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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일까, 확신일까. 2009년 왕가위 감독이 중국의 전설적인 무예가 엽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대종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을 때,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선점자가 있었다. 2008년 겨울 대륙의 박스오피스를 휩쓴 엽위신 감독의 <엽문>이다. 영춘권의 대가이자 무술의 대중화에 힘쓴 엽문의 일대기를 충실히 훑은 이 영화는 현재 중국 무협영화계의 ‘넘버 원’ 액션배우 견자단을 앞세워 절정의 액션장면으로 관객을 홀렸다. 그런 <엽문>이 무술감독 홍금보가 참여한 속편을 제작하고, 뒤이어 2010년 허먼여우 감독이 엽문의 청년 시절을 다룬 <엽문전전>을 만들면서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는 중국영화계의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엽문 영화에 대한 구상을 최초로 얘기한 사람은 2002년의 왕가위였으나, 이러한 일련의 유행으로 인해 그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란 부담감과 함께 경쟁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미
강호에 돌아온 고수 중의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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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소더버그는 2010년 단 한편의 영화도 내놓지 않았다. 원래 감독들이 1∼2년 쉬었다 갈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소더버그는 아니다. 그는 재기작인 <조지 클루니의 표적>(1998) 이후 한해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어쩌면 이 남자는 힘이 좀 빠진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걸작 <체>(2008)는 미국 개봉도 제대로 못한 채 잠들어버리고, <인포먼트>(2009)는 평단의 반응도 좀 미지근했다. <컨테이전>은 오랜만에 거대 예산과 스타 군단을 데리고 돌아오는 소더버그의 ‘큰 영화’다.
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컨테이전>은 전염성 바이러스에 관한 의학스릴러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공기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각국의 의료단이 치료법을 찾아 헤매는 동안 바이러스는 번져간다. 시나리오작가 스콧 Z. 번즈(<본 얼티메이텀>)는 <컨테이전>이 “소더버그의 <트래픽>을 재난 장르에 이식한 듯
할리우드식 스타군단의 마지막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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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맬릭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둘째 치고 그는 정말 게으르다. 1973년 <황무지> 이후 맬릭은 오직 네편을 찍었다. 마지막 영화는 2005년의 <뉴 월드>였다. 통계적으로 따지자면 다음 영화는 2015년 즈음에 나오는 게 맞을 터이나, 다행히도 맬릭의 신작 <생명의 나무>는 5년 만에 완성됐다. 그것도 숀 펜과 브래드 피트라는 두 할리우드의 아이콘을 데리고 말이다. 스타 시스템에 실려가는 맬릭의 첫 번째 주류영화냐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간략한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1950년대, 텍사스 소년이 순결한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각성해가고,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간다.” 이 평범한 시놉시스에 사람들이 당황해할 때쯤 (그러니까 지난 12월) 트레일러가 공개됐다. 11살 소년 잭에게 엄마(제시카 채스테인)가 말한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단다. 자연의 길과 은총의 길. 너는 어떤 걸 따를지 선택해야만 할 거다.” 폭군 아빠(브래드 피트)는 말한다.
우주의 본질을 캐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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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재벌 총수 헨리크 반예르(크리스토퍼 플러머)는 40여년 전 손녀 하리에트가 실종된 이후 한시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그는 좌파 저널리스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대니얼 크레이그)를 고용하여 자신의 자서전을 쓰도록 지시한다. 미카엘이 벼르고 있던 부패한 사업가 베네르스트룀의 범죄 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넘겨주겠다는 조건이다. 내키지 않게 제안을 받아들인 미카엘은 가족 중심 기업(그야말로 ‘재벌’) 반예르 그룹의 어두운 핵심으로 파고든다. 하리에트 실종 사건은 1966년에 벌어졌지만 실상 비밀은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더 복잡하고 끔찍한 진실의 파편 속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해커 리스베트(루니 마라)가 미카엘을 돕기 시작한다.
