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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공황
<맹크>의 배경인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진통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영화산업은 꾸준히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1929년 10월 24일 주가 대폭락을 신호탄으로 미국은 사상 최대의 경제 대공황을 겪는다. 미국의 거리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할리우드 영화산업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익부 빈익빈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가난한 영화인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튜디오 주변을 맴돌았지만 스튜디오의 고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대공황 시절 할리우드는 막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고, 삶이 힘들어지자 영화라는 마법은 대중에게 더 짙은 호소력을 띠었다. <킹콩>(1933), <오즈의 마법사>(1939) 같은 영화가 모두 대공황기에 탄생했다.
한편 <맹크>에도 나오지만, MGM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한다. 임금 삭감을 발표하면서 MGM의 루이스 B. 메이어 회장은 말한다.
[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할리우드는 진보? 처음엔 아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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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극장에 오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맹크>의 루이스 B. 메이어 대사 중)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와 할리우드식 제작 시스템 그리고 장르 문법은 <맹크>의 시대에 구축됐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메이저 스튜디오 5개사 MGM,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RKO는 배우 및 스탭들과 장기 계약을 맺어 영화를 만들고 소유한 극장을 통해 배급·상영해 이윤을 극대화했다.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제작자 입장에서 그 목표를 가장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수직적인 통합 구조를 만든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이끌었던 이 시스템에 대해 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에서 ‘스튜디오의 천재성’이라 일컬었다. “이 시스템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작업을 측정 가능케 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스토리와 테크닉의 반복을 촉진시킨다. 스튜디오들은 개별적인 상업적 노력과 함께 영화의 기존 관습에
[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할리우드의 황금시대, 어떤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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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J. 맹키위츠(1897~1953)
허먼 J. 맹키위츠는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기 전 기자 및 드라마 평론가로 활동했다. ‘뉴욕에서 가장 재밌는 사람’ 소리를 듣던 그는 할리우드로 향해 자신의 장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시작한다. 파라마운트와 MGM을 거치며 <8시 석찬>(1933), <오즈의 마법사>(1939) 등 수십편에 참여했는데,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수두룩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즈의 마법사>. 캔자스의 일상은 흑백으로 환상의 세계인 오즈는 컬러로 그리자는 아이디어는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하지만 맹키위츠는 술에 빠져 지내는 날이 많았다. <맹크>에도 나오는 대사지만 “내가 같이 일하기 싫은 제작자가 반, 나와 일하기 싫은 제작자가 반”인 상황일 때 오슨 웰스는 맹키위츠에게 시나리오를 맡기고, <시민 케인>이 탄생한다.
오슨 웰스(1915~85)
<시민 케인>이 탄생하기 전의 일
[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오슨 웰스, 메리언 데이비스... 실존인물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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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드림
농담처럼 시작하자면 <맹크>는 <에이리언3>(1992)가 데이비드 핀처에게 안겨준 트라우마 치유의 마지막 과정처럼 보였다.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이리언3>로 데뷔한 그는 20세기 폭스사의 나이 지긋한 중역들에게 후반작업 편집권을 빼앗긴 채 자기 영화를 부정해야 하는 아픔으로 커리어를 열지 않았던가. 21살에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를 거쳐, 25살에 황금기 시절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등에 업고 <시민 케인>을 만든 오슨 웰스(그리고 ‘로즈버드’를 품은 채 미국의 마천루에 오른 찰스 포스터 케인)를 택한 것은 그래서 어쩐지 애틋할 정도다. 다만 여기에는 핀처 자신만큼 아버지의 페르소나도 뚜렷하다.
