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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는 간첩날조사건이 횡행하던 1980년대를 재현한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에서 주인공 ‘나복만’을 고아이자 문맹으로 설정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1980년 ‘그날’ 주인공 ‘만섭’이 광주에 간 이유를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고 간명하게 정리했다. 수많은 관객이 “내가 연희다!”라고 외칠 만큼 공감을 얻은 영화 <1987>의 등장인물 ‘연희’는 선배에게 품은 연정 때문에 1987년 ‘그날’ 광장에 나간다.
흥미롭게도, 역사적 폭력과 민주화 항쟁을 재현하는 최근 대중 서사에는 ‘이념’을 가진 주인공이 없다. ‘보통 사람’, ‘평범한 소시민’을 돌연 ‘피해자’이자 ‘투사’로 만들 만큼 당대 역사가 폭력적이었다는 점, 지배권력에 저항하며 싸우는 사람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1980년대는 ‘노동해방’, ‘민족민중해방’ 같은 가치들이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유례없는 시대다. 이를
[오혜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을 지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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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행사 ‘2020 미술주간’이 9월 24일부터 10월 11일까지 개최된다. 올해 6회째를 맞는 미술주간은 전국 7개 권역 30개 도시에서 진행되며, 300여개의 미술관, 화랑, 비엔날레, 아트페어 등이 참여해 일상에서 친숙하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또한 올해 미술주간은 ‘당신의 삶이 예술’이라는 주제 아래 코로나19 시대에 예술이 주는 치유와 위로의 힘에 주목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미술주간 홈페이지(artweek.kr)에서는 VR과 ASMR 등 새로운 콘텐츠가 제공되고, 미술여행 브이로그를 통해 여행을 떠나는 등 다채로운 온라인 프로그램도 함께 선보인다. 그중 미술주간과 <씨네21>이 협업한 ‘영화로 만나는 미술’ 코너에서는 영화를 통해 쉽고 흥미롭게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g
2020 미술주간과 <씨네21>이 함께하는 '영화로 만나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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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3개월 넘게 문을 닫았던 프랑스 극장. 대대적이지만 조심스러웠던 지난 6월 22일 재개관 이후 7월 말 기준 관객 수가 지난해 비교 70%나 하락했고,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12개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프랑스에서는 보통 일주일에 14~15편 정도의 작품이 개봉하는데, 최근 개봉 작품이 귀해진 전례 없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극장 측에서는 마티외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1995) 복원 버전을 전국 개봉하는 등 고전영화 상영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작품을 찾는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다. 계속 개봉을 미루던 디즈니사의 <뮬란>마저 자사 OTT에서 공개하기로 전략을 바꾸면서, 지난 8월 26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 극장가에 관객을 불러들여 어려운 극장을 구원해낼 ‘메시아적’ 작품이 될 것이라는 평이 나왔다. 자국 영화 점유율 40%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던 지난해 상황과 비교하자면 정말 자존심 상하는
[파리] '딜리트 히스토리' 주인공 연기한 코미디언 겸 배우 블랑슈 가르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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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혁은 학교라는 공간과 유독 인연이 깊다. 모델로 활동하던 그가 첫 주연을 맡은 작품은 <후아유 학교 2015>였고, 악동뮤지션의 <Give Love> 뮤직비디오에서는 교복을 입고 여고생이 짝사랑하는 소년으로 등장했다. JTBC의 예능 프로그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는 실제 고등학생들과 학교 생활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문 교사 홍인표를 연기한다는 건 일견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학교를 물려받은 뒤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한문 선생님, 마른 데다 자세까지 구부정해 삶에 대한 의욕이라곤 없어 보이는 홍인표는 맑고 건강한 청춘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남주혁과 사뭇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삶에 찌든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한 배우 남주혁의 변화를 처음으로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 다음’ 벌어질 일을 궁금하게 만든다.
