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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CJ ENM 스튜디오 센터가 드디어 열렸다. 2018년 부지 확보 후 2020년 공사를 시작해 올해 4월 사업준공 승인을 받고 본격적으로 개방한 것이다. 7월5일, tvN 드라마 <환혼> <작은 아씨들> 등의 촬영이 한창인 CJ ENM 스튜디오 센터에 초대받아 현장을 둘러본 답사기를 전한다. 원스톱 제작 인프라를 갖춘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Virtual Production Stage)였다. 삼성전자의 마이크로 LED 월이 적용된 이 스튜디오는 마이크로 LED 기술력과 500평 규모의 스튜디오 시설이 만나 버추얼 스튜디오가 영화, 드라마 콘텐츠에 직접적으로 끼칠 혁신적인 영향력이 더이상 이상이 아닌 눈앞에 당도한 현실임을 체감시켜주었다.
CJ ENM 스튜디오 센터는 원스톱 제작 시스템을 목표로 13개동에 달하는 타운 안에 스튜디오, 오픈세트, 버추얼 스튜디오, 멀티로드, 근린 시설, 대규모 미술센터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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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와 대상을 초월해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잊을 만하면 되새기는 현상. 좋아하는 상대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애먼 ‘머글’들에게 가고, 정작 덕후들은 멀리서 속 끓이고 마는 처지를 일컫는 말. 일명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탄다’의 준말)은 범(汎) 덕질계의 오랜 불문율이자 자조 섞인 넋두리다.
세월을 타고 수천 겹의 감정을 빚어내는 덕질의 생리로 인해, 이 슬픈 이야기는 최초 용례를 빗겨간 의미로 읽혀도 낯설지가 않다. 열렬히 사랑한 남성 연예인이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면(<성덕>), 현생보다 아낀 게임 세계가 슬그머니 사라질 채비를 한다면(<내언니전지현과 나>), 팬심을 담아 무명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려는데 난항이 계속된다면, 그러다 그가 유명인 반열에 훌쩍 들어서버린다면(<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덕후가 끝내 계 타기란 얼마나 요원한가.’ 읊조리며 먼 곳을 바라볼 수밖에.
그렇게 덕후의 넋을 달래는 와중 카메라를 든 감
‘빠순이’라 불린 감독들이 말하는 나의 덕질, 우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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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만남도 인연이다. <뒤틀린 집>의 강동헌 감독과 윤상 음악감독은 마치 오래 사귄 벗 같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데 꼭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강동헌 감독의 전작 <기도하는 남자>를 보고 반한 윤상 음악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먼저 연락을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강동헌 감독은 긴 호흡으로 인간을 관찰하던 전작과 전혀 다른 호러를 들고 돌아왔다. <뒤틀린 집>은 한국판 <컨저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우스 호러의 장치들을 익숙하게 활용하는 장르영화다. 하지만 전형적인 장르의 길을 가면서도 감독의 숨길 수 없는 개성과 시선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윤상 음악감독은 강동헌 감독의 깊은 이해자이자 동반자가 되어 모험 같았던 이번 작업을 도왔다.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좋은 만남이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게나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 강동헌 감독과 윤상 음
'뒤틀린 집' 강동헌 감독 × 윤상 음악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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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등을 돌리고 비로소 자신이 찍어야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걸려든 세상의 프레임으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가서 발견한 바깥이다.’ 올해 영화평론상 우수상에 당선된 소은성씨는 비평문 맨 마지막 문장에 영화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영화를 통해 배우고 많은 것을 얻었다고 연거푸 말했다. 영화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냐는 질문에 “내가 나로서 잘살 수 있도록 견디는 힘을 줬다”라고 조심스레 고백한 그는 오랫동안 영화와 나눠온 친밀한 시간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는 영화가 던진 질문에 글쓰기와 제작으로 성실하게 응답해온 사람이었다.
