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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는 적어도 두 가지 지점에서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기존의 영화들과 달랐다. 하나는 범인을 쫓는 것이 경찰이 아니라 보도방을 운영하는 포주라는 점,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추격이 끝내 실패한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추격자>는 추적, 추리가 아니라 추격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지금 와서 새삼 눈길이 가는 건 바로 이 추격행위의 주체와 목적이다.
살인범의 검거를 목적으로 하는 경찰과 잠재적 희생자의 구출을 위해 움직이는 엄중호(김윤석)는 애초에 목적도 접근 방식도 다르다. 엄중호의 목적은 미진(서영희)의 죽음을 막는 것이었고, 그는 결국 실패했다. 반면 경찰의 목표는 자신들의 체면을 구긴 연쇄살인범을 검거하는 것이었고 과정이야 어찌 됐건 그들은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추격에 성공한 자는 실패하고, 추격을 시도하지 않은 자들은 성공하는 이상하고 찜찜한 상황. 당시엔 경찰의 무능과 시스템의 허점을 조롱하고 추격의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
우린 아직 잠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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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졌듯,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5년간 10명의 부녀자들이 강간 살해당했고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었으나 공소시효가 끝난 2006년을 지나 오늘날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 2003년에 제작된 <살인의 추억>은 1986년을 시작으로 연쇄살인마의 행적과 정체를 쫓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확히 말해,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연쇄살인마를 제외한 당대 한국 사회의 다른 모든 것을 겨냥한 이야기다. 단순히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차원이 아니라, 끝내 범인의 자리를 공백으로 두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 공백을 둘러싼 실패와 좌절과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영화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차단한 채, 더 깊은 어둠의 심연 앞에서 막을 내린다. ‘왜 그런 잔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나’ 하는 질문은 폐기되고, ‘왜 잡지 못했나’에 대
악은 어둠만을 잘라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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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영화 속에 연쇄살인마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믿기 어려운 말이겠다. 한국 영화사에서 연쇄살인마는 그다지 환대받는 소재가 아니었다. 1999년에 개봉한 <텔미썸딩>에 이르러서야 이 소재가 대중의 큰 환심을 샀고 <텔미썸딩>은 그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3위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는 <텔미썸딩>이 아니라 몇년 뒤 2002년에 나온 <공공의 적>이다. 심은하라는 당대의 스타 혹은 철저한 장르성으로 접근한 <텔미썸딩>과 다르게 사회와 영화가 영향을 주고받은 차원에서 보자면 <공공의 적>이 훨씬 기념비적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에는 잔혹한 살인마 조규환(이성재)이 등장한다. 그는 주인공 강철중(설경구)의 강력한 적수다. 조규환은 화이트칼라 계층에 성공한 펀드매니저이자 거침없는 살인마다. 그의 악마성은 여과 없이 묘사된다. 사소한 시비가 붙은 택시기사를 기어이 집까지 찾아가 살해하는
사람이 사람 죽이는 데 무슨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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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범죄에 관한 전시(<죄악의 시대>)를 제안받은 것이 이 영화의 출발 지점이라고 들었다.
=그 전시에 참여하며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일종의 아카이브 같은 책을 만들었다. 당시 자료를 조사하면서 지존파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 사건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이후에 ‘지존파 사건’에 대한 작업을 따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건 중 유독 지존파 연쇄살인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을까.
=지존파보다 1990년대에 대한 관심이 컸다. <살인의 추억>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연쇄살인이라는 행위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바로미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존파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9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다. 지존파 사건에 특히 흥미를 느낀 건, 원한 관계 같은 이유가 아닌, ‘자본주의’를 범행 동기로 내세운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대한
“연쇄살인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바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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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올 수 없다고 장담 못해요. 미리미리 방지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절규한다. 눈물을 흘리고,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이건 2014년의 풍경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외침이었다. <논픽션 다이어리>에 삽입된 이 장면이 올해 재현되었다. 수백명의 생명을 앗아간 올해 4월16일 진도 앞바다의 그 사고 현장에서, 유가족이 전 국민을 향해 외치던 절규는 20년 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외침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앞으로 얼마든지 발생 가능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불행은 실현되었다. 2014년의 대한민국 사회는 1994년에 예견한 불행을 막는 데 실패했다.
