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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라는 말이 범람하는 세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등의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된 것이 그 원인일 것이나 나로서는 한두번 받아본 ‘호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담론의 측면에서 봐도 <속물과 잉여>와 <잉여사회>가 최근에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잉여’는 여전히 생명력을 갖춘 말이며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필자들에게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일 거다.
그러나 이 ‘유행’은 제법 오래되었다. <속물과 잉여>에 수록된 글들은 여러 필자들이 몇년에 걸쳐 여기저기서 발표한 것들이 묶인 것이고 최태섭씨의 단행본인 <잉여사회>의 논의 또한 그 정도 시간 동안 숙성된 것이다. 당장에 내가 청탁받은 글에서 ‘잉여’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적어도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당시에는 FANA라는 가수의 <잉여인간>이란 노
자조와 냉소 사이, 잃어버린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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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노모는 아직도 날 ‘백수’라고 부른다. 마땅한 직업 없이 한량처럼 사는 게 걱정스러운지 이따금 “요즘은 뭐하고 사냐?”라고 넌지시 떠보시곤 한다. 칠십 노모의 눈에 영화감독이란 뭐하고 사는지 늘 궁금한 인생 낭비의 딴따라인가 보다.
하긴 나도 내가 뭐하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달력과 시계를 멀리하고 산다. 어쩌다 출근길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 물씬한 낯섦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그 흔한 노동사회의 ‘평균인간’의 전형에서 한참이나 탈피된 삶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남들 잘 때 일어나 앉아 하릴없이 우주와 지구를 걱정하고, 남들 일할 때 허리가 아플 때까지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세월을 쏠고 있는 처지니까.
적지 않은 영화판 인간들이 나처럼 방바닥에 찰싹 눌어붙은 채 만유인력의 법칙을 스스로 증명하며 살아간다는 게 한줌 위안이랄까. 이번에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의 중학생 조카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 꿈은 삼촌처럼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딴짓으로 빚는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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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Pai)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치앙마이에 있다가 빠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세 시간이나 달려왔는데 막상 빠이에 오니 대체 뭘 봐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빠이에서 보통 뭘 보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별로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이곳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오는 곳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의 표정은 더 복잡해졌지만 사실이 그랬다. 빠이는 특별히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랄까.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목적은 그냥 ‘잉여’ 그 자체였다. 거리에서는 ‘빠이는 시큰둥한 곳’이란 문장이 적힌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빠이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도 자주 보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개처럼 늘어져 있다가 기타를 치거나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부치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는 곳이라니, 마침내 허탈해진 그는 오후에 떠
저울의자 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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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후의 벤치는 한산하다. 바람이 제법 매섭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햇빛이 비쳐 눈이 부시다. 하얀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춤을 춘다. 시인 L씨라면, 텅 빈 벤치 하나를 즐거이 차지한 채 이 즉흥적인 춤을 분명 두어 시간은 넋놓고 바라봤을 것이다. 구름이 해를 가려 빛의 춤이 일시적으로 멎어도 감상은 여전히 지속된다. 이번엔 구름과 해의 숨바꼭질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풍경의 명암을 시시각각 바꾸는 이 숨바꼭질은 하늘과 땅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큰 스케일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드넓은 풍경 전체의 분위기가 끊임없이 바뀐다. 인상파 화가라면 이 변화무쌍한 빛의 유희에 황홀해하며 그 과정을 붓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시인 L씨에게는 이 위대한 놀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그저 바삐 제 갈 길만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멍청해 보인다.