-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 20살 때부터 영화를 즐겨봤고, 영화 보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 무렵 <씨네21> 평론상에 지원한 적이 있다. 인디포럼 상영작을 비평하는 ‘독립비평 TAKE’에 리뷰를 쓰기도 하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남다은 평론가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영화평론을 읽는 데 재미를 붙이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소은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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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맞은 네명의 중학생들이 카메라를 들고 세상의 끝을 찍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서사를 작품의 한 가지 구성 요소로서 영화가 포함하는 한, 이 문장 하나에는 예측 가능한 서사적 형식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일종의 교양소설적 서사로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보수적이다. 네명의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경로를 이탈하고, 적당한 시점에 길을 잃으며, 마침내 예정과 다른 장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결국 찾고자 했던 것, 또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무언가를 얻는다. 그것은 영화에서 스틸 이미지로 제시된다. 나머지 친구 셋은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난 시연은 열려 있는 경로당 출입문 앞에 앉아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에는 출입문에 걸린 투명한 문발 너머로 시골 마을의 지붕이 낮은 집들과 경로당 앞마당이 보이고, 그곳에는 자신과 친구들의 벗은 신발이 놓여 있다. 아마도 이 사진이, 시연이 찍고자 원했던 세상의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소은성 작품비평 - '종착역', 세상의 프레임과 둥근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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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둠으로부터 온다. 그 어둠은 실질적인 빛의 부재가 아닌, 아직 보이지 않는 어떤 상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가후쿠와 오토가 새벽 창문을 등지고 앉아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그를 덮고 있는 바로 그 어둠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사실 벗은 몸의 윤곽일 뿐이며, 그림자와 다름없는 그 몸이 이야기를 전하는 소리의 출처라고 판단하도록 이끈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오래된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습관에 기댄 판단은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옳다. 이 시퀀스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오토임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이 느슨해진 이 나른한 순간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은 그의 이름 ‘오토’(音)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뜻하는 자신의 이름에 적합하게도 이 영화에서 카메라 앞의 보이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토의 죽음 이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소은성 이론비평 - 요청하는 이미지와 지연되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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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은 작품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번 영화평론상은 내게도 그런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올해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한 김예솔비 당선자는 공모전을 준비하며 분투해온 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상에 당선된 그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에게 영화를 향한 사랑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돕는 원동력이자 오랫동안 지녀온 자기만의 무기다. 영상 연출, 촬영, 평론….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그가 여러 경계를 종횡무진하며 어떤 이야기를 전하게 될지 기대된다.
- 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에서도 최종심까지 올랐던 이력이 있다. 올해 우수상 수상이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다.
= 지금도 얼떨떨하다. (웃음) 초여름의 연례행사처럼 몇년 동안 <씨네21> 영화평론상에 지원했다. 오랫동안 바라온 일이 현실로 이뤄지다니 믿기지 않는다. 최종심에 올랐을 땐 조금만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김예솔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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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있는 마리옹의 옆얼굴. 뒷좌석에 앉은 딸 넬리의 손이 불쑥 들어와 간식을 나눠준다. 말없이 웃는 두 사람. 단순히 상황만 놓고 보자면 여느 다정한 모녀의 모습처럼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분명 어딘가 기이함을, 다정함으로 미처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남긴다. 카메라가 간식을 건네는 넬리의 반응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화면 안쪽에는 말없이 간식을 받아먹는 마리옹의 옆얼굴과 간식을 건네는 넬리의 손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개구지게 웃는 넬리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순간 넬리의 얼굴은 영화의 외화면 영역(hors-champ)으로 밀려난 것이다. 프레임 밖에 있는 것들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관습적으로 공포와 스산함을 동원한다. 물론 우리는 이 손의 주인이 넬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장면에는 모녀의 다정함과 더불어 이상한 기운이 달라붙는다. 외화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얼까.