오슨 웰스의 그림자처럼 등을 맞댄 인물인 시나리오작가 허먼 J. 맹키위츠의 이야기가 <맹크>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의 시절에 극장에서 유년기를 보낸 잭 핀처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영화감
[스페셜] '에이리언3'에서 '나를 찾아줘'까지, '맹크'에 영향 준 데이비드 핀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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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버드.” 영화사를 바꾼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단어. 미국영화연구소 선정 위대한 미국영화 목록 1위에 꼽힌 영원한 걸작 <시민 케인>은 죽기 직전 케인이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로 시작된다.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쥔 권력자의 중얼거림은 남겨진 이들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마저 로즈버드라는 이름의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한참 헤매는 와중에도 우리는 이미 직감한다. 여기에 답이 없음을. 답을 찾지 못하는 건 애초에 엉뚱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현혹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영화가 아니다. 로즈버드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고찰하는 영화다. 1941년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 감독 오슨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여 현대 자본주의와 아메리칸드림의 신화를 해체해버렸다. 한참을 헤맨 끝에 로즈버드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권력의 끝에서 케인이 느꼈을
[스페셜] <맹크>, 데이비드 핀처의 ‘로즈버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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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가 넷플릭스로 다시 돌아왔다. 플랫폼의 성격을 감안할 때 역설적이게도 <맹크>의 무대는 극장 산업이 황금기를 맞은 1930년대 할리우드다. 어떤 사람들은 <맹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시민 케인>을 봐야 한다고, 1930년대 할리우드와 미국 정치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 진입 장벽을 강조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맹크>는 <시민 케인>을 알고 있을 때 훨씬 재미있을 만한 작품이 분명하지만 의외로 고전 자체를 집요하게 해부하며 세밀한 지식을 요하지는 않는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가의 권리, 대공황 이후 미디어와 예술이 손잡고 정치 공작을 펼치던 풍경이 훨씬 비중 있게 묘사된다.
이번 특집 기사에서는 <맹크>와 <시민 케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데이비드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번 작품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맹크>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스페셜] <맹크>를 보기 전 알아야 할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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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서산개척단 사건, 세월호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사회적 참사를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조훈 서산개척단 사건(박정희 정권이 국토개발사업을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강제 동원해 충남 서산 개펄을 농지로 개척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 서산 출신 대학 후배인 류일용 전 KBS PD가 술자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말한 적 있다. 서산으로 내려가서 세명의 개척단 어르신을 만나 사전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꼭 알려야겠다 싶었다.
김지영 세월호 특별법 관련 홍보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누나가 앉아 있었다.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오더라. 2개월 정도 홍보 영상을 만들 목적으로 세월호에 대해 파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인 사실을 알게 됐고 세월호 관련 다큐를 두편(<그날, 바다> <유령선>) 만들게
[스페셜②] 세월호도 용산도 삼풍도, 다들 안다고 말한다. 지겹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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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광주, 강정, 대추리, 맹골수도. 이곳은 단순히 지역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애석하고 서럽다. 비참하고 끔찍한 사건, 일명 ‘사회적 참사’는 왜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걸까. <씨네21>은 4·16재단과 함께 사회적 참사를 다룬 세 명의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고 재현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무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거리의 아이들을 끌고 와 강제 노역시켰던 국가폭력을 폭로한 <서산개척단>의 이조훈 감독과 이미 두편의 세월호 다큐를 만들고도 세월호에 대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김지영 감독,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다루면서 과거 뉴스 푸티지와 가해자의 현재를 교차시킨 구상모 PD가 그 주인공이다.
김지영 감독
세월호에 관한 다큐 두편을 제작했다. 세월호 항로 데이터 AIS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그날, 바다>와 <유령선> 모두 사고 원인에 집중한다.
[스페셜①]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고 재현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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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만나는 가장 지적인 방법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예지원 배우
<달빛 길어올리기> <생활의 발견>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전주시와는 인연이 있었다. 외국에 비해 한국에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얼마 없는데, 이곳에는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이 있다. 독립예술영화관은 상업영화를 상영하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비해 관이 크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개인적으로 찾아간 느낌을 준다. 그렇게 관객이 적극적으로 작은 극장을 찾아 좋은 영화를 만나고, 훌륭한 독립예술영화가 발굴될수록 좋은 감독과 예술인도 더 많이 배출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영화의 다양성을 가져온다. 그래서 지금보다 지역 독립예술영화관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정재은 감독
<고양이를 부탁해> <말하는 건축 시티:홀>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피칭 행사에 <말하는 건축 시티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⑦] 예지원 배우, 정재은 감독의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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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처럼
아트하우스 모모
장항준 감독
드라마 <싸인>, 영화 <기억의 밤> <불어라 봄바람> <라이터를 켜라>
예전에 스크립터했던 친구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일을 할 때 제안을 해줘서 김은희 작가와 <어 퍼펙트 데이> GV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전에도 몇번 간 적이 있는데 아트하우스모모 때문에 이화여대가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교 안에 극장이 있는 것도, 편의점과 문구점, 식당 같은 게 한 건물에 모여 있는 구조도 독특한 곳이다. 상업적인 행사라면 개런티도 따졌을 텐데 김은희 작가와 함께 ‘공짜로 영화도 볼 수 있고 좋지, 뭐’ 하는 생각으로 책정된 금액만 받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독립예술영화 상영작을 볼 수 있는 상영관, 관련 행사를 한번에 볼 수 있는 통합 애플리케이션 같은 게 있으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⑥] 장항준 감독, 이민지 배우의 아트하우스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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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도 축하도 함께였다
아트나인
윤가은 감독
<우리들> <우리집>
<우리들> 가족 시사회를 아트나인에서 했다. 고마운 분들, 신세진 분들, 정말 친한 분들 모시고 첫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작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까지 앞으로 나와서 인사하고 서로 오순도순 얘기하고, 뭔가 조그맣게 차린 잔칫상 같았다. 관객이 숨 쉬는 것도, 웃고 찡그리는 표정도 다 보이는 공간에서 처음 영화를 공개한 거라 그날의 기억이 되게 생생하게 남았다. 이후에 아트나인에서 GV를 많이 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은 기본 150석이 넘으니까 나는 무대에, 관객은 객석에 있다는 느낌이 강한데 신기하게도 아트나인은 물리적 거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트나인을 찾을 때마다 감독으로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데, 관객은 내가 긴장한 것에 비해 엄청난 애정을 장착해서 온다. 분명 내 영화에도 흠결이 있을 텐데 “애썼어. 좋아해줄게”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봐주신다.
