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부탁>에서 임수정이 연기하는 효진은 혹독한 인생의 환절기를 조용히 나고 있다. 결혼에 뜻이 없다가 만난 이혼남(김태우)을 깊이 사랑하여 아내가 되었지만 갑작스런 사고가 남편을 앗아갔다. 효진의 트라우마는 단번에 쓰러뜨리는 대신 스며든다. 친구(이상희)와 보습학원을 운영하며 남들만큼 일상을 감당하고 있지만, 효진은 사실 아무 데도 있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훌쩍 떠나거나 은둔할 만큼 드라마틱한 인간도 아니다(그런 일에는 약간의 자기도취가 필요한 법이다). 망가지진 않았지만 고장난 효진에게 어느 날 예전 시댁 식구가 뻔뻔한 부탁을 들이민다. 남편과 전 부인 사이의 16살 아들 종욱(윤찬영)이 사고무친한 처지가 됐다며 “애는 아무래도 엄마가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들이댄다. 동의해서가 아니라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데려온 소년도 효진에게 바라는 바가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부탁>은 모성이 모두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종욱은 효진을 신경 쓰
<당신의 부탁> 임수정 - 배우가 계단을 오를 때
-
<씨네21> 창간 23주년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배우 정우성의 별책부록 <청춘의 초상, 정우성>을 발간했다. 1994년 <구미호>로 스크린에 데뷔한 정우성은 모두가 환호하는 청춘의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은 채 진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대표 배우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데뷔 24년이 지난 지금, 정상의 자리에서 꾸준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 배우 정우성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해줄 분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비트>로부터 시작해 최근작 <아수라>까지, 정우성의 연기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김성수 감독, 그리고 <아수라>를 함께한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 정우성과 함께한 작품은 <마담뺑덕> 한편이지만 꾸준히 영화적 우애를 나누고 있는 임필성 감독, 정우성이 가진 매력의 총합을 보여준 <강철비>의 양우석 감독, 이렇게 네명의 영화인들과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 모두 정
정우성과 영화 친구들
-
<드레스드 투 킬>
Dressed to Kill /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 1980년
브라이언 드 팔마만큼 오마주나 레퍼런스를 기꺼이 수용하는 감독도 없을 것이다.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모방”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는 과거 작가들의 스타일을 수용하며 자신의 호흡으로 새로움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특히 <드레스드 투 킬>에서 그는 자신이 광팬임을 밝힌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에 대한 오마주이자 장 뤽 고다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의 영향을 드러낸다. <드레스드 투 킬>은 양성을 가진 정신과 전문의 엘리엇(마이클 케인)의 환자 케이트(앤지 디킨슨)의 살해를 둘러싸고, 목격자인 리즈(낸시 앨런)가 결백을 증명하려 나서는 스릴러. 자신의 인격을 여성인 보비가 지배하면 여인들을 습격하는 살인마로 변모한다.
<드레스드 투 킬>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반, 엘리엇이 케이트를 엘리베이터에서 처참히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⑨] <드레스드 투 킬> <용호풍운> <어셔가의 몰락> 外
-
<샤레이드>
Charade / 감독 스탠리 도넌 / 1963년
“히치콕이 만든 적 없는 최고의 히치콕 영화.” 스탠리 도넌 감독의 <샤레이드>를 수식하는 가장 멋진 한줄 소개가 아닐까 싶다. 케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의 신명나는 애드리브 연기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스파이 스릴러, 스크루볼 코미디, 멜로 등 여러 장르 요소의 장점을 아우른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난데없이 등장하는 충격적인 살해 장면, 아이가 해맑게 물총으로 장난치는 익살스러운 장면,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위장을 하는데 누가 봐도 귀엽고 눈에 띄는 지방시 드레스와 스카프, 그리고 화룡점정인 선글라스로 얼굴만 가린 모습 등이 영화의 종잡을 수 없는 온도 변화를 대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돌아온 남편의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즉 ‘너무 많은 것을 모르는 여자’와 미스터리로 똘똘 뭉친 ‘너무 많은 이름을 가진 남자’가 돈가방을 추적하고 사랑에 빠지고 범인의 실체에 다가서다 위기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⑧] <샤레이드> <이탈리안 잡> <몬티 파이튼의 성배> 外
-
-
<수영장>
La Piscine / 감독 자크 드레이 / 1969년
