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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8혁명. 시위의 나날들
고다르는 2월에 누벨바그 동료들과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수장 앙리 랑글루아의 사임을 종용한 것에 대한 거리 시위를 벌인다. 칸영화제 참석 이후에도 파업 노동자, 학생들과 함께 거리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같은 해, 장피에르 고랭과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영화를 지향하며 픽션 바깥으로 탈주해나갔다.
1969년
<대영제국의 소리> <즐거운 지식> <이탈리아에서의 투쟁들> 등
방송국과 협업하지만 연이은 상영 거부를 당한 장뤽 고다르. 러시아의 체코 침공에 관한 가상의 토론을 담은 다큐멘터리 <프라우다>를 위해 지가 베르토프 그룹과 프라하 여행.
1970년
<승리가 될 때까지> <동풍>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영화 촬영. <승리가 될 때까지> <동풍>, <블라디미르와 로사>(197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연표로 보는 고다르의 생애 - 1968년부터 1990년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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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 고다르의 죽음은 녹화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공상이지만, 그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마지막 무대의 시각적 형식이었다. 스스로 최후를 선택하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의료진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현장에 과연 카메라는 입회하고 있었을까? 종종 그 자신을 픽션의 등장인물로 삼아왔고, 거주하는 집 내부와 아틀리에, 근처의 호수를 영화적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영상 작가라면, 모든 기록을 말살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조차 분명 촬영되었을 것이며 “그것을 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영화감독이라면, 그리고 조력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죽음에 덧대진 합법과 위법의 범위를 캐묻는 인간이라면(이는 <필름 소셜리즘>에서 제시한 대로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언어에 기초한다) 삶의 마지막에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는 ‘연출’을 시도했을지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고다르와 죽음, 그리고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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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문법을 해체한 혁신가, 누벨바그의 기수, 정치적 급진주의자, 괴팍한 은둔자…. 장뤽 고다르에 대한 수식어는 그와 영화가 언제나 투쟁 혹은 긴장 관계였으리란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영화라는 개념을 거대한 몽타주의 재료로 삼아 현실과 긴밀히 교차시키고자 했던 장뤽 고다르는 한 편의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혁명과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는 창작자였다. 1996년, 67살의 고다르가 남긴 희귀한 인터뷰(<필름 코멘트>)가 영화 앞에 무한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그의 소망을 잘 들려준다. 고다르는 “그림이 나를 거부할 때까지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면서, 약 10년에 걸친 <영화의 역사(들)>라는 긴 작업을 마무리한 소감을 이렇게 전한다. “이것은 앞으로 영화관에서 몇편의 영화를, 몇십년 더 상영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영화를 향한 내 화해의 제스처다.” 고다르는 그 약속을 지켰다. 지난 9월13일 타계한 장뤽 고다르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고다르를 추모하는 비평의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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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에 참여한 인터뷰이들은 예전에 성범죄자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 남자 연예인이 구설수에 오르는 케이스가 훨씬 많다는 것을 상기하며, 마음 놓고 연예인을 좋아할 수 없게 됐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자 연예인과도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소비 행위를 통해 유해한 산업에 일조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과연 우리는 계속 덕질을 할 수 있을까.
오세연 지지난해부터 여자 아이돌을 보는 게 취미가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무대를 보는 데 눈물이 났다. 그들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버틴 시간을 상상하다 보니 슬퍼졌다. 한국에서 아이돌이 되려면 단지 노래와 춤을 잘하는 것을 넘어서 산업이 요구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그 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내가 이 사람들을 좋아하는 게 실은 이들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그냥 스쳐 지나갈 것 같았던 남자들에게 계속 관심을 주는 내 자신도 너무 답답하다. 아무래도 이건 헤테로의 저
[기획] 영화 ‘성덕’ 대담 ⑤ 누군가를 사랑한 죄로 자책하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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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팬덤 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하는 분석이 부쩍 늘어났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좋기만 할까. 오세연 감독은 <성덕>에서 2016년 J의 성추행 기사를 최초 보도한 기자를 원망했던 일기장을 발견한 후 이를 반성하는 메일을 기자에게 보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부정하기 위해 메신저를 공격하는 거다. 한편으로 팬들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아이돌의 감정 노동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오세연 2016년 당시 미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동시에 ‘거짓 미투’를 의심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자를 비하하는 ‘기레기’라는 욕이 널리 퍼지기도 했던 시기다. 당시엔 무혐의 판결을 받은 사건을 기사화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게 나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기만 썼지만 다른 팬들은 박효실 기자님을 조직적으로 공격했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J의 팬이기 때문에 기자를 공격해도 된다고 정당화하는 거다. 나중에는 팬덤보다
[기획] 영화 ‘성덕’ 대담 ④ ‘주주 정체성’이 크게 심화되며 팬으로써 느끼는 복잡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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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경 |
경기콘텐츠진흥원 영상산업팀 매니저
| 모은영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 장현상 |
헤이리시네마 대표
‘인디한 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김영경 경기인디시네마의 지원 사업은 크게 배급과 상영으로 나뉜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상영관만 지원했다면 올해부턴 헤이리시네마와 협업해 오프라인 극장 상영도 병행한다. ‘인디한 편’은 상영 지원의 한 파트다. 좋은 작품을 중점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큐레이터 역할을 해줄 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감독 등 여러 전문가를 초대해 운영위원회를 만들었다. 많은 분들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무료 상영으로 진행하게 됐다.
