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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앤더슨은 현재 스웨덴 영화계에서 ‘마스터’로 불리는 노장감독이다. 그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2014, 이하 <비둘기>)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비둘기>는 외판원인 샘과 조나단 콤비가 뱀파이어 이빨과 라텍스 가면 등을 팔기 위해 예테보리(감독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창백하고 무뚝뚝한 표정이며 비슷한 대사를 반복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웃기면서도 슬픈 정서를 만든다. 로이 앤더슨을 만나기 위해 그의 제작사 ‘스튜디오24’를 찾아갔다. 1층 한편에는 <비둘기>를 포함한 그의 영화의 많은 부분이 촬영된 스튜디오가 자리했다. 2층 작업실에는 그가 직접 그렸다는 컨셉 아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책상 위가 상당히 복잡하다. (웃음)
=청소할 시간이 없다. (하하) 작업이 하나 끝날 때마다 싹
“예술가라면 당연히 휴머니즘에 대해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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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인들이 활발히 활동 중인 스웨덴 영화계에서도 특별히 돋보이는 여성 제작자 집단이 있다. 여성 영화인에 의한, 여성 영화인을 위한, 여성 영화인의 영화제작을 목표로 하는 제작사 ‘도리스 필름’(이하 ‘도리스’)이 그 주인공이다. ‘영화 업계 종사자의 상당수가 남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등장한 여성 영화인들이다. 예테보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도리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1999년 문을 연 이후로 도리스는 줄곧 여성 영화인의 제작 여건 개선과 권리 향상을 위해 달려왔다. 애초에는 영상을 통한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느슨한 형태의 네트워크 조직이었으나 2000년대 초반,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6명의 여성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도리스가 스웨덴 영화계에 결정적으로 눈도장을 찍은 건 2003년 ‘도리스 매니페스토’를 만들면서다. 도리스의 구성원이자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 출품작 <플로킹&
여성 영화인의 극영화 비중이 40%를 넘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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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가 1월23일부터 2월2일까지 스웨덴의 항구 도시 예테보리에서 진행됐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을 포함한 북유럽 지역의 영화 경향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영화제다. 아트 디렉터 요나스 홀름베리를 만나 영화제의 정체성과 스웨덴영화의 기대주들에 대해 들었다.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우리는 강력한 노르딕 영화로 라인업을 구성해왔다. 여기에 89개국에서 온 500여편이라는 엄청난 영화 편수를 자랑한다. 12명의 상근, 비상근 프로그래머들이 발로 뛴 결과다. 노르딕 단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장르 면에서도 다양하다.
-스웨덴에서 만난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노르딕’ 영화의 강점을 강조하더라. ‘노르딕’ 영화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드라마타이즈(극화, 희곡화), 리얼리티가 굉장히 강하다. 노르딕 지역에 방영되는 TV드라마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노르딕 크라임(범죄물)
‘노르딕’ 스타일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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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으로 날아갔다. 쉽게, 자주, 또 폭넓게 접하지 못해 낯선, 그래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웨덴 영화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함께했다. 도착하기 전, 스웨덴 영화사의 서두에 이름을 올릴 몇몇을 기억해보는 일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인간과 신, 죽음과 구원을 특유의 익살로 풀어낸 잉마르 베리만, 노동계급의 역사를 자신의 작품의 정수에 올렸던 얀 트로엘, 사색적인 영화와 거리를 두며 실천적 의미의 영화 만들기로 직행했던 보 비더버그와 같은 거장들이 제일 먼저다. 그레타 가르보나 잉그리드 버드먼처럼 세계 영화사의 한 시기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기억되게 만든 배우들도 있다. 이들은 스웨덴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보기 드문 유산이자, 스웨덴 영화인들의 자부심이다. 그 뒤로도 스웨덴 영화인 인명 사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있다. 부조리극과 블랙코미디 사이를 오가는 로이 앤더슨이나 과장되지 않은 코미디극에 능하다는 라세 할스트롬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웨덴 장르영화가
스웨덴식으로 영화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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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나이트>(1997)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영화 속 인물들이 1980년,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 파티장에서 벌어진다. 마치 유사가족을 구성하듯 한데 거주하며 포르노 필름을 제작하는 이들은 새해를 경축하며 1980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그러나 그 순간 영화의 스탭이었던 ‘리틀 빌’(윌리엄 메이시)이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아내를 총으로 쏴죽이고,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그를 직시하는 순간, 총구를 입안에 넣어 자살하고 만다. 198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70년대 LA를 배경으로 호황을 이루었던 포르노 필름 산업은 마치 비극의 예고장처럼, 한 남자의 고통스런 절망과 살해, 그리고 자살을 함께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두 번째 장편영화 <부기 나이트>는 감독 스스로 경험하고 향유했던 LA 포르노 필름 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연대기이자 동시에 애가였다. 그는 언제나 시대적 변화에 부대끼고 상처받는 인간들에 대한 지
상상적 노스탤지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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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내 임무는 영화화가 그렇게 어렵다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어떻게 폴 토머스 앤더슨이 영화화하는 데에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미리 말하겠지만 이 결론은 다소 싱겁다. 질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무비 데이터베이스(IMDb)를 확인해보면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각색했다는 영화는 단 두편이다. 오늘 이야기할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그리고 2002년에 나온 독일영화 <Pr¨ufstand VII>. <Pr¨ufstand VII>는 <중력의 무지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진 작품이니 온전한 각색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핀천의 각색물은 <인히어런트 바이스>, 단 하나만 있는 셈이다.
