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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종종 이런 꿈을 꾸었다. 광고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알린다. “이번주 광고가 3분의 1로 떨어졌어요!” 이 악몽은 편집장을 그만두고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편집장일 때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만두었을 때는 내가 더이상 편집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피 말리는 일이다. 더구나 비평지와 연예지와 산업지의 성격이 혼합된 전대미문의 영화 주간지가 시장에서 오래 버텨낸다는 것은, 지금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매체를 창간했고 2년도 안돼 <씨네21>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조선희 초대 편집장의 공적은 아무리 치켜세워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종이매체의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시장에서 분투해온 후배 편집장들의 고뇌도 그에 못지않게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매체를 만드는 일과 국수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최상의 국물을 내는 객관적 공
끝까지 살아 질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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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지?” 안정숙 편집장은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글을 만날 때면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 선배로 기억된다. 어떤 기사든 일단 그 기사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기다리고 읽는가 하면, 만족스러운 글에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간혹 편집장의 데스크에서 그 즐거운 탄성이 들려올 때면, 어떤 날카로운 지적이나 조언을 듣는 것 이상의 자극을 받곤 했다. <한겨레> 문화부를 포함해 15년 이상 기자생활을 해온 베테랑 선배의 감탄사를 듣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틈틈이 건네는 깨알 같은 칭찬으로 기자들을 춤추게 하는 편집장이었다.
깨알 같은 건 칭찬만이 아니었으니 방심은 금물. 조금이라도 궁금하거나 동의가 되지 않는 대목을 발견할 때면, 의문점이 풀릴 때까지 질문이 이어지곤 했으니 말이다. 지난 5년 동안의 습관으로 당연시하고 넘어가기 쉬운 것도 다시 묻고 되짚어보는 것. 돌이켜보면 기자들을 독려하는 칭찬과
저예산영화의 든든한 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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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봄, 창간편집장 조선희가 떠난 자리에 내가 왔을 때, <씨네21>은 이미 생명력 넘치는 유기체로 한국영화와 독자들 속에 예민해서 더욱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양적, 질적으로 급팽창하던 한국영화의 힘과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새로운 세대의 영화열은 <씨네21> 생장의 필요조건이었다.
영화‘시장’이 확대되면 독자 역시 증가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잡지들이 연이어 새로 등장했다. 한데 2000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초 사이에 등장한 잡지들은 왜 월간지가 아니라 주간지였을까. 나는 <씨네21>에 머물던 이태 동안 세 종류의 영상 주간지 창간호를 읽었다. 혼자 서 있던 지경 안에 경쟁자가 들어서는 데 우리가 초연했다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긴장하니까 좋은 점도 있었다. 우리는 광각 또는 깊은 초점, 때로는 길고, 때로는 경쾌한 호흡, 앵글 등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탐냈다. 크게 보아 영화를 중심에 두되 곳곳에 사회와 문화를 향
이곳에서 세상과 호흡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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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동시에 태어난 <키노>와 <씨네21>은 서로 비교를 피할 수 없는 ‘엄마 친구 딸’이었다. 숱한 편집회의의 결론을 되살려 “우리는 주간지이기에 갈 길이 다르다”고 소심하게 말해봤자 사람들은 건성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당연했다. 영화 주간지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었으니까. 이른바 ‘다른 길’이 뭔지 <씨네21> 초대 편집장이 독자에게 설명할 방도는 매주 한권씩 쌓이는 <씨네21>뿐이었다. 어차피 맨땅에 헤딩할 바에야 백지가 낫다는 판단이었을까? 조선희 편집장은 대담하게도 연예잡지 경력이 전무한 평론가, 신문기자, 1년차 프리랜서로 창간팀을 구성했다. (내 기억에) 그녀가 시야에서 놓치지 않은 푯대는 “저널리즘의 규율과 시선으로 영화에 접근한다”는 원칙이었다. 여기엔 영화를 가십거리로 다루지 않는다는 기본 전제와 더불어 가판에서 신문을 사보는 보편적 독자와 눈을 맞춘다는 위치 설정이 포함된다. 1년에 극장 한번 가
진지하거나 섹시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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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을 한번 하면 5년은 해야지. 나는 그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일했는데 내 후임자 중에 나만큼 질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창간 준비기간까지 하면 내가 <씨네21>과 함께한 시간은 무려 5년하고도 5개월이다!!
