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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황윤 감독
수신인 박그림 환경운동가
설악녹색연합 대표. 설악산 산양 연구가. 설악산 환경지킴이. 1992년 설악산 언저리에 집을 지은 이후 모노레일 설치 반대, 설악산 세계자연유산 등록 추진,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 반대 등 꾸준히 환경보호 운동을 해왔다.
박그림 선생님께.
2001년 1월,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에서 보냈던 그 겨울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원 철창에 갇힌 호랑이들의 삶에 관한 영화 <작별>을 만들던 당시, 저는 ‘동물원 밖 세상’ 그러니까, ‘야생’이 너무나도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보고 싶었습니다. 야생에 관해서라면 일자무식이었기에, 야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입만 열면 너구리 발자국이랑 개 발자국은 어떻게 다른지를 토론하는 ‘야생동물소모임’이었지요.
그 모임에서 설악산으로 6박7일간 장기탐사를 갔을 때 선생님이 이끌어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대피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야생으로의 안내자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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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경순 감독
수신인 한경은 사진작가
계원예술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에 재학 중인 신진 사진작가. 2008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 2012년 브레다국제사진페스티벌, 2013년 <로드쇼: 대한민국-백령도> 등 다양한 그룹전을 통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경은아. 나는 참 게으른 사람이다. 그 게으른 나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조차 없었다면 아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거리는 삶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살았을지도 모르지. 더구나 다큐멘터리영화란 얼마나 많은 품이 필요한지 일단 제작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빈둥거리며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근데 왜 또 찍고 또 찍고 그러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그것은 바로 미지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너는 <쇼킹 패밀리>를 준비하면서 만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참 특별한 인연이었어. 출연자로 만나 <쇼킹 패밀리>와 <레드마리아> 두편의 영화
약한 척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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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주현숙 감독
수신인 이주노동자 비두씨께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 2002년 4월28일부터 77일간 ‘집회결사자유 쟁취, 추방 반대, 노동비자 쟁취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인권 투쟁에 참여했다. 2004년 ‘전국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서 연행되어 강제추방당했다
비두씨,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의 의미를 바로 그 순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리 준비해도 세상 사는 일은 매 순간 새로운 일이라서 예상을 빗나가게 마련이라 저처럼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한참 뒤에야 어떤 순간의 의미를 알게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기억에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죠. 그래도, 아니 그래서 비두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몇 순간이 있어요.
처음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마석 가구공단에 드나들던 때였어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항상 너그럽고 부드럽던 비두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현숙씨는 그것만 보여요?”라고 했을
존재해도 됩니다, 말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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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권효 감독
수신인 제주도 강정마을 강동균 전 마을회장님께
2011년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독립영화 감독들이 제주도 강정마을로 내려갔을 때 강동균 회장님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마을 잔치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한바탕 어울리던 그날 회장님은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걸쭉하게 트로트 한 자락을 뽑으셨습니다. 왁자지껄하고 구수하고 멋들어진 잔치. 강정마을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저는 강정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으려 했기에 회장님과는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군기지와 관련된 곳이면 어디서나 회장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강정마을은 기지건설을 놓고 찬성과 반대의 갈등이 극에 달해 주민들간의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황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마을의 회장으로서, 당신 역시 한명의 주민으로서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을 텐데 항상 웃으며 저희들과 활동가들을 대해주셨습니다. 강정에는 많은 평화 활동가들과 예술인들
구럼비 바위의 노래가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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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태준식 감독
수신인 유기수 민주노총 사무총장
1989년 벽산사무노조 위원장을 시작으로 97년 건설산업연맹 부위원장, 2007년 건설산업연맹 사무처장을 지냈다. 2006년 하중근 열사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2013년 7월 민주노총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유기수 실장님. 몇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1월. 너무나도 추워 고통스러웠던 아침. 계동 현대사옥 앞. 온 천지가 얼음과 눈밭이었던 시멘트 바닥 위에 갑자기 벌러덩 누워 절규하기 시작하셨지요. 그 절규는 결국 현대 본사 앞마당을 장악하는 힘이 되었고 그나마 노제는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싸움이 끝나고 해단식을 하던 날, 늙은 노동자들이 감사패랍시고 작은 상장과 선물을 준비해 실장님께 건넨 뒤, 결국 아기같이 우셨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저도 울었습니다. 젊은 시절 신념의 깊이가 유난히 얕았던 제가 천지개벽할 사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았던 건 순전히 현대중기 노동자들과 실장님 덕이었습니다. 몇해가 지나
