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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무명감독.” 지난 2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성욱 평론가는 미국 영화감독 리처드 플라이셔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해저 2만리>(1954)나 <바디 캡슐>(1966, 국내에는 <마이크로 결사대>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과 같은, 누구나 제목을 들으면 무릎을 칠 만큼 잘 알려진 영화들을 연출했지만 정작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관객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00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7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리처드 플라이셔의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다채롭다. 누아르, 전쟁, 뮤지컬, 코미디, SF, 호러, 판타지, 다큐멘터리, 전기영화…. 플라이셔는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감독이었고, 연출작의 규모 역시 다채로웠다. 그런 그의 삶을 <가디언>의 부고기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한편의 걸작(그 작품이 무엇인지 <가디언>은 독자의 상상에 맡겼다), 몇편의 작은 보석
[감독들의 감독들③] <보스턴 교살자> 리처드 플라이셔 - 미지의 두려움에 카메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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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코폴라는 <매혹당한 사람들>(2017)의 원작인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에 대해 “명성은 들었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미국 남북전쟁 시기, 부상을 입은 북군 존(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여자들만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겪는 고전을 그린, 직선적이며 하드보일드한 남성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온 시겔의 작품 안에서 비죽 솟아나온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남성이 여성의 질투와 기만에 희생당하는 서사는, 46년 후 여성감독의 시각으로 여성의 응징으로 변환되니 두 작품의 비교지점도 상당하다. 그만큼 시겔의 스타일과 작품세계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극단에 자리한 것 같은 지금의 소피아 코폴라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겔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언제나 로버트 알드리치, 새뮤얼 풀러 등을 위시한 ‘B무비의 제왕’이었고, 저예산으로 만들어낸 액션영화의 대가로 통했다. 빠듯한 예산, 한정된 기간은 그의 영화에
[감독들의 감독들②] <매혹당한 사람들> 돈 시겔 - 직선적인 표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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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모든 영화는 서부극이다.” MTV와 로큰롤, 현대 액션영화의 스타일 안에서 서부극의 장르적 특성과 정서를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던 월터 힐 감독은 자신의 영화세계를 ‘서부극’으로 정리한다. 수십년 동안 <에이리언> 시리즈의 제작을 맡고 있으면서 1940년대 필름누아르 시절 갱스터영화를 연상케 하는 <라스트맨 스탠딩>(1996), 1980년대 버디 액션을 주름잡았던 <레드 히트>(1998)와 <48시간>(1982), MTV 스타일의 로큰롤 뮤지컬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1984) 등의 대표작을 만들어낸 그는 위 세대인 돈 시겔, 샘 페킨파 감독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처음 제2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현장을 경험한 영화가 노먼 주이슨 감독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와 피터 예이츠 감독의 <블리트>(1968)였는데 이때부터 낮에는 촬영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나리오를 썼
[감독들의 감독들①] <드라이버> 월터 힐 - 도시의 서부극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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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월터 힐의 <드라이버>(1978)였다. 언젠가는 이 영화를 닮은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베이비 드라이버>를 연출하게 되었다는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말로부터, 과거의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든 연출자들이 후대의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때때로 좋은 영화는 감독들에게 새로운 영화를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영화의 역사가 곧 수많은 영향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지면에서는 21세기의 관객에게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으나 동시대 감독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화감독과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더 잘 알려진 영화감독들이 선망하는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감독들의 감독들] 멋진 영화보다 좋은 영감은 없다 ① ~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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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난 잔 모로는 1947년 배우 출신의 유명 연출가로 당시 아비뇽페스티벌을 이끌던 장 빌라르의 작품을 통해 데뷔했다. 이어서 코미디 프랑세즈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장 빌라르와 함께하기 위해 그가 새로 설립한 TNP(Theatre National Populaire, 국립민중극장)로 적을 옮겼다. 루이 말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이후 그의 대표작들인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당시 큰 스캔들을 일으킨 <연인들>(1958)에 출연한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모데라토 칸타빌레>(1960)에 출연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92년 <바다를 걷는 나이 든 여자>로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1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루이 말, 프랑수아 트뤼포, 오슨 웰스, 엘리아 카잔, 베르트랑 블리에, 조셉 로지, 로제 바딤, 테오 앙겔로풀로스, 빔 벤더스, 앙
잔 모로(1928~2017) - 종래에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연기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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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는 오늘도>에는 서술어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곳에 들어갈 적당한 서술어는 많다. 여배우는 오늘도 등산을 하고, 막걸리를 마시고, 좋은 작품을 기다린다(1막). 여배우는 오늘도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는 딸을 어르고, 시어머니의 병문안을 가고, 특별출연을 거절하며 술을 마신다(2막). 여배우는 오늘도 장례식장에 가고, 영화 한편을 남기고 세상을 뜬 감독에 대한 씁쓸했던 기억을 상기하고, 동료 배우들과 술을 마신다(3막). <여배우는 오늘도>는 감독 문소리가 ‘여배우 문소리’를 소재로 만든 극영화다. 물론 ‘여배우 문소리’는 문소리가 연기한다. “나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는 맞지만 나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문소리 감독의 설명처럼, 이 영화에는 문소리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여배우의 이야기가 창조되어 있다.
