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생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작품 수는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영화가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연출이 아니라 연기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1980년대, 그러니까 20대를 거치며 그녀는 이런저런 음악 방송과 아동용 방송을 기웃거렸지만 끝내 연기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진 못한 모양이다. 이후에 그녀는 미국영화연구소(AFI) 등을 거치며 영화연출의 길로 항로를 바꾸었고 몇편의 단편과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든 다음 마침내 2006년에 <레드 로드>로 장편 데뷔하게 된다. 어쩌면 연기 인생에서의 그녀의 불운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2000년대에 데뷔한 유능한 여성감독 중 한명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시나리오를 처음 보여줬을 때부터 <레드 로드>는 스릴러로 낙점됐던 영화다. CCTV 오퍼레이터가 직업인 재키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모니터를 살피다 몇년 전 자신의 남
미아들의 안식처를 창조하다
-
켈리 리처드의 <믹의 지름길>은 전에 없는 여성주의 서부극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수긍할 만하다. 서부극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늘 미비했거나 없었는데, 그녀의 영화 <믹의 지름길>에서는 그들이 사막의 한가운데에 선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이 영화의 기원은 인물이 아니라 풍경이었다. 켈리 리처드가 <웬디와 루시>의 촬영 준비를 하며 경험했던 오리건의 사막 지대가 이 영화의 기원이며, 그 사막의 풍경을 체험한 이후에야 서부 시대 여성의 이야기가 풀려나왔다. 그러고 보면 켈리 리처드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뒤집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로드무비를 한번 더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94년 <초원의 강>으로 데뷔하여 선댄스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으니 데뷔작의 연도로만 본다면 켈리 리처드는 꽤 경력이 있는 감독이다. 당시 <
로드무비의 여왕
-
“지아장커 이후 새로 급부상한 가장 흥미로운 중국 감독”이라는 평가까지도 받아낸 리우지아인. 그녀의 작품 <옥스하이드2>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만두를 빚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끼어 앉은 그녀, 정확히 동일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며 한손에는 만두에 넣을 부추를, 또 한손에는 자를 든 채로 고집을 피우고 있다. 마치 자기 영화의 숏들을 자로 잰 듯 자르는 것처럼 부추도 그렇게 자른다. 엄밀함에 대한 그녀 자신의 강박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한편 이런 장면도 있다. 아버지가 만두를 들어 눈 위에 붙이고는 마치 하얀 눈썹이 생긴 것처럼 장난을 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극영화이므로 아버지의 재치있는 연기는 평소의 일화에서 가져왔을지라도 리우지아인의 연출을 거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때로 불쑥불쑥 명랑하다. 리우지아인 영화의 두 장점, 엄밀함과 명랑함의 예가 되는 장면이다.
1981년생이며 베이징전영학원 출신이고 23살에 만든 첫 번째 장편 <옥스하
현실의 시간에 근접한 명랑함
-
영화감독으로서 미란다 줄라이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건 2006년에 그녀의 장편 데뷔작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개봉하면서부터다. 여주인공은 아마추어 아티스트이자 노인을 위한 택시 ‘엘더 캡’의 운전사다. 그녀가 아내와 이제 막 별거를 시작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다. 그녀에게 이 여자의 할아버지 고객은 너무 늦게 진정한 짝을 만난 것을 한탄한다.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간 지역 미술관 큐레이터는 끝내 그녀의 작품을 받아들지 않는다. 한편 남자의 두 아들은 채팅방에서 음담패설을 주고받는데, 알고 보니 채팅 상대는 미술관의 그 큐레이터다. 이처럼 얼핏 보아도 여러 에피소드의 병렬적 얼개가 특징인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줄라이가 ‘어떻게 예술을 하는지’ 그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에서 여자주인공의 예술활동은 늘 일상
성장통을 겪는 소녀처럼
-
-
만약 2012년, 향후 몇 십년을 내다보는 영화용어사전이 새로 발간된다면, ‘여성영화’라는 항목은 과연 어떤 규정들로 다시 설명될 수 있을까. 남성의 시각적 쾌락의 대상에서 벗어나 여성이 응시와 재현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서사적으로, 형식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영화관습에 대항하는 영화. 여성영화에 대한 논쟁이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1970년대라면, 이런 정의들은 전략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명징하며 미학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전복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동시대의 어떤 영화들을 그 범주 아래, 일렬로 나열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그런 작업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날, 영화 안팎에서 적극적인 담론으로 활동하던 ‘여성영화’라는 개념은 4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 이르러, 영화의 변화, 여성의 변화에 무심한 채, 종종 영화 자체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해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용어로 소비되는 현실 또한 분명 인정해야
