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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버스는 독이 든 성배다. 또 다른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모험은 무한대의 가능성을 안겨준다. 동시에 멀티버스는 하나의 선 위에 존재하는 이야기 세계를 파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대와 우려를 한몸에 받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드디어 공개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새롭고 혁신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정도 난장판을 벌인 것치고는 꽤 준수하게, (‘광기’라는 제목과 달리 이성적으로) 정리해냈다. 무엇보다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이제까지 나온 마블 유니버스와는 확실히 다른 색깔을 선보인다. 대부분은 감독인 샘 레이미의 영향이다. 샘 레이미는 호러와 코믹을 섞는 자신의 장기를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했고, 마블의 운명을 쥔 거대 프로젝트에 의도된 엉성함과 농담 같은 상황들을 부여했다. 이 대담한 능청 덕분에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걷던 마블 유니버스 영화 사이에서 확실한 개성을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호러와 코미디의 조합이 어떻게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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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일상의 경험을 풍부한 언어로 다루고 적재적소에 비범한 시각을 드러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써야지.’ 쓰기 전엔 항상 이런 결심을 하는데 정신 차려보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라는 문장이 첫줄에 있다. 한동안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글을 써보는 연습도 했는데 꼭 인터넷 번역기를 돌린 것 같은 어색한 문장들이 알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글을 잘 쓰는 이들은 아마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작가로서 성장하겠지만 나는 그냥 거기서 멈춘다. 내 말과 글은 언제나 해결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머물고 그 궤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취를 감춘다.
힘을 컨트롤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들의 애교와 엉뚱함이 수만개의 클립으로 가공되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동안 시청자 게시판엔 ‘아이들이 우는 소리는 제발 편집해주시길 바란다’는 건의가 쇄도한다. 작고, 연약
칼럼니스트 복길이 말하는 오은영의 방송: 오은영이 대신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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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를 향한 선망은 시대를 초월한다. 입시 커트라인까지 상향시켰던 <허준>의 인기가, 아덴만의 영웅이 된 외과의사 이국종 교수를 둘러싼 현상이, 웬만하면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 의학 드라마의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지금 현대인들은 오은영 박사를 정신적 화타로 여긴다. 30여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연구 논문을 쓰고, 환자들을 진료하고, 방송과 일간지 칼럼을 통해 정신건강 문제를 분석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해온 오은영 박사는 시대적 흐름과 순행하며 활동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마음의 병은 과학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된 유기체로서 개인을 조명하는 사회 분위기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게끔 이끌었다. 오은영을 통해 훈육법을 배우던 부모를 넘어서서 이제는 아이를 키우지 않는 이들도 오은영의 진단을 기다린다. 오은영의원 소아청소년클리닉, 오은영 아카데미, 오은영 지능개발연구소를 이끌
심리 상담 방송의 인기 이끄는 오은영 박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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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를 잃고 손가락질 받으며 독재자의 곁을 지킨 사람. 1970년대 말, 과테말라 독재 정권 내무부의 언론 담당으로 일했던 기자 엘리아스 바라오나의 삶은 그렇게 영원히 오명으로 남을 뻔 했다. 반정부 언론을 탄압하는 역할을 주도했던 그는 시간이 흐른 뒤 사실은 스파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엘리아스 바라오나의 진짜 임무는 내무부의 정보를 빼돌려 민주화 인사들을 살해 모의에서 구해내고, 반군의 게릴라 활동을 돕는 일이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든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은 추방되어 망명 생활을 한 아버지의 회고를 듣고 자라온 밀레니얼 세대로, 조국의 침통한 현대사를 건조하고도 유려한 한 편의 시적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아직 아버지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그는, 시상식이 끝난 밤 떨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과테말라의 땅에 스며든 수많은 핏방울들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전 군부 독재자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정부 이전에도 과테말라는 독재 정권이 지배한 역사를 반복적으로 거쳐왔다.
JeonjuIFF #10호[수상작 인터뷰] <스파이의 침묵>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 과테말라 독재의 역사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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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정밀하고 조용한 언어로 혁명의 시간을 그리는 영화다. 1870년대 스위스, 쥬하 산맥 아래의 시계 공장에도 산업화의 물결이 닿는다. 손수 시간을 빚어내는 섬세한 노동자 일군들은 자긍심 뒷면에서 노동 환경과 조건에 대한 의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지도 제작자이자 여행자인 러시아인 표트르가 시계공장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동행하는 동안 영화는 시계공장과 자본주의의 공고한 시스템 아래 결코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응시한다.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의 세밀한 흐름이며, 또 소리없이 끓어오르는 자각의 순간들이다. <도즈 후 아 파인>(2017) 이후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스위스의 감독 시릴 쇼이블린은 목가적 정치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며 관객을 사유하게 만든다.
