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닝타임이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
90분이 가장 적절한 블록버스터 상영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법칙은 <타이타닉>과 <반지의 제왕>의 성공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다. 상영시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블록버스터 전반의 질적인 성장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서사에 충실한 작가들을 영입해서 똑똑한 블록버스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관객 역시 블록버스터가 정서적, 이성적 유희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하는 시대가 왔다. 그냥 간단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2시간 이상 관객의 엉덩이를 자리에 붙여두기 위해서는 눈요기 이상의 영화적 완성도, 특히 단단한 서사가 필연적이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블록버스터들의 상영시간은 대부분 2시간을 넘어선다. 전쟁 시대극인 <마이웨이>와 <고지전>의 러닝타임은 각각 137분과 133분에 달한다. <퀵>과 <7광구> 역시 112분과 115분이다. 문제는 네 영화 모두 2시간 이상을 지탱할 만한 이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⑥·⑦ - 때로는 대담한 포기가… / 상영등급 타협은 재미없어
-
꼭 블록버스터야할 필요는 없다
Size does matter. 약 15년 전, <고질라>의 메인 카피는 블록버스터의 본령이 ‘크기’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고질라>이기 때문에 크기가 중요했을 뿐, 모든 블록버스터가 규모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충무로의 한 프로듀서는 “실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는 돈을 쏟아부은 것 때문에 그에 걸맞은 생색을 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추격자>에서 인물들의 추격전만으로도 땀방울과 긴장감을 만들어낸 나홍진 감독은 <황해>에서 트레일러를 넘어뜨리지 않고도 스펙터클을 넘어서는 쾌감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쓰나미를 극적인 국면으로 활용했던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이 자신이 제작한 <7광구>에서는 괴물을 왜 그렇게 남용했는지도 의문이다. “규모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스토리”라고 강조했던 강제규 감독이 자신의 말과 상반된 결과물을 내놓은 것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④·⑤ - 이야기의 규모부터 파악하라 / 우울한 이름 값
-
블록버스터의 캐릭터는 기능적인 로봇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에서 샤이어 라버프와 옵티머스 프라임의 연기는 용호상박이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기름을 피처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과 샤이어 라버프가 폭탄의 위력으로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는 장면을 한번 비교해보라. 두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동요에는 큰 차이가 없다. 블록버스터에서 인간 배우와 디지털 배우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건 기본적으로 블록버스터의 캐릭터들이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키라 나이틀리가 <캐리비안의 해적>과 <오만과 편견>에서 보여준 연기를 같은 방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도 이같은 법칙은 어쩌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아시스>의 설경구와 <해운대>의 설경구, 혹은 <라디오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③ - 잘 쓴 조연 하나, 평면적인 주연 백보다 낫다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나라 영화판에는 장르영화 시사회에서 감독이 “난 장르에 대해 잘 모르고 심지어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왜 당연시되고 용인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건 그냥 솔직하다고 말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르에 대해 잘 모르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한다면 양심상 그 감독은 처음부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도 억지로 일을 떠맡았다면 여전히 장르를 싫어한다고 해도 모른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하고 공부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억지로 법정에 끌려나온 부역자들처럼 변명한다. “전 장르에 대해 잘 모르고….”
정리해보자. 장르란 철저하게 경험의 누적에 의해 존재한다. 추리물을 예로 들어보자. 에드가 앨런 포가 명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공식을 만든다. 여기에 아서 코난 도일이 나타나 내레이터 역할과 과학수사를 강화한다. 여기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같은 작가가 나타나 범인을 미리 밝히는 도서추리물을 만들고 대실 해밋이 나타나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① - 재미를 모르는 복제품은 가라
-
-
2011년은 한국 블록버스터의 무덤이었다. 관객과 영화계의 압도적인 기대를 모았던 <7광구>와 <마이웨이>는 박스오피스의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고지전> <퀵>은 원했던 고지에 오르지 못하거나 빠르게 박스오피스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말하는 관계자가 당신 주위에서 여전히 다음 블록버스터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면, 가장 적절한 대처법은 (미안하지만) ‘해고’다. 2011년 한국 블록버스터들의 몰락은 그저 운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네편의 수백억원대 블록버스터가 한해에 모조리 몰락했다. 이건 불운이 아니라 시스템에 거대한 구멍들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자 징조다. 물론 희망은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종 장르는 아직도 걸음마 상태에 불과하다. 여전히 충무로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공식을 한국시장에 맞게 연구하고 개발하는 단계에 있다. <해운대>로 그 가능성을 엿봤다가 제작자로 참여한 &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제작 10계명
-
켄 콰피스 감독
-(한숨을 쉬며 들어온 감독에게) 힘든가.
