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원더랜드’ 서비스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준하는 상태에 놓인 환자들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해준다. 해당 서비스가 보편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의식을 잃기 전 원더랜드로 넘어가거나 원더랜드를 통해 보고 싶은 이를 만난다. 죽음으로 인한 단절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원더랜드의 이점이지만, 그것이 축복과 굴레 중 무엇으로 귀결될지는 사용자 개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오랜 공백을 깨고 신작 <원더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등을 기용하며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주목도가 높았던 작품이다.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의 관계성과 감정선을 다루는 건 <가족의 탄생>에서 김태용 감독이 이미 시도한 구성이다. 이번 작품에서
[기획] 그리움을 연결하시겠습니까?, <원더랜드>의 인공지능이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
-
6월5일 개봉하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줄곧 그로테스크한 감각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렸던 조너선 글레이저가 역사의 표층을 자신다운 언어로 파헤친 충격적 시도라 할 만하다. 유대계 영국인인 글레이저 감독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 할리우드 청중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비판했듯,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일상을 해부하는 위험한 길을 걷는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영화가 국내 개봉한 것은 <언더 더 스킨>(2014) 이후 무려 10년 만. <섹시 비스트>(2000), <탄생>(2004), <언더 더 스킨> 이후 네 번째 장편을 내놓은 과작의 감독 글레이저에게 기다림은 곧 영화 전반을 압도하는 장악력을 축적하는 시간에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선사한 충격파를 시작으로 일찌감치 문제작으로 떠오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특집]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싶었다
-
<찬란한 내일로>는 감독의 이름을 모르고 감상해도 난니 모레티의 신작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풍경부터 죽음, 상실 같은 묵직한 소재를 과감하게 포획하면서도, 시네마에 대한 발랄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모레티의 인장이 뚜렷하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힘겨운 제작 환경과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분투하면서 영화를 계속 찍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찬란한 내일로>는 희망 어린 시선으로 그리는 메타 시네마다. “‘이제 막 시작된’ 커리어의 이정표를 찍고 싶었다”는 난니 모레티를 화상으로 만났다.
- <찬란한 내일로>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이런 형식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 몇해 전에 195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각본을 쓴 적이 있다. 한동안 준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중단하고 <일층 이층 삼층>(2021) 촬영에 돌입했다. 그런데 <일층 이층 삼
[인터뷰] 여러 소재와 시간, 차원이 공존하는 영화, <찬란한 내일로> 감독 난니 모레티
-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이를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는 관객도 수많은 ‘영화 만들기 영화’를 통해 학습해왔다. <찬란한 내일로> 속 영화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5년 만에 만드는 제목 미상의 신작 영화는 프로덕션 내내 난항‘만’ 겪는다. 처음 함께한 제작자 피에르(마티외 아말릭)는 가끔 현장에서 이상행동을 하고 주연배우 베라(바르보라 보뷸로바)는 대부분 감독과 상충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조반니의 영화를 제작한 아내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조반니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부모보다도 연상인 폴란드 대사 예지(예지 스투흐르)와 열애 중이다.
바람과 대척을 이루는 현실 앞에서
관객은 조반니의 신작을 두고 찬란한 내일을 낙관하기 어렵다.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말을 비관하게 된다. 희망을 놓지 않고 영화제작의 투지를 불사르는 작중 캐릭터는 조반니가 유일하다. 감
[기획] 과거에 서서 영화의 미래까지 사랑하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픽션 페르소나는 어떤 변화를 관통하나
-
-
현대 이탈리아 시네마의 거장 난니 모레티가 국내 개봉작으로는 9년 만에 신작 <찬란한 내일로>로 돌아왔다. <찬란한 내일로>는 난니 모레티가 또 한번 감독 본인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와 만든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1994)부터 시작된 그의 픽션 페르소나 조반니가 어김없이 영화에 등장하고, 5년 만에 현장에 출근한 조반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개념에 상대가 뜻을 같이하길 바라며 누굴 만나든 ‘영화란 무엇인가’를 설교한다. 그리하여 <찬란한 내일로>는 모레티가 21세기에 만든 그 어떤 작품보다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향해 경애를 한껏 바치는 작품이 된다. 산전수전 속에 영화를 만들었고 또 만드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시네마의 화창한 앞날을 바라는 난니 모레티의 신작을 돌아보았다. 난니 모레티와 나눈 인터뷰는 영화를 사랑하는 길로 향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에
[기획]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만든다 - <찬란한 내일로> 리뷰와 난니 모레티 감독 인터뷰
-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는 스크린에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시청각적 쾌감, 그 지평선 너머를 향해 질주해온 시리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신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보여주는 것’만큼 ‘들려주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매드맥스 사가’라는 부제답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가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닫는 형식은 마치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퓨리오사’라는 전설을 설화로 풀어낸다. 바로 이 점이 <퓨리오사>의 빼어난 성취이자 동시에 아쉬운 점이다. <퓨리오사>는 (예상 밖으로) 서사적인 완성도가 탁월해진 반면 (기대보다) 직관적인 쾌감은 옅어졌다. 한마디로 전작들과 달리 도파민이 무작정 분출되진 않는다.