작열하는 태양과 이국적인 풍경, 보기 좋게 그을린 근사한 외모의 부르주아들과 기저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은 <태양은 가득히>(1960)와 더불어 여름을 배경으로 우아한 스릴러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영화감독들에게 귀감이 되는 작품이다. 당대 유럽영화계의 스타배우,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프랑스 남서부의 여름 휴양지에서 펼쳐지는 네 남녀의 은밀하고도 위험한 관계맺음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 장 폴(알랭 들롱)과 그의 연인 마리안(로미 슈나이더)은 친구의 고급 빌라에서 낭만적인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평화롭던 그들의 일상은 마리안의 전 남자친구이자 음반 프로듀서인 해리(모리스 로네)가 딸 페넬로페(제인 버킨)와 함께 빌라를 찾으면서 점점 위태로워진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다시 가까워지는 마리안과 해리, 진짜 해리의 딸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⑦] <수영장> <시체들의 새벽> <행잉록에서의 소풍> 外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1959년
“첩보스릴러 장르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초에 히치콕이 있었다.” 브래드 버드 감독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011) 인터뷰 중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독으로 인지한 사람이 앨프리드 히치콕이었다고 고백했다. 브래드 버드는 그 기억을 되살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옥수수밭 추격 장면을 두바이 사막의 모래폭풍 속으로 옮겨와 헌사를 바쳤다. 사실 첩보액션영화에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히치콕의 첫 번째 007 영화’라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007 시리즈를 비롯한 숱한 첩보액션 영화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빚지고 있다. 평원에서의 쌍엽기 추격 장면은 <007 위기일발>(1963), <레이더스>(1981)에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⑥]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선셋대로> <윌로씨의 휴가> 外
-
<밀회>
Brief Encounter / 감독 데이비드 린 / 1945년
기차 시간이 임박한 어느 찻집.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녀의 앞에 눈치 없는 친구가 끼어들어 대화가 중단된다. <밀회>의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은 매주 목요일에 찻집에서 만나며 불륜 관계가 된 로라와 알렉의 사연이 플래시백으로 그려진 후 후반에 재등장하며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2015)은 영감을 얻은 작품에 오마주를 바치는 탁월한 방식을 보여준다. 감독은 원작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은 <밀회>와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밀회>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각색하며 테레즈와 캐롤의 대화가 제3자의 방해로 중단되는 유사한 오프닝을 만들었다. <밀회>의 불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물이 <캐롤>의 동성애를 눈치채지 못하는 인물로 대응됨으로써 50년대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⑤] <밀회> <빌리 엘리어트> <분홍신> 外
-
영화가 사랑한 영화에 대한 특집은 계속된다. 지난호에 이어 세계의 수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중요한 영감이 되어준 50편의 레퍼런스 영화를 소개한다. 이번에는 SF, 호러 등 장르영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도 주의깊게 살폈다. <캐롤>부터 <컨저링>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21세기 영화가 어떤 작품의 궤적을 좇고 있는지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2주에 걸쳐 100편의 레퍼런스 영화를 소개하며, 동시대 영화 중에서는 어떤 작품이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지 궁금해졌다. 이 특집이 과거와 현재를 잇고, 나아가 현재와 다가올 미래의 시네마가 맺을 관계를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레퍼런스 100 2부,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 ⑤ ~ ⑨
-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오리엔탈호텔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거짓말처럼 생을 마감했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스타의 입지를 굳힌 장국영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에 출연하며 배우이자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장국영 15주기를 맞아 3월 30일부터 기일인 4월 1일까지, <씨네21>은 그를 추억하며 독자들과 함께 홍콩 시네마 투어를 다녀왔다. 2박3일의 기록을 전한다.