=힘들다. 하지만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영화를 만들었던 과정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 싶은데 괜찮은가? <빅 미라클>은 자료를 공부하는 것으로 영화 준비를 시작했다. 1988년 10월 포인트 배로에는 155명의 기자가 모였다. 방송사 아카이브로 가서 당시 뉴스릴을 보는 것이 그 출발이었는데, 말 그대로 몇톤이나 되는 비디오테이프들이 쌓여 있었다. 영화에서 고래들은 세 가지로 표현되었는데, 배우들과 연기할 때는 애니매트릭스였고, 바다 아래에서는 컴퓨터그래픽, 그리고 뉴스 영상에서는 실제로 당시에 촬영된 뉴스릴 일부분을 이용하기도 했다. 컴퓨터그래픽 외에도 고래가 숨쉬면서 물을 뿜을 때 추위 때문에 얼음이 되어 뿌려지는 효과도 그래픽이었다.
-추운 알래스카에서의 촬영은 어떤 경험이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가 아마도 100% 알래스카에서 촬영한 첫 스튜디오 제작 영화일 것이다. 포인트 배로가 정확한 장소이
“드루는 나의 첫 번째 선택이자 유일한 선택”
-
얼음바다에 갇힌 고래 세 마리를 구하기 위해 세계가 협동한다. 일개 국가도 아니고 세계라니,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되지만, 사건이 일어났던 1988년이 미국과 소련으로 세계가 양분되었던 냉전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알래스카의 포인트 배로의 얼어붙은 바다에 갇힌 고래 가족의 구조기를 담은 영화 <빅 미라클>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그 사실은 스크린에 첫 장면이 채 영사되기도 전에 관객에게 분명하게 각인된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들의 경우에는 관객이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긴장을 덜하기도 하지만, <빅 미라클>에서는 그 사실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1988년 알래스카의 포인트 배로에 지역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머물던 리포터 애덤 칼슨(존 크래신스키)은 앵커리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수면이 얼어붙은 혹한의 겨울바다에 갇혀, 예정대로 남쪽으로 이주하지 못한 캘리포니아 회색고래 가족 세 마리를 발
작전명 돌파구, 고래 가족을 구하는 전 세계의 모험
-
영화로 각색할 만한 스파이 소설의 걸작들을 고르는 건 영화로 각색할 만한 정통 추리소설을 고르는 것보다 백배 어렵다. 왜? 이들은 퍼즐 미스터리와 달리 훨씬 영화화하기 쉬우며 이미 대부분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의심나면 한번 보라. 조셉 콘래드의 <비밀 첩보원>, 존 버캔의 <39계단>, 서머싯 몸의 <어센든>, 에릭 앰블러의 <디미트리우스의 관>,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렌 데이튼의 해리 파머 시리즈(스파이의 이름은 영화화된 뒤에야 붙은 것이긴 하지만),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 잭 히긴스의 <독수리 착륙하다>, 로버트 러들럼의 본 시리즈, 켄 폴리트의 <바늘 구멍>…. 이들은 스파이 소설의 대표작 리스트지만 첩보영화/드라마의 대표작 리스트에서도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
실화로 소재를 돌린다면? 역시
<나를 사랑한 스파이>여 다시 한번
-
코드네임 콘돌 Three Days of the Condor (1975) / 시드니 폴락
제임스 그래디의 원작 <콘돌의 6일>을 3일로 압축했다. CIA 하부조직의 말단 자료조사원 조셉 터너(로버트 레드퍼드)는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 사무실 동료들 모두가 살해됐음을 발견한다. 뜻하지 않게 목숨을 구하게 된 터너를 죽이기 위해 다른 조직원들이 그를 추적한다. 터너는 문학협회로 위장한 조직에서 세상의 모든 출판물을 읽고 분류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그러니까 다른 스파이들처럼 무기와 호신술에 능한 자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초보적인 형태의 위치추적 장치라든지 영어로 얘기하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지나가자 알아듣지 못하게 불어로 얘기하는 스파이의 모습 등 탄탄한 시나리오 안에서 아기자기한 아날로그적 기법과 설정들이 정겹다. 냉전 막바지이던 시기, 중동 석유시장을 탐내는 미국을 묘사한 점은 지금 봐도 꽤 의미심장하다. 로버트 레드퍼드는
영화가 사랑한 스파이-2
-
우리가 평범한 컨벤션처럼 받아들이는 첩보스릴러의 양식들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그것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맞물려 늘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그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뽐낸 수많은 스파이들의 계보다. 프리츠 랑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마타 하리부터 제이슨 본에 이르기까지 스파이영화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모아봤다.
