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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피부> vs <얼굴 없는 눈>
영혼을 잃어버린 자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밝힌 대로 <내가 사는 피부> 속 베라의 가장 가까운 조상은 단연 조르주 프랑주의 <얼굴 없는 눈>의 크리스티안느다. 물론 그가 작성한 베라의 계보는 그보다 훨씬 장황하다. 갈라테이아,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화적 존재들과 <현기증>의 매들린, 프랑켄슈타인, 장 마레가 연기한 <팡토마>,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속 이르마 베프 같은 고전영화의 인물들이 리스트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 명단에서 받은 인상으로 짐작건대 알모도바르는 일련의 고전영화들로부터 ‘가면’의 역사를 추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왠지 베라가 매일 입어야 하는 스킨 톤의 타이츠 슈트도 그들의 가면을 이어붙여 만든 것만 같다. 그들 중 크리스티안느와 베라는 가면 때문에 영혼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는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알모도바르는 그런 의미에
그들의 가면을 벗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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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vs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무감각의 서스펜스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은 꼭 히치콕에 혼들린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럴 만도 하다. 원작자 에르제는 히치콕의 <39계단>에 영감을 받아 <검은 섬>을 그렸을 만큼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감독 스필버그 또한 히치콕의 <가족 음모> 세트장에 무단침입을 감행했을 정도로 그의 광팬으로 유명했으니. 그러니 <틴틴>에서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중에서도 히치콕의 그림자가 가장 드넓게 드리운 장면은 ‘밀라노의 디바’ 카스타피오레의 콘서트 장면일 것이다. 스필버그가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의 그 유명한 앨버트 콘서트홀 장면을 인용해 에르제의 원작을 새롭게 패치워킹한 부분이다. 그는 히치콕으로 빙의라도 한 듯 음모를
히치콕과의 대화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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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 vs <어 퓨 굿 맨>
의뢰의 기본 공식
법정드라마 속에서 벌어지는 재판은 왜 그리도 약자에게 불리한 게임인지. 웬만하면 그들은 이길 수 없다. 법정드라마의 모범적 사례로 여겨지는 영화들이 도입부에 특히 공을 들이는 건 그래서다. 관건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질 게 뻔해 보이는 싸움에 왜 뛰어들어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꺼이 억울한 자들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 <어 퓨 굿 맨>에서는 야구장 장면이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 판결이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송을 이끌어가야 하는 캐피 중위(톰 크루즈)와 피의자들의 결백을 믿는 갤로웨이 소령(데미 무어)이 펜스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는데, 그때까지 둘은 한편이지만 한편이 아닌 모양새다. 그러다 갤로웨이가 자리를 뜨며 “레드 코드(폭행을 은폐하기 위한 관타나모 내 군대 용어)가 뭔진 압니까?”라고 캐피를 훅 찌르는
진보와 진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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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vs <택시 드라이버>
20세기 뉴욕의 아저씨, 21세기 서울 출현?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서서 도루코 면도날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시퍼런 면도날과 시꺼먼 두발이 일으키는 마찰음이 오싹하다. 몇번을 그러다 그는 면도날을 내려놓고 바리캉을 집어든다. 그리고 박력있게 두피 위로 바리캉을 몬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부분이 기억나는지 자문해보자. 아마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 열개 정도의 숏들이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그 다음에 오는 한개의 숏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 숏에서 우리는 남자가 된 원빈을 만났다. 그러니까 해맑은 웃음이 천진했던 소년 원빈이 아닌 남자 원빈이 자상이 뚜렷한 상반신을 온전히 드러낸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기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던 그는 지난해 한국영화가 낳은 최고의 나르키소스였다. 그러므로 아저씨의 뿌리는 &l
과거가 있는 남자 혹은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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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즐겨 먹던 간식 중에 ‘칸쵸’란 과자가 있었다. 종이상자를 뜯으면 과자가 든 봉지가 나왔고 봉지를 들어내면 아래엔 숨은그림찾기가 인쇄돼 있었다. 지금이야 1분 안에 끝내고도 남겠지만 그때는 마지막 칸쵸 알맹이를 입에 넣을 때까지 그림을 살피고 또 살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나무와 집과 바위 사이로 숟가락, 냄비뚜껑, 연필 같은 것들이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어쩌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란 그 과자상자 안의 숨은그림찾기 코너 같은 것이 아닐까. 어떤 장면에서 우리는 과자나 사탕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오물거리는 아이가 된 듯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만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그러다 보면 그와 비슷한 다른 영화가 또 떠오르게 마련이다. 최근작을 중심으로 하긴 했지만 여기에 포함된 열쌍의 영화도 그런 연상작용의 일부를 수집한 것이다. 군것질거리를 옆에 두고 심심풀이 삼아 읽길 권한다
숨은 영화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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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종말의 광경을 떠올려보시라. 아마도 당신은 할리우드 종말론 영화의 한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지구가 할리우드영화처럼 종말을 맞이하게 될까? 몇 가지 종말론 영화들이 그리는 종말론의 진실 혹은 거짓.
