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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반으로 압축된 7개월간의 투쟁. 다큐멘터리 <보라보라>의 밀도 높은 영상 속에는 지난해 전국의 고속도로를 뜨겁게 달군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치열하게 맞서다가도 조합원들과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왜 같은 노동자가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나뉘어야 하냐며 눈물 흘리고, 그런 서로를 다독이고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많은 이들이 외면했던, 혹은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톨게이트 해고 노동자들의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이면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담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도준 감독뿐만 아니라 김미영, 김승화라는 두 명의 '노동자 감독'이 함께 카메라를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당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이 영화가 희망으로 자리했으면 한다는 김도준 감독의 목소리에서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연대와 투쟁에 대한 신뢰가 짙게 묻어나왔다.
-올해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관객들을
'보라보라' 김도준 감독 - 연대와 투쟁이 가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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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김무열)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건축가다. 어느 날 25년 전 실종된 여동생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자신이 여동생이라 주장하는 유진(송지효)을 만난다. 유진이 돌아온 뒤로 집에서 이상한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서진은 유진이 살아온 과정을 뒤쫓는다. <침입자>는 외부인(유진)이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서 일상에 변화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구성원(서진)이 변화를 의심하면서 서스펜스가 구축되는 스릴러다. 유진은 정말 서진의 실종된 동생일까, 그동안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등등 여러 물음표를 맥거핀 삼아 중반부까지 서사를 끈기 있게 끌고 간다. 이야기 곳곳에서 서부극, 홈인베이전, 스릴러 등 여러 장르를 노련하게 녹여내고,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가족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낸다. 손원평 감독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이다.
'침입자' 어느 날 25년 전 실종된 여동생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후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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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육상부 시절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도원(장동윤)과 진수(서벽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재회한다. 둘은 곧 예전처럼 친해지지만 삶의 행로가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도원은 착실히 몸을 만들어 달리기를 재개하고, 진수는 용역 깡패 일까지 하면서 무리에서 높은 서열에 오른다. <런 보이 런>은 청소년들의 시기와 성장을 다룬 전형적인 사춘기 영화다. 이야기를 책임지는 배우 장동윤과 서벽준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리는 어린 남성들의 세계가 지나치게 폐쇄적인 탓에 관객이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어른다운 어른 캐릭터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단점도 모른 척하기 어렵다. <낯선 자들의 땅>을 연출한 오원재 감독의 신작이다.
'런 보이 런' 청소년들의 시기와 성장을 다룬 전형적인 사춘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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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루는 알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놀림당하는 암탉이다. 이사벨 할머니는 노래를 잘 부르는 뚜루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하지만 어느 날 할머니는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어버리고 만다. 한편 뚜루는 가창력을 인정받아 서커스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할머니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서커스단에 들어가 슈퍼스타가 되기로 결심한다. <슈퍼스타 뚜루>는 시골촌닭이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서커스계의 스타가 되는 과정을 담은 스페인 애니메이션이다. 캐릭터가 다채롭진 않지만 뚜루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뮤지컬 음악들은 그닥 나쁘지 않다. 다만 이야기 구성부터 캐릭터까지 기존 애니메이션들의 패턴을 고스란히 답습, 반복한다는 게 아쉽다. 초라해 보여도 자신을 믿고 매진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익숙한 메시지를 익숙한 방식으로 전한다.