광기에서 이성으로
어쩌면 이 아쉬움이야말로 조지 밀러의 명확한 의도로 보인다. 영화 말미 복수의 천사로
[비평] 지옥에도 도파민이 필요하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있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는 없는 것
-
왜 프리퀄인가
프리퀄은 불리한 게임이다. 권리금을 지불하지 않고 전작의 인지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창작자 입장에선 기본적으로 시퀄보다 따르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본편’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말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라는 역사적 걸작이 결말인 영화다. 다시 말해 <퓨리오사>가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들의 결과물, 예컨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고 누가 어디를 얼마큼 다치는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승패 결과와 스코어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만큼 김빠지는 게 없는 것처럼, 어차피 우승자가 정해진 <퓨리오사>라는 카 체이싱 경주를 <분노의 도로>만큼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
[비평] 위대한 역사가의 일 - 결말을 아는 프리퀄에 주인공을 ‘다시’ 세우는 이유
-
형 이기는 아우가 있을까. 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프리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두고 따져봐도 좋겠다. 김철홍 평론가는 형 못지않은 아우가 “전편의 자장에서 벗어났다”라는 상찬부터 올렸다. 반면 송경원 평론가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안정적 서사를 택하면서 <매드맥스> 시리즈의 고유한 광기를 잃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들의 설왕설래를 읽은 뒤 어느 쪽에 손을 들 것인가.
*이어지는 기사에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비평이 계속됩니다.
[기획] 새로운 탄생 설화 VS 느슨해진 광기,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찬반 비평
-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여우주연상(아드리아나 파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조이 살다나, 설리나 고메즈 공동 수상) 2관왕을 수상했다. 작품이 상영된 뒤로 기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평단의 평점 또한 높았던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주인공인 마니타스는 어릴 때부터 여성이 되길 꿈꿔왔다. 그러나 자신이 자라온 환경 상 그 목표를 실현시키기 어려웠고, 마약 카르텔의 수장으로서 아내와 결혼해 두 아이를 슬하에 둔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한편 유색인종이며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던 변호사 리타는 마니타스로부터 성전환수술을 해줄 의사를 비밀리에 섭외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엄청난 보수가 보장된 제안에 리타는 결국 마니타스의 손을 잡는다. 프리미어 상영 이틀 후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선 인기를 방증하듯 기자들의 열띤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자크 오디아르
[칸영화제 특집] 진지하고 비극적인 주제라면 노래와 춤으로, <에밀리아 페레즈> 자크 오디아르 감독
-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 정치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삶을 그린 <리모노프: 더 발라드>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칸영화제를 찾았다. <레토> <차이콥스키의 아내>에 연이은 경쟁부문 초청이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특정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들거나 자기 영역에 혁신을 일으킨 실존 인물에 주목해왔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작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영화이긴 하나 “리모노프는 1990년대 러시아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던 사람”이라는 점에 감독 역시 동의했다. “그는 항상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거나 ‘소련을 재건하자’라고 말하곤 했다. 극우 성향이 강했고 록 스타 같은 에너지를 지녔었는데 그런 그의 활력과 반자본주의, 반부르주아주의, 반서방주의적 태도에 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이 매료되었다. 다수의 아이들이 그의 포스터를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모노프의 전기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감독의 목표는 아니었다. “리모노프의 실제 생을 옮기
[칸영화제 특집] 관념적 죽음에 이르렀던 하나의 방식, <리모노프: 더 발라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