이 극장을 찾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⑤] 김보라 감독, 윤가은 감독의 아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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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추억을 타고
동성아트홀
이환 감독
<어른들은 몰라요> <박화영>
<박화영> GV로 대구 동성아트홀을 찾은 적이 있다. 나에게 동성아트홀은 그날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조그만 극장 안에 줄 지어 있는 빨간 의자 그리고 무엇보다 열정적인 관객…. 동성아트홀은 사람이 많이 붐비는 시내 거리 안에 있다. 극장은 정말 아기자기하고 로비 또한 소박하다. 작고 아기자기한 우리만의 공간, 마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찾아갔을 때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동성아트홀 역시 추억의 공간이 주는 포근한 느낌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하나하나 떠오른다. 동성아트홀에서 열렸던 <박화영> GV에 오셨던 관객의 얼굴, 그리고 그날의 커피 맛까지….
유지영 감독
<수성못>
“카메라 그렇게 메면 렌즈 다쳐요.” 첫눈에 봐도 인상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④] 유지영, 이환 감독의 대구 동성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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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 영사기사도 고양이도 함께하는
대전아트시네마
임대형 감독
<윤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대전은 노잼의 도시가 아닙니다. 명소 대전아트시네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대전의 명물 베이커리 성심당 본점에서 도보로 몇분 내에 이동 가능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뜨거운 위치이죠. 그런데 막상 이곳을 찾아가려고 하면 저처럼 길눈이 어두운 머글들은 반드시 길을 헤매게 됩니다. 매번 9번과 10번 승강장 사이의 벽에 몸을 부딪혀야 하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인터넷 카페에 길 안내 관련 공지글이 두개씩이나 올라와 있습니다. 힙 플레이스다운 면모입니다. 제가 대전아트시네마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11년 무렵이었습니다. 2010년에 타계한 에릭 로메르 감독의 추모전을 하고 있을 때였죠. 당시의 저는 서울의 낙원상가가 아닌 곳, 심지어 저의 고향집에서 자동차로 4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서 로메르의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전율하고 감격했습니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③] 임대형 감독, 정하담 배우의 대전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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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을 바라는 마음
광주극장
연상호 감독
<반도> <부산행>
독립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시절, 특히 <돼지의 왕> 개봉했을 때 GV를 하기 위해 지방 독립예술영화관을 많이 다녔다. 옛날 극장 느낌 나던 곳들이 많이 떠오른다. 겨울에 갔던 광주극장은 페인트로 칠해서 만든 간판이 붙어 있고, 70, 80년대 느낌이 확 나는 로비에, 내부엔 옛날 포스터도 많았다. 극장이 되게 컸는데 가운데만 운영하고 있었다. 공간이 넓다 보니 관객 몇명을 위해 전체 난방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들 담요 같은 것을 받아서 덮고 영화를 보더라. 독립애니메이션을 보러 오는 관객은 20대 젊은 사람들이 많다. CGV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도 있는데 독립영화에 열정을 갖고 이런 수고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독립영화에 깊은 애정을 가진 분들과 얼굴을 맞대고 GV를 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윤단비 감독
<남매의 여름밤>
자
[나의 사랑 독립예술영화관②] 연상호 감독, 윤단비 감독의 광주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