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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닫는 이 지면에선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려 한다. 감독들이 일상에서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은 종종 영화 연출의 원동력이 되거나 적절한 활력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창작자의 개인적 취향과 영화적 스타일이 완전히 별개가 아닐 거란 믿음으로, 그 대답이 궁금한 한국 감독들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이 아끼는 물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봉준호 감독의 가방 속에는 엽서 사이즈의 공책이 항상 들어 있다. 작아도 “두께는 단행본 수준”이란다. 봉준호 감독은 이 공책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지난 4~5년간 봉준호 감독이 작업했던 영화, <도쿄!> <마더> <설국열차>의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공책을 다시 보니 어떤 영화를 구상할 때 최초로 떠올랐던 생각들이 거기 있더라. 예를 들어 ‘기차는 1년에 한 바퀴를 돈다’ (<설국열차>)는 개념을
나의 집착, 나의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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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의 ‘밥상’이라고 했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들은 아마도 <비정성시>나 <해상화>일 테지만, 문득 나는 이 짧은 지면에서 이미 많은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분석해놓은 ‘허우샤오시엔 밥상의 비밀’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졌다. 만약 그저 작은 나의 취향을 허락한다면,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개의 밥상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그 첫 번째 영화는 <카페 뤼미에르>이다. 대만에 살고 있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 요코는 고향집에 내려가 아버지가 잠든 사이, 뒤늦은 저녁상을 차려준 새엄마에게 망설임 끝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요코는 무심한 듯 계속 밥을 먹고 새엄마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다. 이때의 밥상은 요코와 새엄마를 한자리에 불러 앉혀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밥상에 요코의 아버지가 초대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부부는 도쿄의 장례식에 다니러 왔다가 요코의
어서 오세요, 가족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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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LA에서 열린 <블레이드 러너> 시사회에서(‘로스앤젤레스 안의 로스앤젤레스’라는 영화제 행사의 일환이었다.-편집자) 리들리 스콧은 한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영화에는 자주 선풍기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있냐”라는 것이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리들리 스콧은 이렇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음, 선풍기는 당신을 시원하게 해주잖아요.”(Well, they keep you cool.)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였을 거다. 하지만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일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부합하는 최적의 비주얼을 이끌어내는 것이 장기인 데다 시대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의 영화에 어떤 물건이 자주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 물건이 선풍기라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비록 감독 본인에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짐작가는 바는 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물증부터 들여다보자. <블레이드 러너
불길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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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미술감독/<박쥐> <마더> <괴물>
인상 깊은 오브제들이 많지만 ‘사물’이라고 말하는 순간 두 가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양들의 침묵>(1991)에 나오는 스킨 슈트다. 살인마 버팔로 빌은 납치한 여성들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드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옷으로 만든다는 행위가 무척 충격적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하나의 물질로 이해하는 살인마의 정신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이다. 나아가 살아 있는 대상을 옷으로 바꾸는 일련의 사물화 과정이 악이라는 존재를 물질화시킨, 악의 현존을 눈앞에 구현한 소품이다. 두 번째는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 나오는 남근 형상의 거대한 조형물이다. 미술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 입장에서도 영원히 남을 이미지다. 폭력이라는 추상을 사건과 행위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제시하고 관객의 반응을 기다린다. 단호한 태도로 대상을 정확
시어처럼 함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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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J. J. 에이브럼스가 떡밥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매번 그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고 마는 건 어찌된 노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는 떡밥으로 관객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떡밥이 (어떨 땐 메인 요리보다) 너무 맛있다. 카메라를 대할 때 J. J. 에이브럼스는 영화 세계에 뛰어든 장난꾸러기 같다. 그는 관객을 속이기 위해 카메라 트릭을 쓴다기보다는 카메라를 가지고 놀면서 이 장난감으로 할 수 있는 것,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을 궁리한다.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게 관찰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자전적 이야기랄 수 있는 <슈퍼 에이트> 속 아이들처럼 에이브럼스는 8살 때부터 카메라를 가지고 놀며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슈퍼 에이트’인 이유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선물받은 슈퍼8mm 카메라에서 따온 것처럼, 카메라는 그때부터 에이브럼스의 분신이 되었다.