<딥 임팩트(1998)>
세상이 종말론으로 들끓던 20세기 말에 만들어진 <딥 임팩트>는 ‘소행성 충돌’이라는 가장 인기있는 종말론을 다룬다. 미확인 혜성이 지구의 충돌 궤도에 들어서자 지구인들은 남은 몇 개월 동안 모든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이를 막으려 한다.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일부 종말론자들은 태양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행성 X가 2012년에 지구와 충돌한다고 믿는다. 행성 X란 해왕성보다 멀리 떨어져 있고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가상의 천체다. 2008년에는 일본 고베대학 연구진이 태양계에 9번째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한 적도 있다.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는 행성이란 소리다. 그런데 행성 X
당장 산악 지역으로라도 가는 게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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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만 2012년을 지구 종말의 해로 낙점한 건 아닙니다. 종말론자들에 따르면 파푸아뉴기니의 후리족 전설에도 2012년이 지구 종말의 해로 기록돼 있으며, 중국의 <주역> 역시 2012년을 지구 종말의 해로 점찍었다고 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재해석을 할 필요가 있답니다. 이 프랑스 예언자가 남긴 문서를 잘 해석해보면 지구 종말의 해는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는 거지요. 믿거나 말거나, 문제는 이 모든 역사적 기록이 하필 2012년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저는 이 모든 종말의 비밀을 알기 위해 책장에 꽂혀 있는 종말론 관련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냈습니다. <종말론: 최후의 날에 관한 12편의 에세이> <2012 신들의 귀환> <마야의 달력: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아포칼립스 2012: 최고의 시간과학자 마야가 예언한 문명 종말 보고서> <2012 아마겟돈인가, 제2의
다른 건 모르겠고 할리우드는 심상치 않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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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대예언자 롤랜드 에머리히는 예언했다. 2012년에 지구는 멸망하리라. 신년부터 이거 웬 종말론 이야기인가 마음이 심란해지겠지만, 어쨌거나 이 기사는 내일 지구가 종말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자는 이야기다. 정말?
2012년 12월21일에 지구는 종말합니다. 이게 웬 헛소린가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2012년 종말론이 어디서 튀어나온 헛소리인지를 살펴보자면, 모든 건 마야 문명이 남긴 달력 때문입니다. 마야 문명은 지구가 5125년을 주기로 운행된다고 믿었고 그 주기에 기반해서 달력을 제작했습니다. 마야인들은 394년 주기로 시간을 측정했는데 이걸 박툰(baktun)이라고 하지요. 마야 달력이 시작된 건 기원전 3114년 8월13일이고, 그로부터 13번째 박툰이 끝나는 게 2012년 12월21일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마야 문명을 사적으로 연구한 수많은 종말론자들에 따르면 마야인들은 2012년 12월21일에 지구가 멸망하기 때문에 이후의 달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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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새벽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나타났다. “저, 원래 점 없어요. 오늘 처음 붙였거든요. 하필이면 이날 오셨대…. (웃음)” 말쑥한 정장 차림에 특별한 표정이 없지만 점 하나 붙인 것만으로도 송새벽은 벌써 웃기다. 정승구 감독의 <아부의 왕>은 대쪽 같은 성격의 보험회사 사원 동식(송새벽)이 부모의 사채를 갚기 위해 아부의 A부터 Z까지 알고 있는 ‘혀’고수(성동일)를 만나 ‘아부의 왕’으로 변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영화다.
서울 강남의 한 인테리어 디자인 전시장에서 진행된 이날 촬영분은 동식이 아부해야 하는 홈쇼핑 회장의 측근인 예지(김성령)의 사무실을 찾는 장면이다. “내부 레이아웃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무실처럼 꾸몄다”는 미술감독의 말처럼 인테리어 전시장은 갤러리 같은 특별한 분위기의 사무실로 변해 있었다. 이 사무실의 주인 예지는 이름처럼 어떤 예지력이 있는 인물이다. 동식에게 큰 항아리에 담긴 긴 검은 대나무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하고는 이렇게 말한
현장리스트 07. 아부의 A부터 Z까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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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얼음저장고’ 소재의 영화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양수리 <취화선> 오픈 세트장.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딴판이다. “오늘은 봄이네요 봄” 하고 스탭들이 인사를 건넨다. 요 며칠 촬영 중 유독 따뜻하단 말이지만, 웬걸, 영하를 웃도는 현장날씨가 매섭기만 하다. 애석하게도 영화 속 시간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여기저기 민소매에 짚신을 신은 보조출연자들이 추위에 언 살을 비비는 동안, “입김을 단속하라!”는 절대명령이 퍼진다. 촬영에 등장할 당나귀 한 마리가 스탠바이. 곧이어 한복 차림에 머리를 틀어올린 차태현이 등장한다. 사극이 처음인 만큼 차림새는 사뭇 생소하지만 그의 코믹함이 조선시대라고 통하지 않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분량 역시 차태현과 이문식의 코믹액션 배틀이다. 금서를 뺏기지 않으려는 이문식을 벌렁 드러눕혀 바지까지 홀랑 벗겨내 서책을 뺏어가는 막무가내의 민첩함. 속곳만 입은 채 “내 바지!”를 외치는 이문식이 비실비실 뒤따르면,
현장리스트 06. 황금보다 귀했다오, 서빙고를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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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이틀 지난 양수리. 음기가 가득하다. 양수리 세트, 정식으로 말하자면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남양주종합촬영소는 깊은 산을 깎아 계곡처럼 세워졌다. 겨울이면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음기가 으슬으슬 모여든다. 김조광수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실내 세트에도 음기가 가득하다. 한국 퀴어시네마 진영에서 큰언니로 통하는 김조광수 감독의 기골찬 음기 때문인가 싶었더니 프로듀서가 얼른 난롯가로 오라 손짓하며 말한다. “춥죠? 소음 때문에 온풍기를 틀 수가 없어요.”