아이폰 시대에 맞는 시대 분위기
데이비드 핀처가 스티그 라르손의 슈퍼 베스트셀러 <밀레니엄> 시리즈(국내 출간제목은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부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g
스웨덴산 슈퍼 베스트셀러와 할리우드 명장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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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때나마 칼 구스타브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둘은 1906년에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해 1907년에 서로 만나고 19010년에 각자의 길을 갔다고 전해진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만 깊이 교류했을 뿐인데 그 이유는 각자의 학문적 진리가 서로 다른 데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이 대개 말해지는 프로이트와 융의 사연이다. 그런데 먼 훗날 스위스의 한 지하실에서 젊은 시절의 융이 한 여인과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상대는 융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치료법 ‘토킹 큐어’(대화치료)를 이용하여 고친 첫 번째 환자 사비나 슈필레인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억압으로 히스테리 증상을 앓고 있었는데 융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난 뒤 그녀 역시 정신분석학자가 됐다. 하지만 융과 사비나의 연애 관계에 관해 프로이트는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를 어긴 것이라며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융과 프로이트 그리고 사비나의 삼각관
프로이트와 융을 상담의자에 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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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가 동화책에 손을 댔다! 어느 모로 보나 도무지 감이 잡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스파이크 존즈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웨스 앤더슨이 <판타스틱 Mr. 폭스>를 호기있게 책장에서 집어들었을 때. 그 정도에서 가늠할 만한 꿍꿍이가 아니다. 더럽고 추악한 부패의 거리야말로 언제나 스코시즈를 인증하게 해주는 영화 속 공간이었다. 그런 그가, 이 모든 현실을 뒤로하고 꿈과 희망의 세계를 선언한 거다. 영화가 어드벤처라고? 이 정도 도전이면 노장 스코시즈 본인의 일대 어드벤처라고 봐도 무방하다. 뜬금없어 보이는 건 그러나 속단일지도 모르겠다. 스코시즈가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에 손을 댄 건 벌써 2007년의 일. 그러니 그에게 ‘위코 카브레’의 동화 속 세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셔터 아이랜드>의 무시무시한 섬을 기술할 때도,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부패한 애틀랜틱시티를 그릴 때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장, 3D에 손을 뻗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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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땡땡이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태양왕처럼 군림했던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역사상 유럽의 어떤 왕과 대통령, 총리도 땡땡처럼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대중에게 미친 적은 없다. <땡땡의 모험>은 벨기에 작가 에르제가 1929년 탄생시킨 만화로, 소년 기자인 땡땡과 애완견 밀루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펼치는 모험을 그린다. 이 벨기에의 국보적 만화 시리즈는 전세계 60개국에서 3억부가 팔려나갔고, 한국에서도 80년대의 전설적인 만화 잡지 <보물섬>에 연재됐다. 그런데 20세기의 아이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왜 지금까지 영화화되지 않았냐고? 대답은 하나다. 땡땡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 스필버그가 땡땡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스필버그만을 원한 원작자 에르주
사실 스필버그가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
드디어 만나는 20세기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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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마인드버스터(Mind-Buster) 혹은 아트버스터(Art-Buster)라고 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2011년에는 우리 시대 가장 천재적이고 대범한 작가들의 신작이 기다리고 있다. 키워드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도전’이다. 이미 시대를 뛰어넘은 작가들에게 더이상 무슨 도전할 거리가 있겠냐고? 그렇지가 않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처음으로 퍼포먼스 캡처를 활용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마틴 스코시즈는 3D라는 시대의 신기술을 가지고 논다. 독창적인 데이비드 핀처는 놀랍게도 국제적인 스웨덴산 히트작을 리메이크한다. 소더버그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테렌스 맬릭은… 맙소사. 무려 CG 기술을 잔뜩 활용한 아이맥스영화다. 왕가위는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에 앞서 무협영화를 내놓을 예정이다. 이와이 순지는 첫 번째 영어영화를 만드는데다가 소재가 뱀파이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의 영화사상 가장 잔혹한 호러(말 그대로 이
2011년, 걸작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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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을 만났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지난 1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일체 인터뷰를 거절해왔다. 긴 시간 동안 자숙과 반성, 그리고 오해와 억측 속에 시간을 보내면서 그저 가까운 영화인들의 제의가 있을 때마다 가끔 스크린에 모습을 비쳤을 뿐이다. 최근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로 등장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파주>, 주인공 사이를 오가는 마음씨 넓은 형사로 출연한 <무적자> 등이 있었고, ‘노동해방’을 외치는 해고노동자로 출연한 <죽이러 갑니다>가 오는 1월20일 개봉할 예정이며 현재는 <모비딕>을 촬영 중이다. 여전히 스크린을 떠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를 보면서 만남을 청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뤄졌다.
이경영과의 만남은 갑작스레 이뤄졌다. 그의 출연작들이 개봉할 때마다 인터뷰 요청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매번 이뤄지지 않았고
[이경영] 철든 배우의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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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시의적절한 소재도 없어 보인다. <해피 투게더>(가제)는 화려한 아이돌의 본격 백스테이지다. 화려한 무대, 돈, 인기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기획사와 멤버를 둘러싼 속사정은 만만치 않다. 영화는 아이돌 그룹 ‘미스터 썬샤인’의 리더가 무대에서 추락, 위기를 맞고 그 공백을 대신할 보컬로 홍대 인디밴드 출신의 ‘유진’이 영입되면서 시작된다. 여기엔 메인으로 자리한 아이돌과 홍대 인디밴드 출신의 자존심이 충돌하고, 대형 기획사의 횡포에 제동을 거는 매니저 ‘구주’를 통한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나며, 재능 하나만 믿고 이 바닥에 뛰어든 유진과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키우려는 매니저 구주 사이의 멜로 라인도 형성된다. 아이돌이 키워드로 결국 지금 가요계의 폭풍의 핵으로 뚫고 들어갈 태세가 엿보인다.