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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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며 정신적인 존재이다. 가끔 동물성이 과잉될 때도 있고, 이성이 감정을 이길 때도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 간극을 파헤치며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인간 내면은 ‘소주’를 통해서 드러난다. 맥주나 막걸리도 등장하지만, 비율 면에서 소주가 월등히 높다.
2002년작 <생활의 발견>은 아예 소주를 상기시키는 초록 빛깔로 시작된다. 생소한 초록색 타이틀 다음에, ‘비내리는 골목길’이 등장한다. 투명한 빗길을 뚫고 택시에 오른 경수(김상경)는 춘천에 사는 선배와 통화한다. 선배의 목소리는 술에 취해 있다. 그는 아마 소주를 마셨던 것 같다. 이튿날 경수의 침대 맡에도 소주병이 놓여 있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는 대사 뒤에는 이렇듯 소주가 버티고 있다. 만일 그날 밤 경수가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소주를 빌미로 경수는 춘천으로 떠난다.
홍상수의 캐릭터는 전국으로 여행을 간다.
I like So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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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코미디가 세계의 관객을 기쁘게 한 데는 세명의 발군의 배우, 곧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버스터 키튼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전부 영화 초창기에 한롤(roll)짜리 짧은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20년대 장편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거의 동시대에 활약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개성을 계발하는 노력도 그런 경쟁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 세 배우의 공통점은 슬랩스틱인데, 거의 곡예사 수준의 기량들을 갖고 있다. 채플린의 코믹한 몸동작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로이드와 키튼은 스턴트맨들도 하기 힘든 고난도의 동작들을 능숙하게 해내곤 했다. 로이드는 <마침내 안전!>(1923)에서 보듯 손에 땀이 바짝바짝 나는 서스펜스 곡예를 잘했다. 너무 오래 고층건물의 시계에 매달려 있어서, 심장 약한 관객이라면 중간에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다. 반면에 키튼은 더욱 역동적이다. 넘어지고 자빠지는데, 그것이 서커스의 곡예를 넘어서는 수
개성을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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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치는 말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커튼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마 커튼은 붉은색이리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린치의 영화는 꿈이다. 흔히 몽환적, 환상적이라고 표현되는 모호한 분위가 그렇고 최면을 걸듯 당신을 이끌고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딱 들어맞는다는 점에서도 그의 영화는 꿈의 표상이다. 가령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두고 개연성과 서사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어도, 연결되지 않는 듯 보여도 이 영화 속 각 장면들은 살아 움직여 관객을 납득시킨다. 당신의 꿈이 그런 것처럼 린치의 영화는 우리를 설득시키는 대신 헤어나올 수 없도록 만든다.
린치는 영화와 꿈의 유사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커튼을 활용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주인공 리타는 갑자기 갈 곳이
꿈으로 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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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 세번 놀랐던 순간이 있다. 그 첫째는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서 역 앞에서 손녀를 기다리는(듯한) 할머니 주변을 회전하는 택시의 운동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고다르는 남자와 여자와 자동차가 있으면 영화가 성립한다, 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젊은 여자와 할아버지(할머니)와 자동차만으로 영화를 성립시켰다. 두 번째 장면은 할아버지 타카시가 차에서 잠깐 잠들었다 깨어나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그러하듯 나도 잠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세 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갑작스레 날아온 돌에 타카시 집의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이다. 만약 창문이 그의 영화에서 스크린의 비유라면 그것이 깨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세번의 경이로운 순간이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주요한 사물인 자동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자동차는 무엇보다 영화적 운동의 원초적인 등가물이다. 자동차는 중단 없이
움직이는 감정의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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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나열하면 지루해질 것 같다. 몇편만 꼽아보자. <바틀 로켓>의 귀여운 삼인조 멍청이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지소와 그의 심심한 부하들, <로얄 테넌바움>의 정서 불안증 아버지(벤 스틸러)와 그의 어린 두 아들, <문라이즈 킹덤>의 씩씩한 주인공 소년과 그의 카키 스카우트 단원 동료들,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실은 이렇게 물어야 맞다. 웨스 앤더슨의 모든 (거의가 아니라 모든!) 장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물은 무엇인가. 삼인조 멍청이들은 노란 옷을, 지소와 그의 부하들은 빨간 모자와 파란 옷을, 아버지와 두 아들은 빨간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트레이닝복을, 소년과 카키 스카우트 단원 친구들은 갈색의 단원복을 입는다. 그러니까 ‘유니폼’,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앤더슨의 영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사물이 유니폼만은 아니지만 유니폼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다.