21세기 비극의 뿌리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는 최근 몇년간 1990년대를 소환한 뭇 영화와 드라마가 미처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연쇄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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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상반기, 죽음의 유령이 한국 사회를 배회했다. 학생들을 태운 배가 침몰했고, 버스터미널과 요양병원이 불탔으며 꽃다운 나이의 장병들이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이 상실감을 잊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7월17일 개봉하는 정윤석 감독의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연쇄살인과 대형사고가 난무했던 혼란스러운 1990년대 한국 사회의 한복판으로 보는 이들을 이끈다. 거대한 비극을 경험하고도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과거를 망각한 죗값이 어떤 것인지 상기시키는 이 작품은 수십년간 한국 사회 도처에 존재했던 죽음의 배후로 국가를 지목한다. 사회와 개인의 죽음의 구조적 상관관계를 탐구한 <논픽션 다이어리>의 개봉과 더불어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영화 속 연쇄살인범들을 다시금 소환했다. 당대의 사회상과 욕망을 밀접하게 반영하는 것이 영화라면, 우리는 연쇄살인마를 다룬 그때 그 영화들을 통해
망각을 먹고 다시 태어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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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들>의 이도윤 감독은 한양대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단편 <우리, 여행자들>(2006)과 <이웃>(2008)으로 각각 부산국제단편영화제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 속 세 친구와 비슷한 나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이 반짝거려 좀더 어려 보이는 인상이다. 같은 카페에서 인터뷰 중이던 대학 동문인 배우 지성이 휴식을 틈타 슬쩍 고개를 내밀고 “우리 과의 희망”이었다고 감독을 소개했다. 아주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았다.
-중국 설화집 <태평광기> 16권 ‘기의’ 편 중, ‘파경’(破鏡)의 어원을 그린 이야기를 모티브로 <좋은 친구들>을 구상했다고 들었다. 전란이 닥치자 부부가 반으로 나눈 거울을 정표로 나눠 갖고 헤어졌다 재회하는 일화인데 구체적으로 연관성을 설명한다면.
=‘파경’의 고사는 여러 판본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재회한 부부의 거울 조각이 어긋나는 이야기다. 남편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고스
‘취급주의’의 삶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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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인터뷰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제영화제들이 먼저 발견한 독립영화 <한공주> <10분> <도희야>에 이어, 2014년 기억해둘 한국영화 데뷔작 목록에 충무로 상업영화 한편을 보태도 좋을 것 같다. 이도윤 감독의 <좋은 친구들>(제작 오퍼스 픽처스, 공동제작 초이스컷 픽처스)을 소개한다.
누구나 아는 영화사의 걸작에서 빌려온 제목, 훤칠한 세 남자배우가 폼나게 어우러진 검푸른 색조의 포스터. <좋은 친구들>은 1년이면 십수편 마주치는 충무로의 남성 주도 장르영화의 일원으로 보인다. 의리, 배신, 사기, 살인, 비리. <좋은 친구들>을 이루는 성분도 무엇 하나 새롭지 않다. 그러나 그 총합은 뜻밖이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라는 합리화에서 출발한 보험 사기가 엇나가며 빚어진 사태가 중심 사건인 범죄 드라마에 속하지만, <좋은 친구들>은 범인의 정체가 수수께끼인 스릴러도 아니고 이렇다 할 액
우정의 파경(破鏡), 불신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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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을 블록버스터로만 버틸 순 없지 않나. 블록버스터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짜릿한 쾌감의 영화들이 여기 있다. 이름하여 ‘포스트 누아르 혹은 패닉 시네마, 마이클 만&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들’ 상영전이다. 부산 영화의 전당이 7월3일부터 23일까지 두 감독의 영화를 묶어 상영한다. 여름에 제격이다. <씨네21>은 그중에서도 마이클 만의 세계에 집중했다. 그의 영화들이 성취한 것에 비해 저평가된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비정의 거리> <맨헌터> 등 국내 미개봉했거나 개봉했어도 큰 관심을 얻지 못했던 그의 뛰어난 초기 걸작에서부터 개봉 당시 받았던 지지보다 더 뜨거운 지지를 받아 마땅한 <콜래트럴> <인사이더> <마이애미 바이스>에 이르기까지, 재평가되어야 할 마이클 만 영화세계의 진수에 대해 말한다.
‘마이클 만의 과소평가된 걸작’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둘 것
이미지 헌터 마이클 만을 다시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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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사나이픽쳐스 / 감독 박훈정 / 출연 미정 / 배급 NEW / 진행 캐스팅 중 / 개봉 2015년
사나이픽쳐스 사무실 앞. 출입문 옆에 A4 용지로 작성한 벽보가 붙어 있다. “영화 <대호> 배우 프로필은 이곳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표 다음엔 붉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화살표를 따라가면 프로필 보관함이 놓여 있다. 이빨을 드러내고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종이’ 호랑이가 붙어 있는 프로필 보관함. “호랑이의 입을 벌리고 프로필을 살짝 넣어주세요”라는 문구까지, <대호> 제작진의 센스가 엿보인다.