문소리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면서 세편의 단편 <여배우> <여배우는 오늘도> <최고의 감독>
<여배우는 오늘도> 문소리 감독 · 전여빈 배우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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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국정원·문체부를 통한 지원 배제의 시스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지난해 말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운용 원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판결문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한 국가기관이 문체부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정원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블랙리스트 집행 과정에 깊숙이 개입
그러나 사법처리 과정에서 국정원 관계자는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불법행위는 있었지만 책임지는 자가 없는 법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실제 블랙리스트 재판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등 청와대와 문체부 핵심 관계자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 등 중요 관계자들의 판결문에는 <한겨레 21>이 이번에 확인한 ‘엔터팀’의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불법적 개입을 제외하고도, 국정원이 저지른 다양한 불법행위의 흔적이 남
블랙리스트 판결문으로 본 어둠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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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집권 플랜’.
지난 보수정권 9년 동안 국가정보원 활동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 댓글 사건’,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사건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다. 퍼즐처럼 엮인 큰 그림의 일부다.
원세훈의 인터넷 여론 장악 큰 그림
대부분의 ‘플랜’은 위기에서 시작된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광우병 촛불시위)가 첫 번째 위기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듬해인 2009년 초 원세훈으로 국정원장이 바뀌었다. 서울시 경영기획실장, 서울시 행정1부시장, 행정안전부 장관. 그의 주요 이력이다. 주로 서울시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국정원장에 부임하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깔끔한 일 처리와 공무원 장악 능력을 보여 큰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의 구원투수로 대통령의 복심이 등판한 것
국정원 ‘엔터팀’ 존재 확인을 계기로 되짚어본 인터넷 여론 장악부터 영화계 개입까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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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제작 과정 사찰부터 대통령 히어로 영화 투자 지원 언급까지
국내정보 수집 파트 산하에서 영화 제작·투자·배급 개입한 사실 확인
박근혜식 통치 이념 정책으로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기획됐고 실행됐는지의 문제는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상히 세상에 드러났다. 그건 명백한 국가 범죄, 일방적 피해 구조의 사슬이었다. 하지만 ‘화이트리스트’의 문제는 아직 온전히 발굴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가 피해 구조라면, 화이트리스트는 ‘부패구조’의 문제다. 그 더러운 수혜자가 누구일까의 의문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씨네21>과 함께 공동취재팀을 꾸려 지난 3개월여간 그 구조를 낱낱이 살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박근혜 정부 국가정보원 내부에 ‘엔터테인먼트팀’(이하 엔터팀)으로 불린 위법한 조직이 존재했다. 청와대 직보 의혹을 받는 추명호 국정원 정보보안국장 산하에서 팀 형태로 운영되던 조직이었다. 국정원 엔터팀은 공적 기관과 민
[단독] 박근혜 정부 국정원 엔터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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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드라이버를 연기하는데, 운전석에서 스턴트를 하는 건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하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액션은 안무와도 유사했다. 파쿠르 훈련과 안무 연습, 차 속에서 운전하는 스턴트 훈련만 한달을 받았다.