교복을 입고
<보건교사 안은영> 한문교사 연기한 남주혁이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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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던 지난 9월24일, 배우 정유미는 한 손엔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또 다른 손엔 젤리를 쥔 채 인터뷰 장소에 들어왔다. 넷플릭스로부터 출연 제안과 함께 건내 받은 원작 소설은 많은 페이지들이 군데군데 접힌 채 너덜너덜했다. 페이지마다 줄을 친 책을 보니 그가 얼마나 이 책을 신경 써서 읽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정유미는 “평소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다. 원작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생각할수록 이야기의 본질이 어렵지 않아 좋았다”며 “이야기의 여러 매력 중에서도 유독 호기심이 생긴 건 은영이가 욕을 하는 대목이었다. 전작을 통틀어 욕을 한 적이 없었다. 소설이라는 큰 울타리가 있었던 덕분에 처음에는 단순하게 접근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정유미가 연기한 안은영은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진 인물이다.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거나
정유미, <보건교사 안은영> 이경미 감독 문자 받고 펑펑 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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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8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운영하는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가 개소했다. 그 출발을 지휘하는 조영각 센터장은 인디포럼 사무국장, 한독협 사무국장을 거쳐 2002년부터 2017년까지 집행위원장으로서 서울독립영화제를 이끌었고, 이후 영진위 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돼지의 왕>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사이비> 등 프로듀서로서 10여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잔뼈가 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한국 독립영화 역사의 산증인인 그는 “독립영화가 2주간 극장에서 상영되고 온라인으로 넘어가며 허무하게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만나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디그라운드의 첫삽을 떴다. 개별 배급사나 창작자들이 못다 하는 부분을 채워나가고 싶다는 그를 신당동 인디그라운드 사무실에서 만났다.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가
조영각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 센터장 - 독립영화, 더 많은 관객이 더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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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를 한껏 끌어올린 쨍한 화면 위로 스케이트보드를 탄 배우 이성경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온다. <하트어택>을 가득 메울 화창한 낭만과 낙관이 절로 감지되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심장마비를 막기 위해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여자의 이야기인 <하트어택>은 장편 데뷔작인 호러 스릴러 <콜>을 통해 90년대생 감독의 등장을 알린 이충현 감독의 단편영화 프로젝트다. 촘촘한 긴장감, 충격적인 반전으로 단편영화로서는 이례적인 유명세를 불러일으켰던 <몸 값>, 현재 개봉을 준비 중인 박신혜·전종서 주연의 <콜>을 거쳐 그가 다시 한번 단편의 정수에 도전했다. 10월 5일 왓챠를 통해 공개되는 <하트어택>의 새로운 시도들에 관해 이충현 감독에게 직접 물었다.
-앞서 작업한 단편영화 <몸 값>과 장편 데뷔작 <콜> 모두 서늘한 스릴러였는데 이번엔 로맨스 장르에 도전했다. 밝고 동화적인
단편영화 '하트어택' 이충현 감독,“귀엽고 달콤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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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광고’ 논란이 유튜브 생태계를 뒤집어버린 지난 8월, 타이밍도 좋게 ‘앞광고’ 콘텐츠가 등장했다. <네고왕>은 매주 하나의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본사를 찾아가 ‘가격을 깎아달라’거나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달라’는 소비자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대표와 직접 협상해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유튜브 예능이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에는 부담이 가지 않게 하는 계약이라
못 박는다 하더라도 콘텐츠 자체가 일종의 유료 광고인 만큼 시청자가 거부감을 느낄 요인은 충분한데, 광고나 ‘네고’를 떠나서도 일단 <네고왕>은 웃기다. 광희가 진행하기 때문이다.
시민 인터뷰를 하려다 마주친 식당 주인에게 “어머님, 저 누군지 아세요?”라고 친한 척하고, 모른다는 답이 돌아와도 굴하지 않으며 “저 광희예요! 왜, 성형한 남자 있잖아요!”라고 싹싹하게 인지도를 올리는 광희의 기세는 신인 시절 “눈, 코, 이마, 다 고친” 사연을 흥겹게 늘어 놓으며 토크쇼를 장악하던 모습 그대로다. 여남노소 누