내가 편집장이었던 5년 동안 에디토리얼은 무기명 칼럼이었다. 나는 주로 기자들의 원고가 다 들어오고 데스크 작업이 한산해지는 마감날 저녁에 에디토리얼을 썼다. 그런데 한주 걸러 한주씩은 정말이지 할 말이 하나도 없어 막막한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끄응~ 하고 용을 쓰면 몇 마디 말을 짜낼 수 있었지만 다음주는 또 어떡하나. 그래서 나는 도저히 에디토리얼을 쓸 수 없을 때 취재팀장이나 다른 누구에게 대신 쓰게 하려고 포맷에 캐리커처는 물론 편집장 이름조차 박아두지 않았다. 운 좋게도 5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 다음으로 편집장을 한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는 담대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씨네21>을 떠
기본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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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도 어느덧 열여덟살이 됐습니다. 함께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뭇 매체들 없이 홀로 받는 생일상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네요.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시대, 영화를 사유하는 놀이터는 점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개편을 준비하던 우리도 문득 멈춰 서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영화 천만 관객 시대, 영화주간지 <씨네21>은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을 미리 던져봤을 이들에게 답을 구했습니다. <씨네21>의 데스크를 맡아 매주 영화계 사안과, 원고와, 기자들과, 마감과 사투를 벌였던 다섯 전 편집장들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씨네21>의 미래에 대한, <씨네21>의 과거로부터의 에디토리얼입니다.
씨네리 편집장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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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정원>의 아역 배우(!)가 55년 만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사이 다섯살의 꼬마 아가씨는 당시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이 지긋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국정원>에서 여주인공 방음(우민)의 아역으로 출연한 홍영순씨는 딸에게서 영화가 발굴/복원됐다는 소식을 듣고 영상자료원에 먼저 연락을 취했다. 멋모르고 출연한 생애 유일의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었던 데다가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일들을 두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홍영순씨는 어린 시절을 홍콩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은행 홍콩지점장으로 근무하셨다. 당시 한국은행이 재외공간의 역할도 분담했는데, 한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면 우리 집에서 만찬을 열곤 했다.” <이국정원> 팀도 홍영순씨네 집에 초대받았다. 그때 홍성욱, 홍영순 남매가 뛰노는 모습을 본 감독이 즉석에서 아이들을 영화에 캐스팅했다. 남매는 서울까지 날아가
우연한 출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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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가 훌쩍 넘어 자신의 출연작 <이국정원>을 다시 보게 된 원로배우 윤일봉은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이국정원>에서 윤일봉은 주인공 김수평(김진규)의 친구이자 홍콩 주재 한국영사관 직원인 박철고를 연기한다. 그는 “솔직한 얘기로, 조연으로 출연한 데다 지금까지 영화며 방송이며 출연한 작품이 200편이나 되다보니 내가 무슨 장면에 어떻게 나왔는지 잘 기억을 못한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물론이고 <이국정원>의 영화사적 의미를 꼼꼼하게 짚어주었다.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에 출연했다. 자부심이 상당했을 것 같다.
=홍콩의 쇼브러더스와 합작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에 다들 참 놀랐고, 많이 부러워했다. 그때 김진규, 최무룡, 나 이렇게 셋이서 홍콩에 갔다. 홍콩에 가기 전 국군묘지에 가서 참배도 했다. 총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살아온 게 몇년인가. 나라에선 이런 문화사업으로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한류의 시작은 우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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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정원>(감독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키 미쓰오 출연 김진규, 윤일봉, 우민, 최무룡)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러더스의 합작품인 <이국정원>은 1957년에 촬영해 1958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극영화 컬러필름이다. 영화는 홍콩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국인 작곡가(김진규)와 홍콩 여가수(우민)의 러브 스토리다. 서로의 과거를 모른 채 사랑에 빠지지만 알고 보니 이들이 어릴 적 헤어진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이후 한국의 드라마에서 무수히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이국정원>을 한국 멜로드라마의 전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홍콩을 부지런히 오가며 <이국정원> 발굴에 힘쓴 한국영상자료원 전 해외수집 담당 최소원씨가 험난했던 3년간의 필름발굴 과정을 전해왔다. <이국정원>에 출연한 배우 윤일봉과 홍영순의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최초의 한/홍 합작”,
상실의 역사를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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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설의 주먹>을 봤습니다. 영화는 말 그대로 강우석표 영화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줄로 요약 가능한 캐릭터였고 배우들은 그걸 충실히 연기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복잡다단한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요. 영화는 두 시간 넘게 남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과연 그들은 ‘전설의 주먹’이었을까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덕규(황정민), 상훈(유준상), 재석(윤제문)은 주먹도 셌을까요? 격투기 해설자이자 프로레슬러 입장에서 고찰을 해볼까 합니다. 먼저 누가 센지를 알기 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일어나는 무력 충돌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짱’은 어떻게 결정되나
대개 학교에는 대가리, 짱, 통이라 불리는 주먹이 센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싸움을 잘하는지 어떻게 정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권투나 격투기 시합이라면 챔피언과 도전자가
누가 더 센 놈인지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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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 자리잡은 네 소년에게 별다른 지시는 필요없었다. 사소한 것들로 투덕거리다가도 슛이 들어가면 한 화면 안에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지난여름이 그들에게 일으킨 화학작용 덕택일 것이다. 다른 수많은 영화의 무술팀이 서울액션스쿨에 떴다 저무는 3개월 동안 그들은 서로 훅과 킥을 주고받으며 버텼고, 혹독했던 강우석 감독의 현장에서도 보란 듯이 함께 살아남았다. 그렇게 그들은 1987년 서울 일대를 주름잡았던 4인조 ‘전설’, 아니 ‘절친’이 되었다. 그 4인조란 임덕규 아역의 박정민, 이상훈 아역의 구원, 신재석 아역의 박두식, 손진호 아역의 이정혁이다. 이들이 회고하는 <전설의 주먹>의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보자.
