본을 맡았다는 점 외에도 스필버그가 제작했던 <백 투 더 퓨쳐>의 이야기 형식을 따르고 있어 팬들에겐 더 반가울
모험은 쭉~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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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전성기의 고전영화를 보는 듯했다. 특히 존 포드 감독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영화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포드 감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일부러 그의 톤을 따라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로케이션을 직접 보면서 대지와 하늘이 이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느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대지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이 캐릭터가 된 거다. 영국 시골 농부가 땅을 잃을까봐 걱정할 때 나오는 대지나 프랑스의 기름진 대지, 영국군과 독일군이 서로의 참호에서 대치하는 무인지대의 대지들이 모두 다른 의미로 표현된다.
-촬영 역시 당신의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른 것 같다.
=자연을 캐릭터로 생각했기 때문에 클로즈업보다는 와이드 렌즈로 대부분의 촬영이 이뤄졌다. 내가 뒤로 빠지고 대지가 스토리를 말해주길 바랐다. 존 포드 감독도 이같은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감독들도 이런 방식을 따
“긴장감이 나를 정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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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겨울 두편의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를 보게 된다. 하나는 이미 개봉한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다른 하나는 오는 12월25일 미국에서 개봉하고, 내년 2월2일 국내 개봉하는 <워 호스>다. 심지어 <워 호스>는 ‘말’이 주인공인 모험극이다. 뉴욕에서 양지현 통신원이 갓 미국 시사를 끝낸 <워 호스>의 소식과 스필버그 인터뷰를 보내왔다.
<워 호스>의 제목에는 ‘전쟁’(Wars)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워 호스>가 전쟁영화가 아니란다. 정말 그럴까? 대답부터 하자면,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워 호스>가 “사랑의 희생을 다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워 호스>는 “어른들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말 조이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는 알버트와 생존하기 위해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
전쟁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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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결투>와 영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1974)으로 주목받은 스티븐 스필버그는, 대부분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던 <죠스>(1975)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스타워즈>(1977)의 조지 루카스와 함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낸 원흉인 동시에 할리우드의 신세기를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바로 전 세대, 아니 단지 몇살 위의 감독들과도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은 반문화의 시대였다. 고전 할리우드의 세계는 무너졌고 실제 사회 역시 뒤죽박죽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이지 라이더>로 시작된 ‘뉴 시네마’는 <매쉬>와 <대부>로 이어지면서 할리우드를 바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걸작인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이 참패하면서 할리우드를 접수한 것은 프랜시스 코폴라와 마틴 스코시즈가 아니라 스필버그
영화적 재미에 통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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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감독들에 대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얼핏 보기에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90년대 영퀴방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만 해도 통신망 채팅실에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아, 난 스필버그를 좋아해요”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이었는지 아시는지? 일단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을 하면 어떻게 감히 대자본 블록버스터라는 흉기로 위장한 할리우드 제국주의의 선봉장을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영화광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방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영퀴할 맘도 사라져버린다.
스필버그의 이런 이미지가 사실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설명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영화의 시조이다. 최초로 흥행수익 1억달러를 돌파한 <죠스>의 감독이니까. 그는 친구인 조지 루카스와 함께 특수효과를 동원한 오락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역시 사
스펙터클 제조기, 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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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오랜 인터뷰에서 흥미진진한 말들을 모아서 시간순서대로 배치해봤다. 행간에서 한명의 작가가 성숙해가고, 또 변화해가는 지점들을 읽어보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다.
▶ “(<E.T.>로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에 실패하고) 아마도 나는 절대 오스카 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즐겁게 영화를 만들 것이다.”
▶ “나는 SF영화의 세실 B. 드밀이 되고 싶다.”
▶ “코폴라의 <대부>를 처음 봤을 때 영화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 일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절대로 코폴라만한 자신감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 “내 영화에는 그늘이 있다. <E.T.>와 <죠스>가 특히 그러하다. <레이더스>에도 잔혹할 정도로 그늘진 순간들이 존재한다. 나는 비평가들이 내 영화를 공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했더라면 내가 <쉰들러 리스트>로
관객은 스토리텔링의 파트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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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지난 40여년을 10장의 촬영현장 사진으로 정리해봤다. 이건 스필버그의 역사인 동시에 70년대 뉴아메리칸시네마, 80년대 블록버스터 시대의 탄생, 90년대 디지털 혁명과 21세기 진동하는 테러리즘의 시대를 모조리 통과하는 우리 시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양의 제국>의 복권을 희망하는 듀나의 글도 함께 싣는다.
6. <후크> 촬영현장의 스필버그와 팅커벨 역의 줄리아 로버츠(1991)
참패, 참패, 그리고 또 참패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의 스필버그는 퇴물이었다. 진지한 영화를 만들겠노라며 연이어 내놓은 <컬러 퍼플>(1985), <태양의 제국>(1987), <영혼은 그대 곁에>(1988)는 모조리 흥행과 비평 양단에서 몰락했다. 흥행사로 복귀를 선언하며 1989년에 내놓은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이 팀 버튼의 <배트맨>에 참패하자 평론가들은 “스필버그는 이제 너무 구식”이
이 안에 영화의 역사가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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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지난 40여년을 10장의 촬영현장 사진으로 정리해봤다. 이건 스필버그의 역사인 동시에 70년대 뉴아메리칸시네마, 80년대 블록버스터 시대의 탄생, 90년대 디지털 혁명과 21세기 진동하는 테러리즘의 시대를 모조리 통과하는 우리 시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양의 제국>의 복권을 희망하는 듀나의 글도 함께 싣는다.
1. <죠스> 촬영현장의 스필버그(1975)
블록버스터 시대 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을 찍었을 때, 세상은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작가가 탄생했다고 축하했다. 칸영화제는 스필버그에게 각본상을 줬고, 당대의 평론가이자 역사적인 독설가 폴린 카엘은 “스필버그가 미국 영화계를 접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스필버그는 <슈가랜드 특급>이 흥행에 참패하자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불안에 시달렸고, 우여곡절 끝에 메가폰을 쥔 B급 호러영화가 자신을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
이 안에 영화의 역사가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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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전설을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주목의 대상이다. 지난 수십년간 할리우드의 화려한 역사 제일 윗줄에 놓인 이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전설이 되어버린 만화 <땡땡의 모험>을 찍는다는 이야기에 설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작자 에르제의 유언처럼 스필버그 이외에 누가 감히 이 역사적인 작품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단지 그가 거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스필버그는 둘도 없는 노련한 모험가다. 전세계를 여행하며 사건에 뛰어드는 열혈기자 땡땡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데 이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80년의 세월을 건너 드디어 스크린으로 옮겨진 <땡땡의 모험>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너무도 스필버그다워 어떤 운명마저 느껴진다.
현대 미국의 신화는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두 남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를 대중 신화의 전당으로 끌어올린 두 사람은 <인디아나 존스>를 통한 단 한번의 협력 뒤로 다른 행보를
스필버그의 또 하나의 모험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