어찌 매번 다시 맞설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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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문정현 감독
수신인 ‘평화바람’의 문정현 신부, 오두희 다큐멘터리 감독
문정현 신부님, 뜬금없는 제 편지에 다소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신부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도 같습니다. 2002년 즈음 김동원 감독 특별전 뒤풀이에서 처음으로 신부님을 뵀었지요. “문정현입니다” 하는 제 인사에 같은 이름 때문인지 깜짝 놀라셨지요. 이후로도 인사를 드릴 때마다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신부님이 저에게 처음으로 해주셨던 말씀이 “예술하지 마!”였습니다. 현장의 이야기들은 빨리 기록되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게 신부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신부님을 주인공으로 2010년에 제가 제작한 <용산>이라는 영화에서도 이 정권과 권력의 부조리함을 현장의 언어로 웅변해주셨고, 함께하는 삶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로부터, 군산/용산 미군기지들로, 매향리, 새만금, 부안에서 대추리로, 다시 용산 남일당으
깡패신부(?)와 여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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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왠지 사람 냄새가 나는 달입니다. 이끌어주신 선생님, 길러주신 부모님,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자식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한가득 차올라 어떻게든 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화창한 5월의 햇볕은 그렇게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꼭 가까이 있는 사람만 생각나는 건 아닙니다. 일상에 지쳐 잊고 지냈지만 늘 가슴 한켠 품고 지낸 사람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격려가 되는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럴 때면 5월의 따스한 햇볕에 취한 척 평소엔 건네지 못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서로 위로할 일도 많고 기운도 내고 싶은 요즘,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가슴에 품은 ‘그 사람’은 누군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7인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쑥스러움을 이겨낼 약간의 용기를 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김동원 감독에게도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여기, 그들이 차마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씨네21>이 대신 전달해드립니다.
오월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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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유기농단지 농민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팔당 사람들>은, 제작 당시 푸른영상에 소속돼 있던 고은진 감독이 두물머리에 도착한 2010년 1월 이후부터 무려 4년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졌다. “첫 번째 작품은 2년 안에 끝내는 게 공식이라고 선배들이 누누이 말했는데 그 두배의 시간을 초과해버렸다. 데뷔에 연연한 건 아닌데 기간이 길어지니까 점점 지쳤고, 제발 끝만 보자는 마음이었다.” 염원하던 “끝”을 보았는데도 고은진 감독은 쉬기는커녕 여전히 부천미디어센터에서 다큐멘터리를 교육하는 푸른영상 선배들을 돕고 있다.
푸른영상 소속 감독들은 2010년, 천주교 연대로부터 의뢰를 받고 자료 조사차 두물머리를 방문했다. 그 뒤 김준호 감독이 두물머리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했으나 <23x371일-용산 남일당 이야기>의 편집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이 작업은 고은진 감독에게 오게 됐다. “처음 두세달은 분위기를 살피느라 현장에서 일이 생길 때만 카메라를 돌렸
두물머리에서 농사일도 돕고 다큐도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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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관객이 그러더라. 결국 가족과 친밀해지려다가 실패한 영화가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내게는 너무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친밀한 가족>은 8년째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려 한 윤다희 감독의 시도를 담은 영화다. 신진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 프로젝트인 2013 인디다큐 새 얼굴 찾기 ‘봄’에 선정돼 만들어졌고, 올해 열린 제14회 인디다큐페스티발 국내신작전을 통해 소개됐다.
출발은 학교 과제로 찍은 짧은 필름 무성영화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연을 날리며 놀았던 기억을 재현해 필름으로 기록한 영화다. 막상 만들어보니 특별하게 느껴져 이 작업을 더 확장해보기로 했다.” 그 무렵 감독이 만난 영화가 가와세 나오미의 <달팽이: 나의 할머니>와 <따뜻한 포옹>이다. <친밀한 가족>을 만들 때 가장 큰 참고가 됐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본 <아버지의 이메일>과 <마이 플레이스>를
가족들이 모두 모인 ‘원래 집’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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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댄스>는 한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식을 카메라에 담는다. 한편의 이야기지만 ‘레즈비언’에 방점을 찍느냐, ‘결혼’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생애 첫 장편다큐를 들고 조심스레 인디다큐페스티발의 문을 두드린 <퍼스트 댄스>의 정소희 감독을 설명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미디어 활동가라는 직함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연을 들려준다. “다큐멘터리는 시작부터 모든 순간이 주관적인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이야기를 담는 것, 무엇을 목적으로 찍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퍼스트 댄스>를 촬영했다. <퍼스트 댄스>는 사회적 메시지를 통해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교화시키려는 작품이 아니다. 이 따뜻하고 행복한 영화의 출발점은 친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함이었고 덕분에 애정 가득한 감독의 시선이 듬뿍 묻어난다.