차가운 건 양수리의 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공 커플의 아파트 세트 역시 모델하우스처럼 차갑고 메마르다. “가방 하나에 짐 싸들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삭막한 아파트로 설정해서 그래요.” 김조광수 감독이 말한다. “가짜로 결혼해서 사는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 집이라서 사는 흔적이 도무지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바로 옆에 있는 레즈비언 커플의 집은 따뜻한 공간으
현장리스트 05. “우리 영화는 귀여워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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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카메라 뒤에 돌아와 선 변영주 감독과 다시 만난 <화차>의 현장은 인파로 술렁이는 서울 용산역사. ‘재회’라는 단어의 고즈넉한 느낌과는 이보다 멀 수 없는 장소다. 도착해보니 손수레에 실린 카메라가 달리는 이선균을 놓칠세라 뒤쫓고 있다. 숨차게 따라 뛰던 변영주 감독이 기자에게 날린 첫인사는 “여기 서서 어쩌겠다는 거야? 다 찍혀!” 이례적으로 스테디캠까지 카메라 두대가 동원된 이날 현장에는 감독 의자가 따로 없다. 들고 다니며 확인하는 7인치 모니터가 전부다. 유동인구가 많은데다 보조출연자도 60여명이라 전 스탭의 신경이 곤두선 오늘, 그나마 평온해 보이는 인물은 강주석 동시녹음기사. 어차피 후시녹음이 불가피하니 헤드폰을 헐겁게 걸친 표정이 체념한 듯 편안하다.
199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원작 <화차>를 한국의 현재로 옮겨온 변영주 감독의 미스터리 <화차>의 드라마는,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 문호(이선균)와 시
현장리스트 04.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타인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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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집’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아껴두는 말이다. 바다쪽으로 낸 유리창을 병풍삼아 쨍한 햇살과 구멍 송송 뚫린 현무암 바위, 넘실대는 파도가 기막힌 삼위일체를 이룬다.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듯 소박하게 키를 낮춘 목재 대문과 현관까지 이어지는 돌담길이 아기자기하니 귀엽다. 이곳은 <불신지옥>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건축학개론>의 주요 배경이 되는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의 촬영현장이다. “우리 영화 개봉하면, 제주도에 (부동산) 투기 붐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몰라.” 현장을 지키던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멋지다’, ‘아름답다’는 말을 연발하는 취재진에게 농을 건넨다. 하지만 이 말이 마냥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건축학개론>의 공간이 잘 지은 ‘세트’가 아니라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이기 때문이다.
왜 이 영화의 제작진은 세트가 아니라 집을 지어야 했을까.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건축학개
현장리스트 03. 건물이 3단계로 진화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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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이틀 앞둔 지난 12월30일, 삼척 덕산항 패류 임시 보관장 앞 항구. 신정원 감독의 신작 <점쟁이들>에서 이곳은 ‘울진리’란 마을이다. 몇 십년 묵은 악령이 의문의 사건사고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이곳에 전국 각지의 엄청난 점쟁이들이 모여 한판 굿을 벌인다. 악령의 거대한 힘에 많은 점쟁이들이 도망치고 5명의 점쟁이와 1명의 기자가 남는다. 이날은 과거 마을 앞바다에 침몰한 보물선과 악령의 관계를 알아낸 이들이 배를 빌리려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난리예요. 난리. 완전 난리법석. (웃음)” 배우 이제훈의 말마따나 제각각의 의상을 갖춘 점쟁이들은 정신이 없다. 김수로와 이제훈은 쓸 만한 배를 찾다가 각종 집기를 넘어뜨리고, 타로점술가를 연기하는 우리와 꼬마 점쟁이를 맡은 양경모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뛰어다니고, 강예원은 마을 청년에게 배를 빌려달라는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반복한다. 조감독의 무전기로 신정원 감독의 ‘컷’ 소리가 들렸다. 배우나 스탭할 것 없이
현장리스트 02. 웬만해선 그들보다 웃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