왜 과거로, 19세기 시계공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는가.
내 바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영화적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과거를 재현한다는 것은 일종
JeonjuIFF #10호 [수상작 인터뷰]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시릴 쇼이블린 감독, 목가적인 정치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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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오잔, 열아홉 라마잔은 도쿄에 정착한 터키 쿠르드족 난민이다. 터키의 인종 탄압을 피해 도쿄 교외에 자리잡은 쿠르드족 난민들은 1990년대 이후로 꾸준히 증가해 현재 2천 명을 웃돌지만 정부는 여전히 이들에게 난민 비자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고국의 전시 상황에 참여하지 못해 갈등하는 오잔과 난민 신분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픈 라마잔. 비록 욕망의 세부는 다르지만 이들은 일본 사회가 지워버린 그림자 지대 안에서 함께 신음하며 버틴다. 일본의 다큐멘터리스트이자 TV 프로그램 프로듀서인 휴가 후미아리 감독은 단편영화에서부터 쿠르드족 난민 문제에 주목해, 첫 장편 <도쿄의 쿠르드족>에서 청년 쿠르드족들의 억압적인 현실을 생생히 포착했다. 2015년 격화된 시리아 내전 상황으로부터 마음 속 불씨를 틔운 그는, 일본이 어째서 난민들에게 “안전하고 평화롭지만 동시에 매우 무기력하고 침잠된 장소”일 수밖에 없는지를 파헤쳐 나간다.
장편영화 <도쿄의쿠르드족
JeonjuIFF #10호 [수상작 인터뷰] <도쿄의 쿠르드족> 휴가 후미아리 감독, 무엇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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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13구>는 미국 그래픽노블 작가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각기 다른 세 작품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일본계 미국인인 토미네의 뉴욕 스케치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했나.
= 우선 캐릭터들에 매혹된 측면이 크다. 루시 장이 연기한 아시아인 에밀리, 카미유 베토미에가 연기한 포르노 스타 앰버 스위트 같은 인물은 나 혼자서라면 절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작품을 파리로 가져오면서 발생할 이국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관심이 갔다. 다양한 젊은이들이 뒤섞여 살고 아시아타운이 자리한 파리 13구 자체가 그런 곳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이국적으로 색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흑백을 택했다. 파리는 너무 많이 재현된 도시라 이제는 거의 박물관에 박제된 곳 같다는 인상마저 드는데 흑백 화면이 확실히 도시를 낯설게 보는 데 도움이 됐다.
- 명도가 높고 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은 흑백 화면을 써서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 현실과 디지털 세계, 사랑과 불신
'파리, 13구' 자크 오디아르 감독 "사랑이 필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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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노동절’이라는 이름조차도 금기시되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려왔고 지금도 불리는 5월1일은 사업장에 고용되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환경에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투쟁한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다. 카페에 출근하는 대학생의 주휴수당부터 늦은 시간 사무실을 지키는 회사원의 야근수당까지, 노동법이 보장하는 내용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 인간이 사회구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의 부품이 되어야 하더라도 인간성이 박탈된 채 완전한 부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워왔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근대사회의 기본 전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선언은 각자가 하나의 통합된 인간이며 그 사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다가오는 시대의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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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의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과 <천국은 아직 멀어>에 출연하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두 차례 호흡한 배우 현리는 감독의 유명한 리허설 방식에 관해 흥미로운 부연을 해주었다. 감정을 뺀 채 대사를 읽되 “상대 배우 뱃속의 종을 울리는 상상”을 하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그는 매주 일요일 라디오 DJ를 할 때도 이 태도로 게스트와의 대화에 임한다. “타인의 말을 최대한 듣는 법을 배워간다”는 그는 대화에서도 상대의 뱃속 종을 청명히 울린다. 캐릭터간 장구한 대화가 서사를 축조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세계에 현리가 더없이 어울리는 이유일 테다. 한국인 배우 현리는 일본과 영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연세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다. 3개 국어에 능통한 그는 “대학만 졸업하면 하고픈 걸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순전히 자신의 언어 능력이라면 졸업을 빨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법대에 진학했다. 그의 언어 감각은
[WHO ARE YOU] '우연과 상상' 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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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정준호)은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어선 ‘어부바호’를 몰며 홀로 어린 아들 노마(이엘빈)를 키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남동생 종훈(최대철)은 마흔몇의 나이에 모은 돈도 없으면서 덜컥 두 바퀴 띠동갑의 중국계 여성을 신붓감으로 데려와 결혼하겠다며 생떼를 쓴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아들에겐 죽은 아내에 관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지갑 사정은 빠듯한데, 9년째 대출 중인 선박 회사에 대출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어부바호를 더이상 몰 수 없다. 그 와중에 노마는 선박 회사 전무의 아들과 갈등을 빚고, 종범은 고용 관계뿐 아니라 보호자 관계로도 전무와 얼굴을 붉힐 일이 생긴다. 그럼에도 종범은 가부장으로서 어린 아들과 철없는 동생 앞에서 언제나 밝고 든든한 모습을 보인다.