더 욕망하라, 세계의 문이 열린다
-
여성/남성 감독을 가르는 것이 구태의연한 건 아닌지 시종일관 자문하면서도 몇 가지 것들이 끝내 궁금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 특집을 마련했다. 말하자면 여성영화만이 지니는 그 어떤 영화적 ‘여성스러움’이 궁금했다. 남다은 평론가가 그 주제로 앞문을 열었다. 그러고 나니 어떤 뛰어난 여성감독들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비교적 신인급에 해당하는 여성감독 6인을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다. 그리고 변영주 감독에게는 ‘당신은 <화차>로 여성의 무엇을 그리고 싶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가 소중한 글을 보내왔다. 마지막으로 제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필견을 추천하는 9편의 프리뷰도 함께 싣는다. 여성영화와 여성감독에 관한 당신의 관심과 이해가 넓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
-
<멋진 신세계>와 <해피 버스데이>는 임필성 감독의 본래 취향과 새로운 변화 모두를 보여준다. 유혈이 낭자한 호러영화와 <멋지다 마사루>식의 4차원 개그 사이에서의 줄타기라고나 할까. 얼핏 어울려 보이지 않는 그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어느덧 6년이 흘렀다. 두 장편 <남극일기>와 <헨젤과 그레텔>은 국내 평단으로부터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충무로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듯 장르적으로 펼쳐놓은 임필성만의 다부진 고집과 유혹적 취향을 읽을 수 있는 영화들이었다. 판타스포르투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헨젤과 그레텔>의 경우 데이비드 보드웰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특별히 ‘컬트’라며 언급하기도 했고, 실제로 국내에도 없는 블루레이 버전이 북미지역에서 출시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해피 버스데이>와 그사이 만든 아이폰 단편 <슈퍼덕후>, 그리고 곧 크랭크인하게 될 <주말의 왕자>는
“세상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갈기는 기분”
-
<천상의 피조물>의 깨달음을 얻은 로봇 ‘인명’은 지난 2009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에도 등장했다.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던 녹슨 로봇이 한 소녀(심은경)의 피아노 연주로 깨어나게 된다는 내용으로 독특한 컨셉과 영상이 눈길을 끌었는데, 사실 김지운 감독의 <천상의 피조물>이 이제야 개봉하게 된 것. 컨베이어 벨트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이 종교적 열반과 등가를 이룬다는 파격적 설정의 <천상의 피조물>은 영화사의 오랜 테마를 신선하게 변주하고 있다. 늘 장르를 옮겨다녔던 김지운 감독으로서는 첫 번째 SF 장르의 시도로 봐도 무방하다. 현재 미국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의 후반작업 중인 그가 다시 그 로봇을 만나기 위해 급히 귀국했다. 김지운 감독과의 인터뷰는 제작발표회가 열린 지난 3월12일에 이뤄졌다.
-워낙 오래전 작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겠다.
=2006년 6월경 크랭크업했으니 무려 7년 전이다. 영화 속 김규리가 그때는 김민
“현대 기계문명의 대립지점에 불교가 있다”
-
무려 6년 만에 완성된 프로젝트다. <인류멸망보고서>는 김지운, 임필성 감독이 연출한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SF 옴니버스영화다. 광우병 좀비는 서울을 잠식하고, 로봇은 열반에 이르고, 지구는 당구공과 부딪혀 멸망한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시네필적인 두 감독은 충무로에서 거의 멸종된 장르를 각자의 방식으로 되살려냈다.
SF 장르문학에서 앤솔러지(Anthology: 단편모음집)는 꽤 인기있는 형식이다. 호러나 스릴러 장르문학에서도 앤솔러지는 차고 넘친다만 한국 SF 문학팬들에게 앤솔러지는 단순히 좋은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건 단편 하나에도 장편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를 쏟아붓는 SF문학의 특징 덕분이기도 할 것이고, 다른 장르문학과 비교해도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온 SF문학의 입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SF 단편집 <크로스로드>는 “장르문학시장에서조차 소외되고 있는 SF의
인류의 미래가 궁금하십니까?
-
모바일영화제를 개최할 최적의 장소? 인구의 200%가 넘는 사람들이 모바일을 소유하고 있는 홍콩이야말로 모바일영화제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일 것이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하는 홍콩국제모바일영화제(HKIMFA: Hong Kong International Mobile Film Awards)를 다녀왔다. 거기서 홍콩영화의 미래를 보았냐고? 그보다는 영화의 미래와 홍콩의 야심을 잠시 엿봤다고 하는 편이 좋으리라.