'슈퍼스타 뚜루' 시골촌닭이 서커스계의 스타가 되는 과정을 담은 스페인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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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던 카메론(클로이 머레츠)과 콜리(퀸 셰퍼드)는 졸업 파티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이들의 비밀이 공개되고, 카메론은 가족들에 의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동성애 치료 센터에 입소하게 된다. 센터를 운영하는 마쉬 박사(제니퍼 엘)와 릭 목사(존 갤러거 주니어)에 의하면 애초에 동성애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동성에게 끌리는 ‘죄’만이 존재하며, 센터에 모인 이들처럼 ‘유약한 10대’ 시절에는 ‘악’에 쉽게 지배당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쉬 박사에게 자신을 애칭인 ‘캠’으로 불러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렇지 않아도 여성스럽지 않은 이름이 더욱 남성적으로 느껴지지 않겠냐”는 반문을 듣는 것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릴 뿐이다. 다행히 제인(사샤 레인)과 아담(포레스트 굿럭)이라는 새 친구를 사귀며 카메론의 센터 생활에 작은 활력이 생긴다. 영화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사회와 종교가 규정한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10대의 이야기를 차곡차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 사회와 종교가 규정한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10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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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11km 부근에서 지진이 발생한다. 시추시설 ‘케플러’에 머물던 노라(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조금 늦게 사태를 인지한다. 300여명의 대원 중 탈출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사망한다. 노라와 선장 루시앙(뱅상 카셀)을 비롯해 남은 자는 고작 6명뿐이다. 이들은 1.6km 떨어진 ‘로우벅’ 기지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무거운 슈트를 입고 물속을 걷는다. 그러다 모든 사건이 ‘심해 괴생물체’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더워터>는 한마디로 ‘직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진 영화다. 시작되자마자 즉각적으로 주요 사건이 발생하고, 인물들은 사전정보 없이 목적지로 나아가게 된다. 이웃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적이다. 피하다가 긴장해서 도망치고, 간혹 낙오되기도 한다. 설정이 간결한 대신 서브플롯은 시각적 장치로 채워져 있다. 95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이 ‘불안’과 ‘공포’의 비주얼로 뒤범벅된다. 자칫 B급 괴수영화로 보일 우려가 있지
'언더워터' 모든 사건은 심해 괴생물체로 인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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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장수생 기태(이동휘)는 원치 않게 고향에 내려오게 된다. 그가 소개받은 일터는 오씨(이한위)가 직접 그린 포스터가 걸리고 방송국에서 희귀 문화재 체험하듯 가끔 취재도 오는 ‘국도극장’. 기태는 고향에서 잘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교 동창 영은(이상희)을 만나면서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전지희 감독이 마흔살에 시나리오를 쓴 그의 첫 장편영화 <국도극장>은 감독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다. 감독은 “영화과를 졸업하긴 했는데 영화계에서 일하지는 않았고, 광고회사에 다니는 일도 평탄치 않았다. 더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탄생한 영화의 타이틀이자 주 배경인 ‘국도극장’은 주인공 기태의 질풍노도와 함께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오래된 극장이라 터줏대감 오씨가 직접 그린 포스터가 걸리고 방송국에서 취재를 오기도 하는 그곳은 쓸쓸한 정서를 대변하지만 자칫 감상적으로 빠질
'국도극장' 전지희 감독이 마흔살에 시나리오를 쓴 그의 첫 장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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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프랑스로 떠났던 미라(김호정)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멋진 배우가 되길 꿈꾸며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자도 만나고 결혼도 했지만, 결국 배우의 꿈은 포기해야 했고, 결혼 생활마저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귀국을 축하해주는 술자리, 함께 예술을 꿈꾸며 공부하던 영은(김지영)은 영화감독이, 성우(김영민)는 연극연출가가 되어 있다. 하지만 몇년 전 세상을 떠난 후배, 해란(류아벨)의 빈자리는 이들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문제는 이 ‘또렷’하다고 믿어왔던 기억이 사실은 균열이 난 것임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정확하게 아귀를 맞추어내지는 못하더라도 과거의 망령이 일부는 소환된 기억의 방식으로, 또 일부는 판타지와 뒤섞인 꿈의 방식으로 현재의 주인공을 찾아오는 영화들에 어느 정도 훈련이 된 관객이라면, <프랑스여자>의 진행이 그리 낯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여자>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찾아오는 대신, 현재의 미라를 과
'프랑스여자' 20년 전 프랑스로 떠났던 한 여자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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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간단히 그린 그림을 뜻하는 스케치는 UFO와 함께 이야기할 때 복잡한 맥락을 지닌다. UFO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순간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사진과 영상으로 담지 못했더라도 머릿속에 남은 상을 그림으로 남기는데, 이를 소위 ‘UFO 스케치’라고 부른다. 김진욱 감독의 첫 번째 장편다큐멘터리 <UFO 스케치>는 국내 최고의 UFO 전문가인 맹성렬 교수가 UFO를 봤다는 사람들을 만나 기이한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UFO 스케치를 그려보는 여정을 다뤘다. 짧은 영상을 뜻하기도 하는 제목과 달리, 영화는 시골에서 UFO를 발견했다는 사람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UFO 연구에 매진해온 학자들 사이의 불꽃 튀는 대담도 담았다. 촌부와 학자, 그 누구도 괴짜로 과장되게 다루지 않는 미덕을 갖춘 <UFO 스케치>는 권위자연하지 않는 맹 교수의 태도와 많이 닮은 작품이다.