“그런 거창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웃음)” 장진 감독의 조연출 출신, 전작 <바르게 살자>로 ‘장진 사단’이란 수식어로 불리던 라희찬 감독 신작. 감독은 &
비즈니스 아닌, 아이돌의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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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라고 쓰려 했다. 최익환 감독이 <마마>를 찍고 있다니.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오해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7년, <여고괴담4: 목소리>를 찍고 나서 로토스코핑 기법의 애니메이션 <그녀는 예뻤다>를 만드는 동안 최익환 감독은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 삼은 <오! 당신이 잠든 사이>를 준비 중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뒤 하반신 마비가 된 아버지와 아버지가 불행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딸이 주인공인 가족드라마였다. 신작 소개를 위해 당시 그를 인터뷰했던 기자 또한 첫머리에 ‘어색하다’고 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감동 스토리에는 눈길을 두지 않을 것 같다는 그에 대한 선입견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최익환 감독은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이런다. “(시나리오 받고) 울었어요. 제가 좀 눈물이 많아요!”
제목이 일러주듯, <마마>는 엄마에 관한 영화다. 원재(이형석)는 불치병으로 걷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야쿠르트를 배달하며
당신의 엄마는 어떤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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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익숙하다. 떠오르는 그대로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따왔다. 다만, 죽어도 사는 극중의 존재들을 좀비라고 칭하기는 좀 뭣하다. 좀비보다는 ‘언브레이커블’에 가깝다. 장항준 감독이 발견한 한국형 ‘언브레이커블’이 별나고 귀한 존재는 아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 따르면 한국에 사는 남자들은 대부분 ‘언브레이커블’이다. “TV에서 해주는 여성학 강좌를 우연히 봤다. 강사 말이 ‘한국 남자 대단하다, 강하다’였다. 정리해고 걱정에 술 마시고, 주식 폭락에 담배 피우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다 달고 사는 남자들이 바람은 바람대로 다 피운다는 농담이었다. 아줌마들이 그 이야기 듣고 빵 터지는데, 순간 <바람둥이 길들이기>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언브레이커블>의 브루스 윌리스가 바람을 피우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 등장하
우리 집 좀비는 슈퍼맨보다 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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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설경 위에 두명의 젊은 여인이 서 있다. 어떤 멜로드라마 혹은 청춘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인가. 이 아름다운 눈밭 위의 풍경, 이라고 감탄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진을 다시 보자. 때론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 가장 공포스러운 면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곳이 아름답기보다 으스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렇게 덧붙여보자. 아무도 없는 곳, 눈밭에 버려진 듯 덩그러니 서 있는 두 사람. 촬영지에 인접한 어느 무속인의 터에서는 영화의 촬영과 무관하게 하루 종일 징과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혹은 이런 말을 경청하면서 이 영화를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고양이가 나오는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심플하게 <고양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고양이가 갖고 있는 이중적 느낌이 있지 않은가. 사랑스러운 애완동물, 하지만 때론 섬뜩하고 무서울 수 있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변승욱 감독) 지난 12월28일 촬영장면은 마치 이 영화의 지향점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
죽음을 부르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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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도가니>는 ‘센’ 이야기다. 단순히 표현과 수위의 문제가 아니라 소설이 담고 있는 문제의 무게감이 굉장하다. 무진의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교직원들이 어린 학생들을 성적으로 무자비하게 유린했고, 마침내 이 문제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교사(강인호 역·공유)가 나타났으나 그가 맞서야 할 지역 기득권층의 ‘부당 커넥션’은 더 넓고 깊다. 게다가 이 사건은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실화이며, 아직도 피해자들과 가해자 사이에 수많은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해외 입양아와 사형수 아버지의 만남을 다룬 공중파 방송의 실화 다큐멘터리를 영화 <마이 파더>로 연출한 경험이 있는 황동혁 감독이 <도가니>의 시나리오를 받고 한달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이걸 상업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되더라. 굉장히 세고, 우울한 이야기잖나. 피해자들은 1심 재판에
영상으로 되살아날 광란의 ‘도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