헐렁한 듯 끈끈한 유대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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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국내의 한 평론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심사위원들과 담소를 나눌 자리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국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홍상수 감독이 화제에 올랐고 누군가가 홍상수 감독을 아느냐고 물어왔답니다.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밝혔더니 질문자는 몹시도 궁금하다는 뉘앙스로 불쑥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본 적이 있나요?” 그 일화를 전해주던 평론가는, 다른 것도 아닌 소주를 딱 집어 물은 것, 그게 참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의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해외의 평자였을 그 질문자는, 당신은홍상수 감독과 얼마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요, 하고 더 캐묻는 대신,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보았나요, 하고 특정한 사물을 매개로 한 호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뻔하게 교분과 친분의 깊이를 묻는 대신 특정 사물을 공유해본 경험에 대해
그 물건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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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호기심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참에 마음먹고 한번 시도해봤다. ‘영화감독의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한번 모아봤다. 모아놓고 보니 특정한 영화감독과 특정한 사물들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고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웨스 앤더슨의 유니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자동차, 데이비드 린치의 커튼, 홍상수의 소주, J. J. 에이브럼스의 카메라, 리들리 스콧의 선풍기, 허우샤오시엔의 밥상, 무성영화 희극배우 3인의 사물들에 관한 새롭고 풍성한 이야기. 한국영화의 뛰어난 미술감독 3인이 그들만의 감식안으로 꼽은 영화 속 그 사물들 그리고 박찬욱, 봉준호, 이명세, 이준익 감독의 비장의 사물 목록도 놓치지 말자.
영화의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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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다고, <온 더 로드>에 대해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첫 공개된 2년 전 칸 영화제에서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길 위의 시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물며 영화의 원작이 된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라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를 지녔던가. 소설가 김연수가 <온 더 로드>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순간은 보름 전 어느 오후였다. 그리고 더 멀리, 고교 시절 <길 위에서>라는 소설을 ‘전설’로 전해듣던 때로 추억은 나아간다. 영화가 재현해내는데 실패한 그 결정적 불꽃은 무엇일까.
지난 3월 초, 도쿄에 다녀왔다. 도쿄국제문예페스티벌이라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이런 행사와 달리 일본쪽은 작가들의 개척 정신을 꽤 존중하는 듯했다. 입국해서도 혼자서 택시를 타고 아오야마의 호텔까지 갔고, 떠나는 날 차편도 기념백에 넣어준 하네다행 리무진 티켓(사전예약 필수!) 한장으로 해결하더라. 덕분에 두번의 행사에 참여한 것을 제
미친 듯이 살아버린다는 그 자유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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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장르(<왕좌의 게임>)와 좀비물(<워킹데드>)의 역습에 다소 주춤했던 미국 수사물이 이 작품을 계기로 한 층 흥미로워졌다. 평균 1090만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며 일요일 밤 미국 브라운관의 강력한 신흥주자로 떠오른 <트루 디텍티브>(케이블 채널 <HBO>)다. 속도와 반전, 캐릭터의 특이한 개성이 시리즈의 운명을 결정하던 대다수의 수사물과 달리 서서히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조여오는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장르와 오컬트 장르의 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국내 시청자의 높은 관심 때문인지 2월7일부터 매주 금요일 밤 10시 채널 스크린에서 방영을 시작한 <트루 디텍티브>는 어느덧 파이널 에피소드만을 남겨두고 있다. 다음은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를 연상케 하는, 어둠과 상징과 환영으로 가득한 이 독특한 수사물을 위한 안내서다.
미국 수사물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에게, 최근 몇년은 다소 실망스러운
예측 가능한 전형성은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