-장면마다 음악이 흐르고, 등장인물들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더불어 베이비는 귀에 늘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을 들었나.
=베이비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장면이나 <베이비 드라이버>를 보는 관객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순간에는 언제나 현장에서 내가 음악을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안무의 경우 굉장히 오랫동안 리허설을 했다. 영화 속 베이비가 겉보기엔 즉흥적으로 춤을 추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모든 것들은 사전에 리허설을 철저히 거친 결과다.
-드라이버인 동시에 음악을 직접 믹싱하는, 베이비 같은 캐릭터는 기존 영화에서 보기 힘든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나.
=베이비는
<베이비 드라이버> 앤설 엘고트 - 베이비는 비관습적인 액션 히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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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1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 <Bellbottoms>
<베이비 드라이버>에 대한 이야기는 1994년 북부 런던, 실업수당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던 21살의 한 불우한 영국 청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의 이름은 에드거 라이트. 10여년 뒤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와 <뜨거운 녀석들>(2007)을 만들 예정인 이 영국 감독은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젊은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에서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의 <Bellbottoms>를 플레이한 그는 “어떤 장면이 공감각적으로 떠오르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가 탄 차가 음악에 맞춰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주인공은 누구일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에드거 라이트는 언젠가 이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Bellbottoms>를 처음 들은 날로부터 20
에드거 라이트의 오락영화 <베이비 드라이버>의 트랙리스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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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할리우드의 여름.”(<블룸버그>) 올여름 기대를 불러모았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들의 성적은 실망스러웠다. 속편과 프랜차이즈라는 최근 할리우드의 트렌드가 안일하고도 태만한 선택으로 이어질 때, 이들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신랄해질 수 있는지 영미권 박스오피스와 평점이 증명하고 있다. 에드거 라이트의 <베이비 드라이버>는 블록버스터영화의 무덤이 된 올여름의 할리우드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 중 하나다. 음악의 힘을 빌려 전진하는 자동차(CAR) 액션영화이기에, ‘카카랜드’(<라라랜드>에 빗대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2억800만달러의 전세계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이 영화의 제작비는 3400만달러였다) 영국 감독 에드거 라이트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으로 좋은 성적을 낸 영화가 됐다. 무엇보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싶어지는 영화다. 에드거 라이트의 취향이 반영된 35곡의 멋진 사운드트랙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베이비 드라이버>의 매력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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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지난해 말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운영 원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사건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는 판결문에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한 국가기관이 문체부와 국정원 양쪽임을 분명히 적시했다.
하지만 사법처리 과정에 국정원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불법행위는 있었지만 책임지는 자가 없는 법적 공백이 생긴 셈이다. 블랙리스트 1심 재판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등 청와대와 문체부 핵심 관계자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 등 주요 관계자들의 판결문에는 <한겨레21>이 이번에 확인한 ‘엔터팀’의 활동 말고도, 국정원이 저지른 다양한 불법행위의 흔적이 있다. 국정원이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사찰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고 이들을 배제하기 위해 실제 움직인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청와대·국정원·문체부를 통한 지원 배제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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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파’로 알려진 중견 감독 ㄱ씨는 2013년 말~2014년 초 서울 강남의 한 횟집에서 국가정보원 직원을 만났다. 국정원 요원은 ㄱ감독에게 미국 대통령이 직접 테러범들을 무찌르는 할리우드 영화 <에어포스 원>을 예로 들며 이런 “애국영화, 국뽕영화를 만들면 제작비를 지원할 수 있다”는 계획을 밝혔다.
ㄱ감독의 기억에 따르면, 국정원 요원은 “할리우드에는 대통령이 주인공인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영화가 많고 흥행도 한다. 대통령이 직접 액션도 하는 히어로물을 만들면 영화로도 안보를 할 수 있다. 국내 영화인들은 그런 인식이 없다”며 한국 영화계 풍토를 성토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이 주인공인 영화 제작에 구체적인 금액까지 제시하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 ㄱ감독은 대구·경북(TK) 출신으로 과거 간첩이 등장하는 영화 연출에 관여한 적이 있다. ㄱ감독은 “진짜 연출을 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어서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면 한 30억원 정도는 대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