박훈정 감독이 누가 봐도 호랑이가 주인공인 영화 <대호>를 연출한다. <혈투> <신세계>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연출작. <신세계>가 흥행이 되면 속편을 만들 수도 있다고 박훈정 감독은 얘기했었다. 아직도 유효한 얘기지만 “속편을 연달아 만들겠다는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신세계> 속편은 잠시
이제는 사라진 조선 호랑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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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타이거픽쳐스 / 감독 이준익 / 출연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 배급 쇼박스 / 진행 7월8일 크랭크인 예정 / 개봉 2015년
“와~ 송강호가 영조 의상을 입고 분장까지 했는데, 전에 없던 왕이 탄생한 느낌? 어우~ 전혀 다른 왕을 봤어. 아~ 말로는 설명이 안 돼. 나중에 영화로 확인해봐.” 영조로 변신한 송강호 얘기를 하며 이준익 감독은 문장 사이사이마다 감탄사를 집어넣었다. 이준익 감독이 <소원> 이후 차기작으로 택한 <사도>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는 사도세자의 비극을 그린다. “좋은 배우들을 데리고 영화 찍었는데 영화 못 나오면 어떡하나” 싶어 “기대와 염려가 같이 상승하고 있다”는 이준익 감독을 크랭크인을 2주 앞둔 시점에 만났다.
-시나리오는 여럿이서 함께 썼다고. <사도>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과정이 궁금하다.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 (전문) 작가는 하나도 없다. 제작자, 기획자, PD가 썼고 나
사도세자를 ‘왜’라는 질문으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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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빅픽쳐, CJ엔터테인먼트 / 감독 강제규 / 출연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한지민 / 배급 CJ엔터테인먼트 / 진행 8월 예정 / 개봉 2015년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야 하나….” 강제규 감독은 말을 아꼈다. 아직 ‘ing’인 영화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생각이 좀더 명확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은행나무 침대>부터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웨이>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확장해온 강제규 감독이 불현듯 노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 사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시나리오를 읽고 울컥했다. 이야기가 참 따뜻하고 푸근한 구석이 있더라. 준비하는 과정도 즐겁다. 예전보다 더 편해졌다고 해야 할까. 이전에도 물론 새로운 상황과 마주하며 준비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쾌감이 있었지만, 동시에 설명할
가볍고 경쾌하게 멜로드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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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리얼라이즈픽쳐스 / 감독 김용화 / 출연 미정 / 배급 CJ엔터테인먼트 / 진행 미정 / 개봉 2016년 예정
김용화 감독은 최근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앞으로 2년 동안 넘어야 할 고비가 많기에, 지금부터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가 준비하던 판타지 블록버스터 <신과 함께>는 김태용 감독의 하차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5월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 김용화 감독은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초안을 기반으로 저승세계의 밑그림을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중이다. 주호민 작가의 인기 웹툰 <신과 함께>의 저승편을 영화화하는 이 작품은 아직 정해진 것보다 앞으로 정해나가야 할 요소들이 훨씬 많지만, 각박한 세상으로부터 받은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김용화 감독의 연출관은 전작 <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 <미스터 고>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2016년 개봉을 목표
특급 멀티 캐스팅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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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제이콘컴퍼니 / 감독 곽경택 / 출연 김윤석, 유해진, 장영남 / 배급 쇼박스 / 진행 촬영 중 / 개봉 미정
“밥부터 묵자.” 곽경택 감독은 신작 <극비수사>(가제) 8회차 촬영을 하다 말고 약속 장소인 대전의 한 식당으로 들어왔다. 촬영 없는 날이라고 해서 찾았는데 그새 일정이 바뀌었나보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촬영을 취소했다가 아침에 비가 안 와서 재개했다.” 그는 <사랑>(2007), <통증>(2011), <미운 오리 새끼>(2012), <친구2>(2013) 등 최근 영화 모두 봄에 준비해 여름에 촬영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에도 여름 촬영이다. “매년 안 덥냐고? 지난해 <친구2>를 너무 더운 날씨에 찍었다.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하게 해서 더위 때문에 힘든 건 아직 없다. 8월 중순 넘어가면 그때 각오해야지.”
<극비수사>는 1978년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실화와 배우의 힘 믿고 눈속임 없이 뚝심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