<쁘띠 마망>에서 외화면은 사실상 화면상의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김예솔비 작품비평 - '쁘띠마망', 조용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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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영화 앞에서
<당신얼굴 앞에서>가 닫힌 영화처럼 느껴진다면, 영화가 후반부 30분간 술집을 거의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이 거의 정확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아침에서 시작해, 아침으로 끝난다. 영화는 동생의 아파트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상옥의 이틀간에 놓여 있다. 두 아침을 보여주는 방식은 거의 다르지 않다. 두 아침 모두 카메라는 소파에 앉아 있는 상옥과 아파트 창문,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는 상옥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때 보이는 것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막혀 있으며, 특수한 밀실을 만든다. 너무 높아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창문, 건물에 가로막혀 아파트 단지 내부만을 비추는 풍경,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는 동생의 잠든 얼굴, 응답 없는 얼굴. 그 위로 “천국은 이미 당신 얼굴 앞에 있어요”라는 상옥의 말이 맴돈다. 영화는 얼굴과 세계 사이의 알 수 없는 공간만을 열어둔 채로, 미묘한 방식으로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김예솔비 이론비평 -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이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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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심사 결과, 올해는 최우수상 없이 우수상 2명을 선정했다. 응모작은 총 72편으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특정한 감독이나 작가의 세계를 파고드는 대신 유연하게 이론비평의 주제를 확장한 글들이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글의 수준과 다양한 주제 설정이 흥미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글은 없었다. 본심 심사를 맡은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김혜리 편집위원, 송형국·김소희 평론가는 최종적으로 김예솔비, 소은성, 임장혁, 서정 네명의 글을 놓고 고심한 끝에 김예솔비, 소은성씨에게 공동 우수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김예솔비, 소은성씨 모두 성실한 글쓰기의 태도, 정직하게 영화를 마주하려는 태도에서 믿음을 주었다. 우선 <퍼스트 카우> <스파이의 아내> <바쿠라우> 세편의 영화를 엮어 이론비평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이 말해주는 것’을 쓴 김예솔비씨의 글에 대해선 ‘닫힌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 우수상 김예솔비, 소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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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몇편의 사랑영화를 만들어왔나 헤아려보고 흠칫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는 대놓고 러브 스토리였고 조금 비밀스러운 데야 있지만 <스토커> <올드보이>도 여기 묶을 수 있다. 6부작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작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 관객이 박찬욱식 멜로드라마를, 혹은 그 변태성을 전에 없이 화제로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건 이번 영화의 연인이 그나마 보편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이라서일 수도 있다(동시대 인간이고, 헤테로섹슈얼이고, 근친이나 적이 아니다). 혹은 마침내 연애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자 플롯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다. 욕망의 문답은 취조와 심문의 언어를 빌려오고 정의, 진실, 예의 같은 다른 범주의 인간 행위가 끌려들어온다.
송서
김혜리 기자의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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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서래(탕웨이)의 행동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낯선 행동으로 가득하고, 공감을 요구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지만 이해가 안된 적은 없었다. 영화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야기의 전개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설명하는 다른 구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쥐>와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는 특별하다. 배우들의 모습을 요란하게 전시하는 다른 영화 포스터들과 다르게, 두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념 다이어그램 같은 느낌을 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런 방식을 생각의 도구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고, 영화가 만들어진 후 포스터가 제작되었을 테지만 이 두 포스터는 영화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시간, 혼돈 속에서 생각이 정리되는 바로 그 순간, 즉 개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박쥐>의 포스터는, 태주(김옥빈)가 사제
윤웅원 건축가의 '헤어질 결심'의 공간 구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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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서래의 마지막 선택을 보고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결단의 놀라움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글을 썼다.
누가 뭐래도 <헤어질 결심>은 언어의 영화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을 빼고는 도저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시작은 하나의 단어다. “마침내”. 이 단어가 등장한 순간부터 영화의 말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마침내’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죽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서투르게 표현한 것인가? 기다린 결과가 도래했다는 시원함을 저도 모르게 발설한 것일까? 사극으로 한국어를 익힌 외국인의 독특한 언어 습관인가? 그 말(“마침내”)은 내뱉어진 순간부터 이리저리 갈라지며 여러 겹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서래(탕웨이)는 말한다.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서래는 후에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뜻이라고 정정했지만, 저 문장이 전하는 묘한 인상을 떨쳐내기 힘들다. 여기에는 서래가 처음 뱉은 중국어 소리와, 번역기가 변환
홍수정 영화평론가의 '헤어질 결심'의 다층적 언어와 서래의 결단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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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의심했던 이야기다. 거기에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바다 앞에서 하나의 진실만을 고집하면 안된다.
와이드스크린의 비율이 높을수록 사물의 왜곡이 일어난다. <타락천사>(1995)처럼 굳이 극한의 렌즈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네마스코프의 주변부가 휘어져 보이는 현상은 피하기 힘들다. 막스 오퓔스의 <롤라 몽테>(1955)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오른쪽과 왼쪽에서 내려오는 신으로 시작한다. 샹들리에를 붙들고 내려오는 선은 직선처럼 곧아서 화면의 양쪽을 깔끔하게 분할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교하게 찍은 영화에서도 서커스 천막을 버티는 기둥의 상단부가 휘어져 보이는 건 막지 못했다. 밀로스 포만의 <래그타임>(1981)은 아예 주변부를 왜곡하기로 결정한 경우다. 볼록렌즈로 바라본 양, 바깥쪽 기둥이 볼록하게 휘어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헤어질 결심'이라는 이상한 누아르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