영화는 민주화됐다. 우리의 손바닥 위에는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놀라운 카메라가 하나씩 놓여 있다. 심지어 이 카메라는 HD 화질뿐만 아니라 온갖 촬영과 편집 관련 프로그램들을 지원한다. 핸드그립 같은 부수 기기 역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맞다. 모바일영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소리다.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을 기점으로 한국의 모바일영화 제작 열풍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모바일 기기의 진화와 함께 영화의 DIY 시대가 시작 첸인
홍콩의 야심은 스마트폰을 타고
-
'아름다움'에 제주만큼 어울리는 곳은 없는데…
<그녀의 연기> 김태용 감독
<뷰티풀>은 ‘아름다움’을 주제로 허안화, 차이밍량, 구창웨이, 김태용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다.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단편 <그녀의 연기>는 공효진과 박희순이 주연을 맡았다. 제주도에 사는 박희순이 병으로 쓰러져 아무런 의식도 없는 아버지에게 가짜 여자친구 공효진을 소개하고, 그녀의 ‘연기’가 이어지면서 벌어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제주도의 풍광이 시애틀의 안개를 떠올리게 하고, 말없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서로 언어가 다른 현빈과 탕웨이의 대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짧은 러닝타임에서도 김태용 특유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김태용 감독은 같은 기간 중국에서 개봉한 <만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현지 기자들로부터 탕웨이와의 작업 등 <만추>에 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어떻게 떠올린
<그녀의 연기> 김태용 감독 / <심플 라이프> 허안화 감독 인터뷰
-
해마다 ‘한국이 주인공’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그리하여 심지어 일부 언론으로부터 ‘한국 영화인들에게 주려고 만든 상인가’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아시안 필름 어워드에서 한국 영화인들이 소외된 것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하고 지난해에도 이창동 감독이 <시>로 감독상과 각본상을, 하정우가 <황해>로 남우주연상, 윤여정이 <하녀>로 여우조연상, 남나영이 <악마를 보았다>로 편집상을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올해는 <용문비갑>에 참여한 디지털아이디어의 김욱 슈퍼바이저가 시각효과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그 역시 최근 중화권 블록버스터의 후반작업을 도맡다시피하는 한국 업체들의 탄탄한 실력이 바탕이 된 의미심장한 결과다. <고지전>의 이제훈은 남우조연상 후보로 레드카펫을 밟았지만 아쉽게도 수상의 영예를 얻지 못했다.
수상결과는 아쉬움… 정식 개봉한 김태용의 <만추>는 흥행 호조
-
“올해 더 유난히 활기차지 않나요?” 홍콩 필름마트(이하 필름마트)와 아시안 필름 어워드(AFA), 그리고 홍콩국제영화제까지 영화, TV, 음악 산업을 한데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 엑스포 홍콩’ 개막식에서 홍콩무역발전국의 레이먼드 입 부총재의 표정은 특별히 더 즐거워 보였다. 물론 해마다 즐거운 행사지만 올해는 그만한 이슈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동안 외국영화 상영을 연간 20편으로 제한하는 등 엄격한 스크린쿼터제를 적용해왔다. 또 외국 제작사들이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영화를 공급할 수 있도록 촉구한 세계무역기구(WTO)의 판정에 상관없이 국영차이나필름그룹이 영화 수입을 관장하고 있다. 이에 미국 영화업계는 상영편수 제한으로 인해 중국에서 해적판 DVD 유통을 막을 수가 없다며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해왔다. 그사이 2005년 1억5천만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중국 영화시장 규모는 2010년 15억달러로 5년 사이 10배 이상 커졌다. 지난해 상하이국제영화제를 찾은 언론재벌 루퍼트
미래는 현재보다 낙관적이다… 홍콩에서라면 언제나
-
홍콩의 3월은 영화와 함께였다. 영화와 TV는 물론 음악까지 아우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필름마켓 ‘홍콩 필름마트’(이하 필름마트)가 지난 3월18일부터 23일까지 열렸다. 18일에는 6회 ‘아시안 필름 어워드’(AFA)가 열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겼다. 시너지 효과를 위해 2006년부터 연동된 홍콩국제영화제(HKIFF)도 팡호청 감독의 신작 <러브 인 더 버프>를 개막작으로 36회째를 알렸다. 더불어 홍콩과 한국을 포함해 각국에서 찾아온 모바일영화들의 축제인 홍콩국제모바일영화제도 두 번째 어워드를 가졌다. 이렇게 3월의 홍콩은 여러 영화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며 ‘영화 도시’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그리고 중국 본토로의 진출을 꿈꾸는 세계 영화인들의 관문으로서 홍콩은 그렇게 계속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다. 주성철, 김도훈 기자가 각각 필름마트와 모바일영화제를 찾아 그 기운을 한껏 느끼고 돌아왔다.
홍콩에서 영화의 미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