모은영 경기인디시네마가 지원하는 작품들이 일회적으로 상영되고 그치는 게 아니라 경기인디시네마가 선택한 우수한 작품을 극장과 연계해 소개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동안 개별 극장에 지원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공공기관이 주체적으로 작품을 큐레이팅하는
[기획] 경기인디시네마 신설 프로그램 ‘나는 요즘, 인디한 편!’ 운영위원회 3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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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부터 유통까지, 독립예술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경기인디시네마가 큐레이팅의 역할을 강화했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이하 경콘진)은 매년 50편 내외의 작품을 선정해 경기도 내 극장 상영 및 온라인 상영관 편성을 지원하고, 총 1억5천만원 규모로 개봉예정작 P&A 비용을 지원하는 등 최대한 많은 작품이 개봉 및 배급 단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원 사업을 펼쳐왔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 CJ CGV·KT와 업무협약을 맺고 매달 진행해온 ‘CGV·KT 상영 연계지원’ 사업은 오프라인(CGV 전국 18개관)과 온라인(올레tv 및 시즌) 내 고정관에서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산업 전반이 위축되고 OTT가 성장하는 등 최근의 환경 변화를 고려할 때, 온오프라인 플랫폼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신규 연계 사업은 보다 많은 관객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지난 6월 신설된 ‘나는 요즘,
[기획] 인디한 그대를 위한 다양성 영화의 발견, 2022년 경기인디시네마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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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이 그 세계에 스며들다
여기 모인 분들은 과거에 연예인을 사랑하고 덕질을 해본 경험이 있다. 이 마음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왜 우리는 팬질을 멈출 수 없었나. 몇번의 실망과 탈덕을 거치며 더이상 팬심을 갖지 못하게 된 분들이 있다면 그 사연도 궁금하다.
오세연 사고 같은 게 아닐까. 일부러 좋아하려고 물색해도 안 보일 때가 있는데 원치 않게 갑자기 스며들 때가 있다.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고 나면 한 사람을 파헤치는 것도, 그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알게 되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좋아서 덕질 자체에 중독되는 것 같다. 연예인에게 애정을 쏟는 것도 어떻게 보면 습관이다. 덕후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고 그게 일상의 재미가 되는 사이클이 된다. 오빠의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웃음)
김다은 가치관에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로 덕질을 했다. 사실 B그룹의 G가 매력적이었지만 그는 인기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G 옆에 붙어 있는 S를
[기획] 영화 ‘성덕’ 대담 ⓷ 기부하고 여론전을 펼치는 정치적 존재로 진화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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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 관객과의 대화에서 질문자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저는 OOO의 팬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대담에 참석하신 분들도 ‘덕질의 역사’를 포함한 자기소개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웃음)
오세연 <성덕>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를 연출한 오세연이다. <성덕>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스타가 범죄자가 되면서 어떤 충격에 휩싸인 경험을 한 친구들을 찾아나서는 일종의 기행문이다. 가수 J를 좋아했다.