장르물로서도 만족스러운
이는 엄청난 성취처럼 들린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위대한 작가의 성공적인 소설이 모두 그렇게 쉽게 영화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각색 불가능성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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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게 뭔가, 싶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그런 영화다. 코카인에 취한 내러티브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다.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영화화된 적이 없는 토머스 핀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영화의 지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미지의 땅을 탐험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우리를 누아르의 세계로 초대한다. 비밀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여인의 등장, 탐정과의 만남, 그리고 음모로 가득한 사건 의뢰 등. 하지만 거기까지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탐정이 진실 앞에서 미끄러지며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누아르의 서사적 틀을 빌린 후, 우리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에서 헤매게 한다. 기이한 영화적 경험.
원심력의 내러티브
우리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199
초현실주의이거나 코카인 누아르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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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역시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많은 의문이 생긴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셈이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당신의 노력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말들을 모아봤다. 부디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해줄 실마리가 되길 희망하며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롤링스톤>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편집, 재구성하여 옮긴다.
-토머스 핀천의 작품 중 영화화되는 첫 작품이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재미. 핀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버린다. 그의 작품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도전적이면서도 재미있다. 처음 접한 소설은 <중력의 무지개>라는 작품이었다. 순전히 작품의 명성에 이끌려 읽었는데 토머스 핀천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 첫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너무 두껍다. (
“핀천의 원작보다는 웃기게 찍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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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뒤집어 말해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때 애정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이하 PTA)은 매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의 영화는 열정적인 지지자들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로 확연히 갈린다. 하지만 그것이 PTA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될 순 없다. PTA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극장 개봉 없이 IPTV로 직행한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실망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PTA를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그에게 관심이 없는 이들마저 PTA를 거부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눌 가치가 있는 영화다. 극장 개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대한 논의를 멈추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비록 늦었지만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대한 여러 필자
폴 토머스 앤더슨으로부터 온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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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두려움, 집착과 강박증. <버드맨>이 주요하게 다루는 테마를 한 시대 앞서 선보여왔던 ‘선배’ 영화들이 있다. 예술가의, 예술가에 대한 영화들을 한데 모았다.
<선셋 대로> 1950
“좋아요, 데밀씨. 난 클로즈업 준비가 되어 있어요”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수작.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진 무성영화 시대의 대스타 노마 데스먼드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시절에 대한 향수와 재기에 대한 집착이 극대화된 캐릭터인 노마 데스먼드는 영화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강렬한 여성 캐릭터로 남아 있다. 그녀를 연기하는 이가 실제로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몰려든 경찰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스튜디오의 조명처럼 느끼는 데스먼드의 광기를 성공적으로 소화해낸 건 20여년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던 스완슨의 상황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캐스팅의 묘가 영화에 한층 복합적인 맥락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버드맨>과 관련지
명성의 쌍둥이는 강박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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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작품이 탄생할 것인가. 지난 2012년, <버드맨>의 제작 소식이 처음으로 들려왔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거다. 당대를 풍미했던 슈퍼히어로영화의 주인공이었으나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져 퇴물배우가 되어버린 남자. 그 남자가 자신의 커리어를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제작하려 한다. 이것이 당시까지 알려진 <버드맨>의 기본 줄거리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한 건 코미디 장르로 알려진 이 영화를 멕시코의 중견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한다는 소식이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 <바벨>, 이른바 ‘죽음 3부작’이라 불리는 그의 전작들은 파괴적 에너지와 상실감으로 가득한 작품이었으며 <21그램>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뒤에도 이냐리투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보다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더 사랑하는 이름이었다. 슈퍼히어로와 코미디. 할리우드 상
추락하라 그리하면 비상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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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가에게나 빛나는 재능으로 무장한 전작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의 신선한 충격은 작품이 거듭될수록 옅어지고, 예술가가 작품에 인장처럼 새겨놓은 고유의 개성은 종종 동어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솔직히 고백하면, 4년 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비우티풀>을 세상에 공개했을 때 이 감독에게 앞으로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버드맨>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귀환했고 지금은 그 누구도 이냐리투 영화세계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버드맨>을 통해 그는 어떻게 다시 비상하게 되었나. 영화의 제작 과정과 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하는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 <버드맨>과 맥락을 함께하는 예술가에 대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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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 3월은 아카데미 특수 효과를 노리는 양질의 외화들이 국내 관객을 만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영화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여기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모은 두편의 미국영화가 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4년 만의 신작 <버드맨>과 토머스 핀천의 탐정소설을 원작으로 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그것이다. 각각 뉴욕과 LA를 배경으로 하는 이 두 영화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버드맨>), 뉴욕영화제(<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첫선을 보인 뒤 2014년의 베스트영화를 꼽는 영미권 평단의 리스트에서 종종 그 이름을 비쳤다. 유난히 자국영화에 호들갑스러운 영미권 평단의 반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믿을 만한 매체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투 섬 업’을 외치는 영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된다. 올해 오스카의 최대 수혜자로
TWO THUMBS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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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이경영이 안 나오네?” 무려 <인터스텔라> 리뷰 밑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지난 1년간 오죽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면 그런 댓글까지 등장했을까.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많은 영화에 얼굴을 비쳤던 걸까. 2011년 <씨네21> 신년호(786호)를 통해 거의 10년 만의 공식적인 인터뷰를 가졌던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사는 일산으로 갔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그는 동네라는 ‘구역’을 정해두고, 그곳을 중심으로 지낸다고 했다.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는 이 휴지기에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과 제작자를 만나고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도 매니저도 없는 그에게 일산에서의 시간은 다음 작품을 위한 암중모색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산에서 그를 만난다는 건 이 모의의 시간이 어떻게 구성되나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7년 5월, 박찬욱 감독의 <3인조> 개봉을 앞둔 이경영은 당시 데뷔 11년차의
누가 그를 대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