달라스튜디오 '네고왕',광희왕은 센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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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이 중단된 요양원을 관리하는 블라드(유리 비코프). 차 사고로 인해 길을 잃은 한 부부가 요양원에 머물게 되면서 그의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조용히 요양원의 문을 두드리고 베라는 자신의 남편 보가토프가 회사 자금을 훔쳐 현재 쫓기는 상태라고 고백한다. <더 가드>는 요양원에 모인 순간을 기점으로 세 사람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을 긴장감 있게 묘사한다. 영화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배우 유리 바코프는 혼자서 3역을 소화하며 열연을 펼쳤다. 텅 빈 요양원의 황량함과 인물들의 외롭고 허무한 정서는 잘 묘사됐으나, 주인공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부부를 돕는 동력이 무엇인지는 잘 와닿지 않는다. 제30회 러시아 키노타브르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더 가드' 제30회 러시아 키노타브르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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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산악 거인 예티는 정말 존재할까? 예티의 실존을 굳게 믿는 인류학자 사이먼(박성영)과 그의 동료인 탐정 넬리(이다은)는 예티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히말라야로 향한다. 현지인 테징은 처음엔 사이먼의 말을 비웃는 듯했지만, 결국 ‘당신을 돕는 게 나의 일’이라며 산악 가이드를 자청하고 함께 산에 오른다. 힘들게 산을 오르던 중 사이먼 일행은 설원에 찍힌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하고 흥분한다. <예티: 신비한 동물 탐험대> 는 예티를 찾아 떠난 사이먼 일행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캐릭터의 완성도가 높고 예티를 찾아가는 길목마다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결국 자연의 편에 서서 이들을 보호한다는 메시지 또한 돋보인다. 자극적인 내용이 없어 온 가족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예티: 신비한 동물 탐험대' 온 가족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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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을 쬐면 돌처럼 굳어버리는 트롤들은 빛을 피해 쏜살같이 달리는 것을 최고의 능력으로 꼽는다. 햇빛 사이로 달리는 경주에서 우승하면 트롤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 어린 트롤 트림(손선영)은 실력을 갈고닦아 아버지 그롬(김진홍)처럼 왕이 되고 싶다. 그러나 만년 2등 그리머(이승행)는 이들 부자를 가만두지 않고, 트롤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트롤킹>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모험을 떠나는 트림의 이야기다. 오해가 쌓였을 뿐, 세상에 나쁜 트롤은 없다는 교훈을 얻기까지 우연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트롤 세계관을 흥미롭게 설득해나간다. 특히 리듬감이 좋다는 이들의 특성을 이용해 펼쳐지는 뮤지컬 시퀀스들을 보고 듣는 재미가 있다.
'트롤킹' 위기에 처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기 위한 트림의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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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많은 사고뭉치 소녀 마샤는 매일 분주하고 바쁘다. 조용한 숲도 마샤가 등장하면 언제나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진다. 정원을 사랑하고 낚시를 즐기는 평화주의자 곰은 작지만 무서운 손님 마샤가 찾아올 때마다 늘 난감하지만, 마샤와 함께하는 모험이 싫지만은 않다. <마샤와 곰>은 공식 유튜브 채널 전체 누적 조회수가 247억뷰를 넘어서는 러시아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마샤와 곰: 최고 중에 최고> 는 현재 시즌3까지 나온 시리즈 중 인기 에피소드를 몇편 묶어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끄러운 소녀와 온화한 곰, 그리고 동물 친구들의 자잘한 소동극은 흐뭇한 웃음을 안긴다. 극장판으로 따로 제작된 건 아니지만 애초에 옴니버스 방식인 데다 영유아 대상의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엔 무리가 없다. 특히 시리즈의 핵심이기도 한 음악과 춤이 흥겹다.
'마샤와 곰: 최고 중에 최고' 영유아 대상의 러시아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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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애니메이션 <미니특공대>의 다섯 번째 시리즈. 리더인 볼트가 블루시티 최고의 맛집인 미스터 J 버거의 광고모델로 발탁되면서 미니특공대를 탈퇴한다. 볼트가 화려한 스타 생활을 즐기는 동안 햄버거 괴물은 식당들만 골라 파괴한다. 위기감을 느낀 남은 멤버들은 햄버거만 먹는 세상을 만들려는 브레이커 J와 햄버거 괴물 군단에 맞선다. 리더가 빠진 채 햄버거 괴물, 콜라 괴물, 감자 괴물, 닭다리 괴물, 피자 로봇 등 만만치 않은 악당들을 상대로 힘겹게 싸우는 미니특공대의 활약이 심장을 뛰게 한다. 강해진 적만큼 미니특공대의 액션 또한 전편에 비해 더욱 화려해졌고, 박진감이 넘친다. 어린이 관객에게 패스트푸드를 편식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극장판 미니특공대: 햄버거괴물의 습격> 인기 애니메이션 '미니특공대'의 다섯 번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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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더이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지 못하는 시대, <부활: 그 증거>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다. 이용규 교수, 배우 권오중·이성혜 등 세 사람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부활의 증거를 찾기 위해 인도 바라나시와 첸나이,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려낸 로드무비다. 다만, 종교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교과서 같아 다소 지루한 점은 아쉽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잊혀진 가방>(2010), <순교>(2015), <제자도: 제자 옥한흠2>(2016) 등 기독교 정신을 담아낸 김상철 감독이 지난해 MBC에서 방영된 TV용 다큐멘터리 <부활>을 극장용 영화로 재구성했다.
'부활: 그 증거' 종교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