스파이 Spione (1928) / 프리츠 랑
프리츠 랑이 <메트로폴리스>(1927)의 흥행 참패 이후 우파(UFA)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제작했다. 원본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체코 프라하의 영화기록보관소에서 카피본이 발견돼 여러 개의 필름을 합쳐 2003년 복원됐다. 무역부 장관이 암살당하고 중요 문서들이 사라진다. 게다가 내막을 아는 인물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저격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첩보부의 체면을 회복할 때”라는 편지를 첩보부에 보낸다. 이 모든 것은 겉으로는 건실한 은행가로 위장한 ‘하기’의 음모였으며 그
영화가 사랑한 스파이-1
-
“존 르 카레는 현재 영국에서 글을 쓰는 그 어떤 소설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작가다.” <가디언>의 평처럼 존 르 카레는 스파이 소설 작가로서의 장르적 성취와 보수적인 문학계의 지지를 동시에 이뤄낸 보기 드문 작가다. 그는 냉전시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스파이들의 냉혹한 세계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이언 플레밍이 창조해낸 환상적인 스파이 세계에 머물러 있던 독자들을 현실 세계로 데려왔다.
영미 진영과 소련 진영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던 60, 70년대, 대다수의 영미권 스파이 소설들이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과의 대결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면 존 르 카레는 이데올로기라는 냉전시대의 유산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개인의 초상을 직시한다. 스파이로 분한 개인이 느끼는 윤리적 혼란과 고독감은 르 카레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종종 드러나는데, 그의 첫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인용하면 이렇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더러운 술수 덕분에 보통 사
회색지대가 낳은 작가, 존 르 카레
-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파이영화의 효시라 불리는 프리츠 랑의 <스파이>(1928)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또한 그것은 스파이영화 혹은 첩보영화의 태동과 이후의 흐름을 요약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스릴러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애매한 결합처럼 느껴지는 스파이영화는 특정한 장르로 분류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영화사와 더불어 관객 혹은 영화계와 조응하며 그들만의 세계를 이뤘는지 일러준다.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첩보전’은 사실상 지난 세기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영화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지난 20세기는 영화의 세기이자 첩보의 세기이기도 했다. <스파이>가 말한 ‘세상의 이상한 일들’이 바로 지난 세기에 집중돼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스파이영화를 굳이 설명하기 위해 스릴러와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성을 언급한 것이지 스파이영화는 영화사의 시작과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T
사라져가는 스파이(영화)를 향한 송가
-
존 르 카레가 1974년 발표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전직 정보부 요원 스마일리가 영국 정보부 최고위층에 잠입한 소련 간첩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시작된다. 애타게 단서를 찾아 헤매는 스마일리처럼 <씨네21>도 영화사를 가득 메운 기발하고 탁월한 스파이들을 하나하나 불러냈다. ‘스파이영화’를 딱히 명쾌한 역사적 장르로 규정할 순 없지만 그 화려한 스파이들의 면면은 여타의 장르가 낳은 스타들의 계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지도 삼아 스파이영화의 세계를 훑어보고 프리츠 랑의 <스파이>부터 맷 데이먼의 <본 아이덴티티>까지 역대 스파이들을 총망라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 듀나가 영화화를 기대하는 스파이 소설과 실화들에 대해 썼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씨네21> 사무실로 유능한 스파이를 급파해주시길.
스파이영화는 어떻게 단련되었나
-
-당시 80년대를 거쳐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취재나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
=범죄와의 전쟁 당시 검사였던 분이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70, 80년대 악명을 떨쳤던 범서방파의 김태촌, 양은이파의 조양은, OB파의 이동재 등 3대 깡패의 전성기에 대한 얘기도 재밌게 들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히로뽕의 아시아 제1수출국이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한 깡패 두목이 있었는데 스폰서라 불리는 사람과 친인척 관계였다는 얘기를 들어 거기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
-그렇다면 실화에 바탕했다는 자막을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나. 당신이 좋아한다는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의 도입부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긴 한데 그런 식으로 자막을 넣는 게 나한테는 좀 불편했다. 실화를 영화화한다는 게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같기도 한데 그런 설정이 너무 마케팅적으로 쓰인다는 느낌도 있어서 뺐다. 아무튼 <좋은 친구들>은 거의 100번
나쁜 아버지들에 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