직장의 룰, 잉여생활의 적
열정적인 잉여생활을 위해 드러머 K씨는 최근에 학교 강의를 중단했다. 직장은 단연코 정규 잉여생활 최대의 적이다. 직장의
밤이 되면 그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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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질구레한 생활상을 주 소재로 삼아 웃음을 양산하는 생활툰 작가에게 ‘잉여’란 꽤 친숙한 어휘로 느껴지겠지만, 막상 잉여됨을 주 소재로 삼는 작가들의 실생활은 의외로 빠듯하다. 간단해 보이는 그림체를 사용하지만 아이디어를 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때가 많으며, 형편없는 아이디어로 분량을 채우다 보면 댓글란에 올라올 각양각색의 비난성 댓글에 시달리는 망상에 빠진다. 이렇게 빠듯하고 규칙적이고 건전한 마감생활을 지키다 보면, 어김없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한없이 남아돌던 시간들을 동경하게 된다. 아마도 잉여의 의미는 직업과 직군, 개인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나의 경우 잉여질이란 그간 즐겨왔던 무수한 콘텐츠들, 그리고 ‘덕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옛날 영화 보기. 최근엔 크리스토퍼 놀란의 데뷔작, <두들버그>와 <미행>을 봤다. 어쩌면 놀란은 초기에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비전과 스타일을 확립해놨는지도 모른다. 앨프리드 히치콕
쓸데없어 쓸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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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를 꼽자면 주저없이 ‘잉여’를 고르겠다. 주변부에서 쑥덕거리던 잡담에 불과했던 잉여들의 이야기는 먼지처럼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어느새 온 방 안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단순히 캐릭터의 소재로 차용하던 것을 지나 이제는 제목 전면에 ‘잉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잉여로움을 외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청춘들은 나이가 들어도 변변한 벌이도 없이 엄마 집에 빌붙어 살면서(<고령화 가족>), 때로는 현피(현실에서 직접 싸움을 벌이는 것)에 몰두했다가(<잉투기>), 어느 순간 인터넷 성인만화 사이트를 그리겠다고 호들갑을 떨더니(<네버다이 버터플라이>), 갑자기 돈 한푼 없이 유럽 여행을 간다고 나서기도 한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정작 본인들은 천하태평, 유유자
우린 안 될 거야, 아니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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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잉여로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이제야 전면에 나온 것이 외려 더 신기할 정도다. 올해 한국영화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잉여’는 실상 익숙하고 보편적인 문화코드다. 처음에는 낙오자쯤으로 인식되던 잉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더니 이제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중이다. 혹자는 잉여들의 시각에서 색다른 창조력을 발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웃음의 도구로 활용한다. 좋든 싫든 당신도 언제든 잉여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오늘도 그들의 잉여로움을 보며 웃고 즐기고 있지만 여전히 잉여의 정체가 궁금한 당신, 지금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여기 2013년 잉여인간 생태보고서를 마련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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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의 <풍경>을 두번 보았다. 장률이 <풍경>을 두번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올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세편 중 하나로 고바야시 마사히로, 에드윈과 함께 ‘이방인’이라는 주제 아래 <풍경>을 찍었다. 이 영화는 42분이다. 그런 다음 다시 <풍경>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를 96분으로 만들었다. 장률은 두 영화 사이에 일부 장면이 겹치긴 하지만 단순히 늘리는 대신 완전히 다시 편집을 했다. 그래서 앞의 영화를 보았다 할지라도 뒤의 영화를 볼 때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풍경>은 장률의 5 1/2번째, 그리고 여섯번째 영화이다. 하여튼 두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환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이다. 당신이 장률 영화를 알고 있다면 이 말 앞에서 잠시 멈칫할지 모른다. 과도할 정도로 황폐한 풍경 앞
안개 속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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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미안해. 수고해. <변호인> 현장에서 감독, 배우, 스탭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라고 한다. 부림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소재때문에 쉽지 않았던 제작 과정을 정면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제작진이 서로를 끌어주고, 챙겨준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투자부터 상영까지 제작의 전공정을 힘들게 이끌어온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가 이 세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펀드매니저 출신의 투자자였던 그는 전 아이픽쳐스 대표, 전 바른손 대표 등을 거치며 많은 영화의 투자와 제작을 결정해왔다. 그런 그가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계기인 부림사건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언론/배급시사회 반응이 좋다. 예상했나.
=못했다. <링컨> 같은 정치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 평가를 받았다. <변호인>처럼 특정 인물이 논란이 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게 불편했다. 영화를 보고
“이 영화의 변호인은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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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벼랑에서 뛰어 내려 자살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는 일이 전세계 역사상 몇번이나 있었을까. 없거나 희귀할 거다. 그 죽음은 이례적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방식 자체가 강력한 전언이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은 2003년 8월경 <씨네21>에 자살의 유형에 관한 무척이나 인상 깊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먼 훗날 발생한 노무현의 죽음도 그의 지적과 관련 있어 보인다. 예컨대 강물에 뛰어내리는 사람이 남기는 전언이란 “우리는 가요. 찾지 말아요”라고 한다. 반면에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남기는 전언이란 “더 이상 할 말 없다. 똑바로 쳐다봐라”라고 한다.