<어부바>에는 눈에 띄는 독창성보단 가정의 달 개봉에 걸맞은 안온하고 익숙한 서사로 가득하다. 하늘을 보며 사별한 가족의 빈자리를 떠올리는 구성원의 슬픔, 영화의 제목을 듣는
[리뷰] '어부바' 답보와 퇴보 사이 표류하는 가족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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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들의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꿔놓는 저 은은한 미소의 소유자는 누구일까. 바로 베트남 출신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이다. 마크 J. 프랜시스와 맥스 퓨 감독은 스님의 명상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 머물며 그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3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나를 만나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목이 궁금한 관객에게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자료다. 베트남 반전 운동을 벌인 틱낫한이 베트남 정부로부터 망명을 강요받자 프랑스로 건너가 플럼 빌리지를 설립했다는 몇줄의 자막이 사실상 그에 관한 유일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수행하며 틱낫한 정신에 감응한 두 감독은 혹여나 스승을 우상화할까 염려해 의도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는 촬영 방식을 택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플럼 빌리지 내부를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본 카메라는 외부 활동에 나서는 제자들을 따라 도시로 나갔다가 그들의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나를 만나는 길>은 명상이
[리뷰] 스승 대신 제자들이 이끄는 무던한 명상 체험, '나를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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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소치틀 고메즈)는 어느 날 멀티버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힘에 눈을 뜨지만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다. 정체불명의 악마가 아메리카를 죽이려 하자 다른 우주의 스트레인지가 이를 막아보지만 결국 살해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로 넘어온 아메리카는 어벤져스 멤버인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도움과 보호를 받는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웨스트뷰 사건 이후 잠적한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곧바로 그녀가 사건의 진정한 흑막, 스칼렛 위치임이 드러난다. 스칼렛 위치는 자신의 원하는 멀티버스로 가기 위해 아메리카의 힘을 흡수하려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아메리카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스칼렛 위치를 피해 또 한번 다른 멀티버스로 도망치지만 그의 끈질긴 추격을 받는다.
제목 그대로 대혼돈과 광기로 가득하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연출을 맡은 샘 레이미 감독은 호러와 유머, 괴이한 액션이 뒤섞인 자신의 색깔을 마블 유니버
[리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의외로 단순한 이야기+이미 봤던 상상력+조악한 듯 현란한 눈뽕+샘 레이미가 늘 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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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콜센터에서 영업 일을 하는 에밀리(루시 장)는 룸메이트를 찾고 있다. 노령의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들어간 뒤, 넓은 아파트를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진 탓이다. 근처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카미유(조나단 아모스)가 공고를 보고 그녀를 찾아오고, 이내 두 사람은 선을 넘는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카미유에게 에밀리가 반기를 들면서, 둘 사이에는 금이 간다. 한편 보르도 출신의 늦깎이 대학생 노라(노에미 메를랑)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한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극복하려고 그녀는 파티에 과감한 복장으로 참석하는데, 우연히 선택한 가발 때문에 소동에 휘말린다. 언뜻 캠걸 앰버 스위트(카미유 베토미에)와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후 노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선다. 그렇게 카미유와의 교류가 시작된다. 카미유를 중심으로 세 인물들은 서로 연결된다. 과도하게 직설적인 이들의 상황은, 실상 우리 삶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리뷰] 타이트한 몽타주 사이, 음악처럼 흐르는 대사들 '파리, 1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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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있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천원에 산 병아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지자 온 동네 떠나가라 울어대던 시절이.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아니 무뎌지고, 외부의 규격에 순응해가는 것이 어른이라면 아예 성장을 포기하고 싶었던 남자가 있었다. 유원지에 숨어 사는 어설픈 마술사 리을(지창욱)을 두고 누군가는 낙오자라 폄훼할지 모른다. 하지만 계급의 벽에 부딪쳐 굴욕을 자처하는 아이(최성은)와 잘 닦인 아스팔트가 보장하는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처음으로 질문하는 일등(황인엽)에게 리을은 현실을 망각하는 찰나의 환시를 경험케 한다. 지창욱은 지독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마법을 논하는 <안나라수마나라>의 모순형용을 성립시키는 중심축이다. 데뷔 초부터 주목받은 미남 청춘 스타에 머물지 않고 치열하게 다양한 무대의 문을 두드렸던 지창욱은 판타지와 평범성을 고르게 추구한다. 리을은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처럼 “진짜 잘생긴 미술사”지만, 이따금 스치는 눈빛에
'안나라수마나라' 지창욱: 하고 싶은 대로, 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