3월 30일,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4월 1일을 즈음하여 홍콩을 찾은 적이 여러 번이지만 15주기 때처럼 날씨가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는 이제 ‘스타의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성광대도(星光大道)라 불리는 이곳은 원래 빅토리아항을 끼고 인터컨티넨털호텔에서 홍콩문화센터까지 길게 이어진 거리였는데, 현재 스타의 거리가 공사 중이라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페
<씨네21> 장국영 15주기 홍콩 시네마 투어
-
‘미투(#MeToo) 운동’ 이전에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있었다. 해시태그는 문단, 영화계 등 각 분야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해시태그를 달고 ‘ㅇㅇ계 _내_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고발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일어났던 지난해,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강동구갑·행정안전위원회)은 미디어 내 성평등을 위한 연속토론회 ‘#STOP_연예계_내_성폭력 #GO_미디어_내_성평등’을 4월 19일과 5월 30일에 각각 열었었다. 진 의원은 토론회에서 나온, 영화계 성폭력 문제 예방의 필요성, 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대책 등을 바탕으로 미투 운동이 한창이었던 지난 3월 8일과 3월 23일, 미투 피해자보호법과 영화계 미투 방지법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미투 피해자보호법은 피해 여성과 그의 법정 대리인을 가해자의 고소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의 법안이고, 영화계 미투 방지법은 영화 근로자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이나 부당노동행위 강요 등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법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 -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안전이 보장된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
-
<블러드 베이>
A Bay of Blood / 감독 마리오 바바 / 1971년
슬래셔영화의 인기는 <컨저링> 같은 오컬트, 하우스 호러 영화쪽으로 이동해 왔지만, 최근까지도 <유아 넥스트> <해피 데스데이>처럼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여러 하위 장르를 뒤섞거나 변주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는 있다. 마리오 바바 감독의 <블러드 베이>는 슬래셔영화라는 단어가 제대로 통용되기도 전에 사실상 슬래셔영화의 정수를 담아낸 영화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미래의 모든 슬래셔영화가 솟구치는 동맥”과도 같은 영화라고 평하기도 했다. 즉 살인사건이 난 해변가 저택을 찾은 4명의 젊은 청소년들이 음주와 섹스, 장난에 빠지면서 한명씩 죽어나가는 일명 ‘보디카운트’ 플롯을 확립하다시피했다. 밥 클라크의 <블랙 크리스마스>(1974), 존 카펜터의 <할로윈>(1978), 숀 커닝엄의 <13일의 금요일>, 샘 레이미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④] <블러드 베이> <중경삼림> <오명> 外
-
<좋은 친구들>
Goodfellas / 감독 마틴 스코시즈 / 1990년
<대부>와는 다르다. <좋은 친구들>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긴 힘들 것이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좋은 친구들>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와 함께 갱스터 누아르의 양대 산맥으로 거론되지만 속살은 제법 차이가 난다. <대부>가 마피아의 은밀하고 귀족적인 측면을 우아하게 다루고 있다면 <좋은 친구들>은 거리의 갱스터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개봉 당시 <대부>의 안티테제에 가깝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데다 마틴 스코시즈가 현실을 건조하게 포착하는 방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리처드 시켈이 쓴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 중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마피아에게 당신들의 세계를 가장 잘 담은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좋은 친구들>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③] <좋은 친구들> <사무라이> <사망유희> 外
-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일례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의 거의 모든 전쟁영화가 현장감을 담아낸다는 이유로 핸드헬드 촬영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채도를 한껏 낮춘 푸른 색감, 사지가 날아간 참혹한 순간의 무력함을 조용히 보여주는 카메라 등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이다.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미국과 소말리아간의 전투를 다룬 <블랙 호크 다운>(2001)부터 베트남전을 다룬 <위 워 솔저스>(2002), 과거의 십자군전쟁을 다룬 <킹덤 오브 헤븐>(2005), 심지어 <반지의 제왕> 시리즈 같은 판타지물에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②] <라이언 일병 구하기> <글로리아> <악의 손길> 外
-
<지구 최후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 감독 로버트 와이즈 / 1951년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룬 모든 영화는 이 작품에 얼마간 빚지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등을 연출한 미국 감독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을 맡은 <지구 최후의 날>은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 클라투와 그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진 지구의 풍경을 조명하는 SF영화다. 인간의 형상을 한 외계인 클라투는 핵무기 개발과 전쟁을 막기 위해 지구를 찾아왔다며 멈추지 않을 경우 지구가 위험에 처할 것을 경고한다. 하지만 외계인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지구인들은 클라투를 공격하고, 클라투와 함께 지구에 온 장신의 로봇 고트가 엄청난 위력으로 인간들을 무장해제시킨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현실감 넘치는 연출과 매혹적인 외계인 캐릭터, 혁신적인 특수효과는 SF영화에 미온적이던 성인 관객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영화가 사랑한 영화들①] <지구 최후의 날> <페르소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