씨네21_오디션 볼 때 지금 배역대로 지원했나.
박정민_내가 지원했던 역할은 없어졌다. 고민하다 재석과 덕규 중 덕규를 골랐다. <파수꾼> 때의 진중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뭔가 진득하게 눌러내는 연기로. 지난 1년간 별 고민 없이 까부
전설,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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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의 드라마를 탄탄하게 해주는 구심점은 결국 액션이다. 철없던 고교 시절의 막싸움의 판타지와 성인이 된 전설의 싸움꾼들의 이종격투기의 긴박감을 모두 표현해야 했다. 시나리오책의 절반을 차지하던 액션장면을 현실화한 것은 정두홍(위 오른쪽) 무술감독과 그와 함께한 강영묵 무술감독의 몫이었다. 강영묵 감독이 촬영 전 액션스쿨에서부터 배우들을 단련시키고 합을 만들어냈다면, 정두홍 감독은 연출의 자리에서 이렇게 훈련된 배우들을 촬영이라는 실전에 적용시키고 화면에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
-액션 비중이 큰 만큼 더없이 욕심나는 작품이었겠다.
=정두홍_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존의 건달들이 나오는 작품은 더이상 안 하고 싶더라. 마침 다른 작품의 촬영과도 시기가 겹쳤었다. 그런데 한번은 술자리에서 한 배우가, 왜 배우들은 아프게 맞는데도 화면에선 그게 표현이 안되냐라는 말을 하더라. 그는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고통스럽더라. 그 말이 일종의 트라우마
아프냐, 나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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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옆에서 찍어줘.” 3월27일 언론시사 이후, 거의 매일 술과 문자 메시지의 나날을 보냈다는 강우석 감독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입 주위에 두드러기가 났다며 애써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강우석이 돌아왔다’, ‘강우석의 힘을 느꼈다’는 문자가 가득 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멈출 줄 몰랐다.
-원작 웹툰 <전설의 주먹>을 어떻게 바꾸고자 했나.
=케이블TV의 ‘전설대전’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설정을 두고 장민석 작가와 얘기를 나누길, 전면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원작은 전반적으로 표현이나 전개가 좋은데 너무 무겁고, 그들이 너무 ‘루저’처럼 묘사된다. 관객이 즐길 만한 대중영화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덕규가 일하는 곳도 소박한 동네 국숫집으로 하고, 과거 돈 많던 내 짝꿍이 이제는 중년의 재벌이 되어 있다는 설정도 현실감있게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나 어디서나 접할 법한 평범한 가장들의 이야기로 그리고 싶었다.
-153분이
강우석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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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영화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한다. 종종 일차원적이다, 단순과격하다는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화 자체로 그렇다기보다 그의 언어나 문법이 그야말로 ‘직접적’이기 때문에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시작부터 거추장한 수사를 달지 않는다. 그저 관망하는 것 같은 매끄러운 설정숏 하나 없이 경찰서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나이트클럽을 휘젓는 식이다. 그렇게 강우석의 영화는 ‘사건’과 ‘세태’를 다룰 때 투박하지만 절묘한 기승전결을 이룬다.
<전설의 주먹>은 그가 <이끼>(2010)와 <글러브>(2011) 등 그동안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음에도(예정대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전신인 <나는 조선의 왕이다>를 연출했다면 그 1년의 공백도 없었을) 그가 마치 굉장히 오랜만에 귀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강우석이 돌아왔다!’는 문구가 굉장히 자연스레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뭘까. 말하자면
승부사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