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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대영박물관, 프랑스에 루브르박물관이 있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은 앞으로 이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 시작과 현재, 미래를 총망라하며 주도권을 쥐고 보여줄 수 있는 오브젝트는 역시, 영화다. 영화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터를 잡은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이 9월30일 개관했다. 공식 오픈에 앞서 9월21일(현지 시각 기준)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이 개관식을 가졌다. 시민단체, 문화·엔터테인먼트 업계 핵심 리더 등은 물론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참석해 박물관을 탐방했다. <씨네21>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프레스 투어에 참석했다. 먼저 임수연 기자의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탐방기는 1300만점 이상의 박물관 컬렉션을 미리 엿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을 이끄는 빌 크레이머 디렉터 및 대표이사와 재클린 스튜어트 최고 예술 프로그램 책임자의 인터뷰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비전과 야심을 보여준다.
3층 롤렉스 갤러리에
HOUSE OF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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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벽을 가진 천재 수사관과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 클래식한 레시피는 창작자들에 의해 수없이 변주되며 대맛집들을 낳았다. 그중 주요 배역을 여성으로 꾸린 드라마 <킬링 이브> 시리즈의 한국형 프랜차이즈인가 싶었던 JTBC <구경이>는 ‘세상에 없던 탐정’을 부제로 달았으니. 무슨 자신감인가 불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의심은 구경이(이영애)의 속성이다. 강력계 형사 시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것도, 가까운 이들은 물론 자신까지 피를 말리는 것도 의심에서 비롯한다. 남편의 자살로 해명을 구할 수 없는 의심에 갇힌 그는 5년간 방구석 게임 폐인 생활을 하다 옛 동료 나제희(곽선영)의 의뢰로 보험조사관 일을 맡게 된다. 특출한 능력이 핸디캡이 되는 캐릭터야 두말할 것 없이 매력적인데, 나는 좀 지저분한 장면에서 그에게 붙들려버렸다.
제희와 식당에 간 구경이의 주변에 CG로 만든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씻지 않아 냄새나는 사람임을 과장하는 익숙한 기호다. 비
사이코패스 살인범 캐릭터의 재해석, '구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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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와 호소다 마모루, 도쿄국제영화제서 만나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데뷔작은 잘 알려진대로 <백색인>(1994)이 아니라,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촬영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낙원을 찾아서>(1992)다. 지난 11월7일, 제34회 도쿄국제영화제(TIFF)의 대표 프로그램, ‘아시아 라운지 컨버세이션 시리즈’를 통해 호소다 마모루 감독과 만난 봉준호 감독이 고백한 사실이다.
“역시! <괴물> <옥자>에서 엄청난 ‘애니메이션 스피릿’을 느꼈어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아이> <미래의 미라이> 등을 만든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화답. 신작 준비 차 잠시 LA 체류 중이었던 봉준호 감독은 화상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꼼꼼한 관찰력과 집요한 애정 공세, 그리고 유머를 더해 동료 거장의 비기를 물었다. 두 감독이 셀 애니메이션과 CG 애니메이션의 조화를 고민하거나, 관객을 이끄는 설득력과 독창적
'애니메이션 스피릿'으로 통한 봉준호 X 호소다 마모루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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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자연, 생명, 평온, 재생, 조화, 회복, 부활의 색이다. 붉음과 푸름의 중간 스펙트럼에 위치한 초록은 균형과 내면의 평화, 그리고 넘치는 생명력을 반영한다. 동시에 초록은 우울과 죽음, 붕괴와 질투의 색이기도 하다. 짙은 어둠에 물든 초록은 우리를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초록은 그렇게 탄생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품고 있다.
윤서진 감독의 <초록밤>은 초록의 조명 아래 잠식된 영화다. 제목만 듣고선 이게 초록의 어떤 얼굴에 가까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초록과 밤의 조합은 어딘지 위태롭게 들린다. 이것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하루는 무기력하 다. 살림을 도맡은 어머니는 늘 지쳐 있다. 장애인 활동 보조사인 아들에게 내일을 꿈꾸는 건 사치다. 이들 가족을 잠식한 초록은 어둡고 무겁고 우울해 보인다. 이들의 삶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짓는 순간 영화는 기이한 마력을 발휘한다.
<초록밤>은 매우 단
녹색 광선의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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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 나는 실패한 덕후가 되었다”라는 내레이션이 고백하듯, 오세연 감독은 TV에 출연해 스타에게 러브레터를 낭독한 적도 있는 이른바 성공한 덕후, 성덕이다. 그가 만든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초청작 <성덕>은 가수 정준영의 성범죄 이력이 드러나자 오랜 팬 생활을 접은 오세연 감독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자칭 ‘관종’, 덕후의 DNA를 타고난 그는 정준영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에서 자신을 성장시킨 과거의 긴 시간들이 통째로 ‘흑역사’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마주했다.