김다은 <성덕>의 조감독을 맡은 김다은이다. 연예인을 떠나 어떤 대상을 너무 사랑하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로 오늘 이 자리에 소환된 것 같다. 영화제에 가도 극영화를 주로 봤고, 다큐멘터리를 진지하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를 찍을 자질이 부족하다며 거절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세연씨가 “저는 J를 좋아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범죄자가
[기획] 영화 ‘성덕’ 대담 ⓶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기 위해 바꿔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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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O를 좋아하다 자연스레 ‘패밀리’도 알게 됐다. 언제 데뷔할까 목 빠지게 기다렸던 막내 G는 6년 연습 후 어느 다큐멘터리를 거쳐 그룹으로 세상에 나왔고,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B그룹의 첫 콘서트 현장에 있었다. 좋아하지 않게 된 지는 꽤 됐다. 다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사건·사고가 있었다. 노래만 듣는다느니 개인 팬이라느니 둘러대던 때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후회하게 만드는 일이 터졌다. 봉인했던 과거를 고백하는 건 9월2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영화 <성덕>이 보는 관객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덕>에는 정준영과 빅뱅 승리, 슈퍼주니어 강인, 가을방학 정바비 등 그들이 범죄자가 될 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인터뷰이로 출연한다. 연예인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그가 범죄자가 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팬질 덕분에 가능했던 긍정적 경험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좋아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지, 우상에 매혹된 경험이
[기획] 영화 '성덕' 대담 ⓵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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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에는 1992년 영상부터 2021년 촬영분까지 30여년의 시간이 담겼다. 어느 시점에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
= 2006년에 영화가 한번 엎어지고 2013년 외국 프로덕션 합작 계획도 무산됐다. 그러다 2019년 남북미 정상 회동으로 송환이 추진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부랴부랴 촬영을 다시 시작했다. 그 열기가 식었을 때 선생들의 실망이 굉장히 컸고 송환되는 장면은 이제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엎느냐 송환이 안되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끝내느냐 갈림길에 섰다. 영화에 2020년 ‘송환 20주년 기념 2차 송환 촉구대회’가 나온다. 행사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장기수 선생님이 10명 남짓 계시더라. 영화에서는 자리가 간소했다고 표현했지만 초라했다. 어떻게든 빨리 영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다 돌아가신 후에 끝낼 거야 뭐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아찔하더라. 이듬해 송환 21주기 되는 날 김영식 선생이
[기획] ‘2차 송환’ 김동원 감독, “촬영은 계속된다.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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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의 <2차 송환>은 2차 송환을 기다리는 김영식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분들과 북한을 방문해 1차 송환된 조창손 선생을 촬영하길 염원하는 김동원 감독의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기록한 작품이다. 나는 아무런 사전정보 없어 <2차 송환>을 봤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 푸른영상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다큐보기’ 행사를 했다. 그때 김동원 감독이 <2차 송환>의 편집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벌써 몇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나는 <2차 송환>이 어느 시점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가 됐을지 무척 궁금했다. 전작 <송환>(2003)은 1992년 김동원 감독이 아는 신부의 부탁으로 지방의 한 요양원에 계신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김석형 두분을 감독이 사는 동네로 모셔오는 일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내레이션(감독의 목소리)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려준다. 김동원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획] '2차 송환' 기약 없는 희망, 그러나 김 선생은 오늘도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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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목은 ‘송환 속편’이었다. 2000년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송환>의 뒷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었다. 옥살이 중 고문에 못 이겨 전향했던 장기수들이 2000년 송환 명단에서 제외됐고 이들은 ‘폭력에 의한 전향 무효선언’과 함께 2차 송환 운동을 시작했다. 김동원 감독은 이 운동을 좇아 이들의 2차 송환 과정과 더불어 북한에 먼저 송환된 장기수들도 촬영하려고 했다. 정권이 5번 바뀌는 동안 2차 송환 가능성도, 김동원 감독이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송환 속편’은 이루지 못한 <2차 송환>이 되었다.
2차 송환 운동이 시작된 지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46명의 송환 신청자 중 생존자는 9명뿐이다. 평균 나이 91살. 실패에 실패를 반복하고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2022년에 도착했다. <2차 송환>은 평화를 위협하는 빌런도 아니고 코미디나 로맨스의 배경도 아닌, 아주
[기획] 김동원 감독의 '2차 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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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프랑스 파리 출생.
프랑스인 의사 아버지와 스위스인 은행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파리7구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로 건너가 1940년 스위스 국적 또한 취득. 1948년 부모가 이혼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1949년
소르본대학교 입학, 민족학 전공.
소르본대학교가 있는 파리5구 카르티에 라탱을 중심으로 에릭 로메르가 주도하는 영화 연구 모임, 시네 클럽(ciné-club)에 심취. 그의 곁에는 훗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축이 되는 앙드레 바쟁, 누벨바그의 주요 이름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이 함께였다.
1950년
영화지 <가제트 뒤 시네마>(Gazette du cin´ema) 창간 멤버.
시네 클럽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1950년 6월부터 11월까지 총 5개호 발간. 만 19살의 고다르는 한스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뛰어난 문학적 지식이 돋보이는 글을 썼다. 조지프 L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①] 연표로 보는 고다르의 생애 - 출생부터 1967년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