<퍼스트 댄스>는 주변의 시선으로부
소박한 진심이 느껴지는 결혼식 비디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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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는 끝났지만 문제제기는 계속된다. 제14회 인디다큐페스티발이 얼마 전 폐막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공적, 사적 영역을 넘나들며 카메라에 담아낸 한국 사회의 단면들과 이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내 독립다큐멘터리의 새로운 흐름을 살피는 국내신작전에 데뷔작을 출품한 세 여성감독을 만나 그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봤다.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식을 촬영한 <퍼스트 댄스>의 정소희 감독, 정부의 무리한 4대강 사업 추진으로 농지를 잃게 된 농민들의 투쟁을 기록한 <팔당 사람들>의 고은진 감독, 가족사를 되짚어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한 <친밀한 가족>의 윤다희 감독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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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감독의 <역린>이 월 일 개봉한다 드라마와 영화가 사랑했던 왕 정조를 다시 스크린에 되살린 이 작품은 퓨전 사극 열풍을 지나 당도한 오랜만의 정통 사극이다 본격적인 한국 사극 블록버스터 경쟁의 포문을 열어젖힌 이 작품의 면모와 영화를 보기 전 더불어 알아두면 좋을 정조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을 함께 소개한다.
민초를 닮은 왕. 최근 몇년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주목할 만한 왕의 캐릭터는 그런 것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은 “지랄”과 “우라질” 같은 서민의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왕이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하선(이병헌)은 매화틀에 용변을 보는 모습까지 공개했으며 <후궁: 제왕의 첩>의 성원대군(김동욱)은 신하들 앞에서 중전과 사랑을 나눠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씨돼지’에 비유하는 마음 약한 왕이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곤룡포를 입고 나라의 명운을 결정하는 자도 한낱 백성과 다르
오늘, 왕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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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다. 불온, 부당, 불편한 공기를 두르고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렌즈 위에 살점이 튀고 화면 아래 피가 낭자할 때 누군가는 스타일리시한 감각을 칭찬하고 누군가는 근본 없는 폭력의 전시에서 고개를 돌린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영화는 단순하다. 적과 아군이 선명하게 갈리는 흑백의 세계. 당신은 도식적인 상징과 허무한 과잉으로 범벅이 된 이 세계를 앞두고 한발 내딛을 것인가, 발길을 돌릴 것인가. 폭력, 컬트, 영화광, 잡종성, 마초 등 니콜라스 윈딩 레픈에게 가닿을 여러 단어들을 모아 조심스레 문을 두드려본다.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야생의 충동을 스타일리시하게 연출하는 방식으로 유명세를 탄 덴마크 감독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똠양꿍’ 내음 가득한 몽환적 신작 <온리 갓 포기브스>로 찾아왔다. 방콕의 환락가에서 타이 복싱장을 운영하는 줄리언(라이언 고슬링)은 마약밀매를 하던 형 빌리가 미성년 성폭력으로 살해당하자 범인을 찾아 나선다. 아들의 장례식을 위해 방콕
폭력의 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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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던 <한공주>와 <셔틀콕>이 일주일 차로 개봉한다. <한공주>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열일곱 소녀 한공주(천우희)의 마음을 따라가고, <셔틀콕>은 보험금 1억원을 들고 도망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누나를 쫓는 열여덟 소년 민재(이주승)의 시점을 따라간다. 두 영화 모두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고, 배우의 얼굴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조금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한공주>는 남성감독이 소녀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영화이고, <셔틀콕>은 여성감독이 소년의 심정을 묘사하는 영화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이 <셔틀콕>의 이주승을, <셔틀콕>의 이유빈 감독이 <한공주>의 천우희를 인터뷰해 보아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들 흔쾌히 이 크로스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이어지는 기사 참고). 인터뷰는 애초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했
영화처럼 우리도 닮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