<성덕>에서 오세연 감독은 자신의 혼란을 주변 친구들의 얼굴, 엄마의 얼굴에서도 찾아낸다. 누구에게나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는 있기 마련. 그렇게 <성덕>의 카메라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박사모)까지 찾아가기에 이른다. 불편한 존재들을 응시하고 복잡한 내면을 끌어안은 결과, 범죄 앞에서 서로를 지
흑역사라는 공감대 - <성덕> 오세연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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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드디어 오랜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 드니 빌뇌브라는 천재 연출가를 앞세워 미국을 대표하는 SF시리즈 <듄>을 영화로 각색해낸 것이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듄>은 말하자면 독이 든 성배였다. 손대면 저주받는 투탕카멘의 가면 같은 사막의 보물. <듄>을 16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자던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의 광기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렀던가. 이 방대한 작품을 2시간에 우겨넣길 강요받은 데이비드 린치의 고충은 얼마나 끔찍했는지. 또 그 결과는 얼마나 처참한지. 제작 기간 내내 속을 박박 긁힌 린치는 감독판 제작도 거부하고 아예 자신의 이름을 빼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2000년에 방영된 TV시리즈가 절반의 성공을 거두긴 했는데, 역시 시대와 매체의 한계가 아쉽다. 수십년간 상상 속에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쌓아온 독자들을 만족시키기엔 비주얼 면에서 살짝 부족했다는 의미다. 이후로도 <듄>을 영상화하려는 시도는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듄'의 나머지 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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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를 보고 <라쇼몽>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구성적인 특징에서 그렇다. 영화는 1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장(맷 데이먼)과 자크(애덤 드라이버)의 결투에 얽힌 사연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그러다 2장에서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이것이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사람의 관점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까지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포함한 세 인물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같은 사건이 두번 혹은 세번씩 반복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라쇼몽>식’ 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된 지 오래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라쇼몽>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2장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의 전개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어지는 세개의 챕터에서 상이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가 반복함으로써 멈추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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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예술에는 쓸모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밝은 눈으로 짚는 일이 비평의 쓸모 중 하나쯤은 될 것이다.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작품의 외연을 넓히려는 비평의 노력이 지금으로선 절실하다고 느낀다. ‘프런트 라인’에 합류한 취지다.
21세기 웨스턴 장르의 정의는 다시 내려질까. 다음 영화들을 살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 영화들 사이의 우연과 필연을 연결지어 살펴보자. <퍼스트 카우>(2019),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이하 <레버넌트>),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미나리>(2020), <노매드랜드>(2020), <뉴스 오브 더 월드>(2020)…. 2010년대 후반 이후 미국영화에 나타난 어떤 시류는,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하나의 하위 범주를 만들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퍼스트 카우>는 <레버넌트>와 1820
'퍼스트 카우'를 계기로 본 미국 서부영화의 새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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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가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흥행 몰이에 나섰다. 11월8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터널스>는 지난 주말 사흘(5∼7일) 동안 113만8558명의 관객을 동원, 매출액 점유율 82.4%를 차지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로써 11월3일 개봉 이후 누적 관객 약 161만명을 모은 <이터널스>는 개봉 첫 주 누적 스코어 136만을 달성한 <블랙 위도우>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이터널스>의 기세는 올해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작들과 비교해서도 단연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2021년 외화 흥행 1위인 <블랙 위도우>(7월7일 개봉)가 136만 관객으로 출발해 누적관객수 총 296만을 기록했고, 전체 박스오피스 1위인 <모가디슈>(7월28일 개봉)는 개봉 첫 주에 78만 관객을 동원하고 누적관객수 361만으로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코로나19 거리두기 3·
개봉 첫 주 161만 동원한 <이터널스>, 올해 흥행 최단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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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빈 감독의 <안녕, 내일 또 만나>가 11월4일 개최되는 제11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전작 <프랑스 중위의 여자> <장례식의 멤버> <나와 봄날의 약속> 등에서 그랬듯, 백승빈 감독은 영미 문학에서 받은 영향을 영화의 서사 구조, 인물과 긴밀하게 연결짓는다. 동준(심희섭)은 17살 무렵, 친한 형 강현(신주협)에 관해 후회 섞인 선택을 한 뒤로 세 가지의 평행 우주에서 서로 다른 ‘동준’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한다. 전부 다른 길을 걷는 와중에도, 후회를 후회로 남기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다. 세명의 동준을 통해 세번의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백승빈 감독을 만났다.