자살을 결심한 누구라도 나의 주검이 혹은 죽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남게 될 것인지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므로 그 지적은 타당한 것 같고 노무현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그의 죽음으로 어떤 정확한 해결보다는 당장의 종결을 촉구했다. 사건의 종결
똑바로 쳐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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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이 영화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를 시작하던 시기의 일들을 주요한 동기로 삼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니 정말 그렇다. <변호인>이 노무현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동기로 삼아 어떤 영화로 탄생한 것인지 그 내용을 전한다. <변호인>의 주인공을 맡아 열연한 송강호와의 긴 인터뷰도 실었다. 또한 이 영화를 제작한 최재원 대표와의 인터뷰도 있다. 자, <변호인>의 세계로 가보자.
자꾸만 떠오르는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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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은 망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박순찬(왼쪽) 만화가는 무려 18년째 <경향신문>에 네컷 시사만화 <장도리>를 연재한다. 그것을 엮어서 펴낸 단행본 <516 공화국>의 표지는 압권이다. 이번 대담은 이 표지에서 시작됐다. 그 표지가 담고 있는 2013년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시사만화가의 입을 통해 들어보려 했다. 박순찬 만화가의 대화 상대로 <시사IN>에 <본격시사인만화>를 연재하는 만화가 굽시니스트를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시사만화로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재밌겠다 싶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두 만화가는 잘 아는 사이였고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으니 둘은 그간 하지 못한 일상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사만화 이야기는 언제 할 겁니까.’ 속이 타들어갔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재밌었으니까. 그중 압권은 ‘수제 육포 제조 논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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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되고! 왜죠?
우선 모든 극장에서 술을 파는 것은 아닙니다. 롯데시네마는 주류를 일절 판매하지 않으며, CGV와 메가박스는 일부 지점에서 맥주와 와인을 팔고 있습니다. 주류 판매 여부는 기본적으로 인허가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요, 주류를 판매하려면 해당 구청과 세무서에 일반음식점 영업신고와 주류판매 신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될까요. CGV는 “영화 관람 환경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팩소주와 같은 도수 높은 주류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맥주 또한 무한으로 사다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극장 매점에선 만 19살 이상 성인에게 1인당 2잔까지만 맥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취객 역시 상영관 입장이 거절될 수 있습니다. 문득 든 생각으로, 소주를 팔면 소주 안주도 개발해야 할 텐데 극장에서 알탕이나 꼼장어를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담, 안주 없어도 쭉쭉 넘어가는 ‘소맥’을 프리미엄주로 개발해 팔면 어떨지. 아차,
극장에서 궁금증이 팝콘처럼 내려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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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안경 세척팀이 따로 있나요?
레스토랑에 설거지를 전담하는 팀원이 있는 것처럼 극장에도 3D 안경을 세척하는 팀이 따로 있습니다. CGV의 경우 여러 차례 사용 가능한 3D 안경을 구매해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회용 안경인 만큼 영화상영이 끝난 뒤 관객이 사용한 3D 안경을 수거합니다. 별도의 인력을 구성해 3D 안경 전용 클리너와 세척액으로 관객이 사용한 3D 안경을 깨끗하게 닦습니다. 또, 정기적으로 전용 세척기를 통해 미세 먼지를 제거함으로써 관객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위생에 각별히 신경 쓴다고 합니다. 반면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에는 3D 안경을 관리하는 팀이 따로 없어요. 일회용 3D 안경을 사용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상영이 끝난 뒤 3D 안경을 기념품 삼아 집에 가져가도 상관없어요.
‘알바’로 시작해 점장이 된 경우도 있나요?
점장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뒤 해당 멀티플렉스에 공채 입사한 이들입니다. 점장을 따로 모시진 않습니다. 극장에 입사하
극장에서 궁금증이 팝콘처럼 내려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