<더 발코네트>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연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자 셀린 시아마가 함께 시나리오를 쓴 호러 코미디다. 주인공은 TV영화에서 마릴린 먼로 역을 연기 중인 배우 엘리스(노에미 메를랑), 캠걸로 활동 중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 잘생긴 남자를 훔쳐보며 로맨틱코미디 소설을 구상하는 작가 지망생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등 세 여자친구다. 영화는 이들이 강간 가해자 남성의 시체를 은폐하느라 벌어지는 요란한 소동을 담는다. 전반적으로 남성적 시선(male gaze)이 아닌 평등한 관계를 담은 카메라를 보여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연장선상에서 읽어낼 거리가 많다. 카메라 앞에서 가슴이나 음부를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엘리스지만 그도 부부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여성의 자기 신체 긍정과 젠더 기반 폭력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 <더 발코네트>는 어떻게
[칸영화제 특집] 변화를 위한 질문, <더 발코네트> 노에미 메를랑 감독
-
영화제 8일째 강풍이 몰아치는 칸 크루아제트 해변의 호텔 테라스에서 만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인상은 한마디로 표표했다. 하얗게 풍화한 화강암처럼 창백한 얼굴은 백발과 동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감상과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을것 같은 이 노장은, 2017년 창작 파트너이자 동반자였던 캐롤린 제프만을 암투병 끝에 여읜 정념 가득한 경험을 모티브로 <수의>(The Shrouds)를 만들었다. 애도와 상실을 다룬 무수한 영화를 보았지만 이런 식의 진혼곡은 처음이라는 말을 <애프터썬>(2022)을 보고 했던 나는 <수의>에서 그 감상을 하릴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 <수의>에 등장하는 시신의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무덤이 실제로 있다면 이용하겠나.
= 잘 모르겠다. 앞서 만난 기자들은 전혀 의향이 없다고 하더라. (웃음) 그런데 전세계를 돌아보면 희한한 매장 문화가 많다.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매장 풍속을 리서치했다. <수의&
[칸영화제 특집] 이것은 테라피가 아니다, 경쟁부문 상영작 <수의>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
-
올해 심사위원대상은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에 돌아갔다. 샤지 카룬 감독의 <스와함> 이후 30년 만에 경쟁부문에 진출한 인도영화가 거둔 쾌거다. 칸영화제가 그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한 것은 다큐멘터리였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TV 배우이자 우파 정치인을 대학의 새로운 이사장으로 임명한 것에 반대한 학생 파업을 다룬 <무지의 밤>(A Night of Knowing Nothing)은 2021년 칸영화제 다큐멘터리 상영작 가운데 수여하는 골든아이상을 받았다. 그러니 뭄바이에서 쓸쓸하고 위태로운 일상을 치장 없이 포착하는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의 태도를 두고 다큐멘터리적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성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메라는 뭄바이의 두 간호사 프라바(카니 쿠스루티)와 아누(디브야 프랩하)를 경유해 도시의 쓸쓸한 불빛을 시적으로 담아내며 현대 인도에서 여성이 삶을
[칸영화제 특집] 누구에게나 다양한 교차성이 존재한다,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감독
-
이변 없는 결과였다. 제77회 칸영화제는 <스크린 데일리> 등 유력 매체의 별점 평가와 큰 괴리 없이 영화제 기간 화제작들에 골고루 상이 돌아갔다. 2014년에 제인 캠피언에 이어 칸영화제 역사상 두 번째, 미국 여성감독 중에서는 최초로 심사위원장이 된 그레타 거윅의 영향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거나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이 힘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도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아노라>의 가능성과 안전한 선택들
“이 황금종려상은 세상의 모든 성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나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편견을 없애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노라>가 사람들이 성 노동자를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돕기를 바란다.”(숀 베이커의 수상 소감) 황금종려상을 받은 숀 베이커의 <아노라>는 (오드리 헵번이 콜걸 역이었다는 것을 아예 사람들이 까먹은 듯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나 (줄리아 로버츠를 단숨에 스타
[칸영화제 특집] 영미권 영화 강세 이어가다, 제77회 칸영화제 결산 - 숀 베이커의 <아노라> 황금종려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