- <안녕, 내일 또 만나>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심정이 어땠나.
= 김조광수 집행위원장이 “개막작을 찾고 있는데 얼마 전 퀴어영화 작업을 끝마쳤다고 들었다.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작 '안녕, 내일 또 만나' 백승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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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야기가 메마르고, 질문이 없어진 자리에서 묻다
온몸이 마비된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의 육체가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 있다. 런웨이 무대처럼 길게 뻗은 테이블 맞은편엔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전리품을 감상하듯 적수의 패배를 음미 중이다. 축 늘어진 빨래마냥 의자에 간신히 걸쳐 있음에도 레토 공작의 몸은 잘 빚은 조각품처럼 탄탄한 생기를 잃지 않는다. 이윽고 하코넨 남작이 풍선처럼 괴이한 몸을 띄운 채 허공을 미끄러져 다가오자 레토는 마치 황소를 잡는 투우사처럼 이빨 사이 감춰두었던 독안개를 뿜는다. 넓고 황량하고 검은 방은 순식간에 독 안개에 뒤덮이고 어느새 현장을 벗어난 카메라는 바깥에서 문이 닫히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리듯. 하나의 세계가 종언을 고하듯. 눈꺼풀이 감기듯.
황망한 기습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레토가 하코넨과 대치하고 마침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이 시퀀스는 한폭의 그
3인3색 비평, 송경원 기자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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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와 토토가 들어 있는 집을 들어올린 회오리바람처럼, 세상을 흔들어버린 바이러스와 함께한 지도 2년이 다 되어가며 변화의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익숙해지길 바랐지만 변화가 다시 다른 변화를 추동하는 도미노 같은 연쇄반응은 매일의 적응 또한 만만치 않게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멀미를 덜어드리기 위해 먼 시점의 상수가 있음을 알리려 오랜만에 책을 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동료들, 선생님들과의 교류에서 얻은 배움을 숙고의 시간을 더해 정리해야 하는 일이라 좀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웠지만, 물리적 이동이 제한되며 시간이 허용된 것 역시 어려움 속에서 주어진 작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으면 알려야 할 책무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알릴 것인가가 그다음으로 따르는 질문이 된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와 같은 세칭 4대 매체가 가진 위상과 영향력에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한 동영상 플랫폼과 글로벌 OTT는 다양성과 접근성을 기반으로 수년 전부터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28일, 짧지만 꽤나 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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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바트화 폭락에 따른 태국 금융 위기가 본격화되자 부동산 개발 사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들을 둔 단짝 보움과 이브는 안락하던 삶이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한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견딜 수 없던 보움과 이브는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이브는 손쉽게 자기 턱 아래에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보움은 겁에 질려 죽은 이브를 두고 자리를 피한다. 죽어가는 이브의 눈동자에는 보움의 뒷모습이 비친다. 이브의 저주는 20년이 지나 발현된다. 아버지를 이어 부동산 사업을 하는 보움(남팁 총랏뜨위분)은 아버지들이 일으키려 했고 이브가 자살한 건물을 개발하려 한다. 보움와 함께 건물에 들렀던 딸 벨(아피차야 통캄)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몽유병 증세를 보이거나 자해를 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 모든 게 이브의 저주라는 걸 깨달은 보움은 저주를 막기 위해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싸반>은 태국 공포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다. 특히 점프 스케어와 CCTV 화면을 두드러지게
[리뷰] 태국 공포영화의 자장 '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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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오더>는 체제 전환 이후의 세상을 다루기보다 전환 과정의 혼돈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영화다. 민중에게 무질서는 심연과 같은 절망이다. 감독은 이 절망의 순간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포착하거나 멀리서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멕시코 고급 주택가에서 마리안느(나이안 곤잘레스 노르빈드)는 성대한 결혼 파티를 벌이고 있다. 집 안 분위기와 달리 집 바깥은 긴장감이 감돈다.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있고, 몇몇 손님들은 시위대가 뿌린 페인트에 맞은 채 들어오는 등 어수선하다. 이 와중에 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마리안느는 유모의 집으로 향한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시위대는 집 담벼락을 넘어오더니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믿었던 경호원과 가사도우미는 시위대에 합세해 고용인들을 위협한다. 한편 시위대 사이를
뚫고 유모의 집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군인들에게 납치당한다.
체제 전환의 과도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간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기득권뿐 아니라 민중
[리뷰] 체제의 전환 과정 속 혼돈을 관찰하다 '뉴 오더'