-어떻게 맹성렬 교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됐나.
=극영화를 준비했던 시나리오에 UF
'UFO 스케치' 김진욱 감독 - UFO보다 흥미로운 UFO 전문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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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영화들은 자의식이 강한 감독의 결과물이었었다.(웃음)” <테우리>는 비선형적인 독립영화를 작업해온 이난 감독이 만든 가장 친절한 영화다. 민주화 세대의 현재와 과거를 재현한 극영화 <테우리>는, <남산의 부장들>에서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 서현우가 국가폭력의 피해자 짱구를 연기해 삼촌의 시민운동 동지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 민주화 세대에게 발견할 수 있는 징후들을 섬세하게 살펴보고, 과거사를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영화적 시도는 일찍이 이난 감독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어쩌면 그것은 “딸에게 과거 사건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영화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진과 뮤직비디오 작업을 넘나들면서도 “제일 재밌는 건 영화를 생각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신작을 부디 많은 관객들이 알아봐주고 이야기해주길. 여기 이난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전작 <비치하트애솔> 이후 7년 만
'테우리' 이난 감독 - 알려지지 않은 시민운동가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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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세상의 끝>(2007) <최악의 친구들>(2009) <남자들>(2013) 등 여러 단편들을 연출했던 남궁선 감독이 7년만에 첫 장편영화 <십개월>과 단편 <여담들>을 들고 나타났다.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초청된 <십개월>은 스물 아홉살인 컴퓨터 게임 개발자 미래(최성은)가 임신을 한 뒤 출산하기까지 10개월 동안 겪는 혼돈과 그로 인한 소동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임신에 대해 미래는 앞이 캄캄하지만 주변인물(특히 남자) 누구도 그에게 속시원한 등불이 되어주지 못한다. 실제로 몇 년 전 아이를 출산한 한 남궁선 감독의 경험담과 고민이 이야기 곳곳에 생생하게 녹아있다. <십개월>과 함께 코리안시네마 단편부문에서 상영되는 <여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도시에서 갈 곳 잃은 청춘들의 상실감을 무성영화
'십개월', 단편 '여담들' 남궁선 감독 - 임신을 선택한 여성들의 공포와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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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제작 동서영화기업사 / 감독 윤용규 / 상영시간 76분 / 제작연도 1949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이때부터 1948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 6·25전쟁으로 충돌하기까지 약 5년간, ‘조선영화’는 남한의 ‘한국영화’와 북한의 ‘조선영화’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를 지칭할 때 여전히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처럼, 해방기 영화계 역시 일제 시기에 이어 조선영화라고 불렀고, 이러한 호칭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호명의 문제에서 짐작해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기 한국영화는 후기(탈)-식민주의 과제부터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국가와 영화의 관계까지 해방기의 어지러운 정치사회상을 몸소 새기고 있다. 우선 해방기 극영화의 대표작 <자유만세>(1946)와 <해연(일명 갈매기)>(1948)부터 생각해보자. 해방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월북 영화인 관련 쟁점과 <마음의 고향>, 그리고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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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콜 오브 와일드' 나는 벅이라고 해
[정훈이 만화] '콜 오브 와일드' 나는 벅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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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박지성 선수처럼 뛰어난 스포츠 ‘천재’들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중산층 부모들에게서 들은 말은 이랬다. 공부가 답이 아니며, 아이가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분야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기 위해, ‘여러’ 종목의 운동과 예술을 고르게 시켜본다고. 초등학생 때 이 과정이 집중되는 이유는 이른바 ‘엘리트 교육’을 일찍 시작하기 위해서다. 모든 걸 일찍, 선행학습시켜 앞서가게 하자는 믿음은 한국 사교육의 종교다. 하지만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은 전문가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선택한 사람보다 제너럴리스트로 살다가 자신의 일을 새롭게 찾아내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다룬다. 천재성에 엄격한 조기교육을 더한 타이거 우즈와 대비되는 비교항으로 테니스 선수인 페더러의 예를 든 것을 포함해, 저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한우물만 파는’ 삶이 아닌, 가능한 한 여러 가지를 ‘일단 해보는’ 삶이